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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14장 믿음으로 하는 선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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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믿음으로 하는 선교

후앙리 2020. 4. 21. 19:24

선교 만큼 믿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드물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 하지만 특별히 선교의 일은 믿음 없이는 하기 어렵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는 것이다. 아울러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살아가면서 그 믿음의 원리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고백하는 믿음과 행동하는 믿음이 같아야 한다. 선교사는 믿음의 원리 가운데 살아야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믿음이 없는 사람과 달라야 한다. 믿음을 가지고 선교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감사의 삶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늘 감사하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선교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삶 가운데서 감사를 잃어버리는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보통 사람보다도 더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선교사들이 있다. 선교사의 삶이 너무 힘들고 메마른 생활이기에 감사를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선교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로 모질고 강해야 하기에 넉넉함과 감사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선교지에서 사는 동안 부정적인 면을 많이 보고 경험하다 보니 불평과 비판이 늘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면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는 감사는 어려운 중에 하는 감사가 참된 감사다. 좋은 환경에서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다. 선교사가 믿음이 있는 자라는 사실은 바로 어려운 선교지의 삶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사는데 있다. 선교지에서의 어려움은 그래서 더 값진 것이다. 어려운 중에도 믿음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이 있을 때는 하나님이 훈련해주시는 것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다. 재정이 부족할 때는 기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할 수 있다. 현지인들이 선교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면 그것 때문에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어야 할 이유이기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다. 선교사가 비자가 안 나온다면 선교사에게 비자로 안주는 사람들의 무지함 때문에 선교지에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기에 감사할 수 있다. 선교지에서 몸이 아프면 사도 바울에게 자고하지 않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동일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때로 현지인 앞에서 교만해질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약함을 통해서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가족이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선교에 가족 모두가 헌신된 것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다. 하는 사역이 마음대로 안 될 때는 더 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할 수 있다. 모든 일을 감사로 바꾸는 삶, 감사로 이해하는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오늘도 무엇이 선교사인 당신을 힘들게 만들었는가? 그것을 오히려 감사로 바꾸는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자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가?

 

선교사들이 모이면 항상 감사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 선교사들이 모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누고 함께 기뻐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선교사들이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보다는 감사하는 일을 더 많이 말했으면 좋겠다. 그런 모습이 바로 선교사의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선교사의 정체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감사 없이 선교지에서 사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거칠고 고생만 한 사람 처럼 보이고 개척자로써 괴로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항상 힘들도 나약하고 지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사는 풍성하고 나누어 주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자이다.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모습이 바로 선교사의 트레이드 마크다(Trade Mark). 항상 웃음 짓고 성령의 아름다운 빛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선교사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삶

선교사는 문화를 뛰어 넘는 사람이다. 문화를 뛰어 넘어 선교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에 따라 선교지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 문화의 관점에서 복음을 전한다. 선교지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 대신 선교사 자신이 가진 문화는 잠시 접어 두고 산다. 자국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선교사가 문화를 뛰어 넘는다는 의미는 자신의 입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선교사가 선교지 문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복음이라도 문화 이해가 잘못 됨으로 인해 복음전파의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선교사의 복음 전파의 시작은 선교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부터 시작된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문화 이해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이해이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선교사역의 시작점이 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교사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해 줄 수 없다.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이 선교사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이다. 가장 잘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듣는 사람이 이해하도록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지적이고 훌륭한 언변이라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마음, 그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수다. 이것을 역지사지라 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했다면 그 잘못의 크기나 결과를 보기 전에 그 잘못을 한 배경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역지사지의 태도이다. 일반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상처받은 것에 대해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사는 상대가 오직 했으면 그런 일을 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입장과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선교사 자신이 그 입장에서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선교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지인이 있다면 그 현지인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역지사지이다. 동료 선교사가 힘들게 하였다면 그 동료 선교사가 왜 그랬을까 에 대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는 것이 역지사지다. 선교 단체 본부에서 명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결정한 본부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역지사지다.

 

선교사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까지 마음을 써야 한다. 상대가 상처가 있어서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 뿐 아니라 상대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관점에서 사람을 대한다면 사람의 문제들은 그렇게 크게 보이지를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죄의 결과 모든 사람이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라면 사람은 모두가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상대를 바로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선교사는 파괴하거나, 상처를 들추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볼 때에, 특별히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그 사람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선교사는 그 누구도 자신의 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사랑의 대상자로 생각해야 한다.

 

선교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타종교인은 선교사의 원수가 아니다. 오히려 선교사가 이해하고 싸매고 고쳐야 할 사람이다.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선교사의 태도이다. 선교지 정부에서 선교사를 억울하게 했다고 해서 그 정부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복음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선교지에서 보면 좀 도둑이 많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도 믿을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2:17). 악한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필자는 필리핀 바기오에 아내와 함께 회의가 있어서 갔다가 황당한(?) 일을 당하였다. 돌아오는 좌석이 있는 버스표를 구입하고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터미널 의자에서 같이 동행했던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출발 시간 10분전에 버스를 타러 갔다. 그런데 그 버스가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손을 들어 세워 자리 예약 표를 보여주면서 타려고 하자 안내원이 자리가 이미 다 찾기에 탈 수 없다고 하였다. 아직 시간이 안 되었고 우리는 자리를 이미 예약했기에 타고 가야 한다고 말해도 자리가 다 찼다는 이야기만 하고 떠나 버렸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데 또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회사에 가서 따져도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억울하였다. 마음에는 당장 이런 나라가 어디 있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런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런 부당한 일이 없다면 선교사가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 부당성을 위해서 선교사는 선교지에 와 있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은 버스 예약 시간과 좌석은 그저 종이일 뿐 먼저 타는 사람이 임자이고 자리가 다 차면 버스는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필리핀에 온지 얼마 안 되어 겪는 문화 충격이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했다면 필자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에 필자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한 가지는 선교사는 현지 문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은 것이다.

 

역지사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인터넷 글이 있어 인용해 본다. 선교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지는 않을 것을 알지만 한번쯤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침묵하면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내가 늦으면 사정 때문이고, 남이 늦으면 게으름 때문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 만큼 유능한 것이고, 남이 자리를 비우면 어디서 노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주장하면 고집불통이다.

내가 통화를 하면 업무상 급한 것이고, 남이 통화 중이면 사적인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내가 아프면 아픈 만큼 쉬어야 하고, 남이 아프면 체력마저 의심스러운 것이다.

내가 가족사진을 사무실에 걸어놓으면 가족의 화목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남이 사무실에 가족사진을 걸어 놓으면 직장에서도 집 생각 만 하는 것이다.

내가 회의 중이면 남은 잠간 기다려야 하고, 남이 회의 중이면 나는 잠간 만나야 한다.

내가 남의 말을 들으면 폭이 넓은 사람이고, 남이 남의 말을 들으면 줏대가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선교사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이다. 선교사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기에 선교사는 아무것도 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다.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면 된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이것이 선교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믿음이요, 태도이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8:27). 그래서 선교사는 모든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때로 선교사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곳에 살기에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미 우리의 상황을 아시고 친히 간구하신다.

 

선교사가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렇게 조급할 필요가 없다. 안 되는 일로 인해서 답답할 필요도 없다. 하는 사역이 열매가 안 보여도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철학과 목표를 향해 꾸준히 묵묵히 나간다면 결국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 당장 열매가 안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부족하기에 선교사가 앞서서 일하다가 실수하는 경우도 있다. 참지 못해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주변의 선교사들의 사역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비교하고 힘들어 한다. 다른 선교사들의 선교비가 많으면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 하나님이 각자 선교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 선교사가 할 일은 바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가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종종 싸운다는 말을 듣는다. 동료 선교사와 혹은 선교지 현지인들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후원 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다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지고 굳이 선교사가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회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의가 아닌 경우에 싸우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위로받고 소망가운데 살 수 있다. 어쩌면 선교사의 자질을 기대할 때 위대하고 완벽한 선교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진 선교사를 기대하는 것이다. 능력 있고 훌륭한 선교사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요청된다. 이런 선교사들이 많아질 때 한국 선교는 더욱 발전될 것이다.

 

구제에 대한 단상

구제를 한국 교회의 선교에 연관 시켜 본다. 구제를 하는 사람과 선교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같아야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구제를 살펴봄으로 선교사역에 임하는 한국 교회의 자세를 찾아보고자 한다. 필자도 이 부분이 한국 교회 선교에서 드러나는 가장 문제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구제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선교를 했으면 한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1. 구제에 대한 세 종류의 사람들

첫째는 구제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일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만 아는 사람이다. 구제가 좋은 일인지 알면서도 자기 욕심 때문에 못하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구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일이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구제에 대해서 하지 않거나 인색한 사람이다. 해외 선교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선교를 위해 헌금하지 않는 성도들이 선교에 참여하는 성도보다 더 많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선교참여 현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구제를 하기는 하지만 드러내놓고 하는 사람이다. 매해 년 말에는 구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구제를 한다. 어떤 기업가나 연예인들은 몇 천 만원 씩 하면서 언론을 통해 그들의 구제에 대해서 광고를 한다. 자기를 들어내더라도 구제를 하는 사람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들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의 문제점은 바로 이런 부류의 교회와 성도들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이 자기 교회 이름으로 선교지에 교회를 건축하고 선교지에 자기 교회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교회에 헌금 하면서 그 헌금을 헌금한 성도 마음대로 그 돈을 사용하고 그 성도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성도는 거의 없다. 그러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는 그 선교 헌금을 관리하려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려 한다. 한국 교회 선교에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한국 선교를 흔들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세 번째는 구제를 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은밀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구제하면서 자기 이름을 숨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구제하는 것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언젠가 TV에서 어떤 사람이 쌀 5백 가마니를 교회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방영 되었다. 몇 년 동안 이 사람은 교회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는다. 정미소에 전화를 해서 은행 통장에 입금을 하고 자신은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알고 TV에서 이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하고 노력을 하지만 결국은 누구인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선교에 참여하고 선교 헌금을 하면서 자기 이름이나 의를 드러내지 않는 교회와 성도가 얼마나 될까?

 

이 세 종류의 사람, 즉 구제를 전혀 안하는 사람, 구제를 하지만 자기를 들어내는 사람, 구제를 하면서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사람 중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이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우리 주님은 마지막 세 번째 원리대로 구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 주님은 구제를 할 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다(마태6:4).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구제의 원리이다. 선교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선교 헌금을 하는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구제 원리에 의하면 교회가 선교에 참여하면서 자기 교회의 힘을 드러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 은밀한 구제의 의미

첫 번째 이 구제의 원리 내면에는 구제를 하라는 요구가 있다. 구제를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주님의 요구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감동적인 구제의 모습을 보게 된다. 구제를 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가끔 씩 우리는 TV나 신문을 통해서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떤 할머니는 평생 노점상을 해서 모은 돈 몇 억 원 전액을 학교나 사회단체에 기증하는 것을 본다.

 

어떤 분은 돈은 아니더라도 백혈병이나 신장 등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기적인 우리의 모습을 보며 반성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매월 한 달에 한 번씩은 헌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 단체들은 시신을 기증하는 운동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유독 이런 구제와 좋은 일에 참여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는 원리이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가 가진 것, 생명까지라도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20:35)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주는 것보다는 많은 것을 갖는 것이 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많이 가지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복되다고 하셨다.

 

잠언에서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11:24-25)”고 했다. 세상의 원리는 과도히 아끼고 저축을 해야 부자가 된다고 하는데 성경의 원리는 구제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원리라고 말한다. 오히려 과도히 아끼는 것은 가난하게 된다고 한다.

 

구제를 할 때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갚아 주신다. 이것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원리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주님이 죽임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믿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고 이 원리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이 원리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구제하는 것이 곧 부자가 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원리다. 구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한다. 구제를 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그 상을 주신다. 구제를 많이 하면 많이 갚아주시고 적게 하면 적게 갚아주신다. 선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선교를 주제로 삼은 책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 모두가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두 번째, 우리 주님의 은밀하게 하라는 구제의 원리는 구제를 할 때 믿음으로 하라는 뜻이 들어있다. 구제를 할 때 믿음이 있는 자만이 은밀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구제를 은밀히 안하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은밀히 할 때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은 바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이 믿음이 중요하다. 이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에 어떤 교인이 헌금 시간에 1달러짜리 지폐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좌석 사이의 통로로 다가오는 헌금 위원이 사업상 친분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서 얼른 지폐를 20달러까지로 바꿨으며, 그것을 헌금 접시에 놓을 때 일부러 슬쩍 흔들었다. 이런 모습은 바로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헌금하는 것이다.

 

주님은 기도할 때도 은밀히 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금식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하셨다. 바로 하나님이 들으시고 갚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와 금식을 하라는 것이다. 기도나 금식이나 구제가 모두 하나님과 관계 되어 있는 믿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제할 때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 헌금이나 구제를 할 수 있다. 믿음이 적으면 헌금이나 구제도 적을 수밖에 없다. 구제는 인간의 감정이나 돈의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사는 원리는 세상의 원리가 아니고 믿음의 원리이다. 헌금이나 구제를 할 때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 이것이 믿음의 원리이다. 우리가 저축이나 보험을 들면 반드시 그에 대한 다시 찾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20, 21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다. 이 세상에 저축하는 것은 불안정하기에 하늘나라를 위해 돈을 쓰라는 말씀이 믿어지는가? 우리는 은행에 저축하는 것은 반드시 다시 찾을 것을 의심 없이 저축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다시 찾을 확신이 얼마나 있는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 누가복음 1216절에 나온다. 한 부자가 소출이 많았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마음에 생각했다. “내가 곡식을 많이 쌓아둘 곳이 없다. 더 많은 곡간을 지어 거기에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리라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게도 말했다. 내 영혼아 네가 쓸 것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고 그의 생명을 취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하나님이 생명을 찾으면 다 소용없게 된다. 우리가 버는 돈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도 없다. 우리 주님은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다. 세상의 창고, 세상의 저축, 보험은 구멍이 나서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쌓아두는 것은 영원하다.

 

한 청년이 주님께 찾아 왔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율법을 행하라고 했다. 이 청년은 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그 때 청년은 부자이므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다(마태19:22). 이 청년은 자신이 가진 돈 때문에 영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믿음이 없었다.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수 있다. 선교에 동참하는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다. 선교에 동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세 번째는 남을 구제를 할 때 은밀히 하라는 원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하나님만을 드러내라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할 때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행실이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구제를 할 때 자신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선교를 할 때도 우리가 선교를 통해서 무엇인가 우리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면 안 된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름을 내려고 하니까 선교지에 건물을 세우려고 한다. 교회 몇 주년 기념으로 선교지에 교회 건축을 했다고 자랑을 한다. 선교 센터를 짓고 교회에서 그 재산을 관리하려 한다. 그러나 선교지에 선교 헌금하는 것도 은밀하게 해야 한다. 선교지에 건물을 지어 놓고 성도들이 함께 선교지에 가서 현지인들 앞에서 헌당식을 하는 것도 자기 의를 나타내는 마음이 있어서이다.

 

마태복음 64절에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이것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만이 은밀하게 구제한다. 미국 사람들은 헌금 할 때 주로 1불이나, 많이 하면 5불 정도의 헌금을 한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에 비해서는 헌금을 상당히 많이 한다. 그런데 차이점은 미국 사람들은 유산을 자식에게 주지 않고 교회에 헌금하거나 사회단체에 기증한다. 반면에 한국 사람은 살았을 때는 헌금을 많이 하지만 죽을 때는 유산을 교회나 사회단체가 아닌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다. 미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 중에 누가 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현세적인 믿음을 가졌고 미국 사람은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현세에 잘 사는 것을 바라서 살았을 때 헌금을 잘 하고 미국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 마지막 재산을 드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도 하나님의 상을 바라며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교를 하되 그 분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면서 해야 한다. 현지인이 하는 칭찬을 바라서 하는 것이 선교가 아니다. 선교사들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 선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하는 것이다. 디모데 후서 48절에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라는 말씀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제 후로는, 지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갈 때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하였다.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나 선교사의 면류관은 이 세상이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아주고 평가해주느냐가 전부가 아니다. 진실한 상급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자기 의를 드러내고, 선교에 동참한 결과를 얻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선교사나 후원 교회도 현지인들에게 후원과 구제와 활동에 대한 칭찬을 받는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상급이 없을 것이다. 선교에 동참하면서도 내세보다는 현세의 상급을 바라는 선교는 한국 교회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선교비를 가지고 재산 싸움 하거나 자기 이름 내려는 교회와 선교사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 선교는 겉으로 너무나 요란하다. 자기 의와 행적이 강하다. 그러나 교회가 몇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광고하거나 교만할 필요가 없다. 선교지에 몇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다. 주보나 신문에 광고하는 교회나 선교사들은 내세의 의의 면류관을 이미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은 것이다. 선교를 한다는 자랑이 바로 이 세상의 상급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내세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선교의 모든 잡음들은 바로 자기 의를 이 세상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것과 내세의 면류관을 기대하지 않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선교에 동참하는 모든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는 믿음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결론

한국 교회 선교는 이제 자리를 잡아 갈 때이다. 여전히 선교 동원이나 대회에 얽매일 때가 아니라 전략에 따라 전문성을 키워가야 한다. 선교사 파송 숫자로 자랑할 때가 아니라 선교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선교사의 열매를 바라기 전에 선교사의 실제적인 부분과 내면을 도와줄 수 있는 멤버 케어가 구축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적인 선교에서 섬기는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선교에서 성육신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무계획과 관계 중심의 선교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안목과 목표를 따른 선교를 해야 한다. 기본과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선교를 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한국 선교에 바라시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럴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계속해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데로 쓰임 받은 아름다운 한국 교회 선교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