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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1-1강 선교의 당위성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1힉기

제 1-1강 선교의 당위성

후앙리 2020. 4. 7. 21:28

I. 선교를 꼭 해야 하는가?

어떤 선교사가 선교 관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동원을 꼭 해야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 선교사는 “선교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왜 굳이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느냐?” 는 말을 하면서 선교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하였다. 지금은 로스쿨로 인해 사법고시가 폐지 단계에 있지만 이전에는 사법고시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 준비를 하였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많은 헌신과 수고가 따른다. 그들에게 누가 나가서 사법 시험을 준비하라고 광고하거나 동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많은 고시원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서 준비를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란, 명성을 얻는 것일 수도 있고 돈을 버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개인의 명예나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에 대해서 같은 차원에서 질문해 볼 수 있다. 선교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치 있는 일인가? 선교가 가치 있는 일이라면 굳이 동원을 해야 하는가? 이 장에서는 선교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예수님의 대 위임령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예수님의 대 위임령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예수님의 대 위임령인 선교는 성경 전체의 주제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선교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처럼 전도(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 목적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그를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인류에 대한 유일한 계획이 바로 선교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요3:16). 예수님이 선교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이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여긴다.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특별한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덤으로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사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인간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과 계획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2. 예수님의 유언

선교는 예수님의 유언이다.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들이다.

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2)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3)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눅 24:47-48)

4)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 쯤 들어본 익숙한 말씀들이다. 너무 익숙하기에 식상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반응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선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들의 근거가 되는 말씀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이다. 유언은 사람이 죽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이다. 유언을 받는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유언을 지키는 것을 죽은 사람에 대한 가장 큰 예의와 존경으로 생각한다.

청개구리 이야기에서 유언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청개구리는 평소에 엄마 청개구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항상 엄마 말씀에 반대로 행하였다.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 하는 아들 청개구리를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엄마 청개구리는 자기가 죽으면 시냇가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면 아들 청개구리가 산에 장사지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들 청개구리는 엄마 청개구리가 돌아가시자 지금까지 엄마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였고 엄마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은 듣기로 작정하여 시냇가에 엄마를 묻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지금도 청개구리는 죽은 엄마 청개구리가 오는 비에 떠내려갈까 염려되어 운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청개구리도 엄마의 마지막 유언을 들었다. 그만큼 후손들이 지켜야 할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말씀이 유언이다.

예수님의 유언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시면서 많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권면하시고 훈련하셨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서신서와 사도행전에 유언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을 지상 대 위임 명령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지난 3년 동안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유언으로 부탁하신 것이다. 이 유언의 말씀이 제자들의 삶의 목표였고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키고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그 유언의 말씀이 바로 선교하라는 것이다. 이 선교에 대한 말씀은 특정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말씀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씀이다. 선교는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사역을 위해 강조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유일한 삶의 목표인 말씀이다.

3.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신 사명

선교는 하나님이 모든 구원 받은 자들에게 주신 사명(mission)이다. 사명은 영어로 미션(mission)인데, 이 미션은 ‘임무’ 혹은 ‘책무’라는 뜻이다. 미션을 다른 말로 ‘선교’라고도 한다. 그래서 선교사를 미셔너리(missionary)라고 한다. mission은 라틴어 “mitto”에서 나온 말로 “보내다, 파견하다”는 뜻이다. 군대에서 쏘는 미사일(missail)도 라틴어 “mitto”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사명은 곧 “선교”이고 “보내는 것”이며,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은 “보냄을 받는 자”이다. 사명과 선교는 동일하게 쓰이며, 사명을 받았다는 의미는 바로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서 사명을 주셨다. 사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는 말씀에서 “주셨다”는 말씀은 영어 성경에 “보내다(send)”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구원이라는 사명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이것이 바로 “사명”이고 “선교”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 29절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아버지)가 나를 보내셨음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명을 주셔서 선교사로 보내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이가 누구인지 잘 아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고 이것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명은 예수님의 사명일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인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피를 가진 그의 자녀들이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 그 이상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 보냄의 사명을 받은 존재이다. 구원은 사명과 연결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사명자와 선교사로 사는 사람들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3장 8~9절에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라는 말씀은 바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구원과 사명을 별개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함께 묶어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동시에 복음 전도자(사명자)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구원을 받은 순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다는 뜻이다.

이는 어떤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합격하는 것과 같다. 대학에 합격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고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이 학생은 입학과 동시에 수강신청을 한다. 입학과 수강신청을 하면서 기쁨에 넘쳐있지만 수강 과목에 따른 수업과제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수업을 시작하면서 강의를 들을 때 비로소 과제의 분량이 상당하고 해야 할 공부가 많음을 알게 되며 그때 크나큰 충격에 빠진다. 입학할 때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있고 입학에 대한 특권이 있지만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공부해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복음을 듣고 회심한 순간 기쁨이 있지만 동시에 앞으로 해야 할 과제, 즉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그 후에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바로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선교적 사명으로 부름 받고 선교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구원의 증거는 바로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명을 받고 선교적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의심해야 한다. 선교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였을 때,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할 사명” 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다.

4. 바울의 생애 목표

바울은 이 땅에 사는 이유와 목표를 선교사명에 두었다.

로마서 1장 14~15절에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바울은 고백한다.

바울은 “빚진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왜 자신이 이방인에게 “빚진 자”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구원과 연결된 표현이다. “구원에 대한 빚을 진자”라는 뜻이다. 그가 이방인에게 구원에 대한 빚을 졌다는 표현은 이방인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바울을 먼저 구원해주셨기에 그 이방인에게 바울은 빚을 진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먼저 구원해 주신 것이다. 만약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도 구원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표현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도의 빚을 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선교의 사명이다.

사도바울은 그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고백하기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2~24)”라고 한다.

이 말씀은 바울이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하는 구절이다. 바울의 마음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는 더 좋은 일이라고 한다.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육신으로 이 세상에 더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기 때문이다. 성도를 위한 바울의 사명 때문이다. 성도를 위한 바울의 사명은 빌립보서 1장 29절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로서의 고난을 감수하는 사명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선교의 사명”이다. 이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이며, 삶의 목표이다.

5. 교회의 사명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기를 원했으며,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소원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확장, 즉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교회가 되었다. 그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 대 위임령을 수행하기 위한 공동체다. 대위임령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 교회의 사명인데, 교회가 이 사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는 것이다. 사명을 완수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 중에 선교하는 교회는 15~20% 정도 된다고 한다. 약 80%의 교회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이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 교회이며,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초대교회에서 행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나타난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예배가 있었다. 성도들은 기도를 열심히 했고 능력이 있었고, 교회는 무엇보다 중요한 성도의 교제와 사랑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균형 잡힌 교회였다.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다. 칭송을 받은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갔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교회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이 일을 위해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교회의 기능을 감당한 것이다.

많은 교회가 선교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기 때문일 수 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선교를 위해서 세우셨는데, 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교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까봐서 선교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우선인지, 교회의 사명인 선교가 우선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교회다. 많은 전통적인 교회들은 교회가 선교를 품고 있다. 교회가 하는 많은 일들, 즉 예배, 교육, 구제, 교제와 같이 교회가 해야 하는 하나의 사역으로 선교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을 하는데 있어서 선교가 방해요소가 될 수 있어서 선교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면 선교가 교회를 품는 것이다. 선교가 교회를 품고 있다는 말은 선교가 교회 위에 있다는 말이다. 선교는 교회가 해야 하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부이어야 한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은 선교를 위해 하는 일이 되어야 하며, 선교는 모든 교회의 하는 일들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선교는 교회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하다가 여유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선택의 일이 아니다. 교회가 하는 많은 일들은 선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수단적인 일이고 선교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한국교회에 소개되었다. 선교적 교회는 웨슬리 레비긴에 의해서 시작된 용어이다. 레비긴은 영국 태생의 선교사로 평생 동안 선교지 인도에서 사역하다가 은퇴하고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서 영국 교회의 심각한 상황을 보게 되었다. 무너져가는 영국교회를 보면서 그는 교회의 본질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가 찾은 교회의 본질이 바로 “선교적 교회”이다. 교회가 해야 하는 선교적 역할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선교적 교회란 단순히 해외선교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 선교를 잘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 중에 많은 일들 중에 선교를 좀 더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선교적 교회란 교회 존재 목적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선교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는 국내 전도와 세계 선교를 포함하여 교인들의 삶의 목표가 선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기에 선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제도와 구조가 선교적 조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전통적인 교회와 선교적 교회로 구분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 교회

선교적 교회

전통적 교회는 교회의 존재론적 역할이 중요하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교회의 의미를 찾는다. 교회는 존재함으로 위대하다. 그럼으로 전통적 교회는 예배의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예배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진행된다. 예배 참석 여부가 신앙의 척도가 된다.

선교적 교회는 예배가 신자들의 삶의 목적임이 분명하지만,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그 예배를 위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배는 신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이기에 이 목적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는데, 진정한 예배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는 것이 선교다. 그럼으로 선교가 있어야 예배도 가능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역할은 예배보다도 선교가 우선되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는 선교를 하나의 행위로 본다.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비를 지원하고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것으로 본다. 교회는 선교의 행위가 많이 진행되고 교인들은 자신을 선교의 후원자라고 생각하지만 교인들 자신이 선교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에 대해서 선교사는 자신의 사명 때문에 가는 것이고 교회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정도로만 이해한다. 선교사 파송 예배도 선교사 개인의 일로 생각하여 형식적으로 드린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 자체가 교회의 존재의 이유이며, 모든 성도가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선교사는 교회의 선교사명을 위해 대표자 혹은 대사로서 선교사로 파송받아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파송 받은 대표자로 가는 것이지, 선교사 개인의 일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에서는 선교사 파송이 교회의 가장 큰 행사와 축제가 된다.

전통적 교회는 선교를 주로 사업과 프로그램으로 생각하여 교인들의 인격과 삶을 선교적 지평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선교적 교회는 교인들의 인격과 삶을 선교의 중요한 지평으로 생각한다. 선교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세상 가운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 자체이다. 선교는 교회의 조직에 의해서 계획된 사업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세상 가운데 살아내는 것이다.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으며, 교회와 일터가 하나이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며, 교인들이 모두 선교사며, 거룩한 사명자가 된다.

 

전통적 교회는 선교를 지리적으로 구분한다. 해외 선교만을 선교라 생각한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다른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라고 생각한다.

전통적 교회는 개인 구원과 영혼 구원에 주로 관심을 갖고 세상에서 드러나야 할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선교적 교회는 개인과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교인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모든 것을 선교로 생각한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되 정치, 경제, 문화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삶을 산다. 구원과 복음의 통합성을 이루는 교회이다.

 

전통적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교회로 모이게 하기 위해서다.

선교적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교회에 모이는 것이다.

교회는 먼저 교회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교회 중에 또 하나의 우리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며,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궁극적인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고 교회가 선교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누구나 “나는 누구이며, 나의 삶의 방향과 목표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와 성도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파송교회에서 주일에 어린 자녀들을 가진 부부들을 위해 성경공부를 인도한다. 이 시간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선교라는 것을 강조한다. 어느 날 한 엄마가 이런 고백을 하였다. 자신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교회에 나와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고 하였다.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정신없이 살면서 교회는 나오지만 삶의 목표에 대해서는 늘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선교가 사명이며,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이제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 방향을 알게 되었다는 간증이었다.

II. 선교 헌신에 대한 이해

선교동원을 위한 기초 훈련을 하면서 알게 된 한 형제가 있다. 이 형제는 미국 유학을 가서 현대 무용 공부를 하고 권위 있는 무용 콩쿠르에 나가 여러 차례 수상을 한 꽤 실력 있는 현대 무용수다. 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열정은 세계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선교사가 되어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선교 기초훈련을 받게 되었다. 선교 기초훈련을 받기 전까지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반드시 해외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해외 선교사가 되기 위해 자기가 지금까지 했던 현대 무용은 그만두고 신학을 하여 목회자가 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훈련을 받으면서 선교란 모든 그리스도인이 목회자가 되거나 선교사로 해외에 나가는 것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잘 하는 현대 무용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적잖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의미를 무조건 해외 선교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목회자가 되어 해외에 나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헌신 중의 가장 큰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은 선교에 대해 오해를 가져오게 하고, 선교에 바르게 동참하는 것을 방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선교에 대한 오해는 교회가 선교를 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잘못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선교사가 된다는 의미와 선교에 대한 참여와 소명의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은 모든 교인들이 선교적 사명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선교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해외 선교사가 되는 것과 모든 교인들이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손창남 선교사는 요리사의 예를 들어 모든 교인이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선교는 선교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것은 요리가 요리사의 전유물이 아닌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요리를 한다. 가정주부는 거의 대부분 집에서 요리를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요리사라고 하는 타이틀을 지닌 사람은 제한적인 것과 동일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라는 의미는 모든 엄마들이 요리사가 되는 것과 같다. 엄마들은 전문 요리사는 아니지만 전문 요리사 못지않은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다. 많은 엄마들은 전문 요리사보다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기도 한다. 엄마가 요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엄마가 요리사 자격증을 갖지 않아도 요리사라고 하는 것처럼 전임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인 것이다. 그에 반해 전임 선교사는 전문 요리사가 요리사 자격증을 갖고 요리를 하는 것처럼 선교를 직업으로 선교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보내는 선교사와 가는 선교사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엄마들이 요리사인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선교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가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생활가운데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직업적 소명이라는 말로도 사용하는데 직업에 부름 받은 것은 그 직업으로 선교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직업은 선교적 사명을 갖는다. 직업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장(場)이다. 직업 자체가 사명은 아니지만 사명을 이루는 방법이며, 목표이며, 또한 사명 자체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서 선교사로 사명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직장에서 하는 일이 바로 선교의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그 영역에서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하신 것은 바로 직업을 통해 선교사적인 사명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직업이 선교의 일이다. 회사원은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학생이 학교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이 선교사로서 사는 것이다. 주부가 가정에서 가사 일을 주님께 하듯 할 때 선교사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어진 일에 성실과 정직으로 최선을 다하느냐가 기준이 되지, 어떤 일을 하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임 선교사로서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을 때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아니다. 전임 선교사들 중에는 현재 주어진 일을 책임감을 가지고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은 전임 선교사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선교사적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다. 전임 선교사가 한번 선교사로 헌신했다고 영원토록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타문화권(선교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선교사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선교사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는 단 한 번의 헌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계가 있다. 매일의 삶에서 선교사로서 합당한 삶을 살 때 참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이 각각의 선교사로의 일이기에 직업에 대한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부끄러움이 없이 그 일을 감당할 때에 그 그리스도인이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와 선교적 사명을 가진 교인이란 이런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만약 어떤 교회가 교인은 많은데, 교회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없다. 비록 적은 교회이지만 선교적 사명을 감당한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다. 선교적 교회는 날마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사명을 확인해야 한다. 선교를 하나의 행사나 자랑거리로 생각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한다고 해서 선교적 사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교인들이 자신들의 직장에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며, 선교사적인 마음으로 살 때 그 교인들이 모인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선교사라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이다. 한 번의 헌신이나 행사가 선교와 연관되어 있다고 선교사나 선교적 교회가 아니다. 그들의 일상의 삶에서 선교사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고 선교에 대한 사명을 감당할 때에 비로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고 그런 교인들이 모인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된다.

III. 세계 선교에 반대하는 주장

필자가 신학생 때 한 선교사를 돕기 위해 선교 후원회를 만들어서 후원자들을 직접 모으고 선교사의 선교비를 관리하였다. 은행에 가서 선교사님께 직접 송금도 하였다. 어느 날 선교비를 송금하기 위해서 은행에 갔는데, 송금업무를 담당한 은행 직원이 선교사에게 보내는 송금인줄 알고 자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였다. 필자에게 “우리나라도 아직 복음화 되지 않았는데 꼭 다른 나라까지 나가서 선교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국내의 농촌 전도에만 힘쓰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였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세계 선교를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는 기회를 가졌다. 먼저 우리나라부터 복음을 전하고 나중에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이 어쩌면 그럴듯한 말 같이 들렸다.

요즈음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에 대해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선교에 대한 열기가 식어가고 해외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도 15% 정도라는 보고가 있다. 선교사 후보생들도 줄어들고 있다. 교회의 담임 목사들도 해외에 선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말을 한다. 소수이겠지만 어떤 목사들은 해외 선교를 하는 것은 교인과 재정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선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내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굳이 해외 선교까지 참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를 한다.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이유들을 말한다.

1. 차후의 일

우리가 사는 지역과 나라도 아직 복음화 되지 않았기에 세계 선교는 차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까지 가서 선교 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가 어느 선교 단체에서 선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어떤 젊은이가 찾아와서 질문하기를 영국이 기독교 국가였는데, 지금은 기독교인이 2%도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영국교회가 자기 나라사람들에게 전도는 하지 않고 해외 선교사를 내 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나라부터 전도해야 하고 그 다음에 다른 나라를 위한 선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 돈 낭비

선교를 하는 것은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를 보낼 때 해외에 너무 많은 송금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잘 사는데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다.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못 먹고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왜 다른 나라 사람까지 신경을 써야 하고 외화 낭비를 꼭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선교지 자국의 책임

이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교회가 이미 존재하기에 굳이 선교사를 파송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세계는 이미 복음이 들어갔기에 선교지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4.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가라고 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은 순서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대와, 그리고 나서 사마리아와, 그리고 나서 땅 끝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즉 우리나라부터 시작해서 차츰 세계까지 나가야지 지금은 세계로 나갈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IV. 세계 선교의 당위성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논리를 더 귀중히 여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람들의 논리와 주장들에 앞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아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막대기를 던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막대기를 왜 계속 던지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막대기가 넘어지는 쪽으로 길을 가고자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막대기가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넘어지지 않기에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과 뜻을 앞세우고 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뜻에 하나님이 따라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어야 한다.

1. 하나님의 관점과 뜻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관점과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선교를 거부하는 입장들은 하나님 편에서보다는 사람 편에서 하는 주장들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계 선교가 외화낭비일 수 있고 손해일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도 살기 힘들고 우리 주위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다른 나라를 돕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하나님이 이웃과 세상을 돌아보라고 하셨다.

1)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다.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신 우주의 주인이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좁은 마음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만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선교를 통해서 온 세계에 나타나야 하고 모든 민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관심 대상인 온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세계 선교를 해야 한다.

2)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사도행전 17장 26절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다. 온 인류는 한 혈통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나라만이 단일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전 세계가 아담을 통한 한 혈통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 인해 죄인 된 것같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인해 의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민족이 한 혈통이고, 모든 민족이 구원받아야 할 한 가족인 것이다.

3)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통치하신다.

우리의 왕은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왕이신 것을 인정한다면 온 세계는 선교해야 할 관심 대상이다. 시편 24편에 “세상의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 민족도 선교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할 권리가 있다.

4)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 구원에 대한 계획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가장 큰 계획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전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이나 특정한 지역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으셨다.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고 모든 민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만약 선교를 부정하거나 적극적으로 선교에 동참하지 않는 것은 온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구원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세상을 향한 가장 큰 계획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셨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 없이 만드는 것이 된다.

2. 선교사들의 삶의 가치

지금까지 선교했던 선교사들을 생각해야 한다. 세계 선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맞는다면 지금까지 선교했던 선교사들은 모두가 잘못 살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리빙스턴, 윌리암 케리, 허드슨 테일러, 아도니람 저드슨, 그리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들의 선교 행위가 잘못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선교사로 오신 예수님도 이 세상에 잘 못 오신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잘못 오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사람이 선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처럼 생각했다면, 그래서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복음을 듣고 영생 가운데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 선교사들은 자기 나라가 완전히 복음화 되지 않았음에도 복음을 들고 선교사로 왔다는 사실이다.

3. 동시적인 복음 전파

일정 지역부터 차례대로 복음화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가정을 복음화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전도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선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우리나라 전도를 우선해야 한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전 지역이 복음화 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한 나라가 완전히 복음화 된 예는 거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까운 곳에서부터라는 공식을 갖는다면 가족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 한 선교사가 가족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선교사로 나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 있는 곳에서부터 먼저 차례대로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와 온 세계의 구원을 위해 동시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처럼 다른 나라를 위해 똑같은 심정으로 선교해야 한다.

4. 복음 전파의 당연성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일 좋은 것을 발명해서 온 세계에 판다면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아무도 그 사람을 탓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존경해야 한다. 사람에게 해로운 술이나 담배 같은 것도 전 세계로 팔려고 나가는 것을 볼 때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상품은 복음이다. 가장 좋은 상품인 복음을 수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의 가치를 다 알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코카콜라를 광고하는 사람들은 세계에서 이미 코카콜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광고를 하고 있다. 코카콜라의 논리는 죽어가는 사람보다는 태어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고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광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도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기에 계속 되어져야 한다.

5. 사도행전 1장 8절의 해석

사도행전 1장 8절은 지역의 동시성을 말한다.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라는 말은 모든 곳으로 동시에 가야 한다고 성경 원문(헬라어)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자신의 가족이나 민족이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6. 가치 있는 일

선교는 외화낭비가 아니다. 세계 선교는 외화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가난한 나라를 위해서 구제금과 구제품을 공짜로 보낸다. 우리 정부는 지진, 해일, 태풍으로 어려움을 당한 나라에 복구를 지원할 사람들을 보낸다. 전쟁으로 어려운 지역에는 군인들의 생명이 위태함에도 군대까지 파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6.25전쟁 이후에 선교사들과 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아서 발전하여 지금은 구제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진 사람이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다. 복음을 위해 사용하는 선교 비용을 외화 낭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위한 선교비는 외화 낭비가 아니다. 복음을 가진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7. 믿음의 원리

교회가 자립이 되지 않아도 선교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아직 교회 자립이 안 되었기에 나중에 한다고 한다. 교회 재정이 어렵기에 좀 좋아지면 한다고 한다. 빚 갚고 나서 나중에 하겠다고 한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돈을 좀 벌면 선교하겠다고 한다. 어떤 교회는 선교를 잘하다가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선교참여를 중단한다. 어떤 교회는 선교를 열심히 하다가 파송한 선교사와의 문제로 실망해서 선교를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립된 후에 선교한다면 70-80%의 미자립 한국교회는 선교할 수 없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구제도 부자들 보다 마음이 있는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이 한다. 어느 구제 단체에서는 전 구제금 총액의 80%가 30대 미만의 경제 자립도가 낮은 사람들이 기부한다고 한다. 교회가 선교하는 것은 자립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어렵고 미 자립한 교회들도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가 많다. 반대로 자립한 교회도 선교 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 자립해서 선교하겠다는 교회는 선교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하나의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하다. 개인도 돈을 벌면 하겠다는 생각은 하나의 핑계이다. 교회의 재정과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고 안정적이지 못하며 충분하지 않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 참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선교는 우선순위의 문제이지 자립도와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교회가 가난한 또 다른 교회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자립하지 못해서 다음에 하겠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고 자립하지 못했다는 것이 선교를 중단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빚이라도 내서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돈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이다. 선교는 돈에 상관없이 꼭 해야 할 일이다.

8. 선교지의 필요

많은 나라들이 복음은 들어갔지만 영적, 질적, 숫자적으로 어린 교회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상황을 보면 아직도 복음화 되지 않은 나라가 많을 뿐 아니라 복음은 들어갔지만 아직도 미 자립한 어린 교회가 존재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많은 나라라고 할지라도 누군가 도와주어야 할 만큼 약하고 어린 교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젖을 먹고 어머니의 보살핌 가운데 자라나야 한다. 누군가 돌보아 주지 않는 어린 아이는 스스로 자랄 수가 없다. 이런 연약한 교회와 신앙인들이 있는 나라들이 선교사를 부르고 있고 선교를 요청하고 있다. 그런 곳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9. 하나님의 품성

선교는 하나님의 품성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품성을 가지고 계신다(엡 2:1-10, 요나. 살전 2:8).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중심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천국과 이 세상의 모든 선한 것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다면 그 사랑이 넘칠 것이다. 사랑이 넘치면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넘쳐 난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사랑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심판과 지옥의 필연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지금도 살아간다. 그 긍휼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매일 구할 것이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고 나타내도록 선교에 동참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선교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은 계속 지옥에 갈 것이다. 지옥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옆에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모르는 체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처럼 지옥으로 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복음 전도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다.

인간이 타락을 했기에 선교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타락했다면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죄로 인해 인류가 우상 숭배를 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 타락한 인간이 구속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만이 인류의 주인이시고, 유일한 구세주시다.

신명기 4장39절에는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라는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고 있다. 선교의 행위를 통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유일한 왕으로 섬기도록 해야 한다.

10. 주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서 선교한다(살후 3:1, 빌 2:11, 롬 11:36). 이사야 4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으시고 택하셨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으셨다. 인간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전도가 없다면, 전도를 통한 죄 사함이 없다면 누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는가? 선교가 없으면 온 세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선교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11. 성령이 오신 목적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생전에 “내가 내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 15:26, 27)”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말할 때 사람들은 은사나, 성도를 보호해주시는 보혜사와 같은 의미에서 사용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의 결국은 선교를 위해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사도행전의 중심이 성령님이시기에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른다. 성령의 임재는 선교하는 가운데 경험할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시며, 성령은 그리스도와 진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신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믿음을 충만케 하시며 역사케 하신다. 그러기에 선교의 주인은 성령이시다. 선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하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도 선교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선교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복음 전도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서(눅 4:14)”였으며 갈릴리에서부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것”도 주의 영(눅 4:18)이었다.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의 주도권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빌립으로 하여금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게 한 것도 성령이고(행 8:29), 베드로로 하여금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도 성령이시다(행 10:19-20). 안디옥 교회가 사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케 한 것도 성령이시고(행 13:2), 바울로 하여금 더 이상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고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도 성령이시다(행 16:6-7).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진정으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은 선교에 참여한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선교에 참여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였을 때 가능하다. 성령이 사람을 움직일 때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다.

요한 일서 4장 16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씀한다.

갈라디아서 5장 5절에도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하였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과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나서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되는 것도 될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교사로 부름 받고 응답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바로 방언하고 예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만 성령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의 은사는 선교하도록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성령의 오심은 선교하기 위해서다. 방언과 여러 가지 은사는 성령께서 선교하도록 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진정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12. 하나님의 왕국

주님의 재림과 관계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10)”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 소망을 갖지 않는 성도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진정한 성도는 선교해야 한다. 선교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13. 인간의 상태

인간의 상태 때문에 선교한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죄악으로 인해 영혼이 죽어갈 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비참한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필자가 필리핀에서 사역 할 때 그곳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곳이었다. 너무 가난하고 비참한 그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단순히 먹을 것이 없는 차원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이 사는 것은 짐승이 사는 것만큼 비참하였다. 죄악의 결과로 일어나는 인간의 비참한 상황과 세상을 볼 때 선교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보면서 선교에 동참해야만 한다.

14. 시간의 긴박성

시간의 긴박성 때문에 선교한다. 선교는 시간이 한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긴박성 때문에 한다. 긴박성이란 우리 각 개인이 언제까지 생명이 지속될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이 세상은 나그네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세상은 인간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그네의 삶의 현장이다. 주님은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지만 그날을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리의 생명이며,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머뭇거리지 말고 신속하게 선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내일 끝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일 우리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긴박성이 성도들에게 선교하도록 하는 것이다.

15. 이스라엘의 선택

이스라엘의 선택은 세상의 복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전 세계 모든 인류를 부르시기 위한 한 방법이었고 과정이었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이 모든 인류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선교 방법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을 것이며, 그를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특별한 대표자요, 은혜의 중보자임을 뜻한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1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나올 것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부터 메시아가 나올 것이니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과 부활은 모든 나라들의 백성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나라들의 백성이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다른 민족을 위한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민족을 위한 모델이고, 본보기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방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것이니라”

신명기 4장 6절에서는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들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명기 29장 24절~26절에도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셔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고 하셨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말한다. 1)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족속이 되었다. 2) 그리스도인의 직책은 아브라함처럼 왕 같은 제사장이다. “왕 같은”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왕적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서 속죄의 사역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3)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백성이다. 구속 받은 자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의 성도로 사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다. 우리의 소속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너희를 불러내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존재와 자격을 가진 자 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선택된 백성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는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도록 이런 명칭을 부여하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런 명칭도 부여 받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바로 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참된 복은 나누어주는 것에 있다. 진정으로 복된 사람은 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다.

교회에 많은 행사들이 있다. 장로, 집사 안수식, 창립식, 헌당식, 결혼식 등 모두가 행복한 예식들이다. 기쁨의 시간들이다. 그러나 기쁨의 소식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면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큼 복된 행사는 없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교회에서 가장 축복된 시간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선교사 파송과 후원은 단순히 의무나 책임을 지는 것만이 아니다. 의무나 책임을 넘어서 교회가 복을 받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주신 권한을 누리는 순간이다. 사람은 권한이 있으면 누구나 찾기를 원한다. 어떤 상금에 당첨되었다 해도 상금을 받지 않는다면 권한을 버리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는 것도 권한을 누리는 것이다. 장학금을 주는데도 받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느 교회는 서리 집사 임명을 하는데 임명 전에 매년 날짜를 정해놓고 반드시 서리 집사 임명에 동의하는 싸인을 하도록 한다. 그 날짜가 지나서 싸인을 하면 집사 임명을 하지 않는다. 집사 임명은 책임이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권한이고 복을 받는 순간이기에 스스로 권한을 찾도록 싸인을 하게 한다. 어떤 분이 싸인 하는 것을 깜박 잊어버려서 시간을 못 지켰다고 하면 집사 자격이 없다고 집사임명을 하지 않는다. 권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권한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서리 집사의 임명도 본인이 권한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교사 파송도 교회와 선교사에게 가장 복된 시간이다. 하나님이 열방과 세계 선교를 위해 교회와 성도를 부르셨다면 그 일에 참여하는 교회와 성도에게 가장 큰 복을 주실 것이다. 선교사 파송 예배는 교회에서 가장 복된 시간이고 큰 축하를 받아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는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파송을 해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교회들이 있다. 저녁 예배시간에 선교사를 소개하는 정도로 광고하고 파송하는 교회도 있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복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다. 그 복의 내용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위한 통로가 되고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특권이며, 큰 복이다. 이 일을 감당할 때 성도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며, 날마다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은혜를 주시는 분이신지를 경험할 수 있다.

선교의 영광은 고난과 비교할 수 없다. 선교하면 보통 고생, 고난, 정글, 순교, 희생, 개척, 이런 단어를 생각한다. 가족 중의 누군가 선교한다고 하면 고생되는 일이기에 반대한다. 누군가 선교사로 나간다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고생 많이 하시겠어요” 라는 것이다. 선교사역을 하고 돌아온 선교사에게는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어요?” 라고 한다. 그러나 선교는 고생이 아니라 은혜다. 은혜라는 말은 다른 말로 축복이다.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이고 유일한 복이다. 성도는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기에 그렇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힘든 일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힘든 일에 비해 그 유익과 하나님이 주신 댓가는 엄청난 축복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고난을 받은 분은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은 살면서 너무나 억울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억울해도 예수님만큼 억울한 분은 이 세상에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이런 분이 사람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을 찍혔고 갖은 수모와 모욕을 받았다. 영광을 받아도 부족한 분이 죄인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십자가 형틀에서 고통가운데 죽으셨다. 얼마나 억울한가?

예수님은 그 억울함에도 참으시고 인간을 위해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왜 그러셨을까? 바로 부활의 영광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2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난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며칠만 있으면 죽음의 길로 가셔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보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보신 것이다. 고난을 앞에 두고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도 부활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억울해도 참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 십자가의 고통은 부활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고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선교를 통한 영광은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필자는 처음에 선교사로 나갈 때 많은 것들을 포기하였다. 그 중에 파송 당시에 타고 있던 프라이드 문 세 개짜리 2년 된 새 차를 포기했다. 그 차를 파송교회에 드리고 선교지로 갔다. 필자가 살고 있던 조그만 13평짜리 보금자리 집도 포기하였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책들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결혼하고서 월부로 일 년 동안 내면서 정말 힘들게 샀던 인켈 전축도 버려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다 한국에 두고 헤어져야만 했다. 그런데 선교지에 가서 마가복음 10장의 말씀을 몸소 경험하였다. 그 말씀에 “현세에 100배나 받는다”고 했는데, 필자는 한국에서 포기했던 자동차를 선교지에서 다시 사게 되었다. 파송교회에서 바자회를 해서 모은 금액을 필자에게 보내 일제 중고차를 사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산차였는데 그곳에서는 외제차였다. 1996년 당시에 일제 외제차를 탄 사람이 한국에서는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살던 집보다 세배는 더 큰 집에서 월세를 내면서 살았다. 월세는 한국에 있으면 직접 벌어서 고생해서 내야 하지만 선교지에서는 매달 하나님이 사랑하는 후원자들을 통해서 내 주셨다. 한국에서 포기했던 전축은 새롭게 사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음악은 실컷 들었다. 그곳 사람들은 음악을 워낙 좋아해서 하루 24시간 음악을 틀어놓고 산다. 그들은 음악 없이는 한순간도 못사는 사람들이다. 필자가 전축으로 음악을 듣지 않아도 저절로 매 시간 음악을 들으면서 살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노래할 때는 스페인어로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살았던 곳의 언어가 스페인어였으니 얼마나 좋은 음악을 듣고 살았겠는가? 필자는 목회자로서 모든 책을 다 기증하고 선교지로 갔는데, 필자가 선교사역을 하면서 경험했던 것을 책으로 써서 출판을 하였다. 다른 사람의 책 만권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 한권이 더 귀하지 않는가? 또한 형제자매들을 100배나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사역의 대상자인 교인들이 그들이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가족들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친구와 형제자매들을 더 많이 주셨다. 필자가 협력했던 단체의 교회가 이십여 교회 정도 되었는데, 그 교회들의 성도들을 모두 합하면 1,000명도 넘는다. 모두가 형제이고 가족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 아닌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때 더 많은 것으로 주신다. 100배나 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하나의 이야기다. 모두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자랑이나 간증거리도 아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이 세상에서 대가와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니 주님께 헌신하라는 그런 단순한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그 자체가 복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부분에서 신실하게 함께 하시고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며 사는 삶이 바로 헌신자가 받는 은혜다. 선교사는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다. 선교지에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매 순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다.

필자가 선교지 에콰도르에서 정말 힘들 때가 있었다. 선교지에서 딱 한번 다 그만 두고 한국으로 다시 나오고 싶었다. 선교사들이 제일 힘들 때가 선교지에서 도착해서 첫 1,2년이다. 필자도 선교지에 도착해서 일 년 정도 지났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참으로 지치고 어려운 때였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는 매주일 몇 번의 설교를 하였는데 선교지에 도착해서는 설교는커녕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적, 정서적으로 많이 지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처음에 도착하여 모든 것이 낯설었고 문화가 달라서 많은 충격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심했다. 새롭게 배워야 하는 언어도 필자를 힘들게 하였다. 선교사는 선교지의 언어로 설교해야 하고 성경을 가르쳐야 하기에 언어를 배워야 하고 잘 해야 한다. 필자가 함께 일하는 팀의 언어 목표는 현지 대학 언어코스 마지막 6단계까지 마치는 것이었다. 일 년여 동안 공부를 하면서 5단계까지 공부를 하는데 필자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영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거의 탈진 상태에 있었다. 선교사를 포기하고 싶었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파송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 실패한 선교사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선 것과 같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선교지에 남아서 언어 공부를 계속 하면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어느 날 밤에 성경을 보는데 나다나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 (요 1:48).”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전에 이미 나는 너를 보았고 알고 있었노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네가 모를 때에도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필자의 마음에 들어왔다. 그 말씀은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계신다.”는 음성으로 들렸다. 그동안 선교지에서 정착하느라 힘들었던 그 모든 순간을 하나님이 아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아픔과 걱정, 자신 없음과 지침도 아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나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상황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하나님은 나를 아실 것이고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그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시니 나의 마음은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동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너무 감격해서 밤을 새며 눈물과 콧물을 다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였다. 힘을 얻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 하나님을 경험하는 체험이 선교지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힘들 때면 그 말씀을 기억하며 다시 힘을 얻는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모두 알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를 때에도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함께 하신다. 선교를 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축복이다.

필자는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내가 과연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을 늘 하였다. 선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과연 선교사역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다. 선교사로 헌신한 다음에도 필자에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제였다. 마음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실제로 선교사가 되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선교사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교사가 되려면 건강해야 하고, 설교도 잘해야 하고, 언어도 잘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능력과 재능도 있어야 하는데 필자에게는 그런 은사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교사는 대담한 성품과 어려움에도 잘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인내심이 강하고 열정적이어야 하는데 필자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필자가 마음에 그리고 있었던 선교사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역을 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능력이 부족해서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같이 능력이 없는 자는 없을 것이기에. 그래 선교사로 가자. 젊은이들에게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생각이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그 후에 필자는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능이나 은사, 그리고 외형적인 면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필자에게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놀라운 비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시골에서 자랐다. 누구보다도 시골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시골에 자란 것이 필자에게는 자랑스러움보다는 열등감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에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 수 있는 재능을 갖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선교지에서 하나님은 필자의 어렸을 때와 너무나 비슷한 시골에서 사역을 하도록 하셨다. 그곳에서 필자는 현지인들이 어떤 마음과 형편으로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필자의 아이들은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해서 시골 생활과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필자는 선교지의 시골 사람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만약 도시에서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런 시골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니 그들에게 복음과 하나님을 전하는 방법도 알 수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것을 말하면 그들은 오히려 필자를 통해 위로를 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자신 속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는데 이곳 선교지 시골 마을로 보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하셨구나” 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부끄럽고 약하게 생각하였던 것이 선교지에서 오히려 좋은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도 강하게 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제 필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다는 것을 말 할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나간다면 아름다운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명은 헌신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하였다.

사명은 헌신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앙의 척도는 바로 헌신의 척도에 있다. 얼마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헌신하는가에 달려 있다. 신앙의 진수는 헌신에 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생명이 너무나 귀중하였기에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에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밤새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의 고통을 지겠다고 하셨다.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드리셨다. 이것이 헌신이고 기독교의 중심은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는 희생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헌신이 기독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셨다.

희생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이다.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다. 진실된 부활의 생명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현재의 생명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

탁구를 아주 좋아하시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탁구가 최고로 좋았다. 시간만 되면 탁구 동호회에 가서 탁구를 쳤다. 그런데 사실 그는 심장이 약하여 탁구를 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탁구를 치다가 몇 번이나 쓰러졌다. 의사는 탁구를 치지 말라고 권면 하였다. 탁구를 계속해서 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탁구 치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였다. 결국 무리하게 탁구를 치다가 갑자기 죽게 되었다. 이 사람은 탁구를 포기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다가 생명을 내려놓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의미는 예수님이 원하시면 탁구를 그만두는 것과 같다. 탁구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이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요, 제자의 삶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희생하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곳에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있는 것이다.

선교 역사에서 아주 위대했던 영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결혼할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약혼을 하고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았는데 신부될 여자가 선교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결혼을 포기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었다. 그 때 당시에 허드슨 테일러는 사랑하는 사람보다 주님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가장 귀한 것을 포기 할 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고 선교사로의 영광을 취할 수 있었다.

전문인 선교사 한분의 얘기를 하면서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이 선교사님은 들으면 알만 한 회사의 사장님이셨다. 나이 70세가 넘어 사업체를 물려주고 선교사가 되기로 하였다. 필자가 사역했던 필리핀 민다나오에 선교사로 오셨다. 나이 70세면 은퇴해서 평안히 살 수 있는 나이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적당하게 선교 여행을 하고 선교 헌금을 하면서 살아도 된다.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선교헌금하며 사람들에게 칭찬도 듣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교사로 직접 나갔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한방의 침술을 배우기도 하셨다. 필자가 사는 다바오에서 함께 살다가 여건이 맞지 않아 ‘시부’라는 다른 섬의 도시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 외국에서 이사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필리핀은 너무나 덥기 때문에 이삿짐을 싸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선교사님은 돈은 충분이 있기에 이삿짐센터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이삿짐을 손수 다 싸시고 그 이삿짐을 들고 차를 빌려 6시간 걸리는 육로를 통해 항구로 갔다. 그 항구에서 세부로 가는 배를 타셨다. 배는 5등석까지 자리에 따라 배표 가격의 차등이 있다. 제일 좋은 1등석은 우리 돈으로 5만 원 정도 한다.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배 여행을 해야 하는데 3만 원 짜리 3등석 자리의 표를 사셨다. 보통 다른 선교사 같으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고생하는 긴 배 여행보다는 짐은 이삿짐으로 보내고 30분이면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노 부부 선교사님은 배를 타고 고생하며 이사를 하셨다. 필자가 이사를 도와주면서 배표 가격의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니까 1등석 타는 것을 권하였다.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하는 모든 비용은 바로 선교비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우리는 선교비를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어요.” 노 부부 선교사님이 출발하면서 필자에게 “제가 이제 늙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선교사로 부르셨으니 한 15년만 더 건강을 주신다면 15년 동안 필리핀을 위해 살다 주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평생 동안 저를 위해 살았으니 이제라도 마지막 남은 인생을 주님 나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제발 15년만 건강을 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이 선교사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삶을 선택하셨을까? 선교는 고생이 아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은 은혜다. 선교사가 되는 것은 헌신도 아니다. 은혜다. 선교에 쓰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