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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그리고 선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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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문화, 그리고 선교

후앙리 2019. 5. 31. 23:33

 

 

이 세상에는 인간이 꼭 지켜야 할 본질이 있고, 상황에 따라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될 비 본질이 있다. 본질은 삶의 목적이며, 비 본질은 삶의 수단이며, 방법이다. 사람은 본질에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 본질에는 목숨 걸 필요 없고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복음은 변치 않는 진리이다. 복음은 생명이며, 영생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언약(약속)이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다. 본질은 진리이다.

비 본질은 문화와 사회의 규범이다. 문화는 인간 삶의 행동 양식이다. 문화와 사회 규범은 인간들끼리의 약속이다. 문화는 삶의 편리함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문화를 떠나 살 수 없다. 문화의 틀 속에 산다. 문화가 비록 인간 삶의 수단이고 방법일지라도 문화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그 문화 속에 인간 삶의 규율과 질서가 있다. 그 문화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문화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문화와 선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말씀 전도와 삶을 통해 복음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행동양식인 문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문화를 통해서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이며, 행동이다. 문화 내면에는 가치와 의미가 있다. 사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는 행동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행동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탄다고 하면, 그 사람은 버스 타는 것이 의미 있기 때문이다. 걸어서 가는 것보다는 더 좋기 때문에 버스를 탄다. 또한 그 사람의 신념 때문에 버스를 탄다. 밥을 먹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밥을 먹는 것이 의미(유익)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유익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것이다. 밥을 먹는 것이 가치 있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밥을 먹는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 이면에는, 즉 행동하게 되는 요인이 있다. 바로 의미, 가치, 신념이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신념 이면에는 세계관이 있다. 세계관에 따라 의미와 가치와 신념이 정해진다. 세계관은 하나의 종교다. 세계관은 하나의 기준이다. 세계관은 하나의 철학이다. 세계관은 하나의 정신이다.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어떤 기준과 철학과 정신으로 보느냐 하는 창의 색깔이다. 세계관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 그 색깔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정해진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가 하나의 신이다. 그들에게는 소가 신이라는 철학, 혹은 정신, 혹은 종교적 사상이 있다. 이런 것들이 세계관이다. 그래서 인도인에게 소는 무엇보다 가치 있는 존재이다. 신이라는 세계관 때문이다. 그러기에 가치와 의미가 있는 소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 소에게 일을 시켜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소는 동물이다.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동물인 소는 인간에게 고기를 주고 농사를 짓는데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소를 잡아먹거나 농사짓는 도구로 사용하는 행동을 한다. 한국인에게 소는 동물이라는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한국인에게는 유교의 사상 혹은 정신이 있다. 효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무어보다 우선되고 중요하다. 효 사상, 효정신이 있기에 효의 기준으로 가치와 의미가 정해진다. 그 효 정신이 바로 세계관이다. 효의 세계관을 가진 한국인이 지하철을 탔다. 만원 지하철에 노약자 보호석이 비어있지만 어르신들을 위해 젊은이들은 앉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인을 공경하는 효 사상이 가치 있는 것이기에 노약자 보호석에 앉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효 사상은 세계관이고 효 사상에 따라 가치와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며 그 가치에 따라 행동에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 행동이 문화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행동이지만 그 행동은 그 내면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행해지고, 그 가치와 신념은 세계관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래서 문화로 나타나는 행동 이면에 가치와 신념이 있고 그 이면에 세계관이 있다.

 

기독교에도 세계관이 있는데 기독교 세계관혹은 성경적 세계관이 그것이다. 이는 복음의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복음의 세계관은 복음의 기준으로 가치와 신념이 정해진다. 복음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예를 들면 복음은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는 행위를 한다. 그러기에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기독교 문화이다. 때로 돈을 쓰는 행동을 할 때도 가치에 따라 돈을 쓰고 그 가치는 성경의 세계관에 따라 정해진다. 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세계관이 있다. 기도의 세계관이 있기에 기도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라는 행동을 하게 된다. 세계관으로 작용하는 기도의 행위에는 세계관에 따라 기도의 행동양식은 다르게 나타난다. 똑같은 기도의 행동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세계관에 따라 기도의 정신이 달라진다. 샤머니즘의 기도는 복을 구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행동을 동일하지만 세계관이 다르면 기도의 내용도 달라지는 것이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는 세계관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이다.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까지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 없는 행동의 변화만을 가져오는 복음 전파는 완전한 복음 전파가 아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나오는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우상을 섬길 수 있다. 점을 볼 수도 있다. 복음은 돈이 우상이 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사람의 생각에는 여전히 돈이 우상일 수 있다. 기도를 하는 행위를 하지만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는 기복신앙의 기도를 한다면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행동은 기도의 행위를 하지만 기도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을 진실한 복음의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교회에 나오고 예배드리는 행동의 변화 뿐 아니라 그의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도록 하는데 까지 가야 한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행동양식인 문화의 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의 틀을 사용하여 세계관까지 들어가야 한다. 세계관은 반드시 문화를 거쳐야 닿을 수 있다. 심해에 보물이 있다면 반드시 바다 물을 통해서 깊은 바다 밑까지 들어가는 것과 같다. 심해의 보물과 같은 세계관의 변화를 위해서는 문화와 같은 바다 물속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문화를 통해 복음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다. 그러기 위해서 문화를 잘 활용해야 한다. 문화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선교지 문화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에 대해 배워야 한다. 선교지 문화를 관찰하고 질문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 문화를 배우는 과정이 없이는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 문화를 무시하고 세계관을 터치할 수 없다. 선교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선교는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현지인의 문화가 말하는 것(표현하는 것, 요구하는 것)을 선교사는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선교는 쌍방통행이다. 현지 문화 중심의 선교가 제대로 된 선교다.

 

현지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선교사가 사역을 하기 전에 현지 문화에 대해 배우는 자세, 현지 문화를 존경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선교사의 기본 자질이 되어야 한다. 문화를 알기 위해서 선교사는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 문화 인류학자가 되는 것이다. 선교사가 문화 인류학자가 될 때, 선교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하나의 과정이요, 방법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방법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방법은 복음이 아니다. 방법이 다를 수 있다.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타문화를 대할 때, 틀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문화 자체는 중립적이다. 문화는 세계관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변화시키면 문화도 변화된다. 물론 문화 안에는 죄 성이 들어 있다. 문화에 죄 성이 들어 있다고 해서 문화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다른 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해서는 안 된다. 선교지의 문화를 비판하고 욕할 필요도 없다. 저급 문화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문화 속에 죄 성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에 따라 저급문화와 고급문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그냥 고유한 문화이고 선교사는 그 문화를 존중하면 된다. 다만 문화 속에 있는 죄 성은 세계관이 변화되면 자동적으로 변화된다.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은 문화를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복음으로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선교사가 문화를 가지고 현지인과 싸울 필요도 없다. 목숨 걸고 문화를 변화시키려 하거나 한국 문화를 전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문화는 다양하다. 다양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여 그것으로 싸우거나 불편해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선교사는 선교지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 문화를 존중한다는 의미는 선교지의 문화를 내 문화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교지의 문화가 자국의 문화인 것처럼 그들의 문화대로 사는 것이다. 자국의 문화를 내려놓고 선교지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다. 선교지 사람들의 옷을 입는 문화를 수용하고 그들이 입는 옷을 입는 것이 선교지 문화를 따르는 것이다.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언어를 하는 것이 선교지 문화를 따르는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 문화를 따르고 지킨다는 의미는 선교사의 기준이 아니라 선교지의 기준으로 행하는 것이다. 선교사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선교지 현지인들에게 편한 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의 방식과 문화를 가지고 고집 부릴 필요가 없다. 선교사의 문화와 방식이 진리가 아니기에 문화에 목숨을 걸 필요도 없다. 선교사가 먼저 최대한 양보를 하는 것이 그 문화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는 방법이다. 문화와 삶의 방식 때문에 싸우지 않는 자가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자다. 믿음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의 방식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문화나 방식이나 이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분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문화와 방식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것을 인정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믿음 있는 자의 태도이다.

 

이 세상의 것 중에 하나님 이외에 절대적으로 진리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인간은 연약하며,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그 어떤 사실도 칼로 무 자르듯 완벽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그러기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특히 사람을 대할 때 저 사람은 내 편, 이 사람은 다른 편으로 가르기 보다는 모두가 장단점이 있으며 함께 가야 할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내 사람은 키워주고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은 끝까지 외면하는 그런 한국인의 문화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가져야 할 좋은 자질은 문화와 다른 사람에 대한 유연성을 키우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폭이 넓은 사람, 다름에 대한 유연성이 있는 사람이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여 싸우는 사람일수록 덜 성숙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가진 선교사는 성숙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선교사가 문화에 대해 주의할 것은 문화에 대한 이중성이다. 선교사는 이중 문화를 경험한다. 이중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의 문화와 살고 있는 다른 나라 문화가 서로 충돌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이중 문화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서구문화에서 교육받은 한국 어린이들은 형이나 오빠를 부를 때 기분이 좋으면 존칭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른다. 이 때 부모는 한국 사람이기에 형이나 오빠를 부를 때는 이름을 부르지 말고 존칭어를 사용하도록 지적한다. 지적받은 아이는 학교에서는 다 이름을 불러요라고 대꾸한다. 이처럼 (이중)문화(전통)를 가지고 자신이 유리하게 사용하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들이 회의를 하면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사안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을 되도록 이중 문화를 사용한다. 한국 문화가 자신에게 유리하면 우리는 한국 선교사 모임이니까 한국 문화에 맞게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선교지 문화가 자신에게 유리하면 여기는 선교지이니까 선교지 문화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들을 선교지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선교사는 문화의 이중성을 가지고 자기 유리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러지 않기를 노력해야 한다.

 

문화는 사람의 외모와 같다. 사람의 참 모습은 내면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의 인격과 사람의 정신과 철학에서 진정한 인간을 찾을 수 있다. 내면의 성품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인간의 외모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외모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외모가 좋다고 내면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외모가 그 통로가 되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어쩌면 사람의 외모와 내면은 별개가 아니다. 함께 간다. 문화도 외모와 같다. 인간의 내면과 같은 세계관에 도달하기 위해 문화가 필요하다. 세계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문화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선교사가 문화의 중요성과 문화를 배우려는 태도를 가질 때 건강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문화가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세계관까지 나아가는 귀중한 도구가 되는 것을 인정하고 문화에 대해 유연성을 갖는 건강한 한국 선교사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