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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4-5강 추수지역 선교와 프로젝트성 선교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4학기

제 4-5강 추수지역 선교와 프로젝트성 선교

후앙리 2020. 4. 21. 19:09

 

차례 

제 1부 추수지역 선교(중남미)

I. 서론

II. 선교지 분류

III. 한국 선교 동향

IV. 추수지역 선교의 필요성

V. 추수지역으로서의 중남미

제 2부 프로젝트성 사역

I. 서론

II. 프로젝트성 사역의 정의

III. 한국인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되는 이유

IV. 프로젝트성 사역의 부정적인 면

V. 프로젝트 선교의 장점. 그리고 약점의 해결 방안

VI. 프로젝트성 사역의 실례들

VII. 결론

 

제 1부 추수지역 선교(중남미)

I. 서론

몇 년 전에 한 선교 세미나에서 강사가 선교사 재배치와 미전도 종족 선교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지금 한국 선교사들은 몇몇 지역에 치우쳐 있어 이제는 선교사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의였다. 현대 선교에 대한 패러다임이 미전도 종족으로의 재배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곳에 있었던 참석자들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선교사 재배치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결국은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상대를 비방하는 모습으로 세미나는 끝이 났다. 한국 선교계에서는 미전도 종족 선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선교를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해 소수의 사람들만이 한국 선교의 흐름이 한쪽으로 기우려서는 안 된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 미전도 지역이건 추수지역이건 간에 서로 균형을 이루어 협력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선교사들이 집중해야 할 선교지는 어디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선교지는 온 세계가 되어야 한다. 모든 세상이 선교지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결론적인 것을 부인하고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선교를 방해하는 것이 된다. 세상은 넓고 이 넓은 세상에 다양하게 나가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다른 은사와 관심을 주셨다. 하나님은 온 세계가 다양한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화 되기를 바라신다. 이것을 전제로 선교 계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추수지역 선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전도 지역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추수지역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전도 지역 선교에 대해서 부인하거나 축소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추수지역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II. 선교지 분류

선교지는 크게 두 지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도 지역과 미전도 지역이다. 전도 지역은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다. 이것은 복음이 단순히 들어가서 믿는 사람이 있다는 차원이기보다는 복음이 들어가서 자생하는 교회가 있다는 차원이다. 현지인들이 인도하는 자생하는 교회가 하나라도 있으면 전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도지역을 추수지역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들어갔고 교회가 세워졌으니 이제는 그 토착교회가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 벗어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용어로 열린 지역이라고도 말한다. 추수지역은 이미 문이 열려서 선교사가 자유롭게 들어가 복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추수하기 위해 위해서 전략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지역이 된다. 추수지역은 중미와 남미, 북부 모슬렘 지역을 제외한 중남부 아프리카, 동남아 중에서 일부 일본이나 필리핀, 인도와 같은 곳을 말한다.

반면에 미전도 지역이란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지역이다. 다른 의미로는 자생교회가 없는 지역을 말한다. 선교사 비자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말하기도 한다. 이 지역을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도 한다. 공식적인 선교사 비자로가 아닌 창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미전도 지역의 대부분은 북위 10-40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10/40 창문 지역이라고 한다. 닫힌 지역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이 지역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선교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씨를 뿌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터를 닦는 사역을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미전도 지역은 모슬렘 지역이 이 부류에 속하고 중앙아시아, 중국, 동남아, 복음화 율이 낮은 유럽도 미전도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III. 한국 선교동향

한국교회에서 미전도 종족 선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하도고 중요한 사실이다. 지금도 복음을 몰라 죽어가는 사람들과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으면서도 닫힌 지역인 중국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선교에 대해 갖는 관심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선교 후보생들은 많은 사람들이 미전도 지역으로 나가고자 한다. 반면에 추수지역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해야 하기에 지금까지 소홀히 해온 지역인 추수지역도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균형 잡힌 선교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추수지역 선교에 대한 선교단체도 필요하고 전략도 필요하다.

 

IV. 추수지역 선교의 필요성

 

1. 하나님 나라의 비전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세상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잘 표현한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이 세상 모두가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똑같이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미전도 지역사람들 뿐만 아니라 추수지역 사람들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미전도 지역을 사랑하시며 추수지역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복음이 필요한 곳 뿐 만 아니라 이미 복음화 되어 있는 미국이나 한국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한국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나라도 똑같이 사랑하시기에 선교를 하는 것이다. 선교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하나님은 한국만 사랑하고 계신다는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선교에 동참하는 사람마저도 어느 지역은 하나님이 더 사랑하고, 어느 지역은 덜 사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교지를 추수지역과 미전도 지역으로 지나치게 구분하여 한쪽만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세계를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르게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지역이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모두 똑 같이 사랑 하신다.

창세기 1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가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다. 부모가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모든 자녀가 똑같은 부모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에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편협 된 마음을 버리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영적 세계 지도를 통해서 추수지역 선교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에 대해서 영적 세계 지도를 그려볼 수 있다.

 

위의 영적 지도에서 선교지는 모든 곳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느 지역이든지 다 선교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도지역이나 추수지역 모두에 선교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어느 곳이 더 효과적인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선교사가 독립하고 자립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자립하는 교회 다음에 재생산하는 교회가 있다. 선교사의 목표를 한 단계 올려서 재생산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선교사가 추수지역에 가서 그 지역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선교사를 또 다른 나라에 보내는 교회가 될 때까지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교지의 교회가 재생산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선교사에게 있다. 선교사가 추수지역에 가서 선교지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선교사로 갈 수 있을 때까지 현지인을 양육하고 성숙하도록 사역 하는 것이다. 중남미에서 다른 나라에 파송한 선교사는 현재 만 명이 넘는다. 앞으로 중남미는 더 많은 선교사를 다른 지역으로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중남미 사람들이 선교사로 나가도록 양육하고 격려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 선교사의 책임이다.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략적으로도 효과가 있다. 추수지역으로 한 선교사가 갈 때 그곳 사람들을 선교사로 양육한다면 그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나가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지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은 세계 복음화를 속히 이룰 수 있는 꼭 필요한 선교의 전략이다.

한국 성도들은 선교사를 만나면 지금까지 몇 명이나 전도하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선교사는 전도만 하러 가는 사람이 아니다. 전도하는 것으로 평가받아서도 안 된다. 선교사는 전도도 해야 하지만 양육도 해야 한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양육시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교란 숫자로 쉽게 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슬렘 지역에서 선교사가 평생을 두고 한 사람을 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어렵다. 이런 선교사에게 개종하는 숫자를 요구했을 때, 선교사는 조급하게 되고 편법을 쓰게 된다. 거짓 보고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숫자로 계산해서 그 지역에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이유로 선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숫자를 세기 이전에 그곳 그리스도인이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 그리스도인들이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숫자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일 년에 몇번 정도 교회에 나가는 사람으로 이름만 신자이다.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에는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종교를 표시해야 한다. 그곳에는 모슬렘과 기독교의 두 종류의 종교가 있다. 모슬렘이 되기 싫은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에 표시를 한다. 아프리카의 르완다도 마찬가지다. 르완다는 90%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이전에 르완다에 90%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 50만 명을 죽였고 나라는 비참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90%라고 하더라도 복음이 없는 나라와 같은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것이다.

새신자는 아직도 복음에 있어서 기저귀를 차고 있는 사람들과 같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기저귀를 뗄 때까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어머니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젖을 먹이고 자랄 수 있도록 양육을 한다. 아이가 기저귀를 뗄 때까지만 어머니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학교에 다니고 커서 결혼할 때까지 부모 도움은 여러 가지로 필요하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가 독립할 때까지 도와주어야 한다. 심지어 한국 부모들은 자녀가 결혼한 후에도 도와준다. 선교지에 영적인 기저귀를 차고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양육해야 할 책임이 선교사들에게 있는 것이고, 그 지역에 선교사를 계속 파송해야 하는 것은 선교사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미 문이 열린 지역에 들어가서 세워진 교회를 도와 그들이 자립하고 성장하여 선교사를 내 보낼 수 있도록, 재생산하는 교회가 되도록 격려하고 양육해야 하는 책임이 선교사에게 있는 것이다.

 

3. 선교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2818- 20절에는 예수님의 최후 유언인 지상명령이 나온다. 이 구절을 보면 동사가 나온다. “가라, 제자를 삼아라, 세례를 주라, 가르치라, 지키게 하라는 동사다. 이 동사 중에서 주동사는 제자 삼으라이다. 제자 삼으라는 의미는 전도와 양육을 포함한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는 세계 복음화가 아니라 전 세계 제자화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제자 삼는다는 의미는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 제자 삼는다는 의미이다. 전도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전도의 관점에서만 선교를 바라보면 안 된다. 제자화의 관점에서 선교를 바라보아야 한다. 선교사는 전도하고 양육도 시키는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선교는 전도 지역이건, 미전도 지역이건 간에 양육과 성장이 포함되는 일이다.

 

4.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사역의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들의 숫자는 선교사의 숫자보다 더 많다. 목회자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목회자들은 전도와 양육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한국 목사에게 몇 명을 전도했느냐고 질문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한국 목사에게는 교회 크기가 얼마나 되며, 교회 양육프로그램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한국 교회의 목사들은 주로 양육을 위해 일한다는 의미이다. 목사들은 대부분 양육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 목사들 중에는 문서 사역을 하는 목사, 고아원을 위해서 일하는 목사, 병원에서 위해 일하는 목사, 직장이나 학교에서 사역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런 사역들을 특수 목회라 한다. 마찬가지로 선교사도 선교지에서 특수 목회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전도만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은 성도들을 위해 양육하는 목사들이 분명히 필요하다. 한국 교회에 수 만 명의 목회자가 필요하다면, 어떤 선교지든지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할 뿐이지 재 배치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추수지역에 많은 선교사가 있고 그들이 양육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그곳에 파송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5. 미전도 종족 입양운동은 많은 선교전략 중에 하나이다. 미완성된 지역의 복음화를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전략적인 차원에서 생긴 개념이 미전도 입양 운동이다. 이 입양운동은 선교 역사상 있었던 수 백 가지 전략중의 하나이다. 추수지역을 지지하고 있는 교회 성장학도 선교 전략중의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는 단 하나의 전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는 자신에게 필요한 전략을 가지고 균형성 있게 효과적인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전도 지역 선교만을 전부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6. 이제 막 열린 추수지역을 두고 미전도 지역으로 다시 옮긴다면 지금까지의 투자는 헛되게 된다. 추수지역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미전도 지역이었다. 미전도 지역이 열릴 때까지 많은 선교사들이 씨를 뿌리는 사역을 해왔다. 참고 기다리면서 사역을 하여 이제 문이 열리게 되었다. 어렵게 문이 열려 열린 지역이 되었는데, 문이 열렸다고 해서 그 지역을 내버려 두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면 그 동안의 수고가 다 헛되게 돌아가는 것이다. 또 다시 그 지역이 미전도 지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런 대표적인 곳이 유럽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은 다시 선교사를 받아야 하는 미전도 지역이다.

 

7. 실제적인 전략 차원에서도 추수지역이 중요하다. 은사 측면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추수지역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선교사를 은사에 따라서 부르신다. 선교사는 은사에 따라서 선교지에서 사역을 한다. 만약 추수지역에 은사를 받은 사람이 미전도 지역에 간다면 그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음악을 전혀 배우지 못한 운동선수가 음악을 위해 일하는 것은 잘못된 것과 같다. 추수지역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미전도 지역으로 가면 잘못된 것이다. 미전도 지역에 대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미전도 지역으로 가고 추수지역에 은사를 받은 사람은 추수지역으로 가야 한다.

파송과 관리 면에서 추수지역이 더 쉽기 때문이다. 미전도 지역은 추수지역에 비해서 파송과 관리 면에서 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통신도 자유롭게 하기 어렵다. 닫힌 지역은 공안원에 잡혀 갈수도 있고 납치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추수지역보다 많다. 선교본부는 선교사의 생명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고 또한 안전 문제에 있어서 철저히 감독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선교단체 본부에서 선교사를 관리하기에는 추수지역이 더 쉬운 면이 있다. 물론 관리가 어렵다고해서 미전도 지역으로 선교사를 보내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간의 급박성 때문이다. 씨는 언제든지 다시 뿌릴 수 있지만 이미 씨를 뿌려 자란 곳은 열매를 거둘 시기가 지나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추수 때를 놓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다시 투자 되어야 한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에 해야 한다. 농촌에는 추수 때인 가을이 모네기 때인 봄보다 더 바쁘다. 시기를 놓치면 일 년의 수고가 헛되기 때문이다. 미전도 지역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추수지역에도 동일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 성장 측면에서 유리하다. 복음의 수용성이 많은 곳에 교회를 세워야 성장한다는 전략이 있다. 그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왔고 목회자들이 그런 방법으로 사역하고 있다. 미전도 지역은 복음의 수용성이 낮은 곳이고, 추수지역은 복음의 수용성이 높은 곳이다. 추수지역이 교회성장을 위해서 더 전략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략이 추수지역 선교만을 해야 한다는 그런 주장은 아니다. 교회 성장의 관점에서 추수지역이 유리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 세계 복음화에 기여토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작업을 이루어 가시는 일을 하신다. 추수지역은 선교사가 마음 놓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한국인의 성품은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 사람보다도 급하고 일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불편해 하는 성격을 지녔다. 일을 많이 하는 측면에서 한국 사람들의 특성은 개척지보다는 추수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V. 추수지역으로서의 중남미

 

1. 중남미 선교가 관심이 적은 이유

필자가 1994GMP 선교회에 소속 선교사로 허입이 되었다. 허입 될 당시에 허입을 위한 면담을 하는데 당시 GMP 선교부 총무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당신은 성격이 차분하고 조용하고 온화하다. 그에 반해 남미 사람들은 정열적이며, 다혈질인 사람들이다. 당신이 그곳 지역의 선교사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이었다. 필자가 그 당시에 어떻게 대답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필자가 선교지에 가서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중남미 사람들은 선교부 총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혈질 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필자는 한국인으로서 오히려 성격이 급하고 빨리 빨리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필자가 선교지에서 고생한 것은 느리고 반응이 더딘 사람들의 성격에 맞추는 것이었다. 선교부 총무는 필자와 중남미에 대해 정반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중남미에 대해서 겉으로만 알고 있지 깊은 내용은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선교부 총무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중남미는 지리적으로 한국의 정반대에 있는 대륙이다. 한국 교회의 중남미 선교는 거리만큼 먼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단지 지리적으로 멀어서만이 아니라 중남미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리적인 요인 때문이다. 중남미는 한국에서 지리적으로 제일 먼 곳이다. 아프리카보다 더 먼 곳인 이유는 한국의 지구 정반대가 바로 중남미의 페루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직선으로 땅을 파면 페루가 나온다. 지구의 정반대이기 때문에 가장 먼 곳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그곳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남미 에콰도르에서 사역할 때 단기 선교 팀이나 필자의 지인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필자의 가족과 파송 교회도 올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만 24시간이 걸린다. 비행기는 두세 번 갈아타야 한다. 가는 시간만 이틀 정도 잡아야 한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나라는 에콰도르보다 더 멀기에 비행기를 30시간이상 타야 한다. 방문자가 오기 힘든 지역이다. 그러나 필자는 거리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경험을 하였다. 페루에 마추피추(쿠스코)라는 세계 4대 불가사의한 잉까 문명지가 있다. 페루 수도 리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고산지역에 올라가서 기차를 타고, 그리고 버스타고 또 걸어서 가는 먼 곳이다. 옛날 스페인 정복 시대에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이다. 산골중의 산골에 세워진 원주민 도시다. 그래서 스페인이 지배했을 때 정복자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곳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찾지도 못할 만큼 숨겨진 도시이다. 이 도시에 세계 불가사의한 건축물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세우기 어려운 무겁고도 큰 돌들을 옮겨 도시를 만들었다. 정말 신비로운 곳이다.

20년 전에 필자의 파송교회 담임 목사님이 남미에 오셨다. 에콰도르에는 비자를 받지 못해 오지 못하셨다. 필자가 페루에서 만나 목사님과 함께 마추피추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필자는 그곳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멀고도 가기 어려운 곳에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있었다. 그날 우리 팀의 관광 안내원이 전날도 한국 팀이 와서 한국 사람들을 가이드 했다고 한다. 그 때 그곳에 가장 많이 오는 관광객은 한국 사람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페루 위에 있는 나라인 에콰도르에서도 가기 힘든 나라인데, 한국에서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곳에 가려면 적어도 2-3주는 잡아야 하는 곳인데 한국 사람들이 그 곳까지 가는 것을 보면서 선교에 있어서 거리는 별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필자는 그 때 선교사를 방문하거나, 선교사로 가는 것은 관광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인데 왜 선교사로는 오지 않고 관광으로는 오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좋은 것이면 찾아가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선교사들이 중남미에 잘 가지 않는 것은 거리가 아니라 관심 부족이라는 것이다. 중남미가 선교지로서 멀어서가 아니라 관심을 가질만한 기회가 적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남미를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중남미 종교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중남미는 선교사와 복음이 이미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해다.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 선교사가 중복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중남미의 종교가 가톨릭이고 중남미가 가톨릭 대륙이기에 선교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오해를 하고 있다. 뒷부분에서 중남미 가톨릭에 대해 살펴보면서 이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한국 교회의 선교를 하는 태도 때문이다. 교회와 교인들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 선교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중남미는 거리상 멀어서 자주 방문하기 어렵기에 중남미에 선교사를 파송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보다는 자기 교회의 이기주의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된다. 교회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런 이유가 선교의 균형을 깨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선교를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필요하고 중요하다면 교회가 좀 손해 보더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

선교 운동가(동원가)들의 역할 때문이다. 일부 선교 운동가들에게 중남미는 선교지로서 별 유익이 없는 곳이다. 요즈음 선교 운동가들에게 관심있는 전략은 10/40 창문과 창의적 접근 지역 선교다. 닫힌 지역과 무슬렘 지역, 미전도 지역 선교, 전방개척 선교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다. 이런 동원 전략들 때문에 중남미 선교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전략은 전략일 뿐이다. 너무 강한 전략은 다른 한쪽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게 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선교의 전략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 전략이 또 다른 한 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에는 오히려 그 전략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선교 동원가들은 선교 동향이나 현상, 유행에 따라 전략을 세우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폭 넓은 관점에 따라 전략을 세워야 한다. 한국선교 동원 운동가들의 편협한 전략들이 중남미 선교의 관심을 줄어들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초창기에 남미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 선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민역사에서 중남미가 중요한 지역이었다. 1960-70년대에 중남미에 이민을 많이 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한인 교회를 담임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함께 이민을 갔다. 이민과 함께 갔던 목사들이 초창기에는 선교사로 분류되었다. 그들이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한 부분이 많다. 외국에 선교사를 잘 파송하지 못하는 시절에 한인교회를 담임했던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에 동기부여를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기도편지와 선교보고에 의해 선교에 대한 눈을 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중남미에는 오히려 역작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미 선교하면 현지인 선교가 아닌 한인들을 위한 선교로 인식이 된 것이다. 남미는 한인 선교를 하는 곳이지 선교지가 아니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2. 중남미의 종교, 문화, 사회적 배경

1) 교황과 코카콜라

중남미는 로마 가톨릭과 자본주의가 팽배한 곳이다. 로마 가톨릭을 대표해서는 교황이, 자본주의를 대표해서는 코카콜라가 상징적으로 드러난 대륙이다. 교황과 코카콜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대륙이다.

 

2) 중남미의 문화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대표되는 라틴계 서구 문화와 마야, 잉카 문명을 비롯한 토착 문화 세력이 합쳐진 곳이다. 중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가 거의 비슷한 대륙이다. 중남미는 약 300년 가까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 영향으로 라틴 아메리카는 피지배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언어도 브라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중남미의 나라가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문화는 메스티조 문화이다. 메스티조 문화란 혼혈 문화란 뜻이다. 라틴 사람들과 원주민들의 문화가 합쳐진 곳이다. 토착문화가 정복자들에 의해 타격받고 파괴된 곳이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상실한 마음이 많다. 성당 안에 발라진 금을 팔면 나라 빚을 다 갚을 만큼 금이 많은 대륙이다.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집은 변변치 않아도 성당은 크게 지어졌고 그 안에는 금이 발라져 있다. 그러나 이 금으로 사람들 안에 있는 금을 캐내지는 못했다. 배위량 선교사는 한국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는 금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에 의해서 굴복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가톨릭을 받아들인 것이다.

 

3) 강제로 이식된 로마 가톨릭 교회

16세기 종교개혁에 가장 적대적인 스페인, 포르투갈의 가톨릭 세력에 의해 중세적인 가톨릭이 정복자들과 함께 들어왔다. 성경적인 기독교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복음이 전해졌다. 가톨릭이 전 국민의 90% 이상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다. 그들의 신앙은 성당 중심의 생활을 하는데 일 년에 한번 정도 성당에 가면서도 신자라고 생각한다. 중남미 사람들은 거의가 가톨릭 신자이지만 평생 동안 단 세 번만 교회에 간다는 말을 한다. 태어나 유아 세례 받을 때, 결혼할 때, 그리고 죽을 때 교회에 간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앙도 무속적인 요소와 혼합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유교와 혼합되어 유교인지 불교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처럼, 가톨릭도 성경과는 상관없는 무속 신앙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 그들의 가톨릭 종교에는 미신과 우상의 축제만이 있을 뿐이다.

 

4) 불평등한 이중구조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와 저 발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90%의 가난한 자들과 나라의 90%의 재산을 차지하고 있는 10%의 부자들이 있을 뿐이다. 계급의식이 국가 의식보다 강한 대륙이다. 축구 경기할 때에만 국가 의식이 있다고 말할 정도다. 국가가 위험하면 다른 나라로 쉽게 도피 한다. 도피한 나라가 위험하면 또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서 살아간다. 10%의 부자들은 요지부동한 기득권 세력이다. 이들이 지금도 중남미를 지배하고 있으며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세력이다.

 

5) 중남미의 언어

브라질은 포루투칼어를 사용하고 그 외 대부분의 나라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스페인어는 미국인의 60%가 사용하는 언어다. 스페인어는 세계적으로 중국어, 영어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6) 중남미의 인종

주요 인종으로는 인디헤나들과 메스티조가 있는데, 인디헤나는 원주민이고 메스티조는 지배자들인 스페인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족이다. 메스티조가 중남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부분을 지배하고 있고 인디헤나들은 하류 계층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중남미의 사회 구조는 인종 혹은 가문별, 그리고 경제적, 지적 수준에 따라 보이지 않는 사회 계급이 있다. 다른 계급 사이에는 인사도 안할 정도로 서로간의 간격의 벽이 크다. 선교사의 특권은 이들 모든 계급의 사람들과 다 교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이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

 

7) 중남미의 가정과 치안 문제

중남미의 문제 중의 하나는 가정 문제이다. 역기능 가정이 많다.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끝까지 사는 그런 가정들이 많지 않다. 가정이 깨지고 있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지고 있다. 가정 문제는 미혼모 문제, 성적인 문제, 고아 문제 등의 여러 가지 다른 문제를 가져온다. 중남미는 치안에도 문제가 많다.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소매치기, 좀 도둑, 그리고 폭력, 테러 등 치안의 문제가 심각하다. 필자가 살았던 에콰도르에는 자동차의 백미러 있는 차가 거의 없었다. 백미러를 도둑질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바퀴도 안전장치, 즉 자물쇠를 걸어놓아야만 안전하다.

 

8) 중남미 사람들의 성향

사람들은 온순하고 착한 면이 있다. 좀 도둑이 많이 있고 치안이 어려워도 원주민들은 순수하고 정이 많다. 에콰도르 시골에 가면 한국의 옛날 할머니들의 구수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손님으로 방문하면 감자나 옥수수를 삶아 대접하는데 깊은 정이 느껴진다. 그곳에서는 선교사가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인간의 순수함을 배우게 된다. 필자는 그곳에서 선교사로 살면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고 경험하였다.

중남미 사람들이 잘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축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춤이다. 이 두 가지를 할 때는 적극적이고 살아있는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외에는 적극적이지 않고 행동도 느리다. 일도 천천히 한다. 한국 사람이 보았을 때는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잘하는 두 가지는 그들 삶의 중심에 있다. 한국 사람의 삶의 중심에는 음식이 있다면 그들의 삶에는 축구가 있다. 축구는 단순한 취미 생활 이전에 그들의 종교다.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축구에 대한 얘기를 한다. 축구에서 인생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는 월드컵 경기에서 콜롬비아의 한 선수가 자살골을 넣었다. 대표 팀이 귀국하는 공항에서 총으로 맞아 죽는 일이 있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축구에서 지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실패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과도하게 축구에 열광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선교사로서 복음의 힘이 축구를 넘어서야 하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춤 또한 그들의 삶에서 중심에 있다. 어린 아이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 춤을 춘다. 한국 사람들은 소풍이나 혹은 야외에 놀러가서도 먹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람에게는 아무리 잘 놀아도 음식이 부실하면 그날은 잘 못 논 것이고 아무리 못 놀아도 음식만 잘 먹으면 잘 논 것처럼 생각한다. 음식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생활에 중요한 것처럼 그들도 춤을 잘 추면 잘 노는 것이다. 필자의 딸의 유치원 졸업식에 갔는데 그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졸업식 행사의 내용이 춤이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는 것이 유치원 졸업식의 대부분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축구와 춤에 열광을 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이 열정적인 사람들로 느껴지는 것이다.

 

9) 중남미의 부정과 부패

중남미 나라들은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잘 살지 못한다. 그것은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정과 부패가 심하기 때문이다. 잘 사는 사람은 아주 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아주 가난하게 산다. 중남미의 자원은 미래에 세계의 공급원이 될 수 있을 만큼 많다. 자원도 많고 땅도 비옥하고 아직 개발이 안 된 지역이 많다. 아마존 정글에서 지구의 50%의 산소를 공급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한국 사람이 에콰도르에 와서 둘러보고 한국이 자원 없이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이 기적이고 에콰도르가 이처럼 풍요로운데 못사는 나라가 된 것도 기적이라고 하였다.

 

10) 중남미의 종교와 기독교(영적 혼동)

중남미의 종교는 아주 다양하다. 그들의 중심에는 가톨릭이 있다. 그리고 많은 이단들이 존재한다. 복음이 필요하고 선교가 계속해서 필요한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3. 추수지역으로서의 중남미의 가능성

1) 대표적인 추수지역

중남미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대륙이다. 세계 가톨릭 인구가 11억 정도이고 전 세계 모슬렘은 14억 정도이다. 불교가 3억이고 힌두교가 7억 정도이다. 전 세계 종교 인구 중에 가톨릭 인구가 두 번째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가톨릭 지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선교 계에는 약하다. 모슬렘 선교를 위한 연구단체나 선교 단체는 있는데 가톨릭 선교를 위한 선교단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이 왜 가톨릭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적을까? 다음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1) 가톨릭을 정통교회로 인정하거나 (2) 아직 가톨릭의 선교에 대한 심각성과 중요성을 모르거나 (3) 열매를 거두기보다는 씨만 뿌리겠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중남미는 가톨릭 대륙으로써, 대표적인 추수지역으로써 선교의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2) 다양한 사역의 기회

중남미에는 인구가 약 5억이고, 20여개의 국가가 있다. 광대한 지역에 다양한 인종이 있다.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모그 따리카, 파나마,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푸에르토리코,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등이 그들이다. 개신교 신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어린 신자들이다. 추수지역으로써 선교가 필요한 대륙이다.

 

3) 부흥하고 있는 교회

중남미의 정치, 경제적 구조를 쇄신할 새로운 역동적인 힘으로 복음주의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중남미 사람의 11% 이상이 복음주의자라는 보고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보다 더 높은 수치를 제시하기도 한다. 브라질에 있는 복음주의자의 수는 유럽 전체에 있는 복음주의자의 수의 2배이다. 브라질에서는 이 대륙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교인보다 복음주의자의 교회 참석률이 더 높다. 성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복음의 불을 지펴주어야 할 추수지역인 것이다.

 

4) 세계 선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

1987년에는 제 1차 꼬미밤 선교대회가 있었고, 97년에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제2차 꼬미밤 선교대회가 있었다. 2006년에는 스페인에서 3차 꼬미밤 대회가 열렸다. 그 후에도 4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단일 대륙으로서는 가장 큰 선교대회라는 평가가 있다. 중남미 사람들이 직접 선교사가 되어 선교 할 수 있도록 선교의 불길을 일으키는 이러한 선교대회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중남미 지역 교회들이 세계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5) 선교의 때

중남미는 대체적으로 100년 전에 복음의 문이 열렸고 지금은 오순절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서구 선교사들은 프로젝트 성 선교로 실패하고 철수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선교사가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갈 때 가능성은 무한하다. 서구 선교사가 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공백을 한국인 선교사가 메워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없다. 아직도 현지인들이 스스로 일을 하기에는 역부족이기에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바로 한국인 선교사가 이 지역에 필요한 것이다.

 

6) 복음 확장의 가능성

중남미 지역은 복음에 대해서 수용적이다. 날씨가 좋고 건강을 유지하기 좋은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국의 지나친 간섭과 한국으로 오가는 유혹을 내려놓고 열심히 사역할 수 있는 곳이다. 현지 기독교의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는 곳이다.

 

7) 한국인과 공감대

정서, 문화적인 부분에서 한국과 비슷한 면이 많이 있다. 부흥하는 시기에 있었던 한국 교회 선교사들이 부흥하고 있는 시기에 있는 그들을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그들의 부흥을 위해서 사역할 수 있을 것이다.

8) 재 복음화 지역

가톨릭교회에서 1910년 에든버러 선교 대회에서 이 지역을 선교 대상 지역에서 제외시켰다가 현재는 다시 재복음화 지역으로 분류했다. 이것은 개신교회도 그곳에 계속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9) 중남미 선교의 부정적인 면

중남미는 지금까지 서구의 선교 투자 지역이었다. 선교를 많이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는 말은 선교전략이나 정책이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서구 선교사들이 지금까지 했던 대표적인 선교의 예는 다음과 같다.

(1) 지금까지의 서구 선교사들은 그들의 재정과 인력을 주로 학교나 병원, 그리고 방송국과 같은 기관을 운영하는데 투자했다는 점이다. 이런 프로젝트 성 사역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교회를 개척하고 투자하는데 인색했다는 점이다.

(2) 선교사들의 사역이 지역교회와 무관하게 이루어졌고 지역교회 지도자들과의 연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3) 지역교회들의 자립의지가 약하여 스스로 교회가 서는 것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4) 기존 교회의 연합이 부족하고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성장을 방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5) 영적전투에서의 실패가 있었다.

(6)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신학교 문제와 지도력 이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른 선교략은 이전의 선교에서 실패한 요인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실패한 요인을 찾았다면 먼저는 그 실패한 요인대로 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했던 그대로 안하는 것이 좋은 전략 중의 하나이다. 전략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반면교사를 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는 과거의 선교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선교사역을 평가해야 한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평가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평가가 필요하다. 잘못했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실패했거나 잘못한 것도 후배 선교사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된다. 그런 면에서 선교사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 실패한 것을 드러내면 그 실패가 또한 성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을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중남미를 선교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

1) 로마 가톨릭의 이해와 그 영향력

중남미는 종교, 문화, 역사, 사회구조가 가톨릭의 영향권에 있는 대륙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남미가 가톨릭 문화권이기에 더 이상 선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남미 대륙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약 90%의 인구가 가톨릭 신자들이다.

 

2) 중남미 가톨릭의 상황

중남미 가톨릭은 한국 교인들이 생각하는 가톨릭과는 거리가 있다. 중남미 가톨릭은 우상 숭배와 미신을 섬기는 종교가 되었다. 그들의 교회와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가로막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구원의 도리가 행위에 있다. 이런 가톨릭의 기존의 사상과 함께 중남미의 전통 무속 종교와 혼합되어 있다. 무속 종교와 혼합되어 타 종교와 비슷하다.

 

3) 중남미에서의 가톨릭 영향

중남미에서의 가톨릭의 영향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미친다. 페루는 공식적으로 개신교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가톨릭이 개신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에콰도르도 가톨릭 사제의 세례 증서가 없으면 공립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 취직도 하기 어렵다. 가톨릭 사제의 결혼 사인이 없으면 혼인 신고가 안 된다. 대통령에 당선 되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이 가톨릭 주교이다.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사역할 때, 시외버스를 타고 지방에 간 적이 있다. 시골 외곽도로로 들어서면서 버스가 서더니 운전수가 내렸다. 도로 옆에 우리나라 성황당 같은 마리아 상이 있었다. 그곳에 촛불을 켜고 절을 하고 그리고 다시 운전을 하였다.

필자가 교회를 개척했던 지역에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기우제를 드리는데, 아기 예수 상을 자동차에 싣고 온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나서 미사를 드리고 함께 술을 마시고 하루 종일 춤을 추었다. 성당의 신부가 한국 신부였는데 기우제를 드리고 나서 술을 권하고 춤을 추도록 하였다.

가톨릭 사제인 한 신부가 기독교 TV 방송에 나와 좌담을 하였다. 기독교인인 사회자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신부는 선행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사회자가 묻기를 그러면 얼마만큼의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신부는 그런 부분은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 하였다.

성당에 다니는 한 한인이 가게를 새로 열게 되었다. 가톨릭 신부가 와서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부가 기도를 하더니 담배를 물고 기름을 들고 온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기름을 가게 곳곳에 뿌리면서 담배 연기를 내 품었다. 가게 안에 있는 귀신을 내 쫓는 행위였다. 이것이 남미 가톨릭의 한 모습이다. 이처럼 중남미는 선교사가 들어가 사역을 해야 하는 복음이 필요한 곳이다.

중남미는 영적으로 상당한 혼동의 상태에 있다. 몇 년 전에 남미의 한 지역에서 비행기 사고로 성당이 파괴된 적이 있었다. 그때 교회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다행이 마리아상 만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그들은 마리아상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 때문이라고 믿으면서 감사하였다. 무속 신앙과 이단, 그리고 타락한 가톨릭이 혼합된 영적으로 혼돈의 상황이 계속되는 대륙이다.

 

5. 가톨릭문화권에서의 선교전략

가톨릭을 지나치게 적대적인 존재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다. 가톨릭은 개신교를 생각하기를 겉으로는 사촌이라고 발표하고 내면으로는 이단 혹은 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지금도 중남미에서는 신부나 수녀가 개신교 교회에 방화를 하고 테러를 계속한다. 그렇지만 개신교 입장에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전도를 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해야 했다.

가톨릭권 선교의 장점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선이해가 있다는 점이다. 성경도 이미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 단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오히려 복음 전도가 쉬울 때도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직접 그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핵심을 가르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제자훈련을 한 적이 있다. 일 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면서 복음의 핵심을 가르쳤다. 그 가정의 부부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지금도 QT를 한다. 다만 그들의 외면적인 종교생활은 아직도 가톨릭 성당에 출석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개신교 교회에 다니면 좋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핵심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불의 및 빈곤의 문제, 그리고 가정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 수 있다. 선교사가 사회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것보다는 복음으로 푸는 안목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지도자를 양성하여 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독립된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은 지역이 중남미이다. 중남미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이미 열려 있는 대륙이다. 지금 중남미 지역은 익은 열매를 가진 나무들이 쓰러져 가고 있는 것과 같은 현실이다. 열린 지역인 중남미를 더 활성화시켜 세계 복음화에 참여토록 하는 선교적 책임이 한국교회에 있다.

 

 

 

 

 

 

 

2부 프로젝트성 사역

 

I. 서론

 

오래전 1997년 말 한국에 IMF 시대가 왔을 때 정치, 경제 분야 뿐 아니라 선교 분야에도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선교 구조조정을 말하면서 언급한 것이 곧 선교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었다. 짧은 한국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선교는 급성장했는데 그런 과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프로젝트 성 선교라는 지적이다. IMF 구조 요청이 일어날 때 한국의 대 교단 선교부에서는 선교사들에게 즉각 프로젝트성 선교사역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적이 있었다. 한국의 선교 역사 가운데 선교사들에게 항상 경고성 내지는 부정적인 사례를 말할 때마다 프로젝트 성 선교에 대하여 언급되었다.

선교 프로젝트의 원형은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로 부터 찾을 수 있다(1761~1834). 그는 선교지인 인도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성경번역을 하고 기독교 서적을 위한 인쇄소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사업적인 선교를 하였다. 윌리암 케리로 부터 시작된 선교 시대를 현대 선교 시대라고 명명한다. 이런 이유로 현대 선교는 프로젝트성 선교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크든 적든 간에 프로젝트성 선교를 해오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선교는 확장되어 왔다. 이처럼 선교 프로젝트는 항상 우리들에게 관심거리와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II. 프로젝트성 사역의 정의

 

프로젝트성 사역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몇 가지 면에서 프로젝트 선교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프로젝트성 사역에 반대되는 개념을 말한다면 사람 중심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이라고 해서 사람이 배제된 것은 아니기에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물질이나 건물보다는 사람이 중심 되는 사역이 프로젝트성 사역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이라 함은 그 순서가 사람보다는 보이는 외형적인 건물이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우선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우선순위에 있어서 보이지 않은 분야 즉, 사람을 교육시키고 전도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그램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 프로젝트 사역이다. 또한 프로젝트 성 사역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사역이다. 프로젝트성 사역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의 일차적인 목적인 복음 전파에 관련된 직접적인 일이 아니라 복음 전도를 위해 이차적으로 동원되는 수단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학교나 병원을 세우는 것, 방송국이나 선교 센터, 사회 시설을 운영하는 것 등이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도 그 순서가 전도하고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그것은 사람중심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 보다 먼저 땅을 사고 교회 물을 세우고 나서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교회 개척이라 할지라도 프로젝트성 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교 건물을 먼저 짓기보다는 어린이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일정한 장소에서 공부를 시키다가 현지인들의 필요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현지인들이 학교를 짓고 그들이 직접 학교를 운영한다면 이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시작했기에 사람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 훈련원이나 선교센터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외형적인 것보다 가르침이 중심이라면 사람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훈련을 한다고 먼저 사무실이나 건물부터 준비하고 커리큘럼을 짜고 개강예배를 먼저 드리고 나서 사람을 모집한다면 이것도 프로젝트성 선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인부터 제자훈련을 통하여 선교 훈련을 시켜 가면서 그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건물을 짓는다면 그것은 사람 중심 사역이다. 한국 사람들은 먼저 가시적인 것부터 시작하고 그 후에 내용으로 들어가는데 한국인의 특성상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프로젝트성 사역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선교사가 신학교를 하면서 건물을 짓고 나서 학생들을 모집한다면 이것 또한 프로젝트성 사역이다. 그러나 현지에 있는 신학교에서 가르침의 사역을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학생이 모여지고 현지 교회건물 등에서 시작하는 것은 사람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현지인 중심으로 사역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혼자서 일을 다 처리하고 현지인들은 그저 들러리가 된다면 그것도 일종의 프로젝트 성 사역이라 할 수 있다. 현지인이 주도가 되어 모든 일을 진행하고 거기에 선교사는 현지인이 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만 도움을 준다면 이것은 사람중심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돈을 사용하거나 사람보다는 돈의 비중이 많은 사역을 프로젝트성 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III. 한국인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되는 이유

 

1. 한국인의 성격과 기질의 특성상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된다.

서구 사람들은 보통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게 되면 그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자금을 준비하고 연구 조사가 우선 된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은 사무실이나 건물을 얻고 난 후에 구체적인 일을 연구하거나 추진한다. 건물이나 보이는 것들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일을 하는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개척할 때는 먼저 건물을 구한다. 그 후에 전도하고 교육하는 일이 뒤 따라 오게 된다. 그러기에 한국 선교사들이 비록 건물이나 장소는 없더라도 전도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현지인들을 중심으로 건물이 세워지는 방법으로 사역하는 것은 드물다. 이런 방식으로 할 때 선교사가 많이 참아야 하고 시간이 걸리고 열매가 당장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국 선교사들은 당장 눈으로 결과가 보이는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큰일을 성취 하려는 성격과 특성이 곧 선교 프로젝트를 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업을 하는 것도 일본 사람들의 경우에는 10년이나 20년의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일을 한다. 일본인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보통 10년 이후를 내다보며 시작한다고 한다. 그들은 기초를 다지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당장 1년 혹은 2년 안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다. 1-2년 일을 해서 안 되면 바로 직종을 바꾸기도 한다. 남미에 있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옷 장사를 했는데 그것은 쉽게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주로 전자제품이나 현지 공장을 지어 사업을 하는데 이는 몇 년 후를 내다보고 하는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도 한국 사업가들처럼 당장 몇 년 안에 눈에 보이는 어떤 성과를 반드시 얻으려고 하는 조급함이 있다. 한국 선교사들은 힘들고 보이는 열매가 적은 사역을 잘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다.

 

2. 후원교회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성급한 성격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교회에도 나타난다. 교회는 선교사에게 주님의 재림의 때가 왔고 비싼 선교 헌금을 사용하기에 빨리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한다. 다른 한편으로 후원교회가 너무 많은 후원금을 보내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선교사가 돈이 많을 경우 그 돈을 사용해야 하기에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일부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단 돈 1000만원이면 교회를 하나 세울 수 있다고 후원자들에게 요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 건축을 하고 그 결과 교회건물은 많이 지어 졌지만,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 지금도 한국인 선교사들이 시골에 교회 물을 세워 놓고 그 뒤로 관리를 하지 못해 텅 비어 있는 교회건물이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3. 창의적 접근 지역을 향한 선교 전략 때문에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된다.

창의적 접근지역은 공식적인 선교사 비자로 들어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 사역을 직접 할 수도 없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경우 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분을 숨길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창의적 접근지역에서 선교사들은 개인사업이나 사회사업 같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4. 각 개인의 선교적 안목 때문에 프로젝트를 많이 하게 된다.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선교가 반드시 영혼구원에 연결되리라는 생각이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한다.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때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먼 안목으로 시작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프로젝트성 사역을 했을 경우 일어날 위험성을 모르고 그냥 뛰어들기에 자신도 모르게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된다. 만약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의 위험성을 안다면 프로젝트성 사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중하게 하게 될 것이다.

 

5. 전도나 가르침의 은사가 없기에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된다.

선교사가 현지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를 가지고 전도하고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은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 선교사는 언어 공부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언어를 통한 가르치는 일보다 언어가 별로 필요치 않는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된다.

 

6. 복음전파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하게 된다.

선교지 현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한 터를 일구는 작업이 프로젝트성 사역이라 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함이다. 또한 요즈음은 프로젝트성 선교 자체도 의미 있는 선교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도 선교이기에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는 것이다. 복음전도와 직접 연관이 없는 사회참여 자체도 선교로 보는 것이다.

 

7. 현지인들의 필요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교지는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산다. 그들에게 병원이나 학교 등은 필요한 분야이다. 이런 현지인들의 필요를 보면서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한다면 당장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육신적인 필요와 복음적인 두 가지 필요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IV. 프로젝트성 사역의 부정적인 면

 

1. 선교사의 고국 문화를 강요할 위험성이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때 선교를 복음전파보다는 인간화를 우선으로 할 위험성이 있다. 선교사 본국의 교육 시스템이나 위생, 의료 시설을 선교지에 세움으로써 그것이 현지 문화를 무시 할 위험성이 있다. 또 그것만이 고등문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는 토착 문화를 무시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는 본국이나 선교사의 문화가 성경적으로 반드시 옳거나 낫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물질적인 면이 향상되면 기독교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선교사들의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문화변혁이 필요하다면, 문화변혁은 철저한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선교사가 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2. 현지 교회가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선교사를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은 현지 토착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선교는 현지교회가 스스로 서 나가는 자립에 방해를 가져올 위험성이 많은 것이다.

 

3. 현지인들이 선교사에 대해 돈이 많은 투자가로 생각할 위험성이 있다.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게 될 때 현지인들은 선교사로 보기보다는 돈 많은 사업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어야 한다. 돈 많은 사람이나 투자가로 보여 지는 것은 선교에 방해가 된다. 돈 많은 선교사에게 현지인들이 돈 때문에 다가서기는 하겠지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남미의 개신교 교회는 일반 사람들로부터 돈이 많다는 인식이 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돈과 프로젝트성 사역을 앞세웠고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은 이런 선교사나 교회를 보면서 좋은 인상보다는 오히려 복음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게 된다.

 

4. 교회 성장이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목표를 잊을 가능성이 많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때 박애주의나 제도의 변화만을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에 치우치다 보면 중요한 복음 전도에 투자할 시간을 빼앗길 수 있고 선교사 스스로도 균형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사람은 두 가지 일을 다 잘하기는 어려운 존재이다. 만약 선교사가 센터를 하나 짓게 되면 거기에 시간과 정신과 돈을 투자해야 하기에 진정으로 중요한 복음전파나 제자훈련,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데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5. 영적 생명력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의 귀중성을 따라서 살 때 영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지만 프로젝트 중심으로 사역하다 보면 사람보다는 물질에 더 큰 관심이 가게 되고 영적으로 메마를 가능성이 크다.

 

6. 현지인을 무시할 가능성이 많다. 선교사가 현지인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하 관계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프로젝트를 위해서 현지인을 고용하게 되고 그 결과 주종 관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어찌 동등할 수 있겠으며, 동등한 위치에서 삶을 나눌 수 있겠는가! 프로젝트성 사역은 현지인들과 바른 협력이 이루어지는데 방해를 할 수 있다. 선교사가 지위나 물질 사용에 있어서도 현지인들과 동등해야만 진정한 동역과 형제애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7. 선교사를 경제적으로 의지하게 될 수 있다. 선교사를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도 일어날 것이고 선교사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어떤 선교사가 많은 돈을 사용하여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때 그 선교사를 뒤에서 따라 다니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이런 것으로 동료 선교사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8. 선교사가 자기 과시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통해서 선교를 잘 했다고 스스로 교만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과시할 수도 있다. 선교 목표를 향해 나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빨리 보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참고 인내하면서 열매를 기다리고 또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마음보다는 쉽게 열매를 맺고 안주하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열매를 맺어 주시기 이전에 선교사 스스로 열매까지 챙기려는 것은 선교사의 욕심이다.

 

9. 내용보다는 외형적인 것으로 선교의 성패를 가늠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숫자와 보이는 것에 그쳐서 바른 내용과 결실을 평가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선교 목표를 흐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사역이 복음전도와 양육에 얼마나 연결이 있는지를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10. 선교사 자기 성장과 자기관리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경우에는 바쁘게 일할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성 사역과 복음 전파를 동시에 하다보면 한가지의 사역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바쁘게 뛰게 된다. 바쁘다 보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선교사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일 자체에 얽매여 자기 성장을 못하게 될 때 결국 선교사는 망가지고 그 사역 또한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후원교회나 현지 교회가 선교사가 일만 하기를 바랄지라도 선교사는 자기 성장을 위해서 시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열매 맺는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11. 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가지의 균형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복음주의자가 프로젝트성 선교 때문에 오히려 사회참여 쪽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만 치우칠 위험이 있다. 선교사가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맞추어 나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다보면 균형을 잃을 확률이 사람중심의 사역보다 더 많이 나타나게 된다.

 

 

V. 프로젝트성 선교의 장점. 그리고 약점의 해결 방안

 

선교사는 프로젝트성 사역을 전혀 안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한다고 해서 전부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통하여 선교를 잘한 선교사들이 많았고 프로젝트성 사역을 통해서 현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이 들어가는 기폭제 역할을 해온 사례들이 많이 있다. 다만 그 위험성을 알고 그것을 주의하면서 바른 방향으로 해 나갈 때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1. 프로젝트성 사역은 평신도, 즉 전문인 선교사들이 선교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기독교인중 95%이상인 평신도들이 선교사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또한 공식적인 선교사역을 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전문인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프로젝트성 사역을 통해서만 선교를 할 수 있다. 이런 곳에 복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고 오직 프로젝트성 사역만이 가능한 것이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통해 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선교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교회 개척과 전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기억하면서 해야 한다. 프로젝트성 선교는 복음전도를 위한 방법, 혹은 결과이지 사역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은 그 병 고침과 그들의 배부름, 인간의 욕구를 해결해 줌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사역들을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3. 현지인 교회를 세워주는 것이 프로젝트성 선교의 목표임을 알아야 한다. 현지 교회를 무시한 프로젝트성 사역이나 그것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일할 때 실패를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 현지인들이 지나치게 선교사를 의존하여 토착교회의 성장에 방해를 가져올 수도 있기에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더라도 현지인을 앞 세워서 해야 하고 그들이 주인이 되도록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현지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 선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사가 없어도 현지인 교회나 그 프로젝트성 사역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데 있기에 만약 선교사가 떠날 때 현지인들이 이어갈 수 없는 사역이라면 이것은 이미 실패한 사역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현지인들이 그 프로젝트를 할 수 있도록 위임과 이양을 해 주어야 한다. 그 위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선교사가 언제까지나 선교지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현지교회의 자립과 재생산할 때 까지이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초기 선교사들은 많은 프로젝트를 했지만 실제로 그 프로젝트성 사역이나 기관들을 운영하는 데는 한국교회가 80%이상의 재정을 감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초기 선교사들의 바른 사역관이 한국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현지인이 주인이 아니고 종업원이나 구경꾼이 된다면 그 사역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역이다. 아무리 현지에 학교가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현지 교회가 바통을 이어받지 못하는 학교라면 이 사역은 건강치 못한 사역이 된다. 지금 한국 선교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선교사가 돈을 가지고 선교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큰 프로젝트를 하다가 중간에서 중단하는가!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교회당 건물은 지어주지만 이 교회를 이끌 지도자를 키우지 않아 교회 건물이 텅 비어 있는가!

교회건물은 아무리 어려워도 현지 교인들이 짓도록 하는 것이 자립하는 교회를 위해 필요하다. 현지인들이 짓지 않은 교회는 계속 유지되기 어렵다. 선교사가 교회 건물을 짓게 되면 현지인들은 교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적어지고, 교회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하게 된다. 선교사가 전도와 양육 없이 교회 건물을 지어주는 것은 가장 위험한 프로젝트성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는 먼저 사람을 훈련시키고 그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서 그들 스스로 교회건축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만약 사람을 세우기에 앞서 건물을 짓는 사역을 먼저 하거나 선교사가 직접 건축을 하는데 깊숙이 관여한다면 십중팔구 실패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돈을 낭비하는 것이요, 현지 교회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후원자들을 우롱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기에 후원자들은 선교사가 너무 빨리 무슨 일을 하도록 기대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돈을 많이 후원하면 선교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선교사들이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는 것은 후원자들의 강요일 수 있지만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이 제외된 선교 프로젝트를 하려는 욕구를 잠재워야 한다. 현지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좀 더 기다리고 참아야 한다. 교회를 세워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인가! 큰 건물을 지어놓고 그 선교사가 철수하면 그 건물은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선교사는 보이는 것과 돈으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선교하는 것이다. 같이 살고 함께 나누고, 동등한 입장에서 현지인과 함께 할 때 선교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면서 사람들이 그 프로젝트 사역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 왔느냐 아니면 말씀 때문에 돌아 왔느냐 하는 것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4. 조직적이고 장단기적인 목표와 계획 가운데서 프로젝트성 사역을 해야 한다. 사역을 지혜롭게 하고 선교의 효율성을 최대한으로 도모한다면 프로젝트성 사역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프로젝트성 사역들이 그 동안 실패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한국 기독교 학교나 선교를 목적으로 했던 병원들이 처음 선교사가 세웠던 그 목표를 얼마나 이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처음 세웠던 목표와 철학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사역했던 에콰도르에 30년 전에 선교사에 의해 병원이 세워졌다. 초기 설립자인 선교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고 도와줌으로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목표로 병원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병원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재정적인 이익을 위해 운영되고 있으며, 오히려 복음 전하는데 방해 요소가 되는 병원이 되었다. 처음 세웠던 철학이 세대가 바뀌면서 변하였으며, 현지인들은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병원이 비싸다고 불평을 한다. 30년 만에 이 병원은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가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때는 10년 혹은 30, 50년 후 이 프로젝트성 사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상하고 해야 한다. 현지인들에게 단계적으로 이양하고 위임해주는 시기를 결정하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현지인 지도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들이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교사는 항상 떠날 것을 전제로 일을 해야 하며, 언제 떠나더라도 현지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사역을 진행해 나가야 한이다.

 

5. 선교 현지 경제 상황이나 형편을 고려하여 단계적으로 선교 프로젝트 사역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큰 프로젝트 보다는 작은 사역부터 조금씩 현지인들과 함께 이루어 가면서 해 나가지 앉고 처음부터 크고 터무니없는 사역을 하게 되면 결국 실패할 확률이 높다. 현지인들의 경제 수준에 비해서 크고 비대하면 그들에게 오히려 위화감을 주게 되고 그것은 다른 선교 사역에도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은 가능하면 좋은 물건과 좋은 건물을 통해서 사역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을 죽여야 한다. 현지교회들은 흑색 칠판을 사용하는 것도 큰 부담인데 선교사가 돈이 있다고 해서 화이트보드나 OHP를 사용한다면(이런 것들이 선교사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는 컴퓨터를 통한 영상 시스템을 사용한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하고 그런 것들이 선교의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지는 카메라가 아직도 사치품인 곳이 대부분이기에 선교사가 카메라 하나 사용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즈음은 스마트폰 시대가 되어 어디서나 카메라로 사용할 수 있다.

 

6. 선교사의 영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고 제국주의적인 함정을 경계하면서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때 영적 생명력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만약 프로젝트로 인해 영성을 잃는다면 분명 그 프로젝트는 잘못하고 있는 신호임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프로젝트성 사역을 할 경우 선교사 자신도 모르게 제국주의적인 강압을 할 위험성이 있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된다.

 

7. 현지인들의 생각과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선교사가 보아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현지인들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선교사는 현지인들의 의견과 요청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들에게 맞는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현지 교회의 형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상황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방편으로써 연구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8. 동료 선교사들도 생각하면서 해야 한다. 아무리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동료 선교사의 형편이 어렵거나 위화감을 주는 프로젝트라면 고려해 보아야 한다. 어떤 선교사는 수억의 프로젝트 사역을 하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생활비조차도 부족하게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돈과 연관된 프로젝트 성 사역은 언제나 선교사들 간에 긴장과 다툼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VI. 프로젝트성 사역의 실례들

 

프로젝트성 사역에 대한 몇 가지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부정적인 사례들만을 드는 것은 모든 프로젝트성 사역이 전부 나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 위험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다. 이런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알 때 사전에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례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정리하였다.

 

1. 아프리카의 한 선교사는 선교센터와 기술학교를 세웠다. 그 나라에서는 가장 좋은 건물과 직업 훈련원이라고 해서 그 나라 대통령까지 와서 개원식에 참여했다. 그 일을 위해서 한국 교회에서 많은 후원금이 투자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처음에 꿈꾸었던 그림은 사라지고 그 단체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이것을 빼앗고자 하는 현지인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선교사 자신도 그 사역에 대해서 정체감을 찾느라 고민하다가 결국은 이 센터를 버려두고 한국으로 철수 해야만 했다.

 

2. 태국의 한 선교사는 교회를 짓는다고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모아서 여러 지역에 땅을 샀다. 모두가 교회개척에 필요한 지역이기에 여러 군데의 땅을 산 것이다. 문제는 그 여러 지역에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땅은 사 놓았는데 선교사 자신은 한계가 있고 돈도 모자라 교회건축을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원자들은 왜 비싼 땅을 샀으면서도 교회를 짓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품게 되었고 결국 모든 땅의 등기가 그 선교사 개인 명의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교사는 교회와의 원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후원교회와 선교사간에 많은 다툼과 싸움이 있은 후 결국 그 선교사는 선교본부로부터 제명을 받았고 그 선교사를 도왔던 많은 교회들은 선교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3. 남미의 한 나라에 선교 방송국이 하나 세워져 있다. 선교사들만 200명이 근무하고 17개 언어로 방송을 하고 있다. 그것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현지인들은 그 방송국에 대해 좋은 생각과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방송국 옆에 가기도 두려워한다. 현지인들이 그 방송국을 한번 방문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검색이 따른다. 방송국 안에 딸린 부속 건물과 시설이 많이 있는데 현지인 교회에서는 거의 사용을 하지 못하고 방송국에 있는 선교사들만 사용할 수 있다. 아울러 그 방송국을 운영하기 위해서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을 직원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외국에서 공부를 한 교회 지도자급의 인력들이다. 이들에게 많은 월급을 주면서 방송국 운영을 위해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력들이 약한 현지인 교회 개척이나 목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데 방송국에서 좋은 교회의 리더들을 데려감으로 인해 현지 교회의 성장에 방해가 되고 있다. 결국은 이 방송국도 자체적으로 평가하기를 이 사역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최근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철수하였으며, 방송 송출도 두 세 개의 언어로만 하게 되었다.

이상의 사례들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런 프로젝트성 선교를 할 때 보통 생각보다는 훨씬 많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VII. 결론

 

선교지에서 프로젝트성 사역은 필요하며 많은 사역들이 이루어져 왔고 또한 많은 결실들도 있었다. 선교사가 프로젝트를 해야만 하는 상황과 선교지도 있다. 평신도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위험성도 많이 나타난다. 선교사가 먼저 위험성을 파악하고 시작한다면 프로젝트 성 사역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프로젝트성 사역이 선교사 자신의 생각이나 현지의 필요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에 따라 할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중남미 선교가 줄어들게 된 요인들을 나누면서 이런 요인들을 초월해서 중남미 선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나누어 보자.

2. 추수지역 선교의 필요성과 장점은 무엇이 있는가?

3. 가톨릭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4. 한국 선교사들이 프로젝트성 사역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5. 프로젝트성 선교의 장, 단점에 대해 정리해서 토의하고 이런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겠는가?

 

<부록> 프로젝트성 사역의 예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집사는 영 떨떠름한 생각을 털어 낼 수가 없었다. 부인 황 집사도 마찬가지인지 말이 없다. 조금 전 설교 후 광고시간에 선교부장 장로님이 나와서 그 동안 교회가 추진하고 후원해 왔던 C국의 A선교 병원 사역을 당회의 결의에 따라 그만 중단하기로 했다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수년간 이 교회는 수억의 돈을 C국의 A병원을 위해 투자해 왔다. 이를 위해서 많은 성도들은 희생적으로 선교헌금을 해왔다. 어떤 가난한 성도는 파출부를 해서 어렵게 번 돈이지만 선교를 위해서 기쁘게 바쳐왔다. 교회는 교회대로 예산 절약을 위해 내핍생활을 해 왔다. 교회 예산으로는 성가대원들에게 조차 연말시상 한 번 없었다. 물론 불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부심을 느끼며 지내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C국 주재 김 선교사에 의해 맨 처음 이 프로젝트가 제안되었을 때에, 당회는 한국의 그 어느 교회도 할 수 없는 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는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프로젝트가 우리나라의 세브란스 병원처럼 성공적으로 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교인들을 격려했던 것이다. 처음 병원 건물 기공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당회장 목사님으로부터 그 나라의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식장에까지 나아와 감사를 표하며 치하하더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온 교인들이 감격하며 더 뜨겁게 기도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와서 아무런 설명 없이 그 프로젝트를 중단해 버린다는 것이 많은 교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작년 교단 총회에서는 이 사역에 대해 표창을 했었고, 일설에 의하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을 추방하려던 정부가 이 병원사역으로 인해 그 조치를 재고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금융기관의 중견간부로 일하고 있는 이 집사는 사실 그 동안도 교회가 너무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왔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들어가는 돈을 과연 우리 교회 단독으로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마땅히 의견을 전달할 통로도 없는데다 서리 집사 주제에 당회가 하는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을 보니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아울러 수억의 헌금을 그렇게 집행하고 나서도 막상 변변한 설명조차 없는 교회에 대해 실망과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회사 같았으면 누군가 책임을 져도 크게 져야할 텐데, 이건 도대체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 라고 하자 "그래도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렇겠지요" 라고 부인 황 집사가 한숨을 쉬며 대꾸하였다.

얼마 후 들은 이야기이지만, C국에 주재하던 김 선교사는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선교병원은 마땅한 인수자를 찾을 수 없어 현지 세속법인 단체에 넘어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