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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2-5강 선교사의 자질과 동기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2학기

제 2-5강 선교사의 자질과 동기

후앙리 2020. 4. 8. 22:02

I. 선교()란 무엇(누구)인가?

 

II. 선교사에게 요청되는 기본적인 자질

III. 자질이 부족한 선교사

IV. 잘못된 선교의 동기들

V. 선한 동기의 필요성

VI. 선교의 순수한 동기

 

I. 선교()란 무엇(누구)인가?

 

필자가 대학교에 다닐 때 한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학교 다닐 때 정말 좋은 선생님은 누구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생각나는 선생님은 누구인가? 공부 잘 가르치는 선생님인가? 아니면 인자하고 학생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인가? 그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었다. 필자가 가만히 듣고 있자 이 친구는 자신이 대답까지 하였다. “진짜 좋은 선생님은 잘 가르치는 선생님보다는 인격이 좋은 선생님, 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이다. 몇 년이 지나면 그 선생님이 가르쳤던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지만 그 선생님이 하셨던 행동, 학생들에 대한 태도는 기억이 남기 때문이다는 말을 하였다. 진정으로 좋은 선생님, 다시 만나고 싶은 선생님은 잘 가르쳤던 선생이 아니라 인격이 좋은 선생님이다.

선교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해 본다. 좋은 선교사는 누구인가? 사역을 잘 하는 선교사, 설교를 잘 하는 선교사, 일을 많이 하는 선교사, 전도를 많이 하는 선교사인가?

선교는 무엇일까? 전도하는 것인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인가?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것인가? 가난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인가? 학교를 세우는 것인가? 병원을 세우는 것인가? 고아원을 세우는 것인가?

선교와 선교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혹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말씀이 무엇인가? 요한복음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다. 선교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면 선교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요한복은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말씀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선교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의 뜻은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을 전하러 오신 분이시다. 말씀을 전하러 오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왜 예수님(말씀)이 사람이 되셨을까? 왜 말씀이 사람으로 변했을까? 말씀이 사람이 된 그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이다. 사람은 지, , 의를 합한 전인격적인 존재이다. 사람은 인격이 있고 성품이 있고 영성이 있고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존재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전인적인 사람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최초의 선교사였다. 복음, 즉 말씀을 이 세상에 전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셨다. 그 분이 바로 복음이다.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선교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그 선교의 내용이 말씀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 되는 구세주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말씀(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듣도록 내가 하나님인데 나를 믿어라라고 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사람들에게 기적과 능력을 베푸셔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을 뿌려서 하나님을 믿도록 하실 수 있다. 죽은 자를 그 자리에서 살아나게 하셔서 그것을 봄으로 하나님을 믿도록 하실 수 있으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 즉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최초의 선교사이면서 선교의 내용이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선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곧 전인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선교사), 전인적인 삶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전인적인 삶을 통해 말씀을 드러내는 것이다. 선교는 선교사 자신이다. 선교는 선교사 자신의 삶이다. 선교는 말씀을 전하는 그것이 아니라 말씀이 삶이 되는 그 모습이다. 선교는 사역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다. 선교사의 전인적인 삶 자체가 선교다. 선교는 말씀을 전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말씀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그 말씀이 삶으로 육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사역이 아니라 선교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삶을 살았느냐하는 것이 어떤 사역을 했느냐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 선교 사역자체는 잘 하는데 그 삶의 뒷 모습은 엉망일 때 이것은 참된 선교가 아니라는 뜻이다. 설교는 잘하는데 가정에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삶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면, 좋은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는 사역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선교사 자신의 삶이고 선교사 자신이 선교다. 그래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선교사(사람)가 되느냐가 우선 되어야 한다.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다. 전인적인 존재는 무엇을 포함하는가? 육체, , 건강적인 면 영적인 면 인간관계(사회성)적인 면 지적인 면 가정적인 면 감정적인 면 예술적인 면 사역의 능력적인 면 , 재정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

선교사의 자질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런 전인적인 부분에서 자질을 말하는 것이다. 선교사 자질의 여러 가지 부분들은 선교사가 가지면 좋은 부분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선교라는 사실이다. 이런 부분들이 다 잘 되어질 때 선교가 바르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자의 선교에 대한 정의는 선교란 선교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워가고 성숙해가는 과정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사의 삶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 과정이 선교라는 것이다. 선교사의 자질을 말할 때, 단순히 그것이 선교사에게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선교이기에 선교사의 자질은 좋은 선교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질 자체가 선교이며, 그 자질이 선교의 기본이 되기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II. 선교사에게 요청되는 기본적인 자질

 

한 사람의 뛰어난 지도자나 발명가 혹은 전문가가 수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이다. 선교에 있어서도 한 사람의 양질의 선교사가 선교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한국교회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더 많은 양질의 선교사가 나오는 것보다 더 축복된 일은 없을 것이다. 자질 있는 선교사가 많아질 때 하나님 나라는 더 빨리 확장되어 질 것이다. 선교사의 자질을 평가할 수 있는 요소는 어떤 것이며, 선교사가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선교사의 자질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선교사에게 여러 가지 자질들이 있지만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기본적인 자질들을 정리해 본다.

 

1. 영성 있는 사람

영성이란 하나님과 교제를 깊이 하는 삶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성품을 말한다. 선교사는 말씀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통해 깊은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의 노력이나 재능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영성이 선교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자질이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선교사들은 모두가 영성이 뛰어난 선교사들이었다. 훌륭한 선교사들은 영성에 있어서도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버어마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저드슨은 평생 동안 매주 금요일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으로 삼았다. 금요일에는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하루 종일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영성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자질이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사역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교사역의 도구이고 선교의 목표이다. 이 말씀 사역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말씀으로 자신이 먼저 은혜를 누려야 한다. 말씀이 선교사 속에 살아있고 선교사가 그 말씀의 맛을 보아야 한다. 말씀을 잘 전하는 선교사는 그 말씀에 충만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선교사 자신의 삶을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

선교사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도 있다. 선교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메마를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많다. 선교지에서는 선교사 자신이 말씀에 충만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누가 먼저 찾아와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선교사의 고국에서는 좋은 설교를 들을 수도 있고 양질의 신앙 서적을 쉽게 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그런 것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영적인 공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순간에 주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다 보면 선교사 스스로 말씀에 갈급한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선교사 자신이나 후원자들은 선교사는 말씀의 영성을 지키는 데에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요즈음 선교사역은 다양하고 방대한 작업이다. 선교의 기술적인 면도 발전되어 가고 있다. 선교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전략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오히려 영성을 방해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선교사들이 할 일이 너무 많아 분주하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과의 충분한 교제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선교지는 영적인 전쟁터다. 영적인 전투에서 싸움의 가장 큰 도구는 기도이다. 기도가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케 하는 도구라면 선교사가 항상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교사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많다. 그 중에 기도는 필수중의 필수이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밥을 먹는 것이 사람에게 필수적인 요소인 것처럼 기도는 선교사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선교사가 사역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도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기도는 선택의 요소가 아니다. 시간이 있을 때 하고 없을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도를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교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쉽지는 않다. ,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하루아침에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교사가 되기 전부터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하는 것이 선교사를 선발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고 선교사의 중요한 자질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 선발에서 이 부분을 점검해야 하고 기도 훈련이 안 된 선교사는 기도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 기도 훈련이 안 된 선교사는 선교지에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기도를 통해 모든 일을 해 나가는 영성이 선교사의 중요한 자질이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설교를 잘하느냐, 말씀을 잘 가르치느냐, 하는 문제는 기술적인 부분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때로 선교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부분은 아니다. 기술적인 부분이 약해도 선교사역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에게 있어서 영성은 기본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를 선발하거나 그 자질을 말할 때 영성을 첫 번째로 꼽아야 한다. 영성에 있어서 균형이 잡혀있고 기본적인 영성이 되어 있는 선교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영성이 있는 선교사는 인간관계에서나 사역적인 면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이겨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의 영성이 모든 분야를 어우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이 된다. 영성 있는 선교사의 모습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선교사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만든다.

영성 있는 선교사는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 변론이 많지 않다. 영성 있는 선교사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별로 없다. 묵묵히 십자가를 바라보는 겸손한 모습이 있다. 선교 후원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 않는다.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한다. 범사에 감사하며 자기의 일에 충실하다. 선교사역의 참된 열매는 깊은 영성을 가진 선교사들의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선교는 주님과 닮은 선교사들의 삶속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주님을 닮은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선교를 이끌어나가는 풍토가 만들어 져야 한다. 영성 있는 선교사가 많아질 때 한국 교회 선교는 바르게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요즘 시대의 선교사를 볼 때 기술이나 전략이나 정보나 재능에 밀려 선교사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현재 많은 선교단체에서 선교사의 영성을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선교사 선발에서 영성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영성을 점검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참된 선교사의 영성을 위해 선교 단체는 균형 잡힌 영성 훈련을 준비해야 한다. 선교단체는 계속적인 영성을 유지하도록 선교사를 돕는 체계를 가져야 한다.

현재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의 영성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영성 집회를 하는 후원 교회 목사들이 있다. 이 목사들은 부흥회 수준의 집회를 인도하고 나서 선교사의 영성을 일으켰노라고 한다. 그러나 선교사의 영성은 단회적이거나 편협적인 집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주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선교사의 말씀과 기도의 습관과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2. 인격적인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의 인격은 죽을 때까지 성숙해간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날마다 성화를 거듭 한다. 이 말은 사람의 인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성숙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구원 얻는 믿음은 주님을 고백하는 순간 이루어질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인격의 변화는 많은 시간과 훈련과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선교사 선발이나 자질을 가늠하는 부분에서도 인격적인 부분을 특별히 중요시 여겨야 할 부분이다. 선교학이나 성경 지식, 선교 전략이나, 기술적인 부분은 단기간의 훈련과 교육으로 변화가 가능하지만 인격적인 부분은 변화와 성숙의 속도가 더디다. 선교사의 인격적인 부분은 선교사가 되는 그 순간의 상태가 끝까지 그대로 유지 될 수도 있다. 인격적인 문제가 있는 선교사는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선교단체가 선교사의 인격적인 부분에서 잘 못 선발할 경우, 그 악영향은 선교사가 선교사역을 그만두는 그 날까지 계속 되며, 인격이 부족한 선교사로 인해 선교 본부가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한 한다. 그래서 선교단체는 선교사가 된 후로 자동적으로 인격이 좋아지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선교단체는 선교사를 선발할 때 인격적인 부분에서 결함이 적은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가능하면 좋은 인격을 가진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교사의 좋은 인격이란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이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성품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참고 양보하는 모습이다.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신앙과 일치되는 것이다. 거짓과 불의를 모르는 성품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순수하고 깨끗한 성품이다. 선교사의 사역은 삶이 뒷받침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그 삶의 모습이 바로 아름다운 인격이다.

선교사가 재리에 밝고 술수와 야합을 거듭하는 것은 인격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못하는 것도 인격의 부족이다. 다른 사람과 싸우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인격적인 문제이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 중심적인 것도 인격적인 문제이다.

요즈음은 선교사를 평가할 때 인격보다는 사역 자체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선교사의 인격보다는 재능과 사역의 외형을 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인격은 눈으로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 인격의 열매가 사람들에게 잘 나타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격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격이 뒷받침되는 신앙이야 말로 참된 신앙이다. 인격적인 사람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필요하다. 진정한 선교의 열매는 인격이 기반이 되는 것에 있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사역을 잘 하는 선교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비록 사역의 열매가 당장은 나타나지 않지만 인격적인 선교사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고 그 가치가 빛을 발하게 된다.

현재 선교지에서는 선교사의 인격의 결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가 심각하다. 선교사들끼리 곳곳에서 싸운다는 소리가 들린다. 선교사로써 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자도 선교사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냥 사이가 안 좋은 그런 싸움이 아니라 때로 현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육박전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도구(?)를 들어 싸우는 경우도 있다.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집요하게 끝가지 다른 선교사를 괴롭히기도 한다. 인격에 결함이 있는 선교사는 선교 본부와 파송 교회, 그리고 현지인들과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기에 인격적인 부분이 선교사의 자질에서 고려해야 할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3. 믿음 있는 사람 선교사의 믿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선교사를 무시하는 무례한 일이 될 수 있다. 선교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선교사가 믿음이 없으면 누가 참된 믿음이 있을까에 대해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한 선교사들이 있다. 그것도 많은 선교사들이 믿음이 부족하다. 현재도 믿음이 없는 선교사, 믿음이 부족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감히 어떻게 이처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혹은 믿음이 충만한가, 믿음이 부족한가, 하는 것은 선교사의 삶이나 태도를 볼 때 알 수 있다. 믿음이 있다면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 볼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선교사들의 행동을 볼 때 믿음을 의심해 볼 선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님을 처음 마음의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 얻는 믿음을 말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믿음은 모든 행동을 통해 믿음의 사람처럼 행위를 보이는 믿음도 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의 행위도 믿음이 있는 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선교단체에서 선교사를 허입할 때 구원 얻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확신이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인간의 구원이 가장 큰 일임을 고백하는 사람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선교에 있어서 중심을 지키고 바른 선교 사역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최종적인 목표임을 알고 사역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을 구원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심이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을 더 중요시 여기는 선교사들이 존재한다.

얼마 전에 필자가 들은 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선교사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는 자기 사업을 하는 일에 집중하는 선교사다. 그런데도 이 선교사는 한국교회에서 신뢰를 많이 받고 있다. 이 선교사가 하는 일이 주로 교회건축을 해주는 일이다. 한국에서 후원금을 모아서 현지에 교회들을 건축하고 교회 기물들을 사주는 일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선교사에게 들어오는 후원금의 씀씀이가 분명치 않다. 후원 교회에서 송금해 준 후원금이 현지 교회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기물이나 건축을 해주는 것도 현지교회를 방문 한번 하지 않고 현지 사역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내어 돈을 제공해 준다. 이 선교사는 건축 자재상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 목회자가 선교사의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관계를 끊어 버린다. 이런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현지인 사역자들이 상처를 받는다.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의 땅을 구입하여 농사를 지어 이익을 남겨 선교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한국 교회에 선전하여 돈을 모으기도 한다. 그 땅은 농사를 지어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땅이다. 후원자들은 벌써부터 속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선교사를 보면서 믿음이 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믿음이 있다면 선교사들이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 믿음이 있다면 선교사들이 서로 원수처럼 대하고 살 수는 없다. 믿음이 있다면 후원자들을 속일 수 없다. 믿음이 있다면 선교 현지 사역자들을 종 다루는 듯 다루어 신실한 현지인 사역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믿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알고 살아야 한다. 믿음이 있다면 다른 선교사를 비방하며 살지 않아야 한다. 믿음이 있다면 거짓된 선교 보고를 할 수 없다. 믿음이 있다면 다른 어떤 일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부도덕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다면 도둑질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게임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 믿음이 있다면 사람에게 신의를 지킬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선교본부의 규율을 지킬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협력 사역을 할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없는 선교사들은 그의 행동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믿음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선교사들도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믿음이 있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였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부분에서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롯을 도와주는 것이요, 롯을 세워주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롯을 도와줄 때 하나님이 자신을 결코 손해 보게 하지 않을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의 모습대로 행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는 자라고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믿음이 있는 선교사는 아브라함처럼 자기를 희생할 줄 안다. 믿음이 있는 선교사는 자기가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처리한다. 믿음이 있는 선교사는 참고 기다릴 줄 안다. 믿음이 있는 선교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람을 세우는 것을 귀중히 여기고 사람 중심의 원칙대로 살아간다. 믿음이 있는 선교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늘 기다리며 산다. 그러므로 행동과 태도, 결정에 있어서 믿음이 있는 선교사를 선발하는 것이 선교 단체의 중요한 과제이다.

 

4. 선교사 소명이 있는 사람

선교사의 소명을 다루는 것은 구시대적인 자질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교에 있어서 소명도 중요하지만 능력과 재능이 그만큼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선교단체에서는 소명보다는 다른 영역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선교사 소명을 점검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리고 다른 자질들을 더 깊이 점검한다. 선교 소명 부분에서 대충 넘어가는 것이다. 대충 넘어가지 않으면 선교사를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교부에서는 소명과 동기가 불분명하지만 다른 영역에서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면 선교사가 되어 나중에 소명감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소명을 확인하지 않고 허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사에게 있어서 소명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다루어야 할 영역이다. 소명감이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확신이다.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필요하다. 확신이 있을 때 그 일의 성취도는 높아진다. 확신이 있을 때 비록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선교에 있어서 소명감이란 하나님이 이 일에 자신을 부르셨다는 분명한 확신이다. 이 일을 위해 생명도 내 놓겠다는 신념이 선교소명이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암 케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가서 헌신하면 죽음을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확신이 소명감이다. 묵묵히 죽음을 각오하고 그 길을 가는 선교사를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다. 그런 선교사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를 이루어 가신다. 이런 소명감은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다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갖는다.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고 자신의 모든 사역을 진행한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태도는 소명감이 확실할 때 나온다. 소명감이 없으면 자신의 뜻에 따라 일을 하려 한다. 소명감이 부족하면 자신의 욕심과 계획과 지혜를 앞세우게 된다. 선교 소명은 단순히 선교사로 출발하기 위한 조건만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믿음의 태도이다.

소명이 있는 선교사는 모든 일에 분명하다. 모든 일에 분명한 선교사는 어떤 일이든지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산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품고 사역 한다. 소명감이 있는 선교사는 창조적인 일을 추구한다. 그 창조적인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

선교사의 소명감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선교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소명감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소명감은 선교사에게 정체감을 준다. 그 정체감은 하나님으로 출발하는 정체감이다. 그 정체감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당신이 선교사라면 진정 이 일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인가를 확인하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라. 소명감이 분명할 때 흔들리지 않고 만족감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 사명 속에서 사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모든 그리스도인과 선교사에게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선교사에게 이런 소명감이 확실해야 한다.

 

5. 정서적 안정을 가진 사람

정서적인 안정은 영적 자질 다음으로 필요한 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교지에서의 삶은 본국에서의 생활보다도 비교적 어렵다. 선교지의 일상생활은 초조감과 어려움과 곤란의 연속이다. 외국인으로 살기에 갖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어려움과 불안이 계속된다. 외국생활에서 갖는 아픔이 선교사를 날마다 짓누른다. 그러기에 선교사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안정감을 소유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교지에 나가기 전에 정서적인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체적인 건강 검진을 받는 것처럼 선교사는 정신건강 검진을 받을 필요가 있다. 과거에 자란 배경 가운데 상처가 있으면 정서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서적인 미성숙이 나타나는 것 중에 하나는 선교사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는 국적 문제에 대해 안전감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가 외국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의 나라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듣게 되면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일은 자유롭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참기 힘들어한다. 다른 환경 속에서 모국에 대한 대범한 자세를 가지게 되려면 정서적인 안정성이 필요하다.

타문화의 언어로 말하고 다른 주거 환경에서 살아야 하고, 색다른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들은 선교사가 받는 중요한 스트레스가 된다. 옛날에는 긴 도보여행, 열악한 주거 환경, 신체적 위험, 건강의 위협 등 주로 물리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줄어드는데 반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신체보다는 신경계통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도시 선교가 늘어나면서 도시지역의 소음과 환경 장애요인은 신경계통에 대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삶의 주변에서 발견되는 도시빈민과 가난의 문제에 대한 좌절감은 선교사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래서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정신적인 책크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자라온 배경이 너무 어려웠다면 정서적인 책크를 해야 할 필요가 더 많다.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갖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정확히 알고 선교지로 떠날 수 있도록 자신뿐만 아니라 선교본부나 훈련원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

 

6. 문화 적응력이 있는 사람

로마에 가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선교사는 선교지의 문화에 적응을 해야 한다. 적응의 가장 중요한 면은 선교지와 사람들에 대해 배우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적응 능력이란 신체적으로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 하는 것 보다는 선교지의 문화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교지 문화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열어놓지 않는다면 선교지에 적응하기에 어렵고 선교사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완전히 개방된 마음가짐이 문화적응 면에서의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자기 주관에 파묻혀 자기 고집대로 사는 사람은 적응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7.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

유머 감각이 있으면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선교사의 일은 심각한 일이지만 선교사 자신은 너무 심각해서는 안 된다. 동료 선교사나 현지인들을 심각하게 대하면 안 되고 자신에 대해서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긴장감이 돌고 폭발 가능성이 있는 많은 상황에서 유머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사에게 큰 도움을 준다.

남미의 에콰도르 인디헤나 사람들은 모임이 있을 때 먼저 담화부터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많은 유머가 있다. 유머를 하는 가운데 모임의 안건에 들어간다. 본 회의에 들어가서도 한 가지 의견이 나오면 각자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자유롭게 나눈다. 안건을 토의하는 중에도 많은 유머를 한다. 같이 웃고 즐기면서 회의 시간을 보낸다. 비록 회의의 결과가 별로 나타나지 않아도 즐거움으로 보낸 시간들이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다. 선교사는 이런 문화에서 적응하고 자신도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그런 모임의 형태가 시간 낭비 같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같이 웃지 못하고 참지도 못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사가 함께 웃으면서 그 대화에 참여할 때 그들은 자기들과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받아 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선교사는 항상 심각한 사람보다는 바쁘고 여유 없는 곳에서라도 유머를 사용할 줄 알고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8.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

선교사의 실패 이유 중에 하나는 다른 팀 사역자들과의 부조화이다. 팀 내에서 함께 협력하지 못하는 부분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면 왜 선교사들이 동역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협력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할까?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

선교지는 본국보다는 환경적으로 열악하다. 뜨거운 열기, 습기, 고립, 과로 등은 선교사를 초조하게 만들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선교사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선교사들에게 돕는 사역이나 제2인자가 되어 하는 사역을 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선교사 한 사람 사람을 놓고 보았을 때는 다 좋은 사람들인데 함께 사역을 하면 문제가 된다. 선교사는 사람을 다루고 사람과 관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특히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협력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협력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 늘 만나고 협력해야 하는 곳에서 관계가 어려우면 그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그러기에 선교사는 다른 사람과 특히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성품이 필요하다. 어울리기에 힘든 성품일지라도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개선해야 한다. 요즈음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 독불 장군이 될 수 없는 시대이다. 같이 협력해야만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함께 일해 나갈 때만이 효과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본국이나 본국 교회에서는 만나기 싫으면 접촉을 피하면 되지만 선교지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만나야 하고 심지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고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9.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

이 세상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적고 자기 얘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다. 선교사들 중에는 듣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연습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듣는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도 듣는 자세를 잘 가질 때 많은 도움을 받는다. 선교사가 잘 듣기 위해서는 생활 용어부터 배우는 것이 하나의 지혜이다. 어떤 선교사는 생활 용어보다는 복음 전파를 위한 언어를 먼저 배우는데 이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은 먼저 사람들을 이해하고 같아지는 과정이었다. 선교사도 복음을 전하기 전에 현지인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 선교를 잘 할 수 있다. 불안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기가 하는 말이 많다. 선교사는 말을 하기에 앞서서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10. 인내와 끈기를 가진 사람

우리의 선배들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동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운 시대를 보내야만 했다. 고난의 의미를 알고 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시대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세대는 선배들이 겪었던 그런 종류의 고난을 격지 않았다. 냉난방이 잘된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을 마음대로 먹고 의료 혜택을 충분히 받고 자란다. 이러한 육체적 안락, 경제적 안정, 물질적 풍요는 고난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 이런 것들은 고난을 싫어하게 만든다. 그 결과 신세대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본국의 이삿짐을 잔뜩 실어간다. 이삿짐을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이 현지인들과 함께 사역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선교 현지인들과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사는 것이 그들과 동화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면 지나친 이삿짐은 현지인들과 동일화 하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을 생각할 때 선교사에게 고난을 감수하고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인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본국에서 제트기 시대에서 살다가 불과 하루 만에 황소시대로 간다. 선교현지는 본국의 생활보다 느리다. 그러기에 느린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국 선교사는 빨리빨리라는 말을 억제하고 천천히라는 말을 자신에게 늘 해야 한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사역하기가 힘들다.

남미에서는 제 시간에 예배를 시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예배의 제 시간에 도착해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특별 행사를 할 경우에는 더욱더 기다려야 한다. 준비하느라 시간이 더 늦어진다. 특별 순서를 갖느라 행사도 오래 걸린다. 큰 행사일 때는 행사를 치르는데 하루가 다 간다. 이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선교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제 시간에 가서 기다리면서 책을 본다든지, 사역 계획을 세운다든지, 아니면 현지인들과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교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서도 여유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선교사가 모임에 늦었다. 왜 늦었느냐고 현지인이 묻자 그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늦었다고 했다. 이런 여유와 유머감각이 필요하다. 적당한 유머와 현지인들처럼 여유 있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선교사 자신이 살아남지 못한다.

남미에서는 어떤 일이 늦어지거나 중단되는 일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항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나라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만드는데 필요한 용지를 수입해야 한다. 어떤 때는 1년이 지나도록 수입을 안 하고 주민등록증을 만들지도 않는다. 현지인들은 이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인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선교사가 화를 낸다면 그들은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른다. 오히려 화를 내는 그것으로 선교사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현지인들처럼 기다릴 수 있는 성품을 가져야 한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비록 본국의 사고방식과 문화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선교사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과 인내와 끈기의 성품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11. 우월감이 없는 사람

우월감은 어느 나라 선교사에게나 있다. 특히 한국인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에 대한 우월감이 있다. 한국이 짧은 시간에 경제적인 성장을 가져온 것도 우월의식을 갖는 요인이다. 이 우월감은 결국 한국 교회의 문화를 선교지에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현지인 교회가 아닌 한국인 교회를 심어 줄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한국 교회가 장점이 있지만 선교지인들의 문화에 맞는 그들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사의 일이다. 선교사들에게 경제적인 면에서나 교육적인 면에서도 우월감이 있을 때, 현지인들을 향해 가난하고 일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게 된다. 그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우월 의식을 버리기 위해서는 선교사는 현지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게으른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다. 현지인들은 대체적으로 가난하게 산다. 가난하지만 가족들끼리 휴식하고 가족 중심의 여유 있는 삶을 산다. 비록 그들에게 먹을 것이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축구하고 노래하면서 사는 삶, 그것이 이들의 삶의 방식이요, 즐거움인 것이다. 가난하지만 어떤 일에나 여유가 있고 즐길 줄 안다. 쉴 틈도 없이 그렇게 빠듯하게 살지는 않는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당장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운 여름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열심히 사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지 사람들은 일하지 않아도 굶거나 추위 때문에 죽는 일은 없다. 현지인들은 일을 많이 하는 한국 사람들을 일의 노예로 본다. 일만 하는 한국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을 향해서 인생을 즐길 줄 모른다고 한다. 이처럼 각자의 입장과 관점이 다르다. 과연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인가? 해마다 전 세계 나라마다의 행복 지수를 연구하여 발표를 하는 국제기구들이 있다. 이 발표에 의하면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가난한 나라들이고 낮은 나라는 대부분 잘 사는 나라들이다. 이처럼 나라마다, 문화 마다 서로가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선교지 사람들은 못 사는 사람들, 공부 못하는 사람들, 저축 안 하는 사람들, 놀기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선교사는 없다.

선교사들은 이런 우월의식을 줄이고 현지인들을 인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지에서 생산하는 물건으로 자급하는 생활 습관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본국의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본국 물건을 사용하는 오류는 선교에 장애가 된다. 사역에서도 선교사가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현지 지도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문제가 된다. 선교사는 먼저 선교지의 사람들과 문화를 배우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현지인들에게 배우려고 하는 그 자세가 좋은 사역의 열매를 가져 올수 있다. 남미의 한 나라에 빛과 소금의 교회라는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10년 만에 200명 이상의 성도를 갖게 되었다. 60% 이상의 마을 주민들이 교회에 출석한다. 이 교회 목사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였다. 글을 읽을 수는 있어도 쓰지는 잘 못한다. 반면에 이 목사는 기도를 많이 한다. 게다가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교회를 잘 리더 한다. 학문으로 리더십을 배우지 않았어도 좋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그 목사는 항상 겸손하다. 성품은 누구보다도 부드럽다. 설교학을 배우지도 않았어도 설교 말씀에 능력과 은혜가 있다. 이 목사가 하는 설교가 신학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 성경적인 설교를 한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고 하나님만을 전한다. 이런 현지인 지도자들 앞에서 선교사가 자기가 많이 배웠다고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문화적인 편견이나 우월감, 종족 편견을 가진 사람은 바른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선교사는 선교사 혼자만 주는 사역이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 나누는 사역을 해야만 한다.

 

12. 섬김의 자세를 가진 사람

주님은 지상 생활동안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잘 감당 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과 같이 되심으로 삼위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외적인 박탈을 당하실 만큼 낮아지셨다. 선교사는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야 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만약 선교사가 기꺼이 섬기려는 마음이 없으면 군림하려고 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세계 어디에서도 현지인들 위에 군림하는 선교사를 원하는 곳은 없다. 섬김의 성품은 선교지 현지인의 집에서 조그만 잡일을 부탁 받았을 때 나타난다. 기꺼이 현지인을 섬길 수 있는 선교사가 진정한 섬김의 성품을 가진 선교사다. 선교사가 하찮은 일을 하도록 배치 받았을 때 섬김에 대한 성품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자신을 파송한 담임 목사를 섬기는 마음으로 현지인들을 섬기는 섬김의 태도가 선교사에게 필요하다.

 

13. 자기 훈련이 되는 사람

선교사의 본국에서의 생활은 바쁘고 복잡하고 스케줄이 꽉 짜여 있다. 그러나 선교지에서는 선교사 스스로 자신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 시간이 많아 게으를 수도 있고, 반면에 조절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시간이 많은 선교사는 자신이 원한다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만 할 수 있다. 반대로 많은 일을 하느라 일에 쫓겨 무리할 수도 있다. 본국 후원자들에 대한 부담감, 선교 열매를 빨리 맺으려는 긴박감,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는 마음, 불안전 한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완벽주의의 성격 등이 오직 일만을 하는 선교사로 만든다. 이런 선교지의 환경 가운데 자기 훈련이 되어서 시간을 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자기훈련이란 휴가가 필요할 때 휴가를 갖고 가족이 필요로 할 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자기 훈련이 되어서 타인의 간섭 없이 스스로를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자격이 있는 선교사인 것이다.

 

 

III. 자질이 부족한 선교사

 

선교사가 좋은 자질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만 반대로 선교사가 가져서는 안 되는 요소들이 있다. 이런 요소를 가진 사람은 선교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런 적합지 않은 요소는 선교사역을 하면서 끝까지 자신과 동료와 현지인들을 괴롭힌다.

 

1. 배울 줄 모르는 사람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배움에 열심 해야 한다. 선교사의 직분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가르쳐 주고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작 선교사 자신의 성장을 위해 배우려는 필요를 갖지 못할 수가 있다. 현재도 충분하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기에 배우고 자기를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이 적을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는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선교지에서 보면 자기발전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는 선교사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사역 또한 발전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선교사가 되면 모든 것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그 때부터 선교사로 자라가는 것이다. 자기 발전이나 성장이 없는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배울 줄 모르는 선교사는 가르칠 자격이 없는 선교사다.

 

2. 자기관리가 부족한 사람

선교사에게 있어서 선교지는 본국보다는 선교사를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약하다. 선교지에서는 선교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일일이 간섭하거나 점검할 수 있는 조직이나 사람이 많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예외는 있다.

선교사가 현지인 단체와 협력하면서 현지인의 권위 아래서 사역을 할 때, 자신의 생활과 사역에 대해서 관리를 받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선교단체의 현지 체제가 잘 되어 있어서 그 체제에 따라 사역을 하는 경우이다. 위의 두 체제가 선교사 자기관리에 있어서는 유리하다. 이런 체제들이 선교사 관리 뿐 아니라 협력사역 등 다른 부분에서도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지인의 권위 밑에서 그들의 감독을 받으면서 사역을 하려고 하는 한국 선교사는 많지 않다. 국제 선교단체가 아니라면 한국 자생 선교단체는 현지 체제가 형태는 있지만 선교사들을 관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이 아직은 실행되고 있지 않는 현실이다. 그래서 선교사가 균형 잡힌 사역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관리가 잘 되어야 한다. 자기관리가 되어 있는 않는 선교사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자신의 관리 능력이 부족하기에 선교사의 삶을 살기에 부적합하다. 환경이나 시스템,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선교사는 시간이나 물질 혹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선교에 적합하게 활용하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적합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그것을 가지고 범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범죄일 뿐 아니라 실제로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면 돈이 있는데 그것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본다. 그 돈을 그냥 모아두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돈을 사용하다 보면 잘 못된데 사용할 가능성이 많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남아도는 시간에 바쁜 사람보다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자기관리는 단순히 시간, 재능, 물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선교사를 관리해주지 않는 환경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자기관리가 부족한 사람은 오히려 범죄 할 가능성이 더 많아 지는 것이다. 자기관리가 부족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칠 가능성이 많다. 선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좋은 시스템 속에서 자기 관리의 면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사람이 오히려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낭비하고 더 나아가 범죄 하게 되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인생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자기관리가 잘 안 되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

 

3.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

전문성이 부족한 선교사는 자기 자신에게 뿐 아니라 한국선교 전체에 대해서도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선교사의 질이 낮다는 뜻이고, 선교사의 질이 낮아질 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된다. 전문성이 부족한 선교사를 보고 후원자나 선교지 현지인들이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그 결과 한국 선교는 퇴보하게 된다. 반대로 선교사가 전문성을 가지고 선교를 할 때에 비전문가들이 선교에 관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전문가들이 선교에 관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선교는 전문성을 가진 영역이 될 것이다. 여기서 전문성이란, 선교의 전문성 뿐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전문성이다. 전문인 선교사라면 자기의 전공에 탁월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고, 목회자 선교사라면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이나, 제자와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탁월한 전문가가 된다는 뜻이다. 선교지에서 이 분야만큼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해야 한다는 프로(?)정신을 가진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4. 열린 마음이 부족한 사람

선교사들이 의외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 듣거나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보통 선교사는 개척 정신이 강하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정 반대로 새롭게 개척하거나 열린 마음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것은 늘 가르쳐야 하고 말해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잘못된(?) 마음과 습관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어느 정도 선교사역을 하다보면 그것에 안주하려는 마음도 생긴다. 그것은 새롭게 개척해 왔던 일들이 너무 힘들었고 또 다른 개척된 일을 하려 할 때 두려움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동안 너무 강한 일들을 해왔기에 자신감이 넘치게 되는 경우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자존감이 너무 강하거나, 혹은 너무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선교사는 자존감에 있어서 위의 너무 지나친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많다. 선교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자기애가 강해진다. 자기애가 강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선교사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지리적인 한계를 벗어나 세계로 나가게 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선교사역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옛 성품을 벗어버리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오히려 열린 마음보다는 닫힌 마음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많다. 선교란 문화와 민족을 뛰어 넘어 복음을 전하면서 성육신하여 현지인들을 섬기는 것이다. 닫힌 마음으로 현재의 틀을 깨지 못하고 몸만 선교지에 와 있다면 참된 선교를 하기 어렵다.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이 없이는 바른 선교를 하기 어렵다.

열린 마음이 없이는 다른 사람과 협력을 하기도 어렵다. 개혁이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도 힘들다. 열린 마음 없이는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열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을 비판하기를 즐겨한다. 열린 마음이 없이는 몸도 마음도 병이 생긴다. 너무 경직되어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래서 선교사는 유머 감각도 있어야 한다. 유머 감각은 열린 마음속에서 나온다. 여유가 있을 때 웃을 수 있다. 경직되거나 닫히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항상 심각하다.

열린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모든 것을 수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기 것이 없이 무비판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도 아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미지근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일단 마음을 열어 놓고 시작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것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것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라는 것이다. 분명한 자기의 철학을 가지고 마음을 열라는 것이다. 내게 당장 안 맞아도 다른 사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열어 놓고 배울 것은 배우고 취할 것은 취하라는 것이다. 열려 있어야 자기 것의 한계와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이 선교사가 될 수 있고 그래야 선교를 바로 할 수 있다.

 

5.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

감정과 이성과 지성의 균형을 가진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감정과 이성과 지성 중에 특별히 선교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영역은 감정적인 부분이다. 한국 사람은 다른 민족에 비해 감정적인 부분이 예민하고 발전되어 있다. 선교사가 고국을 떠나고 낯선 사람들과 살다 보면 감정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특별히 감정이 처음부터 예민한 사람은 고국에 대한 생각이 너무 지나쳐 향수병이 생길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 떠나 사는 것이 힘든 감정적인 약함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선교사가 되었을 때는 고국과 가족에 대한 생각 때문에 스스로 너무 힘들어 한다. 가족들 걱정도 되고 보고 싶은 마음들이 지나치다 보면 선교사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몸만 선교지에 있지 마음은 한국에 가 있는 것이다. 어떤 선교사는 한국이 너무 가고 싶어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라도 한번 갔다 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한국에 얼마나 가고 싶으면 이렇게 표현을 하겠는가? 이처럼 선교지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많이 있는 곳이다.

어떤 선교사는 6개월에 한번 씩은 한국에 꼭 나가야 하는 선교사도 있다. 한국이 너무 그립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 가는 경우이다. 물론 선교지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다 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자주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와 사역을 위해서 방문하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명목이라도 지나치게 자주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필요해서 가는 경우는 문제가 안 된다. 어떤 선교사는 건강 문제로 6개월 만에 한번 씩 한국을 방문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없고 단순히 건강 검진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암이나 기타의 고질적인 병으로 6개월 만에 한번은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 이런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선교지에 남을 선교사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이 그리워 가족을 보러 6개월에 한번 씩 한국에 가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처럼 가족들을 못 잊고 힘들어 한다면 차라리 선교사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 유난히도 감정적으로 약해 이런 문제를 가진 선교사들이 있다. 선교 단체가 선교사를 허입할 때 이런 부분까지 점검을 해야 한다.

 

6. 상처가 많은 사람

사람은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가지고 자란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크고 작건 간에 누구나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산다. 그러나 의외로 선교사 지망생 중에는 상처를 가진 사람이 많다. 다른 직업군보다도 선교사가 되는 사람들이 과거에 큰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필요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는 말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어렸을 때 받아야 할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에 굶주려 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지게 된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금만 사랑을 받아도 쉽게 감격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적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정말 크고도 풍성한 사랑이다. 그러나 상처로 인해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너무 감격하여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느끼고 감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헌신은 다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헌신을 위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이성도 사용하기를 바라신다. 헌신을 위해 환경도 필요하고 자신의 한계와 선교사로서 적절한 은사와 재능이 있는가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은 이런 다양한 헌신적인 요소들을 간과한 채 사랑의 감정만으로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한다. 그 사랑의 감정이 그 사람이 받았던 모든 상처를 다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온전한 사랑을 갖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복을 위해 과거의 상처를 치료 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회성 사랑의 감정으로 온전한 상처를 치유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선교사가 되었을 때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엄청난 상처를 주게 된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선교사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큰 상처를 가진 사람은 선교사가 안 되는 것이 좋다. 치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굳이 선교사가 될 필요는 없다. 선교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힘든 환경에서 해야 되는 일이기에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이 해야 한다. 보통 다른 사람보다도 더 큰 상처를 가진 사람은 선교사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고 선교단체는 이런 사람들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로 인해 선교지는 누룩이 퍼져 가듯이, 도미노가 함께 무너지듯이 건강한 선교사들도 함께 피해를 당하게 된다.

 

7. 자기애가 강한 사람

과거에 상처가 많았던 선교사는 자기애가 강할 가능성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 과거에 지나치게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만 자랐던 사람도 자기애가 강할 가능성이 놓다. 자기애가 강한 선교사는 기독교의 기본 정신을 갖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의 기본 정신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첫 번째 계명이다. 자기애가 강한 선교사는 기독교의 기본 정신인 사랑을 나누어줄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더라도 기쁜 마음이 아니고 의무적으로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 상태에서 나누어주는 복음이나 물질이나 헌신은 소리만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선교지에서는 정말 저런 사람이 선교사일까,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선교사가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선교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선교지 현지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 필자가 B 선교사에게 물었다. “이 선교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까?” B 선교사가 대답하기를 사랑하기는커녕 점점 더 미워집니다.”라고 하였다. B 선교사는 자기애가 강한 선교사였다. 이 선교사는 아내나 자녀에게도 배려하는 마음이 적었다. 현지인들을 미워하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선교사 후배들에게 조언하기를 가장 큰 사역은 현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라고 권면한다. 현지인을 사랑할 수 없다면 보이는 선교사역이 아무리 위대해보여도 실패한 선교사라 할 수 있다. 선교사가 자기애가 너무 강하면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깝다. 자기 것은 잘 챙기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그들의 모습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선교사는 선교 보고를 할 때도 자신이 고생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불쌍해 보여 후원금을 더 모금하고자 하는지는 모르지만 고생 이야기를 많이 하는 선교사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다. 선교사 중에 누가 고생과 배신과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 선교사가 있겠는가! 고생 이야기 많이 하는 것과 자기애는 정비례하는 것 같다. 자기애가 많을수록 고생했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런 사람은 선교사가 되지 말아야 한다. 선교는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고생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선교사가 자기애가 적은 선교사다. 선교를 기쁨으로 여기고 감사하게 감당하는 사람이 좋은 자질을 가진 선교사라고 말 할 수 있다.

 

8.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특별히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어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필자는 형제만 오형제인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를 빼고 모두가 남자이다 보니 여성과의 관계를 가져본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러기에 여성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고 어떻게 여성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다. 어렸을 때 권위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권위를 두려워하고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원만한 가정을 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선교는 일이 아니라 관계이다. 필자는 선교 본부에서 행정 일을 한 경험이 있다. 본부 행정 일을 하면서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정 자체가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어떤 조직도 마찬가지겠지만 선교행정은 인간관계의 사역이었다.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 행정을 잘하는 것이었다. 계획과 조직과 재정 등의 행정적인 일을 아무리 잘해도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그 행정은 별 소용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교지에서도 선교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선교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삶이 따라주지 않는 복음 전파는 쉽게 무너진다. 선교지에 큰 프로젝트를 하여 많은 일들을 하고, 구제를 하고, 병자들을 낫게 하고, 지역 개발을 하고, 교회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좋은 인간관계가 결여된 사역들은 헛된 것들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선교사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해 사람을 중요시 여길 수 없는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9. 권력 욕심이 있는 사람

선교사가 무슨 권력욕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교사의 권력욕은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영역이다. 오히려 권력욕이 큰 선교사를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선교사가 가진 것들을 다 포기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선교사는 선교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선교사는 선교를 위해 가족과 친척과 고국을 포기한 사람이다. 선교사는 돈을 모으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다. 선교사는 세상의 욕심들을 포기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들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채우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생명력이다.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위로하심을 순간마다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뜨겁고 복음의 감격으로 비어있는 곳을 채우는 것이다. 십자가 이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했던 바울처럼 십자가의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차야 한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사랑이 식어질 때가 있다. 풍성한 복음의 능력이 선교사의 삶과 마음속에 계속 유지되지 못할 때가 있다. 선교지의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보니 무언가 허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에 복음의 능력으로 자신을 채워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 과거에 포기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권력에 대한 욕심이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자신 속에 복음 대신에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제어할 영적인 힘이 없을 때 세상 사람들보다 더한 권력욕심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권력욕은 팀 사역을 방해한다. 권력욕은 선교 사역을 방해한다. 권력욕은 선교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한다. 무엇보다 권력욕은 선교사 자신을 파괴한다. 선교사의 바른 정체감과 자존감을 갖지 못하게 한다. 권력욕은 선교사의 자존감을 내면에서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요소로 찾게 한다. 자신 속에서 정체감을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해 정체감을 찾게 한다. 선교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권력욕인데, 결국은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늘 주의해야 한다.

10. 돈과 이성에 약한 사람

선교지에서 돈과 이성에 약한 선교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선교사가 돈과 이성으로 범죄하게 되면 선교사 자신은 물론이고 그 결과가 복음에 크나큰 방해가 된다. 이런 선교사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차라리 선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최소한의 상처는 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복음의 방해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위에서 돈으로 인해 파송교회와 관계가 끊어지고 교회를 선교에서 돌아서게 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이런 선교사들로 인해 교회들이 선교를 중단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이성적인 문제로 선교사를 사임하는 선교사들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이성적인 문제로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있다. 남편 선교사의 이성적인 문제로 가슴앓이를 하고 사는 부인 선교사들의 아픔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선교사는 지도자이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선교사 한 사람이 무너졌을 때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 그래서 돈과 이성에 약한 사람은 선교사가 되는 것을 처음부터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범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전부터 이 부분에서 약한 것을 고치지 못해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다. 선교단체는 이런 부분에서 철저하게 검증을 해서 선교사를 선발해야 한다.

 

11. 결론

완벽한 선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선교사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다만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은 선교사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이 선교사가 되었을 때 그 문제가 선교지에서 또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경험한 이상은 할 수 없다는 말은 부정적인 요인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나쁜 성향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고 선교지에서는 그 확률이 더 크게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선교지의 상황이 어렵고 선교사역이 힘들고 영적전투의 장에서 영적 싸움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선교사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는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선교사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은 선교 단체와 선교지 현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검증을 통해 탈락되는 선교사 자신에게도 결과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누구나 무조건 선교사로 가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고 꼭 필요한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IV. 잘못된 선교의 동기들

 

오래 전에 선교 본부 사무실에서 일할 때였다. 사무실 간사들과 선교사들이 함께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그 중에 한 간사가 소풍을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개인적인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그 개인적인 사정은 겉으로 보기에 충분히 소풍을 가지 않아도 될 수 있는 사정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풍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갈 수도 있는 사정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간사에게 소풍을 가지 않는 사정은 알겠는데, 가지 않으려는 의도는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 때 당시에 이 간사는 다른 간사와의 문제가 있어 함께 가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과 의도는 다르다. 아무리 상황이 안 되어도 마음의 의도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겉으로의 상황은 잘 진행된다 하더라도 내면의 마음은 그 상황에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겉으로 보이는 현상보다도 그 속에 감추어진 의도가 더 중요하다. 선교도 마찬가지다. 선교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도를 가지고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선교라는 똑같은 일을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선교에 동참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선교에 참여할 때 바른 의도, 바른 동기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동기가 잘못되었다면 그 선교의 행위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동기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마음에 많은 부담이 있다. 첫 번째는 선교사 혹은 교회 목회자가 선교를 하면서 잘못된 동기를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그 자신만이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겉모습만을 보고 잘못된 동기를 가졌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잘못된 동기를 가진 예들을 제시하다 보면 그런 예들로 인해 전체가 그런 것처럼 오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으로 인해 전체 선교사와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들을 오해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런 케이스를 접하는 독자들은 선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이해 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안 되는 작업을 해야 하는가 하는 마음의 고민이 있다. 세 번째는 불순한 동기들을 말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은 의롭다는 전제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나를 의롭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범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선교 동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여 잘못된 동기에 따라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케이스를 예로 든다. 똑같은 케이스는 없지만 단 하나의 케이스라도 다른 사람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문제의 케이스를 사용한다. 다양한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다양한 경우들을 정리하여 치료의 도움을 주고받는다. 정신에 이상이 있는 환자들이 한국 전체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많지 않을지라도 단 하나의 케이스가 정신질환자를 고치는데 도움이 되고 그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는 전체 사회를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잘 못된 행동을 할 때는 많은 사람들 혹은 그 사회나 나라 전체를 혼란과 어려움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신과 의사의 심정으로 마음은 아프지만 이 장에서 선교의 부정적인 예들을 다루고자 한다. 부정적인 예들로 인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선교의 잘못된 부분을 외과 의사가 환부를 드러내어 치유하는 심정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1. 파송 교회

필자가 한국에서 선교 본부 사역을 할 때 구미시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선교지에서의 교회개척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이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받고자 필자를 초청하였다. 필자를 강사로 교회에 소개한 전도사가 그 교회에서 선교하고자 하는 동기를 이야기 해 주었다. 그것은 숨겨진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동기는 그 교회에서 몇 년 동안 한국 시골에 지 교회를 세워 자립하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교회가 자립을 하고 나니 모교회로서는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그리고 지 교회가 모 교회의 수고를 별로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이제는 한국에서 교회 개척하는 것 보다는 생색을 낼 수 있는 해외에 선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 동기는 선교지에 선교 센터를 짓겠다는 것이다. 선교 센터와 함께 교회에서 전적으로 지원하는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한 것이다. 이 선교사를 보내 선교 센터를 지어 관리하게 하면서 교인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통로로 삼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교를 한다는 명분으로 선교 센터를 짓고 그곳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교인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낸다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한국 선교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다행이도 필자는 강의를 하기 전에 이 내용을 들을 수 있어서 강의 시간에 교회 개척에 대한 내용에 앞서 바른 선교의 동기에 대해 다룰 수 있었다.

한 선교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대전의 모 교회에서 지금부터 몇 년 전에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웠다. 신학교 건물을 짓고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사는 현지인 교수를 모집하여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파송 교회에서는 이 선교지에 전세기를 빌려 300명 이상의 교인들을 단기 선교로 보냈다. 신학교 운영비로 매월 천만 원 가량의 돈이 사용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워 현지인 목회자를 양성하는 사역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아주 귀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신학교 문을 닫는 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철수시키고 건물은 매각하고 신학생들은 재학 증명서 하나 떼어 주기로 하고 학교 운영을 중단한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겼다. 신학교 현지인 교수들은 당장 일자리를 잃어 버렸다. 신학생들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신학교 교수들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일어나서는 안 될 엄청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파장은 그 선교지역 모든 한국 선교사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현지 교회들은 한국 교회의 선교사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한 이면에는 그 교회가 처음부터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교인 자녀들을 유학을 보내고자 했던 숨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선교지는 마침 영어를 사용하는 영어권 지역이었다. 신학교 부지 안에 따로 숙소를 만들어 놓고 담임 목사 자녀와 교회 중직자 자녀들을 유학 보낸 것이다. 담임 목사 자녀는 이곳에서 영어연수를 하고 선교 현지에서 대학까지 다니다가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교인들의 자녀들은 언어 연수로 와서 공부를 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파송 받은 선교사가 교인들의 자녀들을 엄격하게 다룬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선교사는 군인 출신으로 평신도 선교사였다. 군인 출신이었기에 엄격하게 다루다 보니 유학 온 학생들은 견디어 내기 힘들었다. 교인 자녀들이 힘들다고 하니 교회에서는 더 이상 신학교를 운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학교의 문을 닫았던 것이다. 선교지에 신학교를 세우고 운영할 선교사는 최소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군인 출신 평신도를 보낸 것은 처음부터 불순한 선교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동기를 가진 선교사들이 어찌 이 교회 한 교회이겠는가? 많은 교회들이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선교를 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교회 목사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선교를 이용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교단 총회에서도 정치적인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부서가 선교부이다. 교단이 클수록 정치적인 세력들은 교단 선교부에 많이 진출한다. 교단 선교부에는 다른 부서보다 선교부가 재정과 선교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 부여되기에 정치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이런 불순한 동기들은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불순한 동기를 가진 본인은 물론이고 선교사, 현지인,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선교()에서 철수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교회 선교가 바로 설 수 있다.

Y 교회는 한 선교지에 일반 전문대학을 세웠다. 교회에서 전액을 송금하여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현지 교수들에게 월급을 주어 학교를 시작하였다. 중간에서 이를 대신하는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여 현지에서 모든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학교 개원식에는 한국에서 담임 목사와 교인들이 와서 성대한 행사를 치렀다. 행사의 진행은 한국에서 온 교회 직분자들과 선교사들이 거의 다 하였다. 선교지 현지인들은 들러리로 몇 명 세워졌을 뿐이다. 한국에서 온 목사는 선교지의 가난과 어두움을 깨우치기 위해 학교를 세웠노라고 하였다. 한국도 이전에는 어려웠지만 이런 학교를 통해 발전이 되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한국인 사회자는 현지인들에게 광고하기를 행사가 끝나면 여러분들은 한국식 뷰폐 음식을 먹을 것이니 기대하라고 하였다.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 의심이 가는 그런 프로젝트였다. 선교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하듯 무엇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는 일방적으로 주고 현지인들은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선교가 아니다. 선교지에서 원래 주인은 현지인이고 선교사는 협력자일 뿐이다. 현지인들이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를 하되 한국 교회와 선교사는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협력하는 것일 뿐이다. Y 교회의 경우는 식민주의적인 동기가 있었다. 선교지를 지배하려는 생각이 있고 문명으로 혜택을 준다는 문화적 동기가 있었다. 복음을 순수하게 전한다는 마음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자신들이 도와주기 때문에 선교지 사람들은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Y 교회 뿐 아니라 선교지에 큰 프로젝트를 하는 많은 교회에서는 이런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이다. 자기를 들어내고자 하는 것부터 동기가 잘못된 선교다. 이처럼 현지에 자기 이름과 공적을 세우려는 모든 시도는 빨리 버려야 할 한국인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 땅에서 자기 이름이 높임을 받으면 이미 하늘나라에서는 상급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이 땅에서 많은 선한 일을 하였어도 동기가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

교회와 담임 목사들 중에는 선교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이정도 선교에 참여하기에 하나님이 교회 성장을 이루어주셔야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에게도 우리 교회가 선교를 잘 하기에 좋은 교회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선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교회의 문제를 잠재우기 위해 시선을 선교에 두도록 선교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교회를 자랑하거나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들이 교회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 중에 선교사 파송이기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다. 어떤 교단의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 할 때 매월 선교사 전체 생활비의 50~60%만 지원하면 주파송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교단 선교부의 규칙에 따라 매월 지원만 해주고 선교사의 다른 필요들은 선교사가 알아서 하도록 하였다. 어찌 선교사가 생활비만 가지고 선교할 수 있는가? 현지 정착비, 여행비, 사역비, 자녀 교육비, 보험료, 위기관리 비용 등 많은 재정이 든다. 이런 현실적인 필요들은 외면한 채 파송교회에서는 생활비의 일부만을 지원하면서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자랑한다.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가 늘어가는 것은 좋지만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파송할 때 결국은 그 피해는 파송 선교사가 받게 된다. 파송 선교사뿐만 아니라 전체 선교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결국 이것은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방해하는 행위가 된다. 이런 불순한 동기로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들은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바른 선교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교회도 결국은 손해를 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 선교의 바른 동기를 가져야 한다.

2. 자녀 교육

한국 사람들은 유독 자녀 교육에 민감하고 열심이다. 한국은 자녀 교육이라면 부부가 헤어져서라도 유학을 보내는 그런 대단한 결단(?)들을 하는 자녀 교육 지상주의의 나라다. 이런 현상이 선교 현장에도 들어왔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선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파송 교회의 예에서도 보았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선교사 개개인도 선교사가 된 동기가 자녀 교육 때문인 경우도 있다.

M 선교사는 평신도 선교사다. 한국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선교지에 단기 선교 팀으로 가게 되었다. 단기선교 봉사 중에 그 선교지가 마음에 들었다.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했다. 기도해보니 하나님이 이 지역에 자신들을 선교사로 부르셨다고 하였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선교훈련도 필요하고 전문인 선교사라면 선교지에서 일할 분명한 전공이 있어야 하기에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도 물리치고 먼저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선교지로 갔다. 자녀들을 선교사 자녀학교에 보내려니 선교사 파송 증명서가 없었다. 일단 현지인 학교에 2년 동안 보내다가 출석하던 교회 목사에게 파송장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그 파송장을 가지고 가서 선교사 자녀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나중에 남편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일반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부인 선교사는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분주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 선교 사역은 할 마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해서 주위의 여러 선교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본인들의 내면 이야기를 정확하게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선교 동기를 의심해 볼만한 경우이다.

J 목사는 선교사로 선교지에 간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목회에 문제가 생겨 잠시 선교지에 휴식 겸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갔다. 문제는 자녀였다. 두 자녀를 선교지에 데리고 가서 선교사 자녀학교에 보냈다. 부인은 한국에서 사업을 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 보내고 목사인 남편이 두 자녀를 선교지에서 양육하였다. 선교사 자녀 학교는 일반인의 자녀일 경우에 100%의 학비를 받지만 선교사 자녀일 경우는 25% 정도만 받는다. J 목사에게는 마침 아는 선교사가 친구이고 같은 교단 목회자였기에 추천을 받아 자녀를 선교사 자녀로 등록을 시켜 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선교를 자녀 교육을 위해 이용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또 다른 P 씨도 비슷한 경우이다. P 씨는 사업차 선교지에 가서 사는 평범한 이민 가정이다. 교회도 잘 다니지 않는다. 선교지에 선교사 자녀 학교는 국제학교로서 영어로 교육을 하고 좋은 교사들과 시스템이 있어서 누구나 선호하는 학교이다. P 씨도 이 사실을 알고 현지 교회에 찾아가 돈을 주면서 현지 교회에서 일하는 사역자라고 증명서를 작성하여 자녀를 선교사 자녀학교에 보냈다. 이런 케이스는 분명히 드러난 자녀 교육을 위해 선교를 이용한 경우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녀 교육 때문에 선교사가 된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 교육을 통해 선교사로 부르실 수도 있다. 그것이 잘못된 동기에서 출발하였을지라도 결국 선교사로 헌신하여 열심히 사역을 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자녀교육을 위해 선교를 사용하는 불순한 동기를 가려내야 한다. 불순한 동기를 가려내지 않으면 한국 교회 선교는 혼동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몇 명의 불순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 인해 많은 선량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3. 선교사 후보생

선교사가 되기를 지원하는 일부 선교 후보생들도 선교의 동기가 다른데 있는 것을 본다. 한국에서는 목회 자리가 없기에 선교사가 되겠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아는 한 목사가 있는데 몇 년 동안 조그만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런데 교회는 성장이 안 되고 교인들과의 사이도 안 좋고 해서 다른 교회로 옮기려고 하였다. 많은 곳에 이력서를 내고 새로운 교회를 찾아보아도 담임 목사로 불러주는 교회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사임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새롭게 일할 교회가 없으니 답답하였다. 마침 C국의 한 선교사가 그를 선교사로 나오도록 격려하였다. 그 목사의 나이가 50세인데 갈 곳이 없으니 선교사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런 동기로 선교사로 나가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조언을 하였다. 결국은 선교사로 나갔다. 이런 경우는 한국에서 해야 할 사역이 없으니 선교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요즈음 선교사 중에 한국에서 사역할 자리가 없어서 선교사가 된 케이스를 종종 볼 수 있다.

한국의 한 교단은 목사 안수를 받는 통로로 선교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교단은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개척교회를 몇 년 동안 하던지 더 많은 기간 동안 부교역자로 사역을 해야 한다. 선교사로 나갈 경우는 기간을 앞당겨 안수를 받을 수 있다. 이왕 한국에서 개척 교회를 하는 기간이면 빨리 안수를 받고 선교지에서 타문화권 사역을 경험하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목회를 할 수 있기에 선교사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선교사 후보생들의 잘못된 동기의 대표적인 예다. 이 교단은 교세에 비해 다른 교단 보다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교단 정서는 선교는 목사가 되는 한 과정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 교단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나간 선교사들이 선교에 전력을 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오히려 선교지에서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다른 선교사들 간에도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선교사 후보생 중에는 가족과의 불화 때문에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외국 생활을 동경해서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선교의 동기에서 가장 위험한 경우는 자기 자신도 선교의 동기가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다. 의도를 숨기는 사람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지만 자기 스스로 선교의 동기를 모르는 사람은 고칠 방법이 없다. 이런 사람은 선교지에서 가장 힘든 경우가 된다. 자기 스스로 선교의 동기를 모르는 선교사를 가려내는 것이 선교부에서 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이며,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다. 선교사 한 사람을 잘 못 선택하게 되면 선교부는 다른 선교사 관리의 몇 십 배의 노력과 시간과 정력을 그 한 사람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자신의 미래 인생을 위해 선교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될 경우는 자신도 한국 교회도 하나님 나라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 있는 교회나 교단, 선교사가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교의 동기를 바르게 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를 이용할 때 단기적으로는 자신에게 이익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일 수 있다. 선교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B 씨는 선교사 지망생이었다. 그는 직장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모든 일에 열심이었고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였다. 선교사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특별한 전문성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선교사가 되려는 것을 만류하였다. 바른 선교의 동기를 가지고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을 하였다. 다행이 지금은 한국에서 목회의 길을 가고 있다. 한국에서 할 일이 없어서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선교지에서도 할 일이 없다. 오히려 한국에서도 할 일이 많지만 주님의 사명에 의해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선교지에서 일을 하다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언제든지 일 할 수 있는 탁월함이 선교사에게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수준이 낮아졌다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목회자의 수준이 낮아졌기에 교회의 수준이 낮아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선교의 수준을 자꾸 낮추면 안 된다. 물론 인간적으로 어떤 자질이 있어야 꼭 선교사가 될 수 있다는 특별한 조건은 없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이고도 상식적인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는 기본이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선교를 너무 쉽게 생각하여 생긴 결과다. 선교지마다 문제의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선교사들 간에 협력은커녕 서로 싸우는 일들이 많아졌다. 서로 싸우게 된 원인을 따져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운다.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수준만 되면 문제 될 것이 없는 싸움들이 선교지에서는 일어난다. 그런 예들을 나열하기가 부끄럽다. 너무 많은 예들이 있고 너무 상식 이하의 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외국에 이민을 간 한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에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불륜의 문제를 일으켰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초창기 남미 이민자들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물론 지금은 더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해 도전 정신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데 선교는 이와 반대로 되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전 우리 선배 선교사들은 탁월한 영성과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뛰어난 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선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반대로 오늘날은 한국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선교사로 나가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

G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교사가 되었다고 하면 친구들이 선교를 우습게 여길 거예요. 나는 선교사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예요그런데 왜 선교사가 되었는가? 자녀가 한국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기에 선교지로 피해 갔다. 이들이 선교지에 가서 선교를 잘하면 문제가 없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전의 습관대로 살다 보니 선교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된다. 그래서 선교지의 물을 흐리고 있다. 물론 자질이 좋은 선교사들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지 어디를 가도 이런 문제가 있는 선교사들이 전체 선교를 흐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한국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살 수 없는 사람,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 한국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선교사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가졌던 문제들을 선교지에서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더 크게 확대되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선교의 동기를 확인해야 한다. 순수한 동기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4. 선교사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선교지에 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도 잘못된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많다. 선교의 순수한 동기를 선교지에서 회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Y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두 텀 째 사역을 하고 있다. 전문인 선교사로 선교지에 가서 목회자 선교사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Y 선교사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게임을 해야만 하는 중독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부인 선교사가 알아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부인 선교사 자신이 한국에 돌어가 살기 싫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면 자녀 교육의 좋은 기회를 잃어버릴 것 같고 시댁 부모와의 관계가 힘들어 감당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Y 선교사의 경우는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다. 컴퓨터 게임에 빠졌으니 무슨 사역을 할 수 있겠는가? 정상적인 사역이 힘들다. 이런 경우에는 과감히 청산하고 한국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선교지 사람들에게도 유익이요, 자신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잘못된 동기로 선교지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를 낳는다.

선교지에서 문제가 있는 선교사는 한국에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한국으로 철수하는 것이 좋다. Y선교사의 경우처럼 한국으로 분명히 돌아가야 하는데도 돌아가지 못하는 선교사들은 선교의 잘못된 동기를 계속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W 선교사는 스스로가 비즈니스 선교사라고 자칭하는 선교사다. W 선교사가 사역하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로서 직접적인 전도를 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이 나라에 사역하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비즈니스를 한다. W 선교사는 골프에 중독이 되어 있다. 주변국들을 돌아다니면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가는 나라마다 도착하면 바로 골프장부터 간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골프를 쳐야 하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아내와의 관계에 있다. 아내 선교사는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힘겹게 살고 있다. 아내가 힘들어 비즈니스가 아니라도 충분히 다른 사역을 할 수 있기에 여행을 그만하고 함께 살자고 하여도 W 선교사는 듣지 않는다. 그래서 부인 선교사는 지쳐서 포기하고 산다. W 선교사에게는 엄격하게 따지면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골프를 치는 것이 아니라 골프를 치기 위해서 비즈니스를 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가정을 위해 비즈니스 사역을 포기해야 하지만 골프 때문에 포기하지 못한다. 가정이 잘못되어 가는데도 계속해서 놓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중독이다. 어떤 것에로의 중독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파괴한다. 자신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역을 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가 하는 것 중에 꼭 포기해야 할 것이 있는데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선교사로서 잘못된 동기를 계속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그런데 고치지 못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K 선교사는 정신 건강 문제로 선교지에 갔다. 선교지에는 K 선교사처럼 신체와 정신 건강에 문제를 가지고 간 선교사들이 있다. 선교지에는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우울증은 선교지에서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한국보다 사는 환경이 더 열악하기에 그렇다. 반대로 한국 보다는 스트레스가 적어 오히려 좋아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울증으로 선교지에 온 선교사들이 만약 우울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교지에 왔다면 잘못된 동기다. 동기가 잘못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에서 책임감 있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러나 건강 문제를 안고 선교지에 온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사역을 열심히 할 수가 없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선교사가 어떻게 건강한 선교를 할 수 있겠는가?

S 선교사는 오랫동안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후원금이 부족하여 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선교를 포기하였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선교사의 직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선교를 계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비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다. 선교를 자신의 생활을 위해 사용하는 잘못된 동기를 가진 경우이다.

B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사업을 한다. 한국에서 오는 많은 투자자들을 유치하여 사업 안내를 하기도 한다. 사업자들과 공동으로 투자하여 언어 학원도 하고 국제학교도 한다. 여기저기에 사논 땅이 많다. 집을 지어 살다가 팔기도 하고 폐허 같은 땅을 사서 토목 개발을 하여 몇 배의 이익을 남기고 팔기도 하였다. 단 한두 건의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업가보다도 더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교사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이런 선교사는 상업적인 동기를 가지고 선교하는 경우이다. 선교가 제자훈련이고 교회를 세워 목양하는 것이라면 이 선교사는 사업가이지 선교사가 아니다. 다른 불순한 동기보다도 돈으로 선교하겠다는 것과 돈을 벌어보겠다는 잘못된 동기를 가진 선교사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선교사들은 비즈니스 선교(BAM)이라는 명목으로 선전을 한다. 오히려 BAM 선교의 귀한 모델로 사용되고 있다.

선교사들은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선교사들이 되어야 한다. 돈으로 선교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다. 선교는 마음과 선한 뜻으로 하는 것이다. 물질로 선교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선교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6개월에서 3년 정도의 단기 선교를 하는 단기 선교사들에게 많이 나타나고 있는 잘못된 동기는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동기이다. 어차피 언어 연수를 1~2년 동안 할 거라면 선교지에 가서 사역도 하고 언어 공부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단기 선교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선교부에서 철저하게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 피신해 가는 선교사들도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선교사들이다. 그런 결과로 선교사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선교지에는 있어서는 안 될 선교사들이 있다. 가지 말아야 할 선교사가 있다. 다시 돌아가야 할 선교사가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동기가 있었더라고 하더라도 그런 마음들을 접어 두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순수한 동기를 회복하여 사역한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런 선교사들이 많아 졌으면 한다. 그래야 한국 선교가 쇠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선교사라는 명칭을 아무에게나 사용하는 것도 선교에 대한 잘못된 동기가 있어서다. 한국이나 세계 곳곳에 자칭 선교사가 많다. 파송 교회도, 파송 기관도, 파송 예배도, 후원도, 사역도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교사라고 말한다. 선교지에서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명칭이 없으면 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인다. 목사는 신학을 하고 안수를 받아야 하기에 목사라는 직책을 쉽게 붙일 수가 없다. 전도사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교회 안에서 조력자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다. 사역자라고 하기에는 명칭에서 공적인 인정을 받기 힘들다. 가장 쉬운 직함이 선교사이다. 선교사는 사역자로서 필요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고 공식적인 출처를 밝힐 필요도 없다. 선교사라는 이름의 이미지가 주는 명예가 있기에 선교사라는 단어를 쓰기를 선호한다. 교회 안에서도 부서 이름을 정할 때 전도회 보다는 선교회로 이름을 붙인다. 이런 것은 선교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요, 선교를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교는 아무나,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부르시고 적절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선교지에서도 복음의 효과가 나타난다.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선교가 아무렇게나 쓰이고 사람들의 개인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잘못된 동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 선교가 제자리를 찾는 길이다. 지금 한국 선교는 제자리를 찾을 때이다. 바른 동기와 바른 철학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매진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 선교의 순수한 동기를 회복해야 한다.

 

 

V. 선한 동기의 필요성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가 순수한 동기를 갖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 자체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좋지 않은 의도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고 그것이 드러날 때는 교회 내부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동기가 잘못되면 결과도 잘 못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는 누군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은 바로 교회 지도자들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욕심이나 유익을 위한 잘못된 동기를 가졌을 때는 나중에 모든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교회의 잘못된 동기는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 교회 선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그것을 직접 진행하는 선교사는 잘못된 일을 위해 그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교사가 잘못된 동기로 선교사가 되었다면 스스로의 인생이 불쌍한 인생이 된다. 순수한 동기가 없을 때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리 없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고, 순수한 동기 가운데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그 선교를 축복해주신다.

잘못된 동기는 선교 현지인들에게 손해를 보게 한다. 잘못된 동기를 가진 선교사나 교회로 인해 현지인들은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때 결국은 현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요, 이는 잘못된 선교사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가 되는 것이다.

불순한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더디게 된다. 하나님의 선교에 타격을 입게 된다. 한국 교회 선교에도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한국 교회 선교의 수준이 계속 낮아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불순한 동기는 잘못된 결과를 낳고 선한 동기는 아름다운 결과를 낳는 것은 진리이다. 그래서 선한 동기로 선교를 시작해야 한다.

 

 

VI. 선교의 순수한 동기

(크레익 오트 외 공저, <선교신학> 요약정리)

이 장에서는 선교의 순수한 동기, 바른 동기를 살펴본다.

 

1.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선교의 순수한 동기는 주님의 지상 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의 대 위임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필수적인 일이다. 주님의 명령 앞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번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자신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21:16)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정말 넘쳐 난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사랑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선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심판과 지옥은 존재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의 진실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매일 구할 것이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고 나타내도록 선교에 동참할 것이다.

선교를 통해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나 자신을 못 박고 주님만 드러내기 위한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내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선교지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선교사가 되어서도 선교지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는 선교사가 있다면 선교의 순수한 동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의 공적과 이름과 사역을 드러내기 이전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내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국이 확장되기를 원하는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내 교단, 내 교회, 내 나라의 이름과 문화를 드러내기 전에 복음을 드러내는 것이 순수한 동기이다. 선교사들 중에는 선교지에 까지 가서 자기 고향 사람 찾고, 교단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목사라는 타이틀을 초월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선교에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민족, 혈연, 지연, 학연, 교단을 초월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속한 왕국을 초월할 줄 아는 것이 바른 동기다. 오직 주님과 선교지 사람들을 존중하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선교지 사람들이 잘되도록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그런 순수한 동기를 회복하는 길이 한국 선교가 사는 길이라고 믿는다.

 

2. 긍휼과 인간의 필요(Compassion and Human Need).

긍휼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3:16) 하나님의 성품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9:35-36).

예수님은 사람들의 육신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 모두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계셨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받은 고난과 박해가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것’(고후 6:6)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1:16) 그리스도를 전파할 것을 간청했다. 요나 선지자는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백성들을 향한 긍휼이 없는 것에 대해 책망을 받았다(4).

신자들의 삶 속에 베푸시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5:5, 5:22).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동기가 되었던 긍휼을 선교의 동기로 품어야 한다. 이 긍휼에는 신체적, 사회적, 혹은 감정적 곤경에 처한 상태를 말하는 일시적인 차원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직면해서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실을 의미하는 영원한 차원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이 동기는 선교역사 전체를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Erasmus)는 선교의 과업이 문명화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나중에는 사탄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게 된 영혼과 구속자의 승리를 보는 순수한 소망이라는 글을 남겼다. 17세기의 네덜란드 개혁파들은 이교도들이 처한 일시적이고 영원한 운명에 대한 긍휼을 선교의 동기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했다. 18세기 제2의 종교개혁 당시 루터파와 칼빈파는 구원론 보다는 오히려 '연민과 긍휼이 선교 사역을 추진하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존 엘리어트(John Elliot)17세기와 18세기의 경건주의자들과 같은 초기 청교도 선교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긍휼과 죄를 멸하는 은혜의 능력을 증거 하는 기쁨이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조지 휫필드(Geroge Whitefield)와는 달리 지옥과 심판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영혼구원은 절대적인 핵심이었다.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멀어진 불신자의 종말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1803년에 개최된 미국의 장로교 총회에서 어느 끔찍한 사형 선고를 받은 이교도들이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지기 직전에 절망의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왜 이 날을 나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때 당신의 마음은 찢어질 것이다라고 설교했다. 설교들과 홍보용 문서들은 그리스도가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긴박성에 대해 강조했다.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분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를 제시하기도 했다.

빚짐(debt)의 동기도 긍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판 덴 베르크는 복음주의 진영에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소리가 들려 왔고 이 소리는 악으로 물든 다른 인종들의 회복을 위해 그들을 생명과 평화의 근원과의 만남으로 인도하도록 힘쓰는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권력에 힘입어 악을 물리치기 위해 인도와 아프리카로 갔던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열거했다. “빚진 자의 갈급한 심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연민의 비통함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동기가 되기 시작했고,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사명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19세기 말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멀어져 영원히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많은 선교 단체들의 긍휼이 삶의 질, 무지, 그리고 또 다른 일시적인 필요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 갔다. 반면에, 복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운명과 그들이 처하게 될 영원한 결말에 대한 긍휼을 강조했다. 존 파이프(John Piper)는 이 관점을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요약했다. “만약 사람들이 영원한 삶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그리고 만약 예수가 그들의 영원한 삶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고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를 누릴 수 있다면 사랑은 강력하게 선교를 요청한다”. 그는 계속해서 모든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가장 부자에 이르기까지, 가장 아픈 사람으로부터 가장 건강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다. 우리의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어떻게 구출해 낼 것인가? 사랑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사람을 구해내는 행동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긍휼의 동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 계획, 혹은 사랑보다는 인간의 필요를 강조하여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 동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선교의 동기가 너무 배타적으로 긍휼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선교가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동기는 긍휼의 동기를 보완하고 균형을 잡게 해 준다.

 

3.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를 불신자에게 전해야 한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자비로운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랑이 그를 강권하여 이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선교의 동기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는 미국해외선교부 연합위원회의 S. L. 포메로이(Pomeroy)가 언급한 바 있는데, 그는 1853년에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로부터 발산되는 빛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책임 있는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 영혼이 회생되었을 때 느끼는 첫 감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인데 이는 종종 그 자신의 해방으로부터 오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 단순한 열정이 복음을 로마를 거쳐 마침내 온 세상에 이르기까지 전파하는 역동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열정은 결코 어떤 다른 동기들을 무력화하거나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킬 뿐 아니라 현세의 필요를 위해서든, 영혼을 위해서든 연민의 모든 화음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동기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이 사랑은 대다수의 다른 종교들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인도의 작가와 선교사인 비샬 망가와디(Vishal Mangalwadi)는 힌두교인들의 자발적 봉사 정신과 희생적 섬김의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은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모든 서구 자발적 봉사 정신의 뿌리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바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자발적 봉사 정신의 가장 영웅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하나님의 부르심 또는 내적 강권(Divine calling or Inner Compulsion)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초자연적인 인도, 혹은 단순한 내적 강권 등은 오랜 동안 선교의 강력한 동기가 되어 왔다. 이러한 동기들은 초자연적인 환상, 연민의 감정, 그리스도의 사랑, 혹은 다른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무거운 부담감이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견딜 수 없거나 저항할 수 없는 부르심 등을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 동기는 단순히 선교의 필요나 의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각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명확한 뜻과 직접 연관되어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다. 사도 바울이 성경의 모델로 자주 인용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개종했을 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부르심은 후에 성령께서 안디옥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통해 확증해 주셨다 (13:1-3). 바울의 마게도니아 환상도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16:9).

바울의 선교 사명은 단순한 순종이 아닌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분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라고 고백했고, 동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을 때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말한 바 있다(9:2).

선교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있어서도 부르심, 혹은 내적 강권도 그들의 선교에 대한 동기에 있어서 적어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5세기 초에 아일랜드에서 사역한 패트릭 선교사는 나는 서해 인근의 포클럿(Foclut) 숲 근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소년이여,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와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는 인도 서부 지역을 여행하고 1814년에 인도에서 사망한 감리교 선교의 아버지토마스 콕(1747-1814)하나님께서 나에게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했다.

오스왈드 J. 스미스 (Oswald J. Smith)는 개인적인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선교사로 중국에 갔던 찰스 스터드(Charles T. Studd)의 예를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은 도전의 질문을 던졌다. “당신도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도 이와 같은 긴박성을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고 있습니까? 당신이 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밤이든 낮이든 편히 쉴 수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확신과 내적 충동은 종종 선교활동에 대한 동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이 같은 동기는 최근까지도 복음주의 진영에서 선교의 핵심적인 동기로 간주했다. 전통적으로, 선교 단체들은 선교사 지원자들에게 자신의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대해 진술할 것을 요청해 왔다. 선교 단체가 어느 특정한 형태의 부르심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 지원자가 부르심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면 선교사로서의 허입을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대한 극단적이고 낭만적인 이해는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결정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적절한 동기를 갖고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많은 사람들도 하늘로부터 번개가 치는 듯한 극적인 부르심의 경험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이유로 망설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미 선교사가 되었던 사람들도 죽음이나 은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선교지를 떠나 본국에 돌아 온 경우에 실패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이나 부르심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 등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선교 단체들이 선교사 지원자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영적 은사, 봉사 경력, 인격적 성향, 감정적 안정성, 팀 사역 정신 등 다양한 영역들을 검증하고 있다. 이러한 검증 절차들이 적절하게 사용될 때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많은 교회 신자들이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현대적 형태의 성인 열전(hagiography)이나 감상적인 영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활동을 단순한 자원봉사 정신(volunteerism) 정도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는 오늘날의 경향에 대해 질문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 다른 수많은 동기로 단기 선교 여행과 심지어 장기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가 많이 있지는 않는가? 선교와 관련하여 신실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거나 깊은 헌신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조차도 사용하셔서 그의 종들을 선교를 위해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실업, 자아실현, 지루함, 혹은 모험 등의 동기를 성령의 역사에 의한 내적 충동이나 하나님의 부르심 보다 더 나은 대체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을 위한 타문화 사역자로 선택하시고, 준비시키신다. 선교사로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낭만적 동기와 이상주의와 극적인 체험 등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는 결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인도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Doxology: To the Glory of God) 선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교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복음이 모든 열방 가운데 증거되어 그들이 기쁨으로 왕께 경배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 목적은 결과적으로 선교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있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존귀한 위치로 높이신 것이 모든 선교의 동기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몸소 종으로 오셔서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셨다”(15:9). 바울은 바로 몇 절 뒤에 이방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기록했다(15:16).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당부했다(고전 10:31). 그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다(고후 4:15). 그는 자신의 동료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묘사했다(고후 8:23).

하나님의 영광은 중세 시대의 초기부터 베네딕토 수도원의 생활, 봉사, 그리스도 선교 등을 이끌었던 성 베네딕토 규칙서(The Rule of St.Benedict)’의 핵심 원리였다. 신본주의적 동기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동기가 청교도들과 초기 미국 선교 지도자들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광은 [미국] 국가 형성기에 가장 큰 선교 동기였다. 구속사역을 공유하는 교회의 기회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는 일찍이 선교 사역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흥미로운 개념이었다. 이 동기는 1810년경부터 뚜렷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때는 개신교 선교 운동의 확장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보다 최근에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잘 알려진 글이 영광과 돌림(경배와 찬양)의 동기를 재 점화한 바 있는데, 그는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예배는 선교의 원동력이며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위엄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를 중심에 두지 않는 교회들은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강렬한 소망의 불꽃을 점화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96:3)”.

 

6. 종말론적 동기가 있다(Eschatological/ Motivation: With a View to the End).

마지막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인 종말론은 교회의 전 역사를 통해 강력한 선교의 동기가 되어 왔다. 종말론적 동기는 이 세대는 지나가고, 장래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종말론은 오늘날 역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선교가 구원의 역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교의 결과는 우연이나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모든 민족들에게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13:10 참조).

선교의 종말론적 동기는 선교사들에게 활발한 선교활동을 통해 세상의 마지막이 앞당겨 질 수 있다는 종말적 기대를 불어 넣었던 최초의 진정한 선교사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대제(540-604)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의 화란 개혁주의자들은 유대인의 회심에 뒤이어 이방인들의 회심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보았다. 모라비안 교도들을 비롯한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종말론적 동기가 핵심은 아니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동기가 되었다. “미국 선교회들은 청교도의 산물이었고, 뉴잉글랜드 건국 초기의 헌법 제정자들은 그들의 모든 식민지 개척을 위한 모험의 근거로 종말론적 관점에 주목했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48)는 스가랴 820-22절의 종말론적 환상을 기도와 선교의 동기로 보았다. 영적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설교자들이나 감리교인들의 영국 선교를 위한 노력에 있어서 종말론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이 천국의 도래에 대한 예표가 될 수 있다는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세기 초에 종말론은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선교활동의 시작을 천년 천국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신호로 간주했던 대영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1830년경에는 천년천국(millennium)의 도래를 위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천년 천국설은 19세기 선교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핵심적인 동기로 작용했는데, 미국 남북 전쟁 이후에는 점차적으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죽어가는 이교도들의 구원의 긴박성은 지속되었다. 소위 믿음 선교(faith missions, 독립선교)’를 추구했던 초기의 많은 선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수단으로서의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칼 귀츨라프(Karl Gützlav, 중국의 사도),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중국내지선교회의 창립자), A. B. 심슨(A. B. Simpson, C&MA 교단 창립자), 프래드릭 프란슨(Fredrik Franson, 미국의 TEAM 선교회 창립자), A. T. 피어슨(A. T. Pierson, 학생자원운동), 그리고 다양한 성결 오순절 선교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보다 최근에는 아더 P. 존스턴(Arthur P. Johnston)이 천년천국의 영에 대해 성경은 이 현대 세대에서 어느 개인이나 사회도 완벽하게 될 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궁극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있어서 전도보다 더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전도의 목적은 기독교화된 세상이 아닌 왕을 다시 모셔오게 하는 세계복음화에 있다고 말한다. 독일 루터교의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는 이 견해에 다음과 같이 동의한 바 있다. “전도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천국(천국)이 가시적으로 설립되는 것을 앞당길 수 있는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활동이다. 이 과업이 완수되었을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신음하는 피조물들을 현세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것이다”. 복음주의와 로마 가톨릭교의 대화에서 서로 동의한 선교의 동기들 가운데 하나가 주님의 재림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어린 양의 구속 사역을 통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5:9, 7:9).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7:13), 그들은 반응할 것이다. 교회가 머뭇거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선교사가 연약하고 결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향한 자신의 목적을 이 세대에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 종말론적 소망은 인간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반대에 직면할 때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큰 격려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일할 것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9:4).

그리스도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24:36), 우리는 그가 오시는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살전 1:7-9).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한 것은 긴박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 5:11 )라고 말한바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인내하고 계신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우리의 종말론적 확신은 이와 같이 매우 긴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파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신중하지 못한 채 서둘러 일을 끝내려는 피상적인 선교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교회가 많은 이유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재림과 선교의 긴박성에 대한 인식을 잃어가고 있다. 로잔 언약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재림의 약속은 우리의 전도를 가속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 기간은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 사역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종말이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이 일을 멈출 자유가 없다”.

우리의 선교적 노력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는 일을 위해 교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는 선전 문구들이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에버렛트 후파드(Everett W. Huffard)는 다음과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정확히 지적 한 바 있다. “성공 지향적인 미국의 문화적 가치와 자신의 목적지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성향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섣불리 내릴 수 있게 만들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이 세대에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도록 돕는 최우선의 도구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이 일에 실패한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획이나 시간이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자이다. 그리고 만약 어느 한 교회가 실패를 하더라도 그는 다른 교회들을 일으켜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것이다.

마태복음 2414절과 마가복음 1013절은 명령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진술이다. 베드로후서 3:12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과장해서 강조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리처드 보크햄(Richard J. Bauckham)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아무도 멸망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는(9) 주님의 열망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와 삶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이 종말의 시기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킬 수 없으나, 그의 주권적 결정을 내리실 때 인간의 문제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려하신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본문에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키고, 신적인 계획을 강조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2414절과 마가복음1013절에서 선교는, 특히 선포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교회의 핵심적인 과업이다. 세계복음화는 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의 중심이 된다. 선교사역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는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선교학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학은 결코 시간(특히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모든 시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부여한 의미로부터 벗어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 묵시적 비전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동기를 부여 받았다. 이것이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목적을 우리를 통해 성취하도록 우리가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7. 선교의 동기에 대한 결론

사랑과 긍휼은 분명히 선교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월성에서 나오는 베푸는 자로서의 동정심 정도로 그 의미가 쉽게 퇴색될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이 처한 일시적이고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곤경의 상태에 대한 가장 강한 연민조차도 그 자체로는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이고, 타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대명령에 대한 순종은 명백한 성경적 동기이지만,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랑과 기쁨이 없는 맹목적 순종은 이 사역의 원래 의도를 훼손할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권위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약속과 함께 하는 대명령(28:19-20)과 성령의 은사(24:49)에 근원을 두어야 한다. 판 덴 베르크는 순종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때는 마치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숙한 사랑의 의무를 강조할 때는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부르심(내적 강권을 포함하여)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동기이다. 이 동기는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은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부르심은 언제나 다른 영적 지도자들의 확인이 필요하며, 가시적이고 공적으로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3:3). 그리고 이러한 공적 행동이 결과적으로 마음이나 동기를 잃어버린 종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딤전 4:14, 딤후 1:6). 성경과 선교의 전 역사를 통해서 섭리적 인도, 부르심, 은사 등이 선교의 중요한 동기가 되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자아실현 등의 동기들은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동기로서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부인하고 진정한 제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14:26-27). 바울은 골로새서 124절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기록했고, 빌립보서 310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씀들은 깊이 묵상할 가치가 있다. 이 말씀들은 선교 사역 가운데서 경험하는 고난이 구원이나 성화를 얻게 하지는 못하지만, 고난 받을 준비를 하는 것과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욱 더 깊게 할 수 있다.

개인 변화와 성숙, 개인 만족과 성취, 교회부흥, 그리고 또 다른 단편적인 유익들은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는 선교의 부산물과 복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선적인 동기가 될 때 선교는 마지막에 언급한 바대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또 다른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전혀 사심을 갖지 않고 그의 아들을 보내시는 선교의 정신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선교의 가장 궁극적인 동기는 반드시 하나님 자신의 인격, 즉 세상을 향한 그의 사랑,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 그리고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게 되고, 이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리라는 그의 약속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완전히 순수한 선교의 동기를 갖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기독교 선교 역사를 통해 볼 때 순수한 동기와 불순한 동기가 마치 깨끗한 동물들과 불결한 동물들이 함께 노아의 방주 안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혼합되어 있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교의 동기에 있어서 사각지대나 결점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선교의 동기들이 서로 어떻게 혼합되어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울 뿐 아니라 선호하지도 않는다. 명백하게 잘못된 동기도 있고, 다소 모호하거나 무의식적인 동기도 있다. 현재의 우리가 말하지 않는 선교의 동기들이 과거에 비해 훨씬 적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기독교의 전 역사에 걸쳐 수없이 많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그들의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세기에 서부 아프리카의 열대 지방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사망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모집된 선교사 후보자들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당시의 후보자들은 선교지에서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질병에 의해 죽은 선교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희생정신을 간과한 채 성급하게 그들의 선교 동기에 대해 비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가 다소 의심스러운 동기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사용하셔서 통치하시고 역사하신다. 자신의 사명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고집도 강했던 요나 선지자만큼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덴 버그(Van den Berg)사실상 현재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과거의 동기들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동기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기 보다는 자신의 동기를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선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선교사의 자질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3. 선교의 바른 동기는 무엇인가?

4. 선교사 자질이 부족한 선교사들의 예가 있으면 나누자. 어떻게 하면 자질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