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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4-1강 선교전략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4학기

제 4-1강 선교전략

후앙리 2020. 4. 21. 19:01

차례

I. 제자 삼는 사역

II. 교회를 세우는(교회개척) 사역

III. 은사(재능/ 전공: 전문성)에 따른 전략

 

I. 제자 삼는 사역

 

1. 제자 삼는 사역의 중요성

1) 제자 삼는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정확히 성경적인 방법인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성경적인 방법론도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차이가 있지만 성경의 원리와 방법을 찾아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과정과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세계 복음화를 위한 방법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것이었다.

그 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 선교사들이 하는 것처럼 일반 학교 사역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여실 수 있었다. 그 때도 요즈음 대학과 같은 기관들이 존재해 있었다. 혹은 병원을 세우셔서 치료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실 수도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로 도와주고 지역 개발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도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물론 주님은 병자를 고치셨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셨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많은 군중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배고픈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도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정의를 부르짖으셨고, 잘못된 것을 비판하셨고, 부자를 질책하셨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사회참여적인 일인 구제나 사회단체를 돕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 전파의 주된 주님의 방법은 아니었다. 주님의 주된 사역의 방법은 제자를 선택하여 양육하는 방법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님도 사회 참여적인 일들을 사용하셨지만 복음 전파의 직접적인 사역 방법은 제자훈련이었다. 제자훈련은 주님의 사역의 핵심이었다. 주님은 제자를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맡기시는 것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 선교에 있어서 제자 삼는 사역의 중요성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제자 삼는 사역이 세계 복음화의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제자 삼는 것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세계 복음화의 원리이다. 제자를 삼는 것 자체가 복음 전파의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세상에 제자 삼는 것이 바로 세계 복음화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제자 삼는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제자 삼는 것은 철저한 훈련으로 되어져야 한다. 제자의 숫자는 상관없다. 숫자가 적으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제자 삼는 사역은 단순한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여러 가지 선교전략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선교 단체들이 전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제자 삼는 사역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제자를 삼는 것은 주님의 선교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은 주님의 세계복음화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2) 주님의 제자 삼는 사역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주님이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핵심적인 사역이 제자훈련이었고 이 제자 세움의 결과 세계 복음화는 이루어져가고 있다. 주님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대중을 통한 방법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인적으로 훈련하시는 방법을 선택하셨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다.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충성된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바울- 디모데- 충성된 사람- 또 다른 사람. 제자 훈련의 원리는 배가의 원리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또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세우는 것이 시간적으로 느린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빠르다. 이렇게 할 때 제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것이고 이를 통해 세계 복음화는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2. 제자 삶은 사역이란 무엇인가?

1)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사역이다.

돈이나 물질이나 프로젝트가 아닌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제자 삼는 사역이다.

(1)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하는 사람들 중에 때로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돈을 보내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오늘날 어떤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원리보다는 물질이나 돈으로 선교를 하려고 한다. 돈으로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려고 한다.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성 사역을 함으로 복음을 전하려 한다. 선교 센터나 건물을 짓거나 혹은 학교나 병원 사역을 통해 사역을 하기 원한다. 물론 이런 사역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지만 사람을 세우는 사역보다 앞설 때는 문제가 된다.

사람 중심의 사역이 아닌 물질 중심의 사역은 선교의 기본 원리에 문제가 된다. 세상의 변화는 건물이나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사역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며,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 돈이면 선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한국의 몇몇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보다는 현지에 돈을 보내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는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도 돕고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월급을 주고자 한다.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여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효과를 거둘 것으로 생각한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드는 비용으로 더 많은 현지인 사역자를 도우면 열매가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현지인 사역자와 교회를 무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것은 현지인의 자립 의지를 꺽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에게 자립의지가 없으면 교회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돈을 보내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사람을 보내는 것이 선교다.

 

(2) 존 네비우스(John Nevius) 정책

선교 학자들은 2,000년 세계 선교역사에서 선교가 성공한 나라를 꼽을 때 한국을 첫 번째로 말한다.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해 교회가 부흥한 나라들 중에 한국이 가장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다. 한국이 선교에 있어서 성공한 나라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한국이 부흥하게 된 요소도 한 가지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중에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네비우스 정책이다. 네비우스는 중국 주재 선교사였다. 초창기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 선교의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교사들이었다.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하고 있었던 네비우스를 18906월에 한국에 초청하였다. 그리고 2주 동안 세미나를 열어 그에게 선교 정책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한국 선교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네비우스 정책이다.

네비우스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치, 자전, 자립의 원칙 가운데 교회가 스스로 독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돈을 도와주거나, 물질로 건물을 짓는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데 초점을 맞춘 전략이었다. 사람을 훈련하는 데 중요성을 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교회가 성장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장하게 된 배경 가운데 네비우스라는 한 사람의 전략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선교 역사에 있어서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네비우스라는 한 사람에 대해 의미를 둘 뿐 아니라 그의 정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초창기 한국 선교가 돈이나 물질, 보이는 프로젝트 사역보다는 사람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3) 사람을 세우는 선교사

지금부터 20년 전에 합동 교단 남미 선교사 대회를 하였다. 그곳에서 모인 약 열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각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고 하였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학교와 선교 센터 짓고, 몇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보고를 하였다. 그 중에 필자의 마음에 잊히지 않는 한 선교사가 있었다. 이 선교사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들 양육하겠다는 마음으로 사람을 키우는 사역을 하였다고 했다. 다른 선교사들과 같지 않는 철학을 가지고 사역을 하고 있었다. 다른 선교사들이 선교의 열매에 대해 보고할 때 이 선교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은 없지만 사람을 키우는 사역에 전념하는 철학과 사역에 대해 보고 하였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함으로 후원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눈에 보이는 당장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아서 힘들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결국 그분에게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현지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웠고 그들이 스스로 자립하는 교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후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다른 선교사들은 이런 저런 사역의 변화가 많고 사역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이 선교사는 꾸준히 현지인들을 잘 양육하고 있다고 들었다. 사람들의 눈에 띠는 열매가 보이지 않아 가장 보잘 것 없는 선교사처럼 보였지만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2) 제자 삼는 사역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역이다.

제자를 세우는 사역은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제자를 양육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사역이다. 선교지에서 큰 건물을 짓고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철수한다고 할 때 남는 것은 일, 사역, 건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바른 제자를 남기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지 건물이 남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것은 12제자였다. 니처럼 현지인, 제대로 된 사람이 남으면 그 사람이 바로 선교의 결실이다.

이 세상은 때로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심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위력은 너무나 크다. 그 한 사람이 선교지 그 나라를 복음화 시킬 수도 있다.

한 사람에 의해서 전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다. 정 반대의 또 한 사람에 의해 전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 바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한 사람으로 전 인류가 정죄에 이르렀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전 인류가 의롭다함에 이르렀다.

노아 한 사람을 통해 홍수의 심판 가운데서 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 노아 한 사람의 믿음으로 이 세상은 유지되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선민 삼으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모세라는 지도자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고 출애굽이 모든 인류 구원의 모형이 되게 하셨다. 다윗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은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 느헤미야 한 사람을 통해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역사가 있었다. 바울 한 사람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기틀이 되었다.

세상 역사를 보면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 역사에는 독재자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수백만 명을 대학살하였다. 마오쩌뚱은 7,0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7,000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데 마오쩌뚱이라는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 피노체트나 폴포트, 이디아민을 비롯한 20세기 독재자들은 어떠한가? 한 사람으로 족하다. 북한이 이처럼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3부자로 충분했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악행의 결과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을 통해 나라와 민족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이루어진다. 루터 한 사람을 통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빌리 그래함 같은 한 명의 전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빌리 그래함 같은 한 사람만이라도 세운다면 그 나라의 복음의 확장을 위한 동력은 엄청날 것이다. 한 선교사가 키운 사람이 인도의 간디와 같은 사람이 되었을 때 선교지 나라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윌리암 케리 같은 사람이라면 세계 선교를 책임질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키운 한 사람이 루즈벨트 같은 대통령이 된다면 그 나라를 어려운 가난에서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위대한 경제학자나 과학자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그들이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선교지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끌어 오시면서 사람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돈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권력과 지식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가문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자체를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선교 역사 가운데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다. 풀러 신학교 선교 역사 교수인 폴 피어슨은 이 순간을 선교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1938년에 인도 마드리드에서 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회의가 있었다. 그 모임에서 폴 헤리슨 선교사가 설교를 하였다. 그는 의사로 모슬렘 선교를 위해 사무엘 즈위며와 함께 아라비아 선교사로 가서 50년 동안 사역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50년 동안 선교한 결과 5명의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는아라비아에 있는 교회가 여러분에게 인사를 전한다고 하였다. 아라비아 교회는 5명이 모인 교회였다. 이 선교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10년을 보냈다. 그 결과를 보고할 때, 그 순간이 선교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선교 역사학자의 말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가 10년 동안 한 사람을 구원시켰다고 보고한 순간이 선교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는 의미는 바로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오래된 영화 한편이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다. 영화는 철없는 패거리들이 싸움을 하는 내용이다. 열 명 정도의 같은 편이 한 사람의 상대를 향해 공격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 그 때 이 한 사람은 열 명의 무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난 싸움을 할 때 한 사람만 공격한다(난 죽을 때까지 한 놈만 팬다!).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죽더라도 그 사람만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이 말이 끝나자 10명은 각자가 생각하였다. 그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였다. 이런 생각을 모두가 하면서 그 한사람이 자기가 될까봐 모두가 뒤로 물러서 도망을 갔다.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싸움을 할 때도 한 사람의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선한 싸움도 단 한 사람이라도 분명히 양육하여 지도자로 세우겠다는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한국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린다는 말이 있다. 온 물을 흐리는데 여러 마리의 미꾸라지가 필요 없다. 한 마리면 족하다. 미꾸라지 한 마리는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다. 반대로 그 미꾸라지 한 마리가 활어를 살린다는 말도 있다. 항구에서 도시로 살아있는 생선들을 옮길 때 그냥 그대로 놔두면 모두 죽는다. 그렇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를 어항에 넣으면 그 미꾸라지를 피하느라 생선들이 정신을 차린다. 그래서 생선들은 죽지 않는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전체를 살리는 것이다. 단 한 마리지만 그 위력은 전체를 죽일 수도 있고 전체를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었느냐?” 테레사 수녀는 한 번에 한 사람씩 최선을 다해 섬겼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3) 제자 삼는 사역은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성육신의 삶

사람을 세우는 방법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생활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말씀은 그냥 선포되는 것 이상이다. 그 말씀이 삶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교사는 현지인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다. 현지인과 같아지는 것이다. 생활양식과 생활수준이 같아지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성육신이다. 예수님은 성육신 선교를 하셨다. 성육신 선교는 삶을 통한 선교다. 그저 말씀을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선교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방법은 선포만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공중에 큰 플래카드를 세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을 다 살아나게 하셔서 보여주실 수도 있다. 구약시대처럼 뱀을 풀어 다 죽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협박하실 수도 있다. 돈을 뿌려 하나님의 존재를 믿도록 하실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아무런 방법 없이 그냥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실 수 있다. 그것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는 바로 인격적으로 사람들을 대하셨다는 의미이다.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이 사람과 같아져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과 마음과 사랑의 모습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선교란 삶을 나누는 것이다.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지인과 같아지는 것이다. 현지인을 이해하고 함께 사는 것이다.

선교는 사역이기 전에 삶이다. 돈이나 어떤 결과를 내는 일이 아니다. 일이 아니라 삶이다. 선교는 삶을 통해 보여주고 이해시키고 함께 하는 것이다. 선교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현지인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삶, 선교사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사가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인가를 삶을 통해 나누는 것이다.

제자훈련이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1과부터 40과까지 기초부터 고급반까지, 평신도 훈련부터 사역자반까지 이수하면 제자훈련을 이수하는 것이 아니다. 전 삶을 통해 보여주고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제자를 세우는 것은 선교사가 말씀과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선교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선교사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의 제자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삶으로 말씀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선교사는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준다. 제자훈련이란 선교사가 제자가 되어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줌으로 선교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선교사의 사역과 선교사가 보여주는 삶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선교사가 되려면 성육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가 되려면 자기관리가 잘 되어야 한다. 컴퓨터나 인터넷에 대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시간 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책임을 잘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방 청소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불을 갤 줄 알아야 한다. 떨어진 휴지를 주울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안하는 일을 솔선수범해서 할 줄 알아야한다. 설거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고운 말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삶으로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선교다.

 

4) 제자삼은 사역은 전인적인 훈련을 하는 사역이다.

제자 훈련은 지적인 영역과 감정적인 영역, 영적인 영역, 신체적인 영역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훈련이다. 전인적인 훈련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으며 이 사랑으로 전인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다. 전인 훈련이란 전인격(Whole person)을 지향하는 훈련이다. 인격과 영성(character and spiritual formation), 기술 발전 및 자신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 전체 사람(whole person)의 필요에 의도적으로 부흥하는 학습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존재와 행동, 지식을 포괄하고 성품 및 영성을 형성하는 훈련이다. 성품성장을 위한 지도자의 자질들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딤전 3:1-5, 1:5-9).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 보다 더 놓은 인간성에 대한 찬사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고후 4:4).

나무 조각으로 된 물통을 본적이 있는가? 물통을 이루는 나무 조각의 크기가 똑 같을 때 그 높이만큼 물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조각이라도 짧으면 물은 그 가장 작은 나무 조각까지 밖에 채울 수 없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으로 측정을 받을 수 있다. 선교사의 자녀가 문제가 있다면 건강한 선교사역은 어렵다. 내적인 상처가 있다면 선교사역을 하기 곤란하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잘 가르치고 사역을 잘 하더라도 건강이 약한 선교사는 사역의 한계가 있다. 그런 면에서 선교사는 모든 면에서 건강해야 하고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다. 잘 한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고 그 약한 부분 때문에 선교사역에 지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영성을 가진 선교사가 전인적인 제자 삼는 사역을 할 수 있다.

 

5) 제자 삼는 사역의 실제는 지도자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선교사가 제자를 세우는 사역을 통해 현지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보내야 현지인 복음화를 할 것인가? 한국 선교사가 현지인을 다 전도할 수 없다. 선교사를 아무리 많이 보내도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현지인이 스스로 복음화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사의 초점은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와 사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제자훈련을 통한 선교의 목표이다. 한 사람이라도 세우되, 가능하면 현지인 지도자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다. 교회나 신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전문인 선교사도 자기 영역에서 현지인을 제자 삼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인 제자 양성 뿐 아니라 전문인 선교사의 전문 영역에서도 제자를 양성하는 방향이 효과적인 전략이다. 예를 들어 농업 선교사라면 농사를 지으면서 현지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보다는 현지인들이 스스로 농사짓도록 농사짓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농업 분야에서도 제자를 세우는 것이다. 각 분야에서 자기 기술과 신앙의 영역에서 제자를 삼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다. 지도자 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는 제자훈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3. 선교사가 제자 삼는 사역을 하지 못하는 이유

1) 사역의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 시간에 급하게 어떤 일에 대한 성과를 거두려 한다. 그러나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눈에 보이는 열매로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열매를 얻는 사역이라기보다는 투자하는 사역이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는 일보다는 투자하기를 원하신다.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인가? 한 사람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인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 한다. 눈물 없이 열매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투자보다는 열매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 적은 투자로 많은 열매를 거두기를 바란다. 이런 마음은 엄밀히 따지면 지나친 욕심이고 도둑의 마음이다. 투자 없이 열매를 거두겠다는 것은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

기독교에서 잘못된 신앙관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없는 부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고난 없는 영광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기독교는 고난과 부활의 종교다. 이 일을 행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고난을 당하는 일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부활의 영광을 고난 당 할 때 맛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부활을 일으키시고 사람은 고난에 참여한다.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희생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사람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은 부활의 영광을 주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평가하는 열매는 맺지 못하셨다. 죽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주셨다. 좋은 결실, 눈에 보이는 열매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그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세상이 변화되었다. 사람은 예수님처럼 순종만 하면 된다.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비록 열매나 결과가 이 세상에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열매가 없더라도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열매를 맺어 주신다.

 

2)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의 칭찬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에게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그에 따른 불이익이 나타난다. 후원하는 사람들은 선교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기 보다는 결과에 관심을 갖는다. 제자 삼는 사역은 눈에 보이는 열매가 당장 없기에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이 멀어진다. 선교사들은 후원금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후원자들이 선교사의 사역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선교사는 당장 사는 일에 어려움이 생긴다. 선교사가 후원 교회의 요구를 거부하기에는 후원 교회의 재정적인 영향력이 너무 세다. 선교사는 후원교회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역보다는 보이는 종류의 사역을 하게 된다. 사람 세우는 사역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철학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칭찬을 포기해야 한다. 때로는 생활비와 사역비를 포기해야 한다. 자녀 교육비의 타격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에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춥고 배고픈 사역이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것도 별로 없다. 다른 선교사들은 방문자도 많고 내 세울 것도 많은 것에 비해 사람을 세우는 선교사는 외롭고 소외감이 든다. 그래서 사람을 세우는 투자의 사역을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는 사역을 하게 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선교사는 후원 교회에서 유치원을 지어 줄 테니 유치원 사역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건물을 짓는 것보다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거부하였다. 후원 교회에는 그 후로 그 선교사에게 하는 후원을 중단하였다. 그렇지만 그 뒤로 선교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선교를 하고 있다. 사람과 교회는 외면해도 하나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

 

3)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대체적으로 인내심이 부족하다. 장기 계획에 따라 사역을 하기 보다는 단기간 내에 어떤 성과를 바라는 성향이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압박감이 많은 사회이다. 교회나 선교지에서도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문화는 나타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사람 세우는 사역을 잘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성경 번역을 위해 성경 번역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들과 서구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선교회에서는 10년 정도는 성경 번역을 위해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선교사들은 선교회의 계획에 따라 10년 동안 언어와 현지 문화를 배우며 성경 번역에 대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은 그곳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이미 신약 성경 번역을 거의 완성했다. 이처럼 일을 빨리 하는 것은 한국인의 장점이다. 일에 대한 순발력과 추진력은 그 어느 나라 사람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좋다. 그러나 이런 성품이 때로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하기에는 단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인내하며 길러내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면서 끝까지 참아야 진정한 제자를 키워낼 수 있다. 많은 사랑과 노력과 섬김이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31, 2절에 말씀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어린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어린 아이는 젖을 먹이고 더 크면 밥을 먹인다. 젖먹일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 그러기에 밥 먹을 사람에게 젖을 먹이면 안 된다. 적절하게 주어야 한다. 사람마다 다르고 차이가 있기에 사람마다 적절하게 도와주고 적절한 양육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키우는 선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사역이다. 선교사가 직접 젖이 필요한 사람에게 젖을, 밥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밥을 먹이는 사역이다. 선교사의 세심한 인내의 손이 필요하다. 같이 먹고 마시고 함께 사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는 온전한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한국 내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전심을 다한다. 마찬가지로 선교지에서 선교 한다는 것은 목회하는 것과 같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고, 돌보는 것이고 양육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교를 목회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은 선교는 목회와 다른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선교사만 파송하면 뭐든지 좋은 결과를 맺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선교사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개척과 탐험을 하는 사람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선교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고, 사람을 세우는 것은 목회하는 것과 같이 인내를 가지고 돌보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4) 선교사 자신의 계발과 성장을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선교사 자신이 성장해야 한다. 사람을 키우려면 현지 언어에 능통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책을 보고 연구를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는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또 다른 투자이다. 사역을 하면서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보통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힘들다.

선교사 자신이 중요한 선교의 도구다. 선교사의 영향력은 선교사의 사역과 열심에 있기 보다는 선교사 자신의 성숙에 있다. 선교사 자신을 세워가는 것이 선교이기에 선교의 성과는 선교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 선교사가 무엇을 하느냐의 결과는 진정한 영향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정한 영향력은 선교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가고 성장하는 것이다.

선교사역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말씀을 선교사의 입과 삶을 통해 전하는 것이다. 선교는 선교사의 영성과 선교사의 인격만큼 된다. 물론 인격과 영성이 결여되어 있어도 겉으로의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 말만 잘하고, 설교만 잘 해서 결실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결실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당장은 더 위대해 보일지 모르지만 인격과 영성, 그리고 지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선교사의 사역은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 반석위에 세운 집은 세우는 과정이 힘들다. 고통과 아픔이 있다. 빨리 지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집이 견고하다. 선교사의 삶을 통한 말씀의 전파가 바로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다. 선교사의 겉모습(doing) 보다는 됨됨이(being)이가 견고한 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역자(선교사)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면과 인격, 그리고 삶의 진정한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가고 성숙시켜가는 과정이다. 선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성화되어 가는 그 과정 자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하는 일보다는 자기 관리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선교 후원금과 후원자가 있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느냐보다는 사람들과 관계를 얼마나 잘 맺으며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잘 나누느냐에 있다.

필자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철수하면서 가르쳤던 신학생들로부터 이별 카드를 받았다. 지금까지 받았던 카드 중에 필자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했던 카드였다. 그 내용은 그 신학생 자기 일생에 만났던 사람 중에 필자가 제일 겸손한 사람이었고 그 겸손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사역자로 살아가는데 많은 영향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부족함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 학생의 칭찬에 걸 맞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그 평가에 기분이 좋았다. 나를 과대평가한 것이 사실이지만 잘 가르쳤다는 말보다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왜냐하면 필자가 의도하고 원하는 선교사로서의 평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잘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삶으로의 영향력을 끼치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작은 목표이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의 개혁은 대부분 교회의 변두리 외곽에서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변두리에서 자신들이 먼저 개혁의 주체가 되었다. 부패한 교회를 보면서 교회를 떠나 수도원을 중심으로 혹은 경건주의 운동으로 자신을 개혁하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패턴은 자기 개혁부터 시작해서 부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흥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발전되었다. 이 부흥은 기존 교회에 영향을 주어 교회들이 자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교회가 갱신하게 되고 교회의 갱신은 사회를 개혁하는데 까지 갔다. 그런 면에서 교회 역사에서의 선교는 자기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사의 정체성은 자기개혁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 자기성찰과 자기절제가 중심이었다. 수도사들의 삶은 청빈의 삶이요, 고난을 감수하는 삶이었다.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그 자체였다. 경건주의자들의 특성도 그들의 삶의 모습이 중심에 있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지오반니 프란시스는 13세기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환락에 빠져 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환자들과 함께 살았다. 부자인 아버지의 재산을 낡은 성당을 보수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그는 나는 청빈이라는 부인과 결혼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빈 몸으로 이 세상에 왔기에 아버지의 유산이 필요 없다고 하여 받지 않았다. 그는 돈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다. 음식을 구걸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이 프란시스의 자기개혁이었다. 선교사들도 자신들의 삶이 변해야 한다. 자기개혁이 우선이다. 자기성찰과 자기성숙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것 자체가 사역이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의 재세례파 운동과 18세기의 모라비안 운동과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 부흥운동은 교회 변두리에서 시작된 교회갱신 운동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경건한 삶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을 중요시 여겼다. 이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선교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볼 때 선교의 모체는 바로 경건한 삶에 있다는 점이다. 선교사는 위대한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사역 이전에 그들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건한 삶이 결여된 선교는 있을 수 없다. 선교의 시작이 경건한 삶에서부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해나 이미지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선교의 원래의 정신을 회복할 때 선교가 바로 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과정이 선교라고 할 수 있기에 선교사들이 현지인을 사랑하며, 검소하며, 경건하게 사는 삶이 선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자기 찰과 자기발전, 그리고 자기성숙이 선교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일이다.

 

5) 철학과 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선교사)는 한 사람을 세우는 것에 목숨을 걸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선교사가 될 때부터 사람에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 프로젝트나 건물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하겠다는 철학이 확고해야 한다. 선교의 방향은 사람을 세워 그 사람들이 복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해야 한다. 선교사가 주인이 아니라 현지인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지인 한 사람을 귀하게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선교사가 주인공이 되고 중심이 되면 현지인은 보조자의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현지인보다 선교사가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참된 선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지인은 선교사가 섬겨야 할 주님과 같은 존재라는 확실한 철학이 필요하다.

선교사는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역도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철학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 중심의 사역을 꾸준히 할 수 있다.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사역을 할 때, 인디헤나 교회 연합회에 소속이 되어 현지 목사님들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 목사님들과 매주 모임을 가지면서 그들을 재교육하는 사역을 하였다. 어떻게든 현지 목사님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필요한 것들을 돕는 사역을 하였다. 문제는 목사님들 중에는 선교사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에게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는 목사님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필자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요청하였다. 필자의 선교 철학은 현지인들의 경제적인 부분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선교사의 물질적인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안 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의 물질적인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돈으로 선교하는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안 목사님들은 두부류로 나뉘어 졌다. 한 부류는 그 모임에서 떠났고 다른 한 그룹은 남았다. 경제적인 도움을 원하는 목사님들이 떠나게 되니 숫자는 좀 줄었어도 그 때부터 목사님들의 교육과 훈련의 효과는 크게 나타났다. 분위기도 좋아졌고 필자가 원하는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을 세우고 양육하는 사역을 끝까지 할 수 있었다. 재정적인 요청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또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때 어려움도 있었지만, 선교 철학에 따라 사역을 하게 되니 결국 좋은 열매를 보게 된 것이다.

 

4. 요약

선교에서 제자를 세우는 사역은 전략이면서도 본질이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전략이고 우리가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해야 할 전략인 것이다.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제자를 세우는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제자를 세우는 사역을 해야 한다. 제자를 세우는 사역을 다른 나라에서 하면 그것이 바로 선교다. 선교는 어떤 특별한 것, 어떤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제자를 세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사람들이 선교를 생각할 때 떠오는 것은 부족 혹은 오지 사역’, ‘미전도 지역’, ‘고생’, ‘’, ‘사업’, ‘가난이라는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들을 바꾸어야 하고 선교를 본질적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선교하면 제자 훈련이 떠오르고 제자훈련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 되도록 체질을 바꾸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타 문화권에서 제자를 삼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선교는 타 문화권에서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선교사를 만나면 어느 나라에서 제자 양육하십니까?”, “ 제자 양육의 토양은 잘 되어 있습니까?”, “그 나라에서 제자 양육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문화적인 요소는 무엇이 있습니까?” 등등의 질문을 하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 때에 비로소 한국 교회 선교는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에 선교의 체질이 바꾸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에 선교의 목표를 회복했다고 말 할 수 있다.

 

 

 

II. 교회를 세우는(교회 개척) 사역

 

예수님의 제자는 교회를 통해서 자라나고 양육을 받는다. 제자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다. 그래서 제자 삼는 사역에서 교회를 세우는 사역으로 이어져야 한다.

 

1. 선교지 교회 개척의 중요성

1)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16:18). 주님은 교회를 중요시 여겼고, 그의 죽음과 부활은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교회의 머리와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가신다.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계의 다양한 개인들과 국가들, 그리고 민족들을 통하여 일 해오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역의 초점은 교회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시작된 교회는 오늘도 자기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의 성취 일환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신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는 주된 도구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셨던 것처럼 교회도 세상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를 가지고 자기 주님을 위하여 사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20:21).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의 중심이 교회에 있었기에 오늘날도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선교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2) 성경은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1:22-23).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5:25).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4).

주님은 지상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가 자기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예언하셨다(16:16-18).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교회가 태어나 성장하도록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시면서 교회를 준비하셨다(5:25). 지금은 하늘에 계시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불러내고 계신다(5:26-27). 그가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실 것이다(살전 4:13-18, 4:6). 교회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셨고, 그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마련하셨다(1:19-23). 성자께서 사명을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성령으로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므로 교회의 형성과 발전을 준비하셨다(1:4-8).

예수님의 제자들도 교회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누가는 오순절 후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더라”(2:47)고 고백한다. 그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흩어졌을 때 그들이 두루 다니며 말씀을 전파하였으며”(8:4)라고 하였다. 신자들의 순종을 통하여 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9:31). 안디옥에서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11:21)고 하였다. 바울과 실라가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이전에 세워진 교회들을 든든히 할 때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 하였다”(16:5)고 하였다. 이처럼 사도들의 사역이 교회 중심이었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명백한 사실이다.

 

3)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교회가 확장되고 성장될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 간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있는 교회를 통해서 세워진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기억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의미는 교회가 계속 세워지고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일반 학교나 병원이 하나 더 세워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 세워질 때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 위임령은 하나님의 나라 도래와 관련이 있다. 땅 위에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재림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 기관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천국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증거 할 책임이 있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할 이유는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의롭고 공평하게 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1)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고 그것이 행사되는 영역을 의미한다. 시편 10319절은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 (His kingdom)으로 만유를 통치 하시도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우주적인 다스림, 그의 온 땅에 대한 주권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전도와 선교로 실현된다. 교회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순종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다스림을 받도록 할 책임이 있다

조지 래드(George E. Ladd)는 그의 책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Jesus and the Kingdom of God)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였다(조지 래드: 1985).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출한다. 예수의 선교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교회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회는 과거와 미래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대속의 행위들을 선포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매개자로 하나님의 사역들이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교인들을 통하여 시행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관리자이다. 교회가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누가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며 누가 제외 될 것인가를 결정하실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관계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 보다 좁게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개인 구원과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

마가복음1017-31절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 관원과 예수,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그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대답하셨다(2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물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23) 하시고,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라고 말씀 하셨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 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29-30)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을 동일시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 곧 젊은 부자 관원과 제자들은 영생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예수께서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그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대신에 영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예수는 사람이 거듭나지’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15) '하나님의 나라''영생'을 결부 시키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구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구원, 곧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 도래는 개인의 구원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것이다. 개인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6:33). 각 나라와 족속과 민족과 방언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만민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회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4)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완성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

위 두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재림으로 완성이 될 하나님의 나라의 양면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면서도 지금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5) 천국열쇠를 가지고 있는 교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6:19).

위 말씀들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기관인 교회에게 주어진 권세와 책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책임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

 

(6) 교회의 전도와 선교사역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받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과 만민위에 임하도록 힘써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의 주제이었음을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였으니" (3:1-2).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도래 선언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4-15).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1:3).

열두 제자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시려고 내어 보내시며”(9:1-2).

빌립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빌립이 하나님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바울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0-31).

이상의 말씀들은 세례 요한, 예수님, 열두 제자들, 빌립, 그리고 바울의 주된 사역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 전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전도와 선교에 의하여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교회와 신자들의 사명

교회와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를 구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게 살며,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책임이 있다. 집합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한 기도

나라이 임하옵시며"(6:10). 우리는 '주기도' (The Lord's Prayer)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 "나라이 임하옵시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가르치심을 볼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온 세상을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의 추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 의식주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며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 나라 전파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 하나님의 나라가 말씀 선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전도와 선교활동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야 한다(24:14).

 

(8)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실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주님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하고 물어온 율법사에게 신자들의 사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뿐 아니라, 구속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매 주일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집합적으로 예배하는 일은 성실하게 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을 통한 예배는 등한히 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는 삶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2).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대 위임령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와 같은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16:18).

 

4) 교회개척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대 위임령 성취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1)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단일 전도 방법은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는 것이다” ( C. Peter Wagner. 1990). 모든 사람들이 피터 와그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연구와 관찰에 의해 입증된 사실이다. 하나님은 교회들이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기를 원하신다. 효과적으로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하여 교회개척은 필수적이다.

(2)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활동은 교회들을 개척하는 것이라는 것이 최근 계속하여 내게 더욱 분명해졌다. 회중들을 돌보고, 먹이고, 재생산하는 것이 모든 고안들과 수단들이 지향해야 할 핵심적인 활동이다"(Ralph D. Winter. 1966).

(3) “오늘날 우리가 보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 모든 족속들 가운데 있는 교회들--'산 돌들'로 이루어진 교회들, 지속적인 증거의 수단이 될 교회들, 지금은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의 완전한 신부의 한 부분이 될 교회들을 이 세대나 다가올 세대에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므로 교회가 각 족속들 복음화를 위한 지속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David J. Hesselgrave. 1980).

(4) "선교의 목표는 모든 문화의 모든 공동체 속에 참으로 토착화된 교회를 가지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날 때만이 우리는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도날드 맥가브란. 1997).

(5)“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모든 족속, 부족, 씨족, 그리고 인간 가족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확실히 은사를 받았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이러한 각 족속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개척자로서 장애물들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방법은 그러한 각 씨족들, 부족들, 그리고 가족들 가운데 교회들을 개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회 구석구석과 인간의 모든 문화와 언어권에 토착교회가 세워질 때만이 복음이 모든 인간 씨족들에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Charles Chaney. 1986).

 

5) 교회를 세우는 사역은 선교의 중심 사역이다.

선교에 있어 교회개척은 많은 일들 중의 하나이며, 때로 다른 사역보다 매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인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사역한다고 하면 위대하다고 하면서 목회자가 교회개척을 한다고 하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어떤 의사가 선교사로 오지에 가서 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사역을 한다고 하면 그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대학교수가 선교지에서 교수사역을 한다고 하면 그의 헌신을 귀하게 생각한다. 유명한 운동선수가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나가 운동으로 선교를 하면 대단한 결단이라고 한다. 전문인들이 선교사로서 사역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사람들은 전문인이 선교지에 가서 하는 그 사역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선교사 스타는 전문 직업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다. 전문인 선교사가 덜 훌륭하다거나 그들의 사역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다. 여기서 전문인 선교사의 사역과 목회자 선교사의 교회 개척을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이다. 어떤 목사가 교회를 하나 개척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한 것인 냥 받아들인다. ‘그거 뭐 대단한 일이냐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요즈음에는 선교사가 교회 개척을 한다고 하면 별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사의 사역이 전문인 선교사의 사역보다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무명의 목회자 선교사가 교회를 하나 개척해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어느 유명한 스포츠 선교사가 미개한 나라에 가서 국가 대표 팀을 만들어 지도하는 사역을 하는 것과 어느 사역이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 의사 선교사가 병원을 하나 세워 사역을 하는 것과 어느 목사 선교사가 교회를 하나 개척하는 것의 경중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 개척에 대해 큰 매력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유명해지고 스타가 되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개척이라는 귀한 사역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선교사가 아무리 많이 전도해도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그 전도는 별 소용이 없어진다.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는데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자라지 못한다. 신앙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선교지에서 병원을 통해 육신의 병을 고치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교회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은 다시 잃어버린 영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구제를 통해 가난한 아이들이 배를 채우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는데 교회가 없어 교회에 출석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신앙은 유지되기 어렵다. 교회는 신앙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교회를 통해 신앙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살도록 격려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고 이끈다.

 

2.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은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토착교회란 현지인 스스로 세우는 교회를 말한다. 현지인 스스로 독립하고 자립하여 재생산하는 교회를 말한다. 토착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첫 번째 문제는 선교사들이 교회건축을 해주는 것이다. 교회건축이 토착교회 설립을 방해하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선교사를 통해 교회건축을 해주고자 한다. 이런 성도들은 생전에 선교지에 주님의 전을 건축하는 영광을 얻고 싶다고 한다. 때로는 칠순을 기념해서 선교지에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기도 한다. 선교지에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만족일 수 있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귀한 선교 금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그런 정성스럽고 순수한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론이다.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헌금하는 선교 후원금이 바른 방법 가운데 쓰여 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드리는 정성만큼 선교지에서 그 결과도 아름답게 나타나느냐 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드리는 아름다운 마음처럼 결과도 잘 나타나기 위해서는 방법적인 문제를 반드시 따져 보아야 한다. 그러면 선교사가 선교지에 교회건축을 해주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 성경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모여서 예배하고 교회의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모임을 만들어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교회 개척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한국 선교사들은 사람들과 접촉하여 말씀으로 전도하고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먼저 건물을 구하고 건물을 중심으로 교회를 시작한다. 교회를 건축해 놓고 현지인 사역자를 세운다. 그리고 그에게 월급을 준다. 현지인 사역자가 교회를 하게하고 선교사는 그 사역자를 관리한다. 이것이 한국 선교사들의 교회개척의 방법이다.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다. 바른 방법은 선교사가 전도하고 모임을 만들어 양육하면서 교회가 부흥하면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순서이다.

한국에서 선교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전주 안디옥 교회는 초창기에 깡통 교회라는 별명을 가졌다.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선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건물보다는 선교하는데 재정의 60%를 지출하였다. 건축을 하는 대신 깡통처럼 된 가건물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참된 기능은 건물을 세우는 것보다 선교하고 제자를 훈련하는 것이다. 사람을 세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한국교회가 왜 선교지에서는 사람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건축을 중심으로 선교하는지?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건축을 중단하고 사람을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2) 현지인들의 자립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교회를 건축해주었을 경우에 현지인의 자립과 독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후원교회나 선교사는 교회를 건축해주면서 단순하게 생각한다. 교회건물만 있으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모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교회 건물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선교사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전도와 양육을 통한 목회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나가는 것이지 건물만 지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한 때 한국교회도 건물만 지으면 부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IMF가 일어났을 때 무리하게 건축을 하다가 부도가 난 교회가 한 두 교회가 아니었다. 교회건축을 무리하게 하다가 지금도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교회의 건물이 자동으로 교회를 부흥키기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 건축에 초점을 맞추는 한국선교사들은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선교사들이 교회건축을 해 주지 말아야 할 이유는 현지인들이 직접 교회건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건축은 현지인들의 일이지 선교사의 일이 아니다. 만약 선교사들이 교회건축을 해 주었을 때 현지인들은 수동적이 된다. 주인 의식을 갖지 못하게 된다. 선교사가 교회를 지어 주어도 현지인들에게는 그 교회가 내 교회라는 의식을 적게 갖는다. 내 교회라는 의식이 적을 때 교인들은 그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교회건축이 자신들의 일이라고 느꼈을 때, 그래서 스스로 교회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노력할 때 내 교회라는 주인 의식을 갖게 되고 교회에 대한 애착심이 생기게 된다. 교회에 대한 애착심이 생길 때 교인들은 비로소 그 교회를 위해 일하게 된다. 교회를 사랑하고 내 교회라는 의식이 있을 때 교인들은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게 된다. 반대로 누군가 외부에서 돈을 가져와 교회를 건축해 준다면 그 교회는 와는 직접 상관없는 교회가 된다. 그 교회의 주인은 현지인 자신들이 아니라 선교사일 뿐이다. 현지인인 가 주인이 아닌 이상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의 헌금과 헌신으로 건축된 교회라야 애착심을 가지고 교회가 부흥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게 된다. 현지인들 스스로 교회건축을 했는데 교회의 자리가 차지 않으면 안타까움이 든다. 그래서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전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독립된 교회이고 자립이 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몇 해 전에 필자의 파송 회에서 40주년을 기념해서 사진전을 개최했다. 예배 시간에 그 사진들을 모아 빔 프로젝트로 교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들은 이전에 교회를 세 번 건축하면서 있었던 장면이 많았다. 요즈음은 교회건축을 해도 건축회사가 직접 하지만 그 때만 해도 교인들이 직접 건축을 하였다. 땅을 고르고 벽돌을 나르고 담을 쌓는 사진들이 많았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교회 앞자리에 앉아있었던 할머니 교인들이 웅성 웅성거렸다. 이유를 알고 보니 바로 자신들이 직접 교회를 건축한 것에 대해 감격해서 서로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어떤 분은 그 사진을 보면서 진한 눈물을 흘리셨다. 바로 교회를 가 건축하였다는 자부심과 애착심이 거기 있었다. 그 교회를 지금까지 사랑하며 섬기고 있는 것이다. 정말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만약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일방적으로 도와준다면 현지인 성도들의 이런 기쁨을 빼앗는 것이 된다. 성도들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올린 벽돌 한 장이 그 무엇보다도 보람 있는 일이다. 선교사가 직접 하는 건축은 이런 기쁨과 감격과 헌신을 빼앗는 것이 된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을 건축해주는 선교사들은 상상을 하고 있을까?

소록도에 있는 한 교회의 할머니가 이렇게 고백하셨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청소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리 손으로 교회를 지었으니 교회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우리 손에서 피가 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게 보여도 아픈 줄 모르잖아. 오히려 병이 있는 게 다행이었지 뭐. 그 덕분에 끝까지 계속할 수 있었으니까, 멀쩡했으면 못했지, 못했을 거야, 벽돌 한 장 마다 우리의 피가 묻지 않은 것이 없어. 남자들은 힘쓰는 일을 했고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팔기로 했어. 교회 지으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니까. 그 때 나는 몸이 아파서 머리카락을 내 놓지 못했어.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 이제까지 건축헌금을 하는 것도 그래서야할머니의 고백 속에서 교회를 직접 지을 때 얼마나 많은 애착심이 키워지는 가를 알 수 있다.

필자는 선교지에서 한국교회의 간판을 달고 있는 교회들을 보아왔다. 그 중에는 교회 건물만 있지 성도가 전혀 없이 흉가처럼 되어버린 교회도 있었다. 교회건물은 세워졌는데 지도자를 세워놓지 않아 교회가 문을 닫은 것이다. 교회 건물은 있는데 교인들이 없으니 그 건축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 교회를 보는 사람마다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그 건축을 해 주었던 선교사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 교회를 위해 헌금했던 교회 혹은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고 지금도 기뻐할까? 안타깝지만 세계 곳곳에 이런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다. 선교사가 건축을 해 주었지만 사람을 세우지 않아 교회가 문을 닫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사람을 세우지 않는 건축지원은 현지 교회의 자립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3) 현지인들의 의존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직접 교회건축을 해주고 사역자를 세웠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사역자의 재정적인 필요, 즉 생활비를 채워주어야 한다. 현지인 스스로 교회를 짓지 못하는 형편이기에 현지교회는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책임질 능력이 없다. 이렇게 되면 교회건축 뿐 아니라 현지인 교회는 계속해서 선교사를 의존하게 된다. 선교사를 의존하게 되면 교회 독립이나 성장, 그리고 재생산이 되기 어렵다. 선교사가 무교회 지역에 사람을 세우기 전에 교회 건축부터 할 경우에는 현지인 교회자립이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처음부터 자체적으로 재정을 충당하지 않는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더 악화된다.

현지인 사역자의 경우에는 큰 노력 없이도 선교사로부터 생활비를 받게 되기에 교회 성장에 대한 필요성이나 긴박성을 느끼기 어렵다. 사역자들은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절박함이 때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선교사가 현지인 사역자의 월급을 줄 경우에는 오히려 현지인 사역자의 긴장을 늦추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현지인 사역자에게 월급을 줄 경우에는 그 사역자 한 사람에게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지역의 다른 사역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위 교회들의 사역자들이 선교사에게 월급을 받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선교사를 잘 만나면 쉽게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월급 받는 한 사람으로 인해 이런 사람들이 늘어갈 가능성이 많다. 무보수로 사역하는 많은 현지인 사역자들은 실망하게 되고 질투를 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 교회의 참된 이미지에 많은 손상을 입게 된다.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에게 선택받은 사람이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주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그 사람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월급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가 받아야 할 존경과 영향력을 감소하게 만든다. 월급을 주게 되었을 때 복음의 가치도 떨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선교사의 사역 자체에도 돈으로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만든다.

오늘날 많은 선교지가 선교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재정 도움은 현지인들을 더욱 악순환으로 만들기에 선교사들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으로 현지인과 선교지 교회를 사랑한다면 재정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현지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가로막는 것이기에 그렇다. 현지인들의 자립의지를 꺾는 것만큼 크나큰 위험은 없다. 선교사의 도움이 현지인들의 의존성을 키워준다면 차라리 돕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 의존성은 현지인들이 스스로의 노력과 헌신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을 가로 막는 요소가 된다. 현지인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누려야 한다. 현지인들도 헌금하고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헌금하고 기도하는 책임 속에서 그들은 참다운 기쁨과 신앙의 진수를 누릴 수 있다. 만약 선교사들이 재정 지원을 통해 현지인들에게 의존성을 키워주었을 때 이런 귀중한 것을 현지인들에게 빼앗는 것이 된다.

요즈음 한국의 몇몇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지 말고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직접 월급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비싼 돈 들여 선교사를 파송하기 보다는 그 돈으로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직접 월급을 주면 더 많은 사역자들을 도울 수 있고 그들이 일하면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결과적으로 현지인 사역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가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사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최초의 선교사로 오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할 방법 예수님을 보내셔서 함께 삶으로 선교하게 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선교는 돈으로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다. 선교는 돈으로 한다는 말은 유혹이다. 조심해야 한다. 선교사를 보냄으로, 그리고 그 선교사의 삶으로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다.

조지 페터슨 선교사는 온두라스에서 사역을 하면서 자치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근대 선교사가 가장 흔히 범하는 죄는 선교지 교회들을 좌지우지하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였고 본래 가지고 있는 성령의 능력이 사역을 창출하고 그로서 교회들이 자라고 재생산하도록 하였다. 나는 안내하였고, 격려하였으며, 말씀을 가르치고 상담하여 주었지만,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우리는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는데 한 개척지에서 20년 동안 다섯 세대의 교회가 생겨났다. 재생산의 가장 보편적인 장애 요소는 현지인들 자신들이 헌금하는 일을 막고 의존심을 길러주는 선교사 후원이다. 가난한 신자들이 희생적인 헌금을 하고 복 받을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적지만 정성스런 헌금을 특별한 천상의 수확으로 축복하여 금세와 내세에 번성케 하실 것이다. 외국 돈으로 현지인 목회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일은 거의 언제나 자발적인 재생산을 방해하고 필요가 있는데 더 이상 후원하지 않고 후원을 중단할 때 깊은 분노감을 갖게 만든다”(박기호. 2005. 재인용). 현지인들에게 의존성을 키워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현지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글렌 쉬바르츠(Glen Schwarts)는 선교사들이 현지인에게 월급을 주었을 때 의존심을 심어줄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외국인들이 현지인들을 위하여 교회 건물을 지어줄 때, 그들은 부주의하게도 그들의 자존감을 도적질할 수 있다. 외국 돈은 현지인들이 자기들의 예배당들, 병원들, 혹은 학교들을 짓는 특권을 빼앗을 수 있다. 존엄성을 보존해주기보다는 우리를 따라다니는 의존심을 조성할 수 있다”(박기호. 2005. 재인용).

 

4) 현지인과의 협력 때문이다.

물질을 도와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동등한 관계에서 협력을 하기 어렵다. 동등한 관계에서 협력이 안 되면 선교의 결실은 어렵다. 오히려 현지 교회가 자립하고 재생산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현지인이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현지인이 주인이 되어 현지 문화에 맞는 교회를 세울 때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을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선교사는 조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선교사가 현지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조력할 때 아름다운 협력을 이룰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한다.

선교사가 교회의 성장을 원하고 선교를 바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교회건축을 도와주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한국교회 선교에서 잘못된 이 부분을 고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진정한 선교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선교는 한국교회나 성도 개인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선교지에서의 교회건축은 한국 교회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한국교회의 왕국을 확장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자기만족이나 자기헌신이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칭찬받을 일인지 모르겠지만 선교지에서는 방해가 된다. 선교지에서 복음의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5) 현지인의 문화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주도적으로 교회개척을 할 때 건축양식이나 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사의 의도대로 할 가능성이 많다. 누가 돈만 주고 알아서 하라고 하겠는가? 건축방식이나 방법을 한국 선교사의 입장에서 할 가능성이 많다. 어떤 선교사는 현지인 교회를 건축할 때, 한국에서 건축사를 데려다가 설계와 건축 시공에 대한 모든 일을 맡겼다. 만약 선교사가 선교사의 취향과 문화에 따라 건축을 할 때 현지인들은 뭔가 어색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 고급스런 옷을 입는데 그 옷이 너무 커서 맞지 않는 경우와 같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고 해도 몸에 안 맞으면 소용없다. 교회 건축 양식도 마찬가지로 선교사의 문화에 맞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의 문화에 맞아야 한다.

필자가 선교지에서 개척했던 교회는 필자가 직접 목회를 하면서 시작을 하였다. 교인들이 필요를 느껴 스스로 준비하여 교회 건축을 하였다. 그 당시에 필자는 그 교회 목회자였기에 건축에 있어서 필자의 방법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건축하는 방법에 있어서 한국인인 필자와 우리 교인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서로의 문화가 달랐다. 건축 설계를 할 때 필자는 넓고 실용적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은 많은 방을 만들되 통로를 만들고 방들을 구석구석에 배치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필자가 담임 목사였지만 결국 그 교회는 현지인들의 교회이었기에 그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필자의 마음속에는 필자의 의견에 따라 주지 않은 것 같아 서운함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들의 방식대로 한 것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6) 교회 성장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교회 건물만 지으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축만 하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정 반대의 경우를 만들 수도 있다. 교인들 스스로가 아닌 외부의 도움으로 지어진 교회 건물은 오히려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식물을 기를 때 비료를 너무 많이 뿌리면 오히려 식물이 죽는 것과 같다. 지나친 도움은 오히려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것을 방해한다. 중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1951년에 중국 정부가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한 이래 교회를 박해하였다. 성경을 압수하고 교회들을 폐쇄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50년 만에 거의 1억 명 가까이의 신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철수했을 때 오히려 교회는 부흥이 되었다. 단적인 예인지는 모르지만 외부의 지원이 없을 때도 교회는 자체적으로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있다. 교회의 성장은 자립할 경우에 가장 왕성해진다.

교회는 자체 안에 자기 자신의 종류대로 재생산 하도록 하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식사를 할 때마다 식물들과 동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재생산의 능력의 열매를 먹는다. 문 밖을 내다보라. 어디에나 잡초들, 나무들, 새들, 벌들, 아기들과 꽃들이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소리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재생산은 하나님의 방식이다.

 

7) 선교사 자신의 삶 때문이다.

선교사가 현지교회의 건축을 중심으로 사역을 할 때 선교사 자신에게 손해가 있다. 영성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건축이 말씀과 기도생활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 선교사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내가 했다라는 교만한 생각이 들게 된다.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든다. 한국에서도 많은 목사들이 교회 건축을 하는 기간에는 영성을 지키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사의 정체감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선교사의 참된 정제감은 하나님의 깊은 관계 속에서 깊은 영성과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선교사의 참된 정체감이지 건축을 해주는 건축사의 일이 선교사의 정체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8)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는 복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건물을 세우는 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선교사는 사람을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는 사역을 해야 한다.

선교의 목표는 현지인의 자립이다. 또한 자립을 넘어선 재생산에 있다. 자립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다. 재생산을 할 수 있을 때 그 나라의 선교는 완성된다. 한국이 그 예이다. 선교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그 나라 선교가 완성되는 것은 바로 선교사를 자유롭게 파송할 때이다. 선교지를 말할 때 선교사가 필요한 지역인가, 아닌가 하는 기준은 재생산을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이다. 필리핀은 어떠한가? 재생산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선교가 필요한 지역이다. 선교사를 너무 많이 보낸 선교지라고 더 이상 보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많이 보내놓고도 아직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계속 보내야 한다. 그리고 토착교회를 세우는 바른 선교로 전환해야 한다.

 

 

III. 은사(재능/ 전공: 전문성)에 따른 전략

 

1. 은사(재능/전공)에 따른 선교를 한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언어, 문화, 선교훈련인가? 첫 번째는 교회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교회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교회생활을 잘 해야 한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면 선교지에서 선교사역도 잘 할 수 있다. 때로는 교회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이 선교사가 되면 문제가 생긴다. 교회생활이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교사로, 성가대로 여러 가지로 봉사를 한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제자를 양육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준비할 것은 자신의 은사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을 살리는 것이다. ‘이것만은 내가 최고다라는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이 꼭 영적인 일일 필요는 없다.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일 필요도 없다.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면 된다. 그것으로 선교하면 된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나 능력이다. 혹은 후천적으로 얻은 전공분야를 포함한다. 성경은 은사를 강조한다. 성경은 은사에 따라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한 사람에게 지나친 집중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은 은사에 따라 사역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인들은 은사에 따라 사역하는 분위기보다는 권위나 서열의식에 따라 사역하는 것을 좋아한다. 은사가 별로 없어도 연장자이기에 하는 경우도 있다. 은사가 없어도 현실의 필요가 있기에 하는 경우도 있다. 은사보다는 주변의 환경에 따라 사역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현지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있기에 자신의 은사가 아니어도 그 일을 하게 된다. 은사에 따라 사역하는 것은 때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기 때문에 은사에 따라 사역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은사에 따라 사역하기 위해서는 협력과 팀이라는 기본 틀 속에서 해야 하는데 그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은사에 따라 사역하지 못한다. 협력사역을 할 경우 때로는 지도자가 아니라 추종자의 위치가 되어야 하는데 선교사와 후원교회는 추종자가 되기 싫어한다.

은사의 원리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기본 원리이다. 그래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지금 가진 은사가 있다면 그것에 집중해서 일을 할 경우에는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된다. 어떤 분야이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기여하는 것이 된다.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전문성이 부족하다. 선교사들은 서로 비슷한 사역을 하고 서로 사역을 바꾸어 놓아도 별 이상 없이 돌아간다. 그 결과 현지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전문성이 부족하다. 계속 발전되고 성장되어야 할 그 분야의 탁월함이 부족하다. 이것은 선교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다.

 

2. 은사를 발견한다.

선교사는 자신의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사역지나 사역 형태를 찾고 그 은사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자신만의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인 선교 략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그것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전문성이 무엇인지를 빨리 찾으면 찾을수록 좋다. 예를 들면 목회자라면, 설교, 성경 공부, 제자훈련, 어린이 사역, 청소년 사역, 캠프 사역, 상담, 신학교 교수 사역 등 자신의 것을 발견해야 한다. 전공의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좋다. 성경공부 중에서도 요한복음 하나라도 깊게 연구하는 것이다. 자신이 컴퓨터 기술자라면 컴퓨터도 여러 가지가 있다. 프로그램 만드는 것, 동영상 만드는 것, 그래픽 만드는 것, 컴퓨터를 고치는 것 등 다양한데 그 중에 잘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3. 은사를 계발(발전)한다.

은사를 찾았으면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 최고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전공을 계속 발전시키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전문성(성경 지식, 기독교 세계관, 제자훈련, 전도 등)을 키우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은사를 잘 개발하는 사람이 참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자기만의 특별한 장점을 계속해서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4. 은사를 통한 사역의 장점이 있다.

1) 협력선교를 할 수 있다.

선교사가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전문성이 탁월할 때, 협력선교를 할 수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협력사역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은사나 실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 대신에 각자가 자신의 은사가 탁월할 때는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협력이 이루어진다. 다른 부족한 분야 때문에 자신의 은사를 발휘하는데 시간 낭비하지 않게 된다.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을 혼자 다해야 하기에 자신의 은사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없다. 다른 사람과는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은사를 주신 이유가 바로 협력사역을 하기 위해서다.

부흥의 요소가 무엇인가?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의 힘과 능력이 크게 나타나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의 3대 요소는 회개(기도)와 성경(말씀)과 협력(연합)이다. 이 세 가지가 있으면 부흥은 일어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부흥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다. 자신의 은사가 탁월하지 못해서 협력사역을 하지 못한다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기 어렵다.

 

2) 선교의 효과가 나타난다.

선교사가 자신의 은사와 전공이 확실하고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면 선교지 사람들은 선교사를 존경한다. 탁월한 전공이 있다는 것은 선교지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자를 받기 어려운 선교지가 많다. 선교지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비자를 내준다. 선교사가 자기 전공이 확실하면 선교지 사람들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사역의 효과도 크게 나타난다.

중국에 한 비즈니스 선교사가 있었다. 현지인들과 성경공부하다 발각 되었다. 중국 공안이 와서 회사를 수색하고 조사하였다. 그런데 그 회사가 중국에 큰 도움을 주는 회사였다. 성경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이 선교사는 중국에 이익을 주는 회사를 운영했기에 쫓겨나지 않았다. 자기 은사나 전공이 불확실하면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저 아는 것을 가지고 대충 복음을 전해야지 하는 생각은 안 된다. 한국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선교사로 안 나가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 직장이나 인생에 실패해서 선교사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에서도 잘 할 수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이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

 

3) 은사계발을 위해 전공을 준비한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 사람도 일을 맡길 때 일을 할 만한 준비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일을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다. 선교사가 해야 하는 사역은 바로 준비와 비례한다. 자기 은사계발, 전공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사역이다. 피아노 연습 없이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 피아노로 선교하려고 한다면 피아노를 열심히 쳐야 한다. 준비한 만큼 사역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 즉 학생이면 지금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사역이다. 공부를 해야 할 때 공부하지 않는 것은 지금 사역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자기계발은 평생 해야 한다.

유기농 상추를 재배하는 장안 농장의 류근모 사장에 대한 이야기기 있다. 장안 농장은 일 년에 상추로만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다. 류 근모 사장이 성공한 농장을 이룬 비결은 바로 독서에 있었다. 그는 고백하기를 농부도 공부해야지 농사를 바로 지을 수 있다고 한다. 그가 개발한 아이디어들은 모두가 책을 보면서 나왔다. 그는 일 년에 300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300권의 책이면 주일을 빼고는 매일 한권씩의 책을 읽어야 한다. 농부가 매일 한권씩의 책을 읽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책을 읽지 않으면 농사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농부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실제로 그는 책이나 신문과 TV에서 접한 각종 지식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사업에 접목시켰다. ‘섞어 심기농법이 바로 공부의 결과물이다.

 

4) 은사를 통한 사역 찾기

한 학교 미술 선생님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가 되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선교를 하려면 그림 그리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은사인 그림을 통해서 선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선교지의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칠 수 있다. 미술학원을 할 수도 있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상담 치료를 할 수도 있다. 그림을 통해 선교사들의 취미생활을 도울 수 있다. 선교사들을 멤버케어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여러 개가 있다. 이처럼 선교사는 자신의 은사를 통해 사역을 찾을 수 있다.

 

5) 은사를 통한 선교지 찾기

선교사는 은사대로 사역하면 되고 은사대로 선교지를 선택하면 된다.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우연한 기회에 선교지에 대한 마음이 끌려서 선교지를 선택한다. 단기 선교 한번 가보고 그곳으로 선교지를 결정한다. 잘 아는 선교사가 자가기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해서 선교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파송교회가 가라고 해서 선교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지는 자신의 은사와 전공에 맞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

추수지역에 은사가 있는 사람은 추수지역으로 선교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은사가 미전도지역에 더 맞으면 그곳으로 정하면 된다. 전도가 은사인 사람은 미전도 지역으로, 가르치고 양육에 은사가 있는 사람은 추수지역으로 가는 것이다.

 

6) 은사를 통한 멤버케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선교사 멤버케어를 할 수 있다. 자신의 은사와 직업이 교사라면 선교사 자녀를 케어할 수 있다. 자신의 직업이 의사라면 선교사의 병을 치료해줌으로 멤버케어 할 수 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후원을 통해 멤버케어 할 수 있다. 상담가라면 선교사들을 상담을 통해서 멤버케어 할 수 있다.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선교사의 영적, 육적,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은사를 가지고 선교사의 은퇴를 도울 수 있다. 은사에 따라 선교사의 자녀를 도울 수 있다. 은사를 가지고 안식년 선교사를 도울 수 있다.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선교사 멤버케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7) 은사를 통한 비즈니스 사역 및 기타 사역

(1)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은 비즈니스를 통해서 선교를 할 수 있다.

(2) 언어에 은사가 있는 사람은 성경 번역 선교를 할 수 있다.

(3) 자동차 기술을 가진 사람은 자동차 기술 학원을 통해 사역 할 수 있다.

(4) 운동선수는 운동을 통해 선교할 수 있다( 태권도, 검도, 축구 등).

(5)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 사역할 수 있다.

(6) 컴퓨터 기술자가 선교사가 되어 전도를 위해 영화나 동영상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7) 성경 번역 선교사가 오지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경비행기를 조종하여 생활 용품을 전달할 수도 있다.

(8) 다른 선교사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선교사들의 필요를 점검하고 행정적인 일로 사역을 할 수도 있다. 선교단체의 선교사와 간사들도 이에 해당한다.

(9) 전도와 양육을 위해 문서를 만드는 선교사도 있다.

(10) 선교사에 대한 평가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했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전공을 활용하여 얼마나 복음전파에 기여하고 있느냐를 보아야 한다. 몇 십 년 동안 사역해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선교사의 삶이 선교에 궁극적으로 세계 복음화를 위해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선교란 제자 삼는 사역이라는 말에 동의하는가?

2. 제자 삼는 사역에 대해 자신은 어느 정도 준비되었는가(제자훈련을 받았는가? 제자를 훈련한 경험이 있는가?)?

3. 선교지의 교회를 건축해줄 때의 위험성을 줄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교회개척이 될 것인가?

4. 선교를 위해 자신의 은사 혹은 직업을 바꾸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5.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어떤 사역을 할 수 있는가?

 

<부록 1> 교회 개척의 실제

1. 교회건축은 교인들의 힘으로 하였다.

필자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면서 1년이 지나자 교인들이 늘어갔다. 처음에 빌렸던 한 달에 4불짜리의 조그만 모임 장소가 좁았다. 교회 건축이 필요했다. 필자는 교인들에게 땅을 사고 교회건축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필자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땅 값과 건축 비용은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이 큰 예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계속해서 성도들을 격려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가르쳤다. 마침내 적절한 땅이 나와 계약을 하였다. 가격은 미화 만 불이었다. 6개월 만에 잔금을 치러야 했다. 30-40 명밖에 안 되는 교인들로서는 무리였다. 그들의 수입은 가정당 한 달에 100불도 안 되었다. 그것으로는 가족들이 세끼 먹는 것도 부족하였다. 그들이 사는 집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현지인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땅값을 위해 필자가 먼저 헌금하지 않았다. 현지인들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었다. 교인들은 그 때부터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였다. 일한 수입으로 부지 비용을 위한 헌금을 하였다. 어떤 교인은 빵을 만들어 길거리에 나가 팔기도 하고 또 다른 성도는 집에서 기른 닭이나 돼지를 팔아 땅 값을 위해 헌금을 하였다. 꼭 필요할 때 쓰려고 모아 두었던 저축 통장을 털었다. 이 교회를 개척했던 모교회도 이 일에 도움을 주었다. 모 교회는 10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200불의 헌금을 모아 놓았다. 그만큼 그들의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감사하게도 결국 6개월 만에 빚이 없이 잔금을 치렀다. 잔금을 치룬 날 교인들은 감격해서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기적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하였다. 건축을 통해 또 한 번 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건축을 하도록 결의를 하고 건축은 시작되었다. 공사를 위해 교인들은 매주 모여 함께 노동을 하였다. 어린 아이들까지 돌을 나르고 땅을 고르고 벽돌을 쌓았다. 6개월 만에 1층이 완공되었다. 1층까지 공사비용은 만 불이 들었다. 그 동안 필자는 건축을 위해 한국교회에 따로 모금하지 않았고 특별 건축 헌금도 하지 않았다. 교인들에게는 매정한 일처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건축은 현지교인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필자는 그 교회를 교인들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철수하였다. 필자가 나온 한 달 후에 새로 건축한 교회로 이사하였다. 필자가 교회 헌당식을 뒤로 미루고 나온 것은 그들 스스로 이룬 교회, 그들 스스로 기쁨을 만끽하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필자는 개척한지 2년 만에 현지인들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건축하게 하고 그리고 그곳을 떠나왔는데 지금도 그 교회는 필자가 양육한 현지인 사역자에 의해 성장하고 있다. 그동안 2층 건축도 완공을 하였고 새로운 교인들도 많아졌다.

 

2. 교회건축의 방법에서도 현지인들의 문화와 방법을 따랐다.

어떤 선교사는 현지인의 교회를 건축해주면서 한국에서 설계사를 데리고 간다. 심지어는 건축 자재도 한국에서 가져가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져가는 것이 자재의 질이 좋고 더 싸다는 이유이다. 선교사가 주도해서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물리적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들의 방식으로 교회를 건축하였다.

 

3.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다.

필자는 우리 교인들이 교회가 자신들의 것이라는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교인들이 바른 교회관을 갖도록 교회에 대해서 수시로 가르쳤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주는 것이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4. 교인들의 수준대로 물건을 사용하였다.

교회 물품을 구입하는데 있어서 현지인의 수준에 맞게 하였다. 선교사가 목회하는 교회라서 더 좋은 물품을 구입하는 것을 자제 하였다. 선교사가 없는 현지인 교회들의 수준으로 칠판이나, 의자, 강대상, 성경공부 교재 등을 사용하였다. 선교사가 없어도 스스로 구입할 수 있는 수준에서 물건을 구입한 것이다. 그 때 당시에 어떤 선교사들은 프로젝터나 컴퓨터를 사용했는데, 다른 현지인 교회들은 그것을 사용할 능력이 없었다. 필자는 화이트보드를 사용하는 것도 자제하고 흑판을 사용하였다. 모든 것을 현지인들이 마련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하였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선교사가 사주는 것이 아니라 교인 스스로 목적 헌금을 해서 하도록 하였다.

 

5. 교회개척과 교인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고 대우하였다.

교회는 어떤 수단이 아니라 바로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였다. 현지인도 마찬가지로 현지인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교회개척을 하면서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선교사의 사역을 확장하기 위해 혹은 후원금을 더 받기 위해 교회 개척을 이용하여 후원자들에게 광고하고 요청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현지인 자체가 목적이고 중요하기에 그들의 사진을 찍어 후원자들에게 보내지 않았다. 필자는 기도편지에 넣기 위해 아예 사진을 찍지 않았다. 가끔씩 교회 역사 기록을 위해 교인들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기는 하였다. 교회 건축하는 장면을 찍어 기도편지에 사용하지도 않았다.

필자의 아내가 현지인 장애인 재단에서 사역을 하였었다. 함께 협력해서 그 재단에서 사역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어느 날 아내에게 중증 장애인 아이들이 누워 있는 사진을 찍어 선교 편지에 함께 보내면 후원에 많은 도움이 되는데, 왜 사진을 찍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애인들을 존경하기 때문이고 그들을 통해 선교사의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국인 선교사와 함께 시골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교회는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 연합회 소속의 교회였기에 필자는 자주 방문하는 곳이었다. 미국인 선교사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정말 시골 외진 곳이고 그곳 사람들은 교육은 받아보지 못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곳을 방문하자마자 미국인 선교사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필자를 잘 아는 교인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 미국인 선교사는 저 사진 찍어 후원을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그 말을 듣고 많이 놀랐다. 시골 외진 곳에서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선교사의 상황과 심리를 이렇게 까지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란 것이다. 선교지 현지인들은 비록 가난하고 못 배웠어도 선교사들을 잘 알고 있다. 선교사는 선교사가 하는 선교나 교회개척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6. 현지인 지도자를 양육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인들을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서 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른 일보다 교육시키는 일을 중심으로 하였다. 지도자 교육을 하기 위해 교재를 개발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교회에서는 그들이 성경공부를 인도할 수 있도록 자료를 주고 기회를 주었다.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철수할 때는 설교 계획, 성경 공부 계획, 모임 계획을 세워주었다. 교회행정도 그들이 할 수 있도록 맡겨 주었다. 재정도 그들이 할 수 있도록 위임하였다. 세례나 다른 교회 예식을 할 때도 필자 혼자서 다 계획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패도 있었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필자의 초점은 필자가 이 교회를 이양했을 때(떠날 때)를 생각하였다. 교회의 어떤 행사든지 간에 교인들이 직접 경험을 해 보도록 하였다. 혼자서 원 맨 쇼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는 잠간 있다가 갈 사람이고 교인들이 이 교회의 주인이요, 앞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행사를 진행하였다. 필자가 없어지면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은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필자만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외부 자원, 인력을 끌어 올 수 있는 것들은 잠시 전도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진정한 도움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런 프로그램들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일회성으로 해도 장기적으로 현지인들에게 별 무리가 없는 것은 진행하였다. 예를 들면 의료 팀을 불러 치료해주는 일들은 일회성으로도 의미가 있기에 진행하였다. 그렇지만 연속성을 필요로 하는 것 중에 현지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전도하고 교육하는데 투자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맞는 교회개척 전략, 전도전략을 구상하고 만들고 실현하는 일들을 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선교전략, 토착 교회개척 전략, 지도자 양성전략, 전도전략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7. 토착교회 결과 평가

1) 가난한 지역, 교육 수준이 낮은 지역의 토착교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2) 토착교회야 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

3) 교회개척 원리대로 실천할 때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는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토착교회야 말로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선교의 전략 중에서 토착교회 전략이 선교지 나라와 교회를 변화시키고 확장 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한국 교회가 해야 할 세계 선교 전략은 토착교회 개척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선교의 경향, 선교 전략은 토착교회 설립에 맞추어져야 건강한 선교, 효과적인 선교, 성육신의 선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