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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1-6강 선교 사역 철학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1힉기

제 1-6강 선교 사역 철학

후앙리 2020. 4. 8. 21:44

 

 

I. 사역 철학이란?

선교 사역 유형과 전략은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어떤 방법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들이 각기 나름대로 선교에서 유용하고 필요하다. 문제는 선교사가 하고 싶은 사역이 많이 있지만 모든 사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꼭 해야 할 사역의 종류나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해야 하는 많은 사역 중에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어린 어린이들을 위한 사역을 할 때 어떤 사역과 방법으로 돕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효과적인가 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배가 고프기 때문에 급식 사역을 할 수도 있고, 미래를 생각해서 교육사역을 할 수도 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할 수 없을 때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교육 사역을 하기로 했다면 어린이들에게 학교를 세워서 교육할 것인지, 기존의 학교 교육이 아니라 방과 후 교실을 열어 재능 있는 어린이들에게 그에 맞는 특별 재능교육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선교사가 교회 개척을 할 경우에 지역을 선택해야 하고, 어떤 사역을 통해 교회개척의 기반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선교방법을 바로 선택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는 사역철학이 필요하다. 사역철학은 사역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역에 대한 선교사의 가치관이요, 관점이며, 사역의 원칙이며,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선교사의 사역의 형태와 방법은 사역철학에 따라 결정되고 시행되는 것이다. 사역 철학에 따라 사역을 할 때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선교사가 가져야 하는 중요한 사역철학 네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II. 사람 중심의 철학

 

1.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하는 사람들 중에 때로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돈이 있어야 선교를 하는 것이라고 하고 때로는 선교지에 돈을 보내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한국의 몇몇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보다는 현지에 돈을 보내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선교사 파송할 때 드는 돈으로 가난한 사람도 돕고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직접 월급을 주게 되면 적은 돈으로 더 좋은 효과를 거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이런 정책은 현지인 사역자와 교회를 무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것은 현지인의 자립 의지를 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에게 자립의지가 없으면 교회는 성장하기 어렵다.

 

선교는 돈을 보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가 직접 가서 하는 것이 선교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서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다. 우리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다.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보내지 않으시고도 세상을 구원할 방법이 있으셨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돈이나,

혹은 기적을 보여줌으로, 혹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심으로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날 어떤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원리보다는 물질이나 돈으로 선교를 하려고 한다. 직접 가서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성 사역을 하는 것 자체를 선교라고 생각한다. 선교 센터나 학교, 병원, 교회 건물을 돈으로 짓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역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통해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런 사역을 하다보면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이 소외될 수 있다. 정작 이런 사역 이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사람을 양육하고 세우는 사역은 등한시되거나 이런 사업성 사역이 사람을 세우는 사역과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성 사역과 사람을 세우는 사람 중심의 사역이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라 방해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업성 사역을 하다보면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그 물질과 프로젝트가 사람을 수단으로 삼거나 사람들을 실망케 하고 실족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큰 프로젝트성 사역 안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들어갈 수 있으며 사람을 소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물질 중심의 사역과 사람 중심의 사역은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반대 방향의 사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선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진정한 변화는 건물이나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사역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며,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사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건물보다는 사람이다

감자탕 교회로 소문난 서울 광염교회가 탄생하게 된 동기가 있다. 이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담임으로 섬기고 있는 조현삼 목사가 전도사 시절에 유럽을 방문하였다. 유럽 교회가 건물은 웅장한데, 성도가 없어서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때 교회 건물을 짓기 보다는 인재를 양성하는 사역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교회 건물이 없이 감자탕 식당이 있는 빌딩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교회는 재난 지역의 사람들을 돕는 사역과 선교와 인재를 키우는 사역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다. 자체 건물이 없어도 이런 훌륭한 사역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교회 건축에 들어가는 재정을 사람들을 양육하고 세우고 직접적으로 사람의 필요를 도와주는데 사용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사역을 할 수 있다. 건물을 우선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교회 건물을 우선하지 않고 사람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교회로서 이 교회는 건강한 선교적 교회로서의 기능을 바르게 감당하는 하나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건물이나 돈을 중심으로 사역을 한 것은 한국 교회가 물량주의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이라는 것에 많은 초점을 맞추었다. 교회들은 성도의 숫자로 목사의 능력을 판단한다. 교회에 성도가 많으면 그 목사와 교회는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때로 목사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을 한다고 해도 교회 성도 숫자만 많으면 잘못한 부분을 쉽게 묵인하려 한다. 반대로 목사가 건강한 영성과 목회를 한다 하더라도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교회 건물이 중심인 교회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한국교회 환경에서 선교사들이 배운 것은 교회의 건물과 성장 중심이다. 그러기에 선교사는 선교지에서도 동일하게 건물 중심의 사역을 하려고 한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그렇게 배웠던 경험이 선교지에서도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선교사를 후원하는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에게도 건물 중심의 사역을 하도록 요구한다.

 

필자가 사역했던 2000년도 초반 에콰도르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철수하는 일이 있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선교사들이 에콰도르에 돈과 물질을 많이 투자했는데 그 성과가 기대했던 것만큼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콰도르는 1956년에 짐 엘리옷 선교사와 그의 동료 선교사 5명이 순교를 당하면서 미국 교회에 유명해진 나라가 되었다. 짐 엘리옷은 교회 지도자로서 앞길이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는데 에콰도르의 아오라니 부족을 위한 선교사로 가서 순교를 당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 교회는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에콰도르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에콰도르에 집중적으로 물질적인 투자를 하였지만 결과가 나타나지 않자 많은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철수를 했던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에콰도르에 선교의 결과가 좋게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람을 양육하고 지도자를 세우는 사역이 중심이 되지 않고 병원과 학교와 방송국 등을 세우는 프로젝트성 사역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에콰도르에서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세웠던 병원이 30년 만에 불신자가 경영하는 일반 병원으로 전환되었고, 현지인들에 의해 기독교의 정신을 잃은 병원이라고 비난 받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30년 전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 운영비용을 선교비로 다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의료비를 올리게 되었고 결국 병원은 일반 사업가에게 매각 된 것이다.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은 이 병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미 일반 병원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 병원을 보면서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임을 기억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비싼 병원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에콰도르에 선교사가 세운 한 사립학교도 병원과 동일한 형태가 되었다. 선교사가 처음에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을 위해 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교후원비로 학교 운영비를 감당하기기 어렵게 되자 학비를 올리다 보니 결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학교가 된 것이다. 교회도 사람을 세우기 전에 선교사들이 건축부터 시작한 교회들은 모임이 지속되지 않고 건물만 남아 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많은 돈을 투자했음에도 오히려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러한 현실이 선교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선교단체에서도 선교사 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철학이 있고 선교사보다 선교사의 사역을 우선시하는 철학이 있다. 내전이나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에 선교사 한 사람을 중요시 여기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선교사의 생명에 위협에서 선교사를 철수시켜서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다. 반대로 선교 사역을 우선시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선교사가 그곳에서 생명의 위협이 있을 때 사역을 위해서 선교사를 철수하게 하지 않고 그곳에서 남아서 계속 사역하게 한다. 선교사가 철수하게 되면 사역이 중단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교사가 철수하면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어려웠을 때 선교사가 자신들을 버리고 가버렸다고 생각하기에 선교사가 그곳에 남아 계속 사역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 우선인가, “사역이 우선인가에 대한 철학에 따라 선교사의 현지 철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필자는 선교사역 보다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선교사의 생명이 사역보다 중요하다. 선교사는 사역을 위해서 선교지에 가는 것이고 사역을 위해 때로 순교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의 생명이 사역보다 앞서야 한다. 선교사가 사역을 위해 선교지에 간다고 할지라도 선교사는 사역을 위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선교의 목적이지, 사역이 선교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사역을 위해 희생하지만 선교사가 사역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역이 선교사에 속해있는 것이고 또한 선교사 자신이 바로 사역이다. 선교사가 살아있을 때 사역이 가능하다. 사역을 위해 선교사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의 생명이 사역 그 자체이기에 사역보다 선교사의 생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교단체는 선교사가 내전이나 위협 중에 있을 때 사역에 지장이 있더라도 선교사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을 우선하는 철학이다.

 

3. 예수님의 사람 중심의 철학

얼마 전에 어느 기업에서 사람이 미래다.” 라는 슬로건을 들고 기업광고를 하였다. “사람이 미래다.” 라는 광고가 광고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으로 성공을 보인 듯 했지만 기업이 어려워지자 그 중요한 사람(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권고하였다. 이제 입사한지 일 년도 안 된 사원들을 퇴직하게 하는 일이 벌어져 오히려 역풍을 맞기도 하였다. 말로만 사람이 중요하다고 한 결과가 오히려 기업의 독이 된 것이다. 사람중심은 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기업과는 달리 사람 중심의 철학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실행하셨다.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인 마태복음 2819절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제자를 삼아라가 주동사로서 세례를 베풀다는 보조 동사다. 제자를 삼는 것 안에 세례를 베푸는 것이 포함된다. 세례를 베풂으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제자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천하에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한 사람을 실족케 했다면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나을 만큼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세례는 이처럼 가장 귀한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다.

 

오늘날 세상은 정말 사람이 가장 중요한가? 사람이 돈보다 중요한가? 사람의 생명이 권세보다 중요한가? 사람의 생명이 성공보다 중요한가? 사람이 사업보다 중요한가? 적어도 이 세상은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누군가 사업을 한다고 할 때, 그 사업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것이다. 그 사업의 성공을 위해 종업원들을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해로운 화학 약품을 다루는 어느 회사는 일하는 근로자들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고 근로자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 근로자를 희생하게 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보다는 돈을 중요시 여기는 하나의 예이다. 어느 가게는 직원이 판매를 잘 못해서 많은 매출을 올리지 못했다. 사장은 그 직원의 인격을 모독하며 야단을 친다. 돈이 직원의 인격보다 중요한 하나의 예다.

 

공장을 하고 사업을 하는 이유는 직원, 바로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이고 사람, , 직원을 살리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공부한다. 성공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도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섬기기 위해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좋은 아파트와 좋은 자동차를 사고 누리는 것도 결국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자기만 잘 누리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에서 여름 캠프를 준비하다가 서로 싸워서 실망하여 교사를 그만 두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캠프라는 프로젝트가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되는 것이다. 선교단체는 선교사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선교단체 본부에서 일하는 사역자들(간사나 선교사)이 선교단체 조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경우가 있다. 본부사역자가 존중받지 못하고 일하는 기계처럼 사용되는 경우다. 조직을 위한 일만 잘되면 사역자들이야 상처를 받고 힘들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선교단체 안에도 있다. 사역을 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사역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돌보며 감싸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사람이 목적이 되는 조직이다. 반대로 사역을 하면서 사역의 성과는 있지만 사역자들의 영혼과 정신과 신체가 망가진다면 그것은 사역이 목적이 되는 조직이 된다. 현재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사역자들이 사역을 통해서 만족해하고 성장해 가는가? 아니면 공동체 조직의 사역은 외형적으로 잘 되어 가고 있지만 사역자들은 지쳐 가는가? 이것이 사람 중심과 사역 중심의 기준의 차이점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대학도 있었고 회당도 있었다. 사회사업을 할 수도 있었고 병원을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이런 사역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셨다. 요즈음 선교사들이 많이 하는 교회 건축을 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요즈음 선교사들이 많이 하는 학교도 세우지도 않으셨다. 병원을 짓지도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식민지로 고생할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스라엘 독립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외면하셨다. 그 대신 예수님은 3년 동안 12명의 제자를 양육하셨다. 그 열두제자를 통해 세계 선교 역사가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사람이 모든 인간생활의 목적이 된다는 것은 다른 것 다 잃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생명이다.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이 미래이며, 사람이 전부이다.

 

4. “한 사람의 철학

그러면 몇 사람인가? 바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선교다. 여기서 한 사람이란 한 사람 뿐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게라도의 철학이다. 많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에게라도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이라도세우는 철학이다. 선교사는 다수도 좋지만 현지인 한 사람이라도 세례를 주고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사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 미꾸라지에게 배우는 한 사람의 중요성

한국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린다는 말이 있다. 온 물을 흐리는데 여러 마리의 미꾸라지가 필요 없다. 한 마리면 족하다. 미꾸라지 한 마리는 온 호수 전체를 더럽힐 수 있다. 반대로 그 미꾸라지 한 마리가 활어를 살린다는 말이 있다. 항구에서 도시로 살아있는 생선들을 옮길 때 그냥 그대로 놔두면 모두 죽는다. 그렇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를 어항에 넣으면 그 미꾸라지를 피하느라 생선들이 정신을 차리게 되고 죽지 않는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전체를 살리는 것이다. 단 한 마리지만 그 위력은 전체를 죽일 수도 있고 전체를 살릴 수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세상을 살릴 수 있고 한 사람이 세상 전체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2) 성경의 한 사람

요즈음은 다수, 대중, 혹은 많은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대중과 다수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크고 중요하다. 한 사람에 의해서 전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다. 정 반대의 또 한 사람에 의해 전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 바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한 사람으로 전 인류가 정죄에 이르렀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전 인류가 의롭다함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분명한 말씀이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심을 알 수 있다. 노아 한 사람을 통해 홍수의 심판 가운데서 전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때 노아 한 사람의 믿음으로 이 세상은 유지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으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라는 지도자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고 출애굽이 모든 인류 구원의 모형이 되게 하셨다. 다윗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의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 느헤미야 한 사람을 통해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역사가 있었다. 바울 한 사람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기틀이 되었다. 루터 한 사람을 통해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은 역사를 이끌어 오시면서 한사람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돈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권력과 지식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가문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자체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데오빌로 각하라는 한사람을 위해 쓰여 졌다. 그 때 당시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쓰기 위해 들였던 파피루스라는 종이 값을 따지면 오늘날 웬만한 부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싼 가격이다. 누가에게는 이 비싼 가격을 들여서라도 한 영혼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이 누가의 마음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요한복음 316절은 원래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전 인류를 향해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니고데모 한 사람을 위해 말씀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것이다. 한 사람에게 이 말씀이 전해졌을 때 이 말씀은 전 인류에게 전해졌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위해 이 말씀을 하셨지만 이 말씀의 능력은 전 역사와 인류를 통해 적용되어졌다. 한 사람에게 하셨던 말씀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말씀이 된 것이다. 이 말씀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그 한 사람에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출 때 그 결과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간에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다.

 

마가복음 836-3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한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한 생명인 것을 가르쳐 주신다. 이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더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 속에서의 생명은 바로 주님을 통한 영생을 가진 생명이다. 구원받은 영원이다. 한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고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말씀이다.

 

3) 역사 속에서 한 사람의 중요성

세상 역사를 보면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부정적인 예로는, 히틀러나 스탈린은 수백만 명을 대학살하였다. 마오쩌뚱은 약 7,0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7,000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데 마오쩌뚱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으로 충분했다. 피노체트나 폴포트, 이디아민을 비롯한 20세기 독재자들은 어떠한가? 한 사람으로 족하다. 북한이 이처럼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은 한 사람의 독재자로 충분했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악행의 결과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것이다.

 

한 사람은 긍정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힘을 가진다. 빌리 그래함 같은 한 명의 전도자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빌리 그래함 같은 한 사람만이라도 세운다면 그 나라의 복음의 영향력은 엄청날 것이다. 선교사가 키운 사람이 인도의 간디 같은 사람이 되었을 때 선교지의 국가의 운명을 지킬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키운 한 사람이 링컨 같은 사람이 된다면 그 나라의 흑인을 해방하는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선교지의 한 사람이 윌리암 케리 같은 사람이라면 세계 선교를 책임질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위대한 경제학자나 과학자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이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나라를 변화시킬 것이고 책임질 것이다.

 

4) 감동적인 선교 역사의 순간

기독교 선교 역사 가운데 역사적인 순간이 있었다. 풀러 신학교 선교 역사 교수인 폴 피어슨은 이 순간을 선교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1938년에 인도 마드리드에서 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회의가 있었다. 그 모임에서 폴 헤리슨 선교사가 설교를 하였다. 그는 의사로 모슬렘 선교를 위해 사무엘 즈웨머와 함께 아라비아 선교사로 가서 50년 동안 사역을 하였다. 그곳에서 50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선교한 결과 5명의 결신자를 얻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는 아라비아에 있는 교회가 여러분에게 인사를 전한다.” 고 하였다. 아라비아 교회는 5명이 모인 교회였다. 이 선교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10년을 보냈다. 그 결과를 보고할 때, 그 순간이 선교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선교 역사학자의 평가다. 선교사가 10년 동안 한 사람을 구원시켰다고 보고한 순간이 선교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는 의미는 바로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5) 남미의 한 선교사

10여 년 전에 필자가 속한 교단의 남미 선교사 대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모인 약 열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각자가 자신의 사역 보고를 하였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학교나 선교 센터를 짓고, 몇 개의 교회 건축을 하고 있다고 보고 하였다. 그 중에 필자의 마음에 기억나는 한 선교사가 있었다. 다른 선교사들이 선교의 열매에 대해 보고할 때 이 선교사는 어떤 정신으로 사역하고 있는지에 대해 보고를 하였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보고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다. 이 선교사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사람들 양육하겠다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철학이 다른 사역을 하고 있었다. 이 선교사는 눈으로 보이는 열매가 없기에 후원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힘들고 외로운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이 선교사의 사역은 진정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의 현지인이라도 세우겠다는 철학으로 사역한 결과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현지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을 든든히 키웠고 현지인들이 자생하는 교회를 만들었다. 선교대회 당시 선교의 열매에 대해 보고를 하였던 다른 선교사들은 이런 저런 사역의 변화가 많았고 사역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했지만 그 선교사는 한 사람이라도 제자로 세우는 것에 집중하는 사역을 통해서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진정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선교사처럼 보였지만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6) 효과적인 사역

선교사는 한 사람의 귀중성을 알고 사람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많은 사역보다도 한 사람을 키우는 사역이야 말로 당장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가장 효과적인 사역이다. 복음의 능력은 사람으로 인해 퍼져 나가는 것이다. 물질이 아니다. 돈이 아니다. 힘이 아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사람보다는 물질 중심의 사역을 하게 된다. 선교사들이 좋은 건물을 지어주면 사역의 효과가 나타날 줄 기대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면 잘 살줄로 기대한다. 학교를 세우면 그것을 교육을 통해 그 나라가 발전할 줄 안다. 병원을 세우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길 줄 안다. 교회를 하나 건축해 주면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 올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위력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사람은 인간이 생각하기 어려운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힘이다. 사람이 곧 선교 사역이다.

 

7)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현실적인 이유

마가복음 835절에 우리 주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살지 않을 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생명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이 다른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이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사람보다는 물질이나 보이는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있다. 바로 자기희생이 어려워서이다. 사역자들 혹은 선교사들이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는 이유는 자기희생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하지 않는 좀 더 구체적인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본다.

 

(1) 당장 사역의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사역을 급하게 하려고 한다. 사역의 열매를 곧바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눈에 보이는 열매로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을 키우는 사역은 열매를 얻는 사역이라기보다는 투자하는 사역이다.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한 사람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인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어야 한다. 눈물 없이는 열매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투자보다는 열매에 많은 관심이 있다. 적은 투자로 많은 열매를 거두기를 바란다. 이런 마음은 엄밀히 따지면 지나친 욕심이고 도둑의 마음이다. 투자 없이 열매를 거두겠다는 것은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열매보다는 투자를 원하신다.

 

많은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은 십자가보다 부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고난보다는 영광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구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난과 부활의 종교이지만 이 일을 행하는 주체는 다르다.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고난을 당하는 일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을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이것을 구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교사가 해야 하는 일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부활의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부활의 영광을 맛 볼 뿐이다. 하나님께서 부활을 일으키지 않으시면 사람은 그저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러기에 사람의 할 일은 부활을 스스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다. 고난에 참여하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살았을 때 부활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부활이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 세상에서는 때로 부활의 열매를 못 볼 수도 있다. 때로 하나님 나라에서 회복하는 부활로도 나타난다. 사람이 먼저 좋은 결실, 눈에 보이는 열매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 일이다. 사람은 그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비록 열매나 결과가 이 세상에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열매가 없더라도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이다. 그 한 사람을 양육하고 제자 삼는 일이 사역이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2)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의 칭찬이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에게 사역의 열매가 눈에 당장 보이지 않으면 그에 따른 불이익이 나타난다. 후원자들이 그 일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이 멀어진다. 후원 교회에서도 눈에 나타나는 결실을 요구한다. 선교사가 후원 교회의 요구를 거부하기에는 후원 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후원교회의 힘이 너무 세다. 선교사들은 후원금으로 먹고 사는 존재다. 후원자들이 선교사의 사역에 후원하지 않으면 선교사는 당장 먹고 살 일이 힘들어 진다. 한 사람 철학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요구와 다를 수 있다. 사람들은 당장의 결실을 원하지만 선교사는 한 사람의 철학을 가지고 사역을 함으로 그런 결실이 없을 때 후원감소로 인해 때로 생활비와 사역비를 포기해야 한다. 자녀 교육비의 타격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에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춥고 배고픈 사역이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것도 별로 없다. 눈에 열매가 보이는 사역을 하는 다른 선교사들에게는 후원금과 방문자도 많지만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하는 사람은 배고프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는 사람 중심의 철학을 따라 사역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칭찬과 상급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도움과 인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사람중심의 사역을 할 수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선교사는 후원 교회에서 유치원을 지어 줄 테니 유치원을 운영하는 사역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건물을 짓는 것보다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교회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유치원 운영이 아니라 한 사람을 키우는 사역을 하고자 하였다. 그 후로 그 후원 교회에서는 그 선교사를 후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선교사는 지금까지 선교사역을 잘 하고 있다. 사람과 교회는 외면해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

 

한 사람의 철학을 가지고 선교 사역을 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고통과 아픔이 필요한 사역이다. 다른 선교사들이 힘든 길이 아닌 쉬운 길을 선택하더라도 선교사는 시류에 치우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역에 치우치지 않고 한 사람의 철학에 따라 사역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치고 영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외로움을 감수하는 마음으로 사역해야 한다. 한 사람의 철학을 마음에 새기고 한 사람이라도 세우려는 뚝심과 인내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는 선교사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3) 사람을 키우는 사역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대체적으로 인내심이 부족하다. 장기 계획에 따라 사역을 하기 보다는 단기간 내에 어떤 성과를 바라는 성향이 있다. 성과를 보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회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사회이다. 교회나 선교지에서도 이런 한국 사람들의 성품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중국선교사들에게 있었던 이야기가 있다. 중국의 부족 성경 번역을 위해 성경 번역 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들과 서구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선교회에서는 10년 정도는 성경 번역을 위해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선교사들은 10년 정도 언어와 현지 문화를 배우며 성경 번역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은 그곳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이미 신약 성경 번역을 거의 완성했다. 이것이 한국인의 장점이다. 일에 대한 순발력과 추진력은 어느 나라 사람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강하다. 그러나 이런 성품이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하기에는 단점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인내하며 길러내는 사역이다. 기다리면서 끝까지 참아야 사람을 키워낼 수 있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많은 사랑과 노력과 섬김이 필요하다.

고전 31절과 2절에 사도 바울은 말씀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어린 아이는 젖을 먹이고 더 크면 밥을 먹인다. 젖먹일 사람에게 밥을 먹이면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 밥 먹을 사람에게 젖을 먹이면 안 된다. 적절하게 주어야 한다. 사람마다 다르고 차이가 있기에 사람마다에 필요한 적절한 도움과 적절한 양육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키우는 선교라는 것은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선교사가 젖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젖을, 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밥을 먹이는 것이다. 각자에게 맞는 세밀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같이 먹고 마시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 함께 하는 삶이 없이는 온전한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많은 시간도 필요로 한다. 한국 내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전심을 다하는 것처럼 선교지에서 선교 한다는 것은 사람을 돌보고 양육하는 목회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교를 목회와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특별한 획기적인 방법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선교사만 파송하면 뭐든지 좋은 결과를 맺을 것으로 기대한다. 선교사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개척과 탐험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선교사를 어떤 미개한 사람들을 깨우고 새로운 일을 개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선교사를 보통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선교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고, 사람을 세우는 것은 목회와 같이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은 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4) 선교사 자신의 계발과 성장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현지인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선교사 자신이 계속 성장해야 한다. 사람을 키우려면 현지 언어에 능통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책을 보고 연구를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는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잘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선교사에게 쉽지 않는 일이다. 자신을 먼저 발전시키기 보다는 우선 사역을 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사역을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는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선교사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워야 한다. 한 사람이 중요한 영역은 바로 사역자(선교사) 자신이다. 선교사 자신이 중요한 선교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선교사의 영향력은 선교사의 사역과 열심에 있기 보다는 선교사 자신의 성숙에 있다. 선교사 자신을 세워가는 것이 선교다. 선교지에서 참된 영향력은 선교사 자신의 삶의 성장에 달려 있다. 선교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가 어떤 사람이냐가 우선되는 것이다. 어쩌면 선교사가 무엇을 하느냐의 결과는 진정한 영향력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정한 영향력은 선교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나가고 성숙해져가는 과정에 있다.

 

(5) 철학과 방향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역자(선교사)는 한 사람을 세우는 것에 목숨을 걸겠다는 그런 다짐이 필요하다. 선교사가 될 때부터 선교의 방향을 사람에 맞추는 것이다. 프로젝트나 건물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하겠다는 철학이 선교 초기부터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한다. 사람을 세워 그 사람들이 복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하고, 선교사가 주인이 아니라 현지인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한 사람, 현지인을 귀하게 생각하는 철학이 선교사가 되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역도 당장의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철학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다.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사역을 할 때, 인디헤나 교회 연합회에 소속이 되어 현지 목사들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 목사들과 모임을 매주 가지면서 그들을 재교육하는 사역을 하였다. 어떻게든 현지 목사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필요한 것들을 돕는 사역을 하였다. 문제는 목사들 중에는 선교사와의 성경 공부를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에게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도움을 바라는 목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필자에게 재정적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필자의 선교 철학은 현지인들의 경제적인 부분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선교사의 물질적인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정신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물질적인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들을 위해서였다. 필자는 돈으로 선교하는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안 목사들은 두부류로 나뉘어 졌다. 한 부류는 그 모임에서 떠났고 다른 한 그룹은 남아서 계속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였다. 경제적인 도움을 원하는 목사들이 떠나게 되니 숫자는 좀 줄었어도 그 때부터 목사들의 교육과 훈련의 진정한 효과는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분위기도 좋았고 필자의 선교 철학인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을 세우고 양육하는 사역을 끝까지 할 수 있었다. 필자에게 그 순간에는 재정적인 요청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또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때 어려움도 있었지만, 선교 철학에 따라 사역을 하게 할 때 결국 만족할 수 있었다.

 

오늘날은 돈이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시대이다. 돈을 위해 교회를 팔아먹은 목사가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사람들은 돈을 위해 인신매매를 하고 장기를 사고판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돈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성을 판다. 우리는 돈이면 전부라는 생각이 팽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돈이 우상이 되어 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세상 뿐 만 아니라 물신주의의 사상이 교회에 까지 들어왔다. 돈이 선교지 까지 힘을 미치게 되었다. 선교사들과 후원자들은 돈으로 하는 것이 선교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관점을 돈에서 사람으로 바꾸어야 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버려야 한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 돈 때문에 당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한 사람의 철학을 세워나가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 외톨이가 되어야 한다. 사람을 세우기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철학을 가진 선교사를 사용하신다. 자신을 내려놓는 그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구원하신다. 선교사는 한 생명,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사역 철학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III. 협력이 선교라는 철학

선교는 함께 협력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협력은 선교에서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교지의 현실에서 협력은 선택이며, 협력은 어려운 일중의 하나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들의 약점 중의 하나는 협력사역을 잘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선교사 탈락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팀 동료 선교사와의 관계로 인한 실패이다. 선교 협력 팀이 서로 어려운 관계에 있다는 소식은 어느 선교지에서나 쉽게 들려오는 소리다. 뛰어나지 않는 열 사람이 마음만 제대로 맞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 선교사에게 팀 사역은 도저히 안 되는 것인가?

 

1. 선교에서의 협력의 필요성

 

1) 협력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다.

세상은 경쟁에서 홀로 우뚝 서는 것을 추구한다. 세상은 경쟁하는 것을 좋아한다.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하는 것은 누군가 양보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기에 원하지 않는다. 세상은 함께 하는 것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는 경쟁을 해야 창의력을 계발하고 어떤 성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성과가 있을 때 그것에 따른 상급이 있다.

 

필자가 선교지 에콰도르에서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필자의 큰 딸이 중학교 3학년이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고 적응을 할 때. 한국의 일반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첫 중간고사 시험 때였다. 반의 한 친구가 딸에게 공부를 도와달라고 해서 딸이 노트를 빌려주었다. 외국에서 살다온 딸에게는 그것이 사람 사는 이치였고 도리였다. 그런데 딸이 도와 준 것을 나중에 전해들은 다른 친구들은 필자의 딸에게 바보라고 했다. 왜냐하면 시험 때 자기 노트를 친구에게 보여주거나 빌려주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딸은 한동안 이 말을 이해 못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도와주었는데 왜 그것이 바보짓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에서 친구는 도와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경쟁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경쟁자와는 싸우는 것이지 서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쟁자를 도와주었으니 자연히 필자의 딸은 바보가 된 것이다.

 

요즈음 중,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어려운 과목이 도덕 과목이라고 한다. 옛날 우리 시대에는 도덕이 제일 쉬운 과목이었는데 지금은 제일 어려운 과목이 되었다고 한다. 도덕이 가장 어려운 과목이 된 이유는 학생들이 가진 가치관과 생각이 도덕 과목에서 내는 문제의 내용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덕 과목에서는 자신이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의 어려운 점을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이들이 가진 현실과 생각은 그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 바로 아이들이 가진 생각이고 세상의 현실이다. 나보다 공부 못한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정보나 자료를 숨겨서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 생각과 철학이 도덕 과목에서 요구하는 답과 다르니 도덕 문제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옛날의 미덕과 상식들이 지금 세상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안 되고, 내가 일등 해야 하고, 내가 돈을 더 벌어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손해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함께 협력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역대상 19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무슨 말씀인가? 다윗 시대에 아람과 암몬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어 왔다. 이스라엘은 두 개의 군대로 나누었다. 군대 장관 요압은 아람 사람과 싸우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는 암몬 사람과 싸우기로 하였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 아람이 동생 아비새에게 작전을 말한다. 그 작전이라는 것이 너무나 우스운 작전이었고 당연한 작전이었다. 아람이 동생에게 한 말이 바로 네가 이기면 와서 나를 돕고, 내가 이기면 내가 너를 돕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작전이었다. 두 군대가 싸우는데 한쪽이 지면 당연히 가서 도와야 함께 이길 수 있다. 이것이 전쟁터에 나갈 때의 작전이었는데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서로 협력하는 것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이치다.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이다. 그러나 그 상식적인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잘 안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같은 팀끼리 싸운다. 그것은 같이 망하는 것이다. 나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도 망하고 상대도 망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서로 싸우면서 살아가지만 기독교는 함께 협력하여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가는 것이고 더불어 사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관이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함께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도 이 세상의 가치관처럼 최고나 우뚝 서는 것, 이기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는 현실이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많은 영역에서, 심지어 선교사의 세계에서도 세상을 따라 협력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가운 현실이다.

 

2) 협력이 선교의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예수님은 온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였다(28:20). 예수님은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시다)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시편에서는 협력하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다(133:1-3). 협력은 단순히 일의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삶의 원리요, 신앙이다. 협력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은 교회의 속성이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교회라 할 수 없다. 하나가 되는 모습으로 세상으로 나가 빛을 나타내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된다. 그럼으로 협력하는 노력 그 자체가 곧 선교이며, 교회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에서 한 교회의 교인이 250명을 넘어서면 담임목사 한사람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낀다. 행정 분야를 위해 행정사역자와 교육 분야를 위해 교육 전도사, 교육 목사가 필요하다. 음악을 위해 반주자와 지휘자, 그리고 음악목사도 함께 사역을 해야 한다. 목회 분야를 위해 부목사, 여전도사, 교회 사찰 등도 동역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사역자들이 담임목사의 팀원이 된다. 그럴 때 교회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 선교지가 복음의 불모지일수록 사역의 필요가 다양하다. 선교지에서는 더더욱 개인 선교사 한 사람이 어떤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은사를 다 가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책임과 능력과 체력의 한계가 있다. 현대 사회는 전문화, 세분화, 분업화로 일을 하는 시대이다. 선교 사역 역시 함께 협력해서 감당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각양 다른 은사를 가진 선교사들이 한 팀으로 한 목표를 세워 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할 때 사역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혼자 하는 것 보다 협력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혼자서는 일이 안 되는 것도 협력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일반 사업을 하는 경영자도 협력의 원리를 무시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자는 뒤떨어진다. 하물며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혼자서 사역을 다 하려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여러 사람의 동역은 한 사람이 일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와 상급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성경의 원리이다(4:9-12). 두 사람이 일하면 두 배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두 배 이상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려움과 실패와 낙망 속에 있을 때 동역자가 있으면 그 위기 상황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서로 위로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동역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팀으로 일한다는 것은 의사소통과 역할 분담에 있어서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은사와 능력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쌍방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과업이라고 해도 동역자가 있으면 과감하게 시도해 낼 수 있고, 또 그 사역이 견고하고 안정성 있게 된다. 한 개인에게는 벅찬 것이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목표를 정하고 함께 일하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고 그 사역이 쉽게 무너지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협력 사역을 할 때 사역의 연속성과 안정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목회자와 성도가 함께 협력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다. 교회 부흥의 원동력은 좋은 아이디어,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자들이 협력하는 것이다. 화목한 교회는 자동적으로 부흥한다. 모든 성도들이 협력과 화목이 어렵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죽일 때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할 것이다. 요즈음 한국에는 싸우는 교회가 많이 있다. 각자가 다 이유가 있겠지만 결과는 교회가 분열되거나 성도들이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 부흥의 원리는 목사가 설교 잘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화목하고 협력하는데 있다. 선교도 동료 선교사와의 협력과 현지인 동역자와의 협력이 선교의 열매를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3) 협력 사역은 성경의 요구 때문에 필요하다.

(1) 예수님의 모델

예수님은 3년 동안 공생의 사역을 감당하셨다. 지상에서 하신 일을 다 기록하기에 세상에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셨다(21:25).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전도, 교육, 치유의 사역을 하셨다. 그중에 가장 뚜렷한 사역은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이었고 제자들과 동거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는 사역을 위임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 12제자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를 예비하시고 성취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훈련하실 때, 훈련 과정에서 12명을 한 조로 해서 6개의 전도 팀을 만들어 내 보내셨다(6:7-13). 제자들을 선택하여 훈련하는 과정에서 파송하실 때 반드시 사역을 분배하시고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는 사실에서 팀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볼 있다. 전도를 위해 함께 보내신 주님의 모습은 협력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주님은 세계 복음화를 제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승천하셨다. 협력 사역의 중요한 부분인 위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완벽하지 못하고 부족한 면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임을 하시고 떠나셨다. 또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이 너희도 하나가 되라고 하셨다(10:29-30).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합력하여 기도하는 곳에 자신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18:20).

 

(2) 사도 바울의 본보기

신약 성경의 최초의 선교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후 아나니아를 통해서 선교의 개인적인 부르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자각하게 되었다(9:1-18). 바울은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사역에로의 부르심이 동시에 있었음에도 선교지로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이것은 선교사로서의 준비와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당시 공용어인 언어나, 로마 시민권, 헬라문화가 석권하던 시대의 문화 훈련, 장막 짓기로 자급자족함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함, 가말리엘 신학교의 졸업생으로의 신학 훈련 등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었으나 기다렸다. 그것은 바로 협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준비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지역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라는 교회의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목회를 했다. 그의 목회는 팀으로서 지역 교회인 안디옥 교회와 더불어 시작을 했고 또 같은 팀원인 바나바와 수종자 마가 요한과 함께 제 1차 여행을 떠났다(12:1`5). 그 후에 디모데, 실라, 에바브로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뵈뵈등 수많은 사람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 바울과 끝까지 동역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1) 바울은 팀원과 함께 사역을 시작했고 (2) 팀원들에게 사역을 분배했고 (3) 선교 현장에서 현지인과 동역했고 (4) 현지 지도자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초대교회의 모습

초대 교회는 일곱 집사를 선출해서 그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하였다. 여기서 장로들과 집사들의 팀워크를 볼 수 있다. 스데반은 집사였지만 설교를 하였고 순교를 하였다. 스데반을 통해서 평신도의 적극적인 사역 참여를 볼 수 있고, 팀 사역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서로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 구약 시대의 사사의 경우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사사들은 혼자서 일하지 않았다. 사사기 710절에 보면, 기드온에게 네 명의 부하를 데리고 그 진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지도자들에게 항상 함께 하라고 하셨다. 모세에게도 아론과 제사장들이 있었다. 다윗도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누구도 혼자 일을 하지 않았다.

 

필자는 선교사로 가기 위해 훈련을 받는 도중에 같이 훈련 받은 동료와 함께 같은 나라로 가서 선교사역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함께 기도하며 선교지도 결정하고 선교지에서 같은 집에서 함께 살면서 함께 협력을 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다. 아이들도 서로를 형제자매처럼 여긴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협력의 귀중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협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두 가정을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관계로 사역하는 것이 선교지에서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들에게는 선교사들은 함께 살면서 협력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들에게 그런 선입관이 있는가? 잘 되는 협력팀들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협력사역이 한국인들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경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협력의 좋은 모델들이 한국 선교사 중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또한 여러 선교지에서 들을 수 있다. 협력을 잘하지 못하는 선교사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교사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4) 선교지의 토착화 문제가 협력 사역을 필요로 한다.

선교사가 현지에 공헌하는 정신적, 영적, 물질적인 것들은 결국에는 선교 현지의 것이 되고 그들 손에 의해서 운영되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교 현지의 필요에 따라 선교사역의 종류는 다양하다. 교회개척, 교육이나 의료 기관 설립, 신학교나 일반 기관 사역, 혹은 특수 사역 등 이 모든 사역의 마지막은 선교 현지의 교회나 학교 기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 건강한 선교다. 선교는 거저 받은 복음을 거저 주는 것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이루기 위해서는 선교 현지 지도자들과 처음부터 동역과 협력 계획과 사역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지인에게 위임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현지 위임이라는 측면에서 현지인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5) 우주적 교회관을 생각할 때 팀 사역은 필수적이다.

자국 내에서의 국수주의는 어느 정도 인정되는 요소이다. 그러나 세계를 향해 나가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선교에 있어서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 있어서 국수주의는 위험한 장애 요인이다. 교회는 우주적이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두를 평등하게 보신다. 우주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미국인, 영국인, 유렵인, 남미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모두가 한 팀이 되어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선교 사역을 하는 것은 우주적인 교회의 당연한 모습이다. 모두가 한 팀이 되어 일한다면 그 모습이 곧 우주적인 교회를 맛볼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된다.

 

선교사들은 근본적으로 지역과 언어와 민족과 빈부격차를 초월하는 사람들이다. 인맥, 지역, 족보 등을 초월하는 사람들이다.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하여 동등한 위치에서 현지인을 중심으로 함께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일부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같은 출신 지역끼리, 같은 학교 출신끼리, 같은 교단 출신끼리만 모이고 교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주적인 교회관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모습이다. 이런 생각으로는 끼리끼리 모여 다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진정한 협력을 이룰 수 없다.

 

6) 교회적인 접근 방식에서 협력 사역의 필요성이 있다.

세계 선교의 지상명령은 교회에 주어졌다. ,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가 자기 몸인 교회에 내린 명령이다(28:19-20. 1:22-23). 몸의 지체끼리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한 몸의 지체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서로 협력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만약 지체끼리의 협력이 유지되지 못한다면 머리인 그리스도의 조종을 거부하는 병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고전 12:12-27). 결과적으로 지체간의 협력 없이는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고 기능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은 하나이고 많은 지체가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한다.

 

첫째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자신에 대해 당당함 보다는 열등감이 있다. 지도자가 혼자서 다하는데 굳이 내가 같이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의 존재는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몸에 손만 있고 발이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눈과 귀도 마찬가지다. 별 볼일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모두가 중요하고 모두가 주인이며, 모두가 리더가 되어야 하며, 모두가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교회에서의 지체들의 다름은 누가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역할의 문제다.

 

두 번째는, “나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중요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누가 더 훌륭한가 하는 것을 따지면 안 된다. 나와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이 똑같이 필요하며, 똑같이 중요하다. 교회는 다른 지체들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다. 교회가 서로 필요로 하지 않으면 한 몸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선교에 있어서도 팀을 이룰 때, 한 선교사의 지도자가 갖는 지도력도 은사중의 하나일 뿐이다. 지도자는 지도자로서 조정자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은사에 따라 모두가 추종자가 될 수 있으며, 모두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에베소서 411절에서 14절까지에서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는데, 이것은 몸 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한다. 은사는 개인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역을 할 때 협력하지 못하고 경쟁을 하는 것은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잘못 이해할 뿐 아니라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는 교회의 은사의 원리에 따라서 협력을 해야 하고 그것이 선교사역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7) 윤리적인 접근 방법에 있어서도 그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대 강령은 사랑이다. 주님은 세상을 섬기러 이 땅에 오셨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서는 선교할 수는 없다(22:19-40). 선교사가 동역자와 현지인을 무시하고서는 선교할 수 없는 것이다. 선교사가 동료와 협력하지 않는 것은 마치 전장에서 동료 전사를 무시하고 혼자서만 총을 쏘며 적을 향해 뛰어드는 행동과 같다. 이런 행동은 참된 용기로 볼 수 없고 충성스럽다고 볼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동역자와 함께 사랑의 원리로 사역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 윤리이다.

 

8) 하나님 자신이 보여 주신 모범에서 그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고(1:2) 하나님의 형상으로(복수형) 사람을 창조하셨다(1:29).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3:16)” 라고 한 것처럼 삼위 하나님이 함께 사역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성자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믿고 거듭나도록 인치셨다(1:3-14). 하나님께서는 직접 협력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모범을 보이신 것은 그의 자녀들도 그렇게 사역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2. 선교사가 협력 사역을 하지 못하는 이유

이렇게 중요한 협력 사역이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한국 선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선교사들이 협력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한국 선교사들이 협력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선교사 자신이 먼저 손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협력해서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교사가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선교사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해는 단순히 물질적인 손해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감에 대한 손해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협력사역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은 유명해지는데 자기 자신은 이름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함께 사역하다보면 자신만의 열매가 없을 수도 있다. 선교사 자신은 드러나는 것이 없이 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손해를 감수하려는 마음이 부족해서 협력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2)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의 영향력 때문이다.

선교사가 협력 사역을 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선교사를 파송한 파송 교회 때문이다. 파송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1인자로 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2인자로 사역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돕고 있다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기도하고 헌금해서 파송한 선교사가 다른 선교사 밑에 들어가는 것을 뒤처리나 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또한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협력이란 모두가 1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1인자가 되어야 하고 어떤 이는 그를 도와주는 2인자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보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협력의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은 2인자 즉, 돕는 자는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으로 자신들이 파송한 선교사가 무엇이 부족해서 다른 선교사를 돕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협력의 장애요소가 된다.

 

필자가 필리핀 선교지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의 선교사들은 제각기 자기 혼자 사역을 하고 있었다. 각자가 자기만의 사역을 가지고 우두머리로 사역하고 있었다. 필자가 사역했던 그 지역에 50 가정이 넘는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다른 선교사와 협력하여 돕는 자로 협력자로 일하는 선교사가 많지 않았다. 함께 협력하면 잘 될 일을 선교사들이 각자가 혼자서 일을 하기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교회를 개척할 때 선교사들이 힘을 합해 교회 개척을 하면 더 쉽고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선교사 각자가 다 자기만의 교회를 개척한다. 선교사가 교회를 세우기는 했는데 그것을 도와줄 선교사가 없으니 개척한 많은 교회들이 바로 서지 못하고 개척하는 숫자만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내적인 부분은 부실한데 외형적인 숫자만 늘어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필자가 필리핀에 처음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사역을 개척 안 하고 다른 선교사들을 도울 수 있는 사역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일을 개척하여 시작한다면 그곳의 우두머리는 될 수 있어도 효과적인 면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사역을 개척하게 되면 더 큰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척을 하지 않고 협력을 한다면 적은 투자로 많은 효과를 가져 오게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함께 협력하는 사역을 하게 되면 필자가 하는 사역, 내 사역,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내가 주인이 되고, ‘이 되어 하는 내 사역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필자가 손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내 것이 없다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가 자랑할 만한 의 개인적인 사역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더욱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가 없으므로 인해 협력해서 하는 그 사역이 더욱 왕성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도우면 같이 이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가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새로운 일을 개척한 것이 아니라 필자의 은사를 가지고 협력할 수 있는 선교사와 함께 협력해서 2인자로서의 사역을 하였다.

 

고전 35-6절에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바울이고 물을 주는 사람은 아볼로라고 하였다. 그것을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선교사가 각자의 은사에 따라 일을 하지만 결국 그 열매는 하나님이 맺으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선교사는 자기 은사에 따라 함께 협력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원리는 일(1) 더하기 일(1)은 이(2). 두 사람이 협력하면 둘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혼자서 자기의 일을 하면 일은 일이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의 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르다.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라 셋도 될 수 있고 넷도 될 수 있고 열도 될 수 있다. 한 사람이 각자가 일을 할 때는 일이라는 결과가 나와야 되는데 때로는 절반밖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이 세상의 계산법과는 다르다. 성경에 보면 물질을 나누어 주면 부하게 되지만 과도히 아끼는 것은 가난하게 된다고 말씀하였다. 세상의 원리는 돈 안 쓰고 열심히 절약하고 저축해야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다. 성경은 나누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많이 취하고 가진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때 교인들이 재산을 서로 나누었을 때 궁핍한 자가 교회 안에 없었다(4:34)고 한다. 함께 나누는 삶이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와는 이처럼 정반대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누어 주는 희생이 필요하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공적을 내 세우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필자가 필리핀에서 사역을 하였을 때 신학교 강의 사역을 한 적이 있다. 처음 이 신학교가 시작 될 때 한국인 선교사 몇 명이 같이 하자고 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함께 하기로 했던 선교사들이 모두들 자기 사역을 해야 한다고 신학교 사역을 포기하고 자기 사역을 개척하여 갔다. 결국 필자가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선교사만 남았다. 이 선교사가 신학교 전체를 운영하는데 교수가 부족했다. 교수가 부족해서 힘들어 하기에 필자는 그곳에서 가르치기로 하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행정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교수로 가르치는 일만 하였다. 만약 필자가 신학교를 운영했다면 운영하느라 힘이 들었을 것이고 필자가 하고 싶었던 가르치는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개인적으로는 필자 자신을 위한 열매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신학생이 졸업을 해도 필자는 그저 교수일 뿐 이 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사가 학생들의 졸업의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필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도, 필자의 공적이 없어보여도 그 열매는 하나님이 맺어주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혼자 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은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화목을 위해 죽으셨다. 선교사들이 화목하며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화목 하는 것이 자녀 교육을 하는 가장 귀한 열쇠가 된다. 부부가 날마다 싸우면서 자녀 교육을 잘해보겠다는 사람은 헛꿈을 꾸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은 부부와 가정의 화목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돈으로 자녀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로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화목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협력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온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여러 군데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그중에 공통적인 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합과 협력이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협력하면 부흥이 일어난다. 교회의 성장도 서로 화목할 때, 그래서 서로 협력할 때 교회 성장이 일어난다.

 

그러기에 한국교회의 선교는 협력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함께 협력할 때 한국 교회의 선교는 발전할 수 있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협력하고 선교사들끼리 화목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기 어려울 것이고 서로 싸우는 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이며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관점의 비전의 결핍이다.

선교사가 선교를 해야 하는 궁극적인 비전이 부족하기에 협력을 못하게 된다. 비전이 부족한 것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운 현실이 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협력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비전을 보기 위해 선교사는 사역이 누구를 위한 사역인가를 먼저 계산해보아야 한다. 선교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한다.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은 사람, 내가 보기 싫은 사람, 함께 하기 싫은 사람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있다는 큰 그림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단점이 없는 사람이 없다. 서로가 단점을 가지지 않았다면 누구나 쉽게 협력 사역을 할 것이다. 자기와 맞는 사람끼리만 일을 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수하고 잘못하는 것 때문에 협력 사역을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용서는 필요 없게 된다. 그러기에 나와 다른 성품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큰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4) 영적, 인격적인 결핍이 협력을 방해한다.

선교사들은 영적 전투의 장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거나 영적 능력이 결핍 되어 있을 때는 협력 사역이 어렵게 된다. 사단은 협력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기에 선교사들이 협력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공격한다. 사역 그 자체보다는 인간관계를 공격하면 결국 사역을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선교사는 사단이 사역보다는 협력, 즉 인간관계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사람의 인격적인 부분보다는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다. 선교사들까지도 인격적인 면보다는 능력으로 평가를 받는다. 선교사를 허입할 때 인격에 대한 검증이 잘 안 된다. 팀 사역을 잘 하도록 하는 것은 선교사를 허입 할 때부터 능력 보다는 인격과 영성을 기준으로 삼을 때이다.

 

5) 한국인의 기질과 유교 문화가 협력을 방해한다.

 

(1) 한국인은 기질상 서두르는 편이다.

외국인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빨리, 빨리라고 한다. 선교는 인내하는 것이다. 언어 습득부터 시작해서 빨리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선교사가 긴장감을 가져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지속적으로 끈기 있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빨리 빨리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한국인 선교사의 성품은 협력 사역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2) 가족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뿌리 깊은 서열 의식이다.

협력 사역의 본질은 은사와 역할을 합리적으로 인정하고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관계는 가정, 직장, 사회에서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이를 물어본다. 서열을 짓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습관 가운데는 무의식적으로 서열의식을 따지는 것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수평적인 관계보다는 수직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 그러기에 은사와 역할과 관계없이 누가 더 선임자이고 위에 있느냐 하는 서열 의식이 한국 선교사들을 올무에 빠지게 하는 협력 사역의 큰 함정이 된다.

 

어느 선교지에서는 같은 단체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해야 할 상황에서 맞을 준비는 하지 않고 서로 싸우기만 하였다. 그 원인은 선임을 중심으로 손님을 맞으라는 선교 단체본부의 지시가 있었는데 선교사들이 서로 자기가 선임이라고 주장하며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선교사는 선임의 기준이 목사 안수를 누가 먼저 받았느냐 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제일 먼저 받은 선교사였다. 또 다른 선교사는 누가 선교지에 제일 먼저 왔느냐 하는 것으로 선임을 정하자고 하였다. 이 선교사는 선교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다. 또 다른 선교사는 목사 안수 받은 목사 선교사 중에서 누가 제일 먼저 왔느냐 하는 것을 따져야 한다고 했다. 손님들이 한국에서 도착하는 순간까지 선교사들이 자기가 선임이라고 주장하다가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처럼 역할이나 은사 차원이 아니고 서열 의식으로 생긴 내적인 불화가 협력 사역을 와해시키는 요인이 된다. 당연히 조직과 팀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은사에 따라서 지도자가 세워 져야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은사를 가졌다는 것은 각기 다른 은사를 가졌다는 의미이지 더 나은 은사를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기에 지도자가 되는 것도 은사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섬기는 은사가 있고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며, 다스리는 은사가 있는 것이다. 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 위에 있거나 더 우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스림을 통해서 자신의 은사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지도자가 있다면 그 지도자는 서로 다른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 일을 잘 하도록 조정해주는 조정자의 은사를 가졌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모두가 다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성경적인 섬김의 지도력을 무시하고 한국인의 문화를 따르는 한국인의 수직적인 지도력은 협력 사역을 방해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3) 한국인은 조력자보다는 지도자를 더 선호하는 기질이 있다.

한국인 선교사는 선교사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역을 자신이 직접 하기를 원하는 성품이 있다. 본국의 지원교회, 교단, 단체에 번듯한 사역 내용을 보이고 싶은 위험한 욕심이 있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선택된 사역자라는 소명 의식과 함께 선교사로 인정됨으로 비로소 명실 공히 한 사람의 독립적인 사역자, 혹은 지도자가 되는 전기를 맞게 된다. 더구나 오랜 기간 공부하며 부교역자로서 교회 봉사를 해온 목사나,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서 이력을 쌓은 전문인 사역자들에게 이것은 특별한 의미와 기대치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라는 격려와 권면을 받으면서 남다른 추진력과 노력을 통해 이제 만인이 인정하는 선교사의 신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선교지에 도착하게 되는데, 협력 사역을 하게 되면 리더나 대표가 아닌 한 사람의 팀 구성원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인 선교사를 하여금 달갑지 않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때로 팀 사역의 원리를 알고 자신은 기꺼이 팀원의 한사람으로 섬기고 따를 용의가 있다고 하더라고 가문과 후원교회와 후원자들, 그리고 가족들의 성원과 기대, 자신의 사회적인 체면과 입지를 생각하면서 협력 사역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4) 획일성과 불건전한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는 군사 문화의 폐해가 낳은 것으로서 교회나 선교사역에 있어서는 다양성과 지체 사역을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국민이 주인이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은 국민을 위한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국민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나라가 대통령 중심제가 잘 들어맞는 이유도 수직적인 획일성이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 유독 장로교가 성장하는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인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협력 사역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5) 한국 교육 제도의 문제점이다.

한국의 교육 제도는 개인의 특성과 기질을 인정하여 자신의 은사를 자발적으로 발휘하도록 하는 수평적인 관계 구조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최고와 꼴지 사이의 석차로 사람을 평가하는 수직적인 관계구조다. 입시철이 되면 서울대를 중심으로 상위권 대학에 모든 언론이 집중되어 있다. 소위 말하는 몇 개의 인류대학의 학생보다 숫자적으로 수십 배 많은 다른 학생들의 동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상위 몇 사람을 위한 것으로 고등학교 교육의 결과는 마무리 짓게 된다. 일본인에게는 남에게 맞추는 것이 좌절하지 않는 길이라고 말하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남과는 달리 우뚝 서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어느 비평가는 말했다. 군대에서도 선착순이 군대 규율이 되어 있다. 몸이 약해서 선착순에 들지 못하면 계속해서 고생을 해야 한다. 오히려 일등은 더 많은 훈련을 받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군대의 선착순 예에서 보는 것처럼 약한 사람은 더욱 힘들게 살아야 하는 구조가 한국 사회이다. 이런 교육 구조 가운데서 자란 사람들이 협력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뭔가 특출하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생존 경쟁 사회와 교육 분위기는 이 땅의 젊은 엘리트 사역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홀로 서서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절박한 입장에 서게 만든다. 이런 홀로 서기와 서열 의식과는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기존의 서열에 눌리지 않고 독자적인 위치와 힘을 확보하겠다는 서열의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협력 사역의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6) 한국 선교사들은 조직 사회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비교적 약하다.

일반 직장이나 단체 속에서 일한 경험보다는 관계 중심의 교회 사역에 익숙한 사역자들이 관계와 조직의 조화가 필요한 팀 사역에 적응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 결과 사역에 관련된 토의나 협의의 과정이 자칫 감정적인 관계 문제로 비화되기 쉬운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느낌을 동일시하는 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약점이라 할 수 있다.

 

(7) 한국인에게는 구시대적이며 불합리한 서열 의식과 함께 체제와 권위의 붕괴로 인한 무질서 현상이 나타난다.

한국사회는 군사 독재주의에 얽매여 있다가 민주화가 되면서 정당한 권위마저도 무시되는 가치관의 붕괴가 있다. 과도기적 상황에서 살아온 한국 선교사들은 질서보다는 무질서 쪽으로 더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선교지에 진정한 질서마저도 무너지는 현상이 협력 사역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6) 관계보다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팀을 형성하는 것이 방해 요소다.

사역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교사와 먼저 신뢰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신뢰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 관계를 지속하면서 사역을 하기 보다는 사역을 중심으로 사역이 우선되기에 협력하는 것이 어렵다. 자기가 손해를 보아도 상대가 존경스럽고 신뢰가 되기에 양보할 수 있는 의식이 있을 때 협력 사역을 잘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신뢰 관계의 결여로 인한 팀 사역은 어렵게 되는 것이다.

 

7) 선교지 자체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다.

선교지는 영적 전투의 장으로써 삶에 있어서 치열한 전쟁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은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영적인 공격을 하고 있다. 이런 결과로 선교사들이 많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갖는 것이 선교지 상황이다. 때로는 선교지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있기만 해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다. 선교사 자신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일어나고 이런 상황에서 상담이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지 않는 곳이 선교지다. 선교지는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주관적으로 흐르게 하는 분위기가 있다.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서 발생했을 때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고 해결 받기도 쉽지만 선교지의 상황 그 자체가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선교지에서는 어디에서건 선택의 여지가 적다. 한국이라면 조그만 일이나 감정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지만 선교지에서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의 감정을 좁게 만들고 결국 이것이 협력 사역을 방해 하는 요소가 된다.

 

3. 협력의 방법과 기술

1) 자기희생과 손해를 감수한다.

협력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자기 이름과 공적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선교는 선교사가 자기 공적을 내려놓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속성과 고난을 피하려는 속성이 있다. 자기 자신을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고난과 손해를 싫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협력하는 것은 무엇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고난과 손해를 감수하려는 마음이다. 자신의 자랑을 내려놓고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내미는 것이 협력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에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할 때 협력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자존심까지도 다 주어야 협력을 할 수 있다.

 

2) 사람을 즐거워한다.

선교는 일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선교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이 기본이 되는 일이다. 사람을 즐거워하고 함께 할 줄 아는 것이 선교다. 그럼으로 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 건강한 선교를 하기 어렵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해 치료를 받아야 건강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선교사는 동료 선교사들끼리 만 아니라 현지인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고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본국에 왔다가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고자 할 때, 선교지로 다시 기쁨으로 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사역을 아주 열심히 했지만 지난 선교사역을 돌아볼 때 너무나 힘들고 지쳤다면 기쁜 마음이 아니라 무거운 마음으로 선교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선교지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함께 즐거웠던 추억들을 많이 가졌다면 그 사람들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기쁜 마음으로 선교지로 귀임할 것이다. 좋은 친구가 있는 곳이 바로 행복한 곳이다. 선교지에 편하고 좋은 친구가 있다면 선교지는 어렵고 힘든 곳이 아니라 기쁨으로 사역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복 된 땅이 될 것이다. 현지인과 삶을 나누는 즐거움을 아는 선교사가 진정한 선교사다.

 

3) 기독교적 세계관을 실천한다.

필자는 기독교의 핵심을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본다. 이런 핵심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이 삶속에서 실천된다면 협력은 쉽게 이루어진다. 선교사에게 섬기는 자세가 있다면 협력은 어렵지 않다. 선교사는 어떤 특별한 소명을 받아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희생자이기 전에 기독교의 기본적인 핵심을 몸에 지니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협력을 위한 특별한 교육을 받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선교사가 참된 신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과 섬김에 대한 기독교의 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이웃을 위해 자신이 먼저 절제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의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가 협력하지 않는 다면 단순히 협력하는 면에서 부족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방해하는 선교사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본적인 태도로 사는 것이 협력이되지만 기본이 안 되는 삶을 살게 되면 믿음이 아니라 불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협력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본질을 잃는 것이기에 협력이 선교사로서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항이 되는 것이다.

 

4) 자기의 전문성을 키운다.

한국 선교사들에게 협력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자기만의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전문성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경쟁이 아닌 협력을 할 수 있지만 전문성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과 경쟁해야만 한다. 각자가 다른 전문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 함께 협력하기는 쉽지만 서로 비슷한 상황에서는 협력하기에 어려운 것이기에 자기만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 협력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5) 은사의 다름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은사를 다르게 주셨다. 그 누구도 모든 은사를 다 가질 수 없고 그 누구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각자 다른 은사를 가지고 태어나게 하신 것은 서로 협력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협력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다. 그럼으로 협력 사역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필수적인 것이다. 협력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각자를 다르게 창조하시고 다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혼자서만 독불장군 식으로 사는 것은 타락의 결과이다. 함께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다.

 

6)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

협력이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력은 기대가 아니라 내가 먼저 도와주고 희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은 협력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협력과 나눔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실천을 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욕심이 있기에 자기가 먼저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기가 가진 사역과 재물과 은사를 나눌 때 협력을 잘 할 수 있다.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음식을 나누고 함께 사는 성육신의 모습이 있을 때에 협력이 가능하다.

 

7)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한다.

협력을 한다는 것은 협력하는 사람들과만 함께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협력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협력은 사랑의 표현이다.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8) 비전을 항상 생각한다.

선교는 선교사 자신의 영역을 넓히거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자기 교단이나 선교 단체의 확장도 아니고 한국 교회의 힘을 펼치는 것도 아니며, 개인 선교사의 욕심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선교사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비전이며, 유일한 비전이다. 모든 선교사와 그리스도인의 공동의 목표다. 우리의 옆에 있는 다른 선교사는 같은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다른 선교사는 같은 목표와 골을 향해 달리는 하나의 협력 팀원이다. 만약 경기를 하는데 팀 내에서 싸우고 서로 협력이 안 된다면 그 경기는 당연히 지게 될 것이다. 같은 비전과 목표를 가진 팀이 협력이 안 된다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협력이 어려운 순간이 있을 때 선교사는 비전을 생각해야 한다. 함께 비전을 나누고 그 비전을 품고 함께 기도할 때 협력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사역 그 자체나 옆에 있는 동료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비전을 바라보고 비전에 따라 일할 때 아름다운 협력을 이룰 수 있다.

 

9) 한국적인 문화가치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바꾸어 나간다.

협력을 잘 하기 위해서는 유교적인 명목주의를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족의 개념을 혈연적인 친척으로만 한정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선교의 동역자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생리적인 가족주의의 감정은 그것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성경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인간적이고 전통적인 우리 문화의 체질과 관습을 극복하고 고치도록 하는 문화의 대 변혁만이 협력 사역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곧 내 모친과 동생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족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 고락을 나누어 온 우리의 끈끈한 인정을 좀 더 성경적인 원리로 승화할 때 협력 사역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위험을 당하고 고난에 빠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우리 고유의 공동체적인 상부상조의 품앗이와 가족적인 보살핌을 성경적인 원리와 접목시킬 때 한국인 선교사들은 협력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10) 한국에서 팀 사역의 경험을 갖는다.

한국인 선교사가 협력 사역을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면서 팀 사역의 원리를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면 현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협력을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1) 의사 전달의 기술을 배운다.

아무리 좋은 성품의 사람들일지라도 인간관계 기술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는 상대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훈련으로 된다. 선교사 자신을 과감히 드러낼 줄 알고 나눠줄 수 있도록 하는 자기 노출의 훈련도 협력사역을 잘 하기 위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12) 동역자간에 서로 원칙을 세워 나간다.

동역자와 서로의 합의하에 원칙들을 만들어 갈 때 협력사역에 많은 도움이 된다. 협력하는 동역자의 자녀와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내 자녀를 야단치는 원칙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예다. 물건을 구입할 때도 자기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물건을 샀을 때 동역자가 어떤 감정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다른 선교사를 배려할 줄 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인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문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원칙과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선교사들의 협력을 방해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재정적인 면인데, 재정을 사용할 때 상대를 존중하고 재정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만들 필요가 있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상대가 잘 되게 하는 원칙을 세워나갈 때 협력 사역은 가능할 것이다.

 

13) 서로 비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다 다르게 창조하셨고 다르게 사용하시기에 동역자간에 그것을 인정할 때 협력 사역을 잘 할 수 있다. 상대가 나보다 많이 가질 수도 있고 능력이 더 클 수도 있다. 그것을 단순 비교해서 자신과 상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비교 의식을 없애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4)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간다.

협력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죽이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자존심과 자아를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내놓을 수 있는 영성이 협력 사역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이다. 협력 사역을 하면서 같이 있는 동역자를 축복하고 서로의 관계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단이 선교사들 간의 관계 속에서 틈타지 못하도록 늘 기도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선교사의 상징도 십자가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이다. 십자가는 고난이다. 십자가는 손해를 보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말이 없는 사람은 다툼이나 싸움도 없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죽은 사람이 아무리 잘못한 삶을 살았어도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인다. 재판을 받고 있는 범죄 용의자가 죽게 되면 기소중지가 된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가진 힘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권한이나 능력을 내려놓는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힘을 키우고 채우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 선교사는 힘을 빼는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참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선교사가 자신이 가진 힘을 빼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힘이 그 선교사에게 임할 것이다. 선교사가 십자가 앞에 자신을 죽일 때 협력사역을 이루어 갈 수 있다.

 

(1) 자기 절제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용기 있게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지실 때 인내하셨다. 철저한 자기 절제와 관리가 있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겉으로는 무능해 보이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 강한 정신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내면의 싸움이 있었다. 그냥 자포자기가 아닌 강한 의지와 이성의 활동이 있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그냥 무능해서 포기하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기 절제와 자기 관리 가운데 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때로 유약해 보인다. 그들이 보는 그리스도인은 삶에 대한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때로 삶에 대해 적극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기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절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안다. 십자가라는 목표가 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다. 고난이 있을 때 좌절하지 않는 힘이 나오는 것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살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사는 것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절제하며 사는 것이다.

 

선교지는 절제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선교사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지는 선교사를 제어할 장치가 부족하다. 선교사가 절제하지 않으면 타락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곳에서 매일 매일 자기 절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기 쉽다.

 

좋은 리더는 자기관리를 할 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체력관리, 체중관리, 시간관리, 음식관리를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관리할 자리에 있을 자격은 없는 것이다.

 

어떤 선교사는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한다. 낮에는 사역 대신에 잠을 잔다. 어떤 선교사는 게임에 중독이 되어 있다. 밤새 게임을 해도 그것을 제어할 사람이 없다. 선교사가 자기 절제가 부족하다면 오히려 선교지에 가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번의 헌신으로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국에서의 생활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선교 훈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아픔을 완전히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절제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다면 선교지에서는 더 악화될 수 있다. 선교지라는 환경이 선교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사를 더욱 피폐하게 하고 실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교사만 된다면, 선교지만 가면 모든 것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큰 착각중의 하나이다. 선교지는 완전무장을 한 사람이 가는 곳이다. 누가 전쟁터에 가서 훈련하는가? 누가 전쟁터에서 회복을 기대하는가? 전쟁터는 사람을 더욱 피폐하게 하는 곳이다. 전쟁터는 삭막한 곳이다. 전쟁터는 여유가 없는 곳이다. 전쟁터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곳이다. 전쟁터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곳이다. 전쟁터는 죽음을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곳이다. 선교지는 영적 전쟁터다. 영적 전쟁터만이 아니라 육신의 전쟁터다. 정신적인 충격이 있는 곳이다. 선교사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주는 곳이다. 인격적으로 메마르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이다. 참거나 절제하기 어려운 곳이다. 피곤하고 곤고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런 곳에서 회복과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곳에서 쉼과 여유가 존재할 수 없다. 한가함과 편안함이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선교사는 자기 절제를 준비해야 하고 좋은 인격과 성품을 준비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의 영성이 준비되어야 한다. 사역의 기술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진 선교사의 태도이다.

 

(2) 손해가 곧 이익이라는 생각

필자는 친척의 조카 둘을 잠시 데리고 산 적이 있다. 어느 날 동생에게 필자는 일(심부름)을 시켰다. 이에 대해 동생은 필자에게 불만을 가졌다. 형이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래서 자기는 운이 나쁘다고 투정을 부렸다. 필자는 이 아이를 불러 설명을 하였다. “사람이 일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란다. 형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운이 나쁜 것이 아니란다. 일을 하면 건강에도 좋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기에 기분도 좋아 진단다. 심부름 하는 것을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라. 형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에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라라는 설명이었다. 이 설명을 듣고서도 조카는 여전히 자기가 손해 보았다고 투덜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각과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중심에서 생각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준이 따로 있다. 그 기준이 바로 십자가의 기준이다. 십자가는 변화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회복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긍정을 의미한다.

 

십자가 앞에서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 되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랑하고 싶은 세상적인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다. 자기의 자랑거리는 숨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랑을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물에 대한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한 것은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에 내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기에 내 입장은 없는 것이다. 내 입장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다. 내가 손해보고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보는 것이다.

 

세상은 자기가 많이 갖는 것이 행복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많이 갖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세상은 대접을 받는 것이 행복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대접하는 것이 행복이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면 우리가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은 선도 악도 아니다. 돈이 선이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그 돈은 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유익은 내 것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자가 복된 자다. 내가 손해 보아 가면서라도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어떻게 돈을 모을까를 늘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돈을 사용할까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싸움도 마찬가지다. 싸움에는 선한 싸움이 있고 악한 싸움이 있다. 내가 유익을 얻는 싸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 싸움이다. 그것은 악한 싸움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유익되게 하는 싸움은 선한 싸움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이기는 싸움이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이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공격을 당하고 싸워서 내가 지는 것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싸움은 지는 것이다. 싸움이 나쁜 것은 모두가 싸워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싸움이 선한 싸움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이기도록 하고 자기는 질 때 선한 싸움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변명도 않으셨다. 도망가지도 않으셨다. 그 대신 실패자처럼 죽으셨다. 세상에서는 완전히 패배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정한 승리는 그 이후에 나타났다. 바로 부활로 나타난 것이다.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이런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공격을 당해 패했을 때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마음은 편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쓰러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쓰러졌기에 다른 사람은 손해를 당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으로 인해 내 마음은 평안한 것이다.

지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기에 편안한 것이다. 이 세상의 싸움에서 내가 이겼다는 의미는 상대는 손해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상대가 손해를 받았기에 내가 싸움에서 이겼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진 싸움을 싸운 것이다. 진정한 승리는 상대가 이기는 것이고 내가 지는 것이라는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기독교의 십자가의 원리이다.

 

15) 협력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협력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 꿇고 그 은혜를 구하고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협력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협력의 담이 넘기에는 너무 높아 보인다. 그래서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다. 차라리 혼자 하는 것이 더 쉽고 부담이 적을 수도 있다. 그 많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 높은 벽을 넘는 것은 무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높은 담 이면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들을 생각한다면 참을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열매는 그 높은 담을 넘을 때만이 주어진다. 그 많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협력 사역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IV. 현지인 중심의 철학

 

필자가 선교 본부에서 일 할 때 어느 날 세계 선교사 협의회에서 우리 선교단체에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 왔다. 공문은 필자가 속한 선교 단체를 다른 단체에 소개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10개 정도 되는 질문 가운데 이런 질문이 하나 있었다. “귀 단체의 대표적인 선교사와 대표적인 선교지를 소개해주세요라는 질문이었다. 독자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 질문을 받고서 한참을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 질문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누가 대표적인 선교사인가? 필자는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질문지에 답을 썼다. “우리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모두가 대표적인 선교사입니다. 모든 선교지가 다 우리 선교부의 대표적인 선교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선교부는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선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역으로 선교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선교부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중요합니다.” 이런 답을 쓰면서 필자는 선교를 하는 사람들도 세상의 기준에 의해 누구는 크고 누구는 작은가 하는 기준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다.

 

필자는 언젠가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목사는 큰 교회가 좋다고 하였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하였다. 자기도 큰 교회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작은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작은 교회는 재정이 많지 않아 큰일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였다. 그 목사는 양적으로 큰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사는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하나님은 돈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과연 그 목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것이 좋은 것이고 작은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일까?

 

세상은 큰 것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과 큰 사람에게 더 많은 주목을 한다. 성공을 해도 크게 성공하고, 일을 해도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장관이나 교수가 되어야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필자가 신학교에 간다고 할 때 필자를 교회로 인도했던 숙모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영아! 너는 목사가 되려거든 큰 목사 되고 큰 목회를 하여라. 큰 부흥사가 되고,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어라라는 부탁을 하셨다. 그러면서 숙모님은 필자가 큰 목사가 되도록 기도하시겠다고 하셨다. 한국 교회 안에 큰 것이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것만을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 아니다. 풀러 신학교의 폴 피어슨 교수는 선교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라고 말한다. 선교 역사에서 선교의 부흥은 항상 소수의 사람들, 그 중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에서 권세와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기도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선교의 참 됨은 현지인들과의 협력에 있다. 현지인은 단순한 협력 차원이 아닌 그들이 선교의 주체가 되고 선교사는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현지인은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연약한 자이다. 선교사보다 힘이 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선교사보다 능력이 부족해 보인다. 실제로 선교사보다 가진 것이 적고 배운 것도 많지 않다. 선교사는 강자이고 현지인은 약자이다. 선교사는 유명하고 그들은 유명하지 않다. 선교사는 크고 그들은 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인이 주인이 되고 그들이 직접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다운 선교다. 그들은 겉으로는 미약한 자이지만 하나님은 미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준대로 능력 있고 큰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작지만 믿음 있는 자를 쓰신다. 하나님은 작은 자, 연약한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다. 힘없고 연약한 자들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함에도 성공적인 일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주인이 되어 그들의 일을 주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신앙의 진수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헌신과 희생에서 나온다. 큰 자나 적은 자나, 능력 있는 자나 부족한 자,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것은 그들의 삶을 헌신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드릴 때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현지인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신앙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 그들에게 나타날 때 그들이 선교지에서 주인이 될 수 있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현지인들이 헌신하여 그들의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이런 헌신을 하여 주인이 되도록 섬기는 것이 선교사의 역할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제는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의 헌신의 신앙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교사가 현지인들이 헌신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눈에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너무 연약하기에 현지인들에게 사역의 기회, 헌신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헌신 대신에 선교사가 직접 그 일을 한다. 현지인들이 해야 할 그 일을 선교사가 직접한다. 그러나 선교사는 현지인들이 해야 할 일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현지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작은 자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고 그들이 그들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작은 자는 결코 작은 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1절에서 6절까지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 속에는 작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큰일을 하더라도 귀중한 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큰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작은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큰 것도 보인다. 작은 자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는 사람은 큰 사람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다. 작은 사람을 환영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환영할 수 있다.

 

작은 자나 큰 자 모두를 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작은 자에게 관심이 없지만 주님은 작은 자에게도 관심이 있으시다. 필자는 그 하나님이 좋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기에 내가 연약하지만 나의 생명을 드려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

 

천국은 낮아지는 곳이다. 세상은 우리를 보고 위로 올라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신다. 이 세상은 높아지려 하지만 천국의 성격은 내려가는 것이다. 크고자 하는 것에서 작아지는 것이 천국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올라가는 것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려가는 것은 능력이 없어도 내려갈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내려가는 것이 올라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다. 내려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 몸에 장애가 있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내려가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천국은 연약한 자들의 것이다. 천국은 가진 것이나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외형적이고 보이는 것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천국은 외형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더라도 우리의 마음의 상태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잘하는 것과 상관없고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도 별 상관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과 우리의 인격에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천국은 불평등이 없는 곳이다. 천국은 우리의 마음과 인격에 의해 결정되는 곳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비록 외형적으로 가진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기쁘고 만족할 수 있는 곳이다. 세상의 조건으로 차별을 당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기가 죽을 필요가 없는 곳이다. 우리는 그 천국의 시민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기준 때문에 얼마나 주눅이 들고 고통스러워하며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허락하신 천국은 연약한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큰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것 때문에 제자들은 서로 싸웠다. 예수님과 함께 늘 같이 살면서도, 큰 자리를 원했다. 예수님과 같이 먹고, 같이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기 보다는 큰 자리를 얻고 높아지려고 하였다.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22:26)”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로 제자들처럼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여전이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의 반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의 반을 가지고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 것으로 천국 시민이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외형적인 것과 보이는 것과 물질적인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들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 보이는 것들, 물질적인 것들을 달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마음을 낮추고 비우고 주님께 마음을 내려놓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야 한다.

 

1) 겨자 씨 비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겨자씨는 눈으로 겨우 보일만한 아주 작은 씨다. 이 씨는 작지만 땅에 심기어졌을 때 나중에 큰 나무가 된다. 나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 하나님 나라도 현재는 겨자씨처럼 아주 적다. 그러나 장차 커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도 겨자씨처럼 씨로서는 적으나 하나님의 계획과 손 안에서 커지고 더 많은 유익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 영향력은 크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쓰실 때 하나님 나라에서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와 중요성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은 너무 작은 존재라고 생각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일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겨자씨보다 작은 존재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겨자씨는 자란다. 겨자씨는 더 작아질 필요가 없다. 겨자씨는 계속해서 자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랄 가능성이 있다.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당장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을지라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 때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 하루하루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이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비록 오늘밤 기도해서 내일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천천히 자라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란다. 하나님 나라는 빨리 자라면 빨리 늙고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빨리 사그라드는 조숙조로(早熟早老)가 아닌 큰 그릇은 시간이 걸려서 완성된다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보기에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된다. 능력 없는 것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모두가 귀중하고 모두가 가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족할 만하고 쓰임 받을 만한 존재이다. 이것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나의 작은 것 하나가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작은 일을 작게 생각하지 말고 작은 일 하나가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지금도 평범한 사람을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윌리암 케리의 누이

선교 역사학자들은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윌리암 케리가 훌륭한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누이의 기도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장애를 가진 그의 누이는 평생 동안 윌리암 케리를 위해 기도했고 윌리암 케리는 그 기도의 후원으로 위대한 선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큰일을 이루는 것이고 그러기에 작은 일 자체가 큰일인 것이다. 큰일은 작은 것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인 것이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기준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로마서 1012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차별 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의 기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이다. 믿음이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모두가 평등하다. 만약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준이다. 선교지에 있는 현지인들도 선교사나 동일하게 믿음으로 의로워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자다. 하나님이 눈 여겨 보고 계시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보다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선교사와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동일하게 함께 하신다. 사람들의 관심은 선교사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현지인들에게 있다. 선교사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도 하나님과 교제한다. 현지인들이 모두가 선교사가 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하나님과 동행 할 수는 있다.

 

중국에서 전 생애를 선교사로 보낸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몹시 지쳐 있었다. 전도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번쩍 눈을 떴다.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5) 라는 말씀 앞에 그는 큰 은혜를 받았다. “내가 정신적으로 침체되었을 때 주님이 나를 떠나신 줄 알고 불신 속에서 살았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신 이상 나는 염려할 것 하나도 없다라고 간증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다. 반석이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어떻게 할 때 기뻐할까? 어떤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일까? 부모에게 많은 선물을 드릴 때인가? 돈을 많이 벌 때인가?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걱정되게 하지 않고 자기 일에 충실하게 살 때이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부 안할 때, 결혼 생활 제대로 못할 때, 열심히 살지 못하고 못된 짓 할 때, 이럴 때 부모의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을 때 부모들은 가장 가슴 아픈 것이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가 말한 것을 듣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믿고 인정할 때 부모는 가장 기뻐하는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옳으시고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책임져주신 것을 믿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녹의 그 믿음을 기뻐하신 것이다.

 

어느 집에서 불우이웃을 돕자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에게 성금을 내라고 부모가 제안을 하였다. 큰 아이는 가지고 있던 20불 중에 2불을 냈다. 여러 가지 사야할 것이 있기에 저축을 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둘째 아이는 가지고 있던 15불을 다 드렸다. 자기가 사고 싶은 것이 많이 있지만 그 때는 아빠께 요청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런 태도를 본 부모는 둘째 아이가 뻔뻔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부모를 믿고 인정하는 그 모습이 귀엽고 아름다울 뿐이다. 그 아이 때문에 흐뭇해하고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가진 것 다 드리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다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 기뻐하시는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믿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기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너희 가진 것을 하늘 창고에 쌓아두라. 그러면 내가 채워주겠다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상주시는 분임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 때 풍랑을 만난 적이 있다.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있었다. 그 때 제자들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급하게 깨웠다. 혹시 죽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 올 때 그들 곁에는 주님이 계셨다. 만약 그 때 그들이 죽는다면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그들이 산다면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끝까지 책임져주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때로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려움 때문에 두려워한다. 죽음 때문에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죽어도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실패한다면 그 죽음과 실패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선교사나 현지인이나 모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선교사와 현지인이라는 외형적인 것 때문에 차별을 당할 수 없다. 선교사와 현지인이 함께 추구해야 할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현지인도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선교사도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만 가장 위대한 선교사이다.

 

3. 하나님의 나라에는 섬기는 사람이 큰 자가 된다.

우리 주님은 친히 섬기는 종이 되셨다. 섬김을 받기에 충분하신 분이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 제물로 주려고 오셨다(10:45)”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높아지려면 낮아지라고 하셨다.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사랑의 실천이 최고 가치의 삶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자신의 섬김의 사역을 위해 거처도 없이 지내셨다. 사실 때 입을 것도 충분치 않으셨다. 항상 제자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다. 마지막으로 섬김의 최고봉인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셨다.

 

낮은 곳에서 흘리는 섬김의 땀방울은 온갖 잡념을 씻어낸다. 섬김의 땀방울 속에 생명의 신비가 들어 있고 십자가의 고통을 깨닫게 되며 봉사의 진미를 배우게 된다. 세상의 가치는 높아지려고 발버둥치고 더 가지려고 시기하고 미워한다.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공부하고 노력한다. 보다 많이 얻어 누리려고 서로가 짓밟고 싸운다. 그러나 성경은 낮아지기 위하여 올라가야 하고 나눠주기 위하여 가져야 하고 섬기기 위하여 배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테레사 수녀는 허리를 굽혀 섬기는 사람은 높은 곳을 쳐다볼 시간이 없다. 엎드려 있는 사람은 넘어질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세상은 갈등과 문제가 많다. 교회 내에서도 성도들 간의 골이 깊다. 이기적이고 섬기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더 가지려 하고,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먼저 섬기려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준은 얼마나 큰 사람이 되고,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벌었느냐가 아니다. 우리의 기준은 얼마나 섬기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섬기는 삶을 살았다면 그 인생은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산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섬김, 그 자체가 사역이고, 열매이고 우리가 천국에서 받아야 할 상금인 것이다. 선교사나 현지인이나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선교사나 현지인이 모두 섬기는 사람이 될 때 협력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침 받는 사건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엘리사 선지자나 나아만 장군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여기서 한 소녀가 없었다면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녀는 소망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이방에 끌려가 종살이하는 처지였다.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이방 땅에서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소녀의 상황은 유대인들이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 죽음을 당할 때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하는 갈등을 했던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6.25 전쟁을 당했을 때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을 공산군에게 내어주어 가족과 친척과 정든 고향을 잃었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입장과 같았다. 이 소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방인에게 끌려와 이처럼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 소녀는 그냥 끌려 온 것이 아니라 종으로 끌려 왔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종살이를 하면서도 똑똑해서 바벨론 포로 중에도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러나 이 소녀는 한 여인의 몸종으로 살아야 만하는 신세였다. 조국을 떠나 종으로 끌려온 심정은 인생을 포기할 만큼 소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종이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어린 소녀는 부모를 떠나 왔다. 아마도 혼자 끌려 왔을 가능성이 많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 살았기에 외로웠을 것이고 마음이 고독이 가득했을 것이다. 성경에 그녀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을 만큼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 자신의 처지가 변할지 알 수 없는 현실, 고향에 돌아갈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세상적인 소망은 없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열왕기하 53절에서 이 소녀는 그 주모에게 이르되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께 가시면 그가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선지가가 고쳐주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마 이 소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저주를 품어도 마음의 아픔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소녀는 참다운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만 장군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진 것도 능력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불치의 병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 소망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이 소녀는 왜 염려하십니까? 소망이 있습니다. 가보십시오,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권면한 것이다. 자신이 소망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망을 주는 사람이었다.

 

이런 형편 가운데서 이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계집종의 말을 듣고 왕에게 그녀의 말을 고한다. 그것은 이 소녀의 사는 모습 때문이었다. 평소에 자기 일도 제대로 안하고, 한숨만 쉬고 믿음도 지키지 않았다면 아마 이 소녀가 어떤 말을 했더라도 나아만 장군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이 한갓 계집종의 말을 듣게 된 것은 그만큼 믿을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이 소녀가 성실한 삶을 살았기에 나아만은 비록 계집종이었지만 그의 말이었지만 들었던 것이다. 도저히 소망 없는 상황에서 이 소녀는 성실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묵히 살았던 것이다.

 

어려운 중에도 신앙과 성실함과 소망과 담대함을 지킨 이 소녀의 태도의 결과로 인해 나아만 장군이 고침을 받았다.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역사를 가져온 것이다. 결국은 아람 군대와 왕까지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믿게 된 것이다. 작은 소녀의 믿음과 성실함은 아람 나라의 구원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녀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이 소녀는 외형적으로는 연약한 작은 자였지만 내적으로 믿음과 성실과 용기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았던 위대한 섬김의 사람이었다.

 

4. 재능은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다르게 주신다.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은 한 달란트 가진 사람보다 잘 나서 다섯 달란트를 가진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면 그래서 열 달란트를 가졌다면 그 노력으로 열 달란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달란트 가진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열 달란트를 가질 수 없고 네 달란트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내가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서 열 달란트와 같이 많이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내 노력이기 전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모든 것이 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자에게 다른 달란트를 주시는가? 하나님은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각자에게 다른 달란트를 주신다. 잠언 175절에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했다. 즉 우리가 더 가진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주시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813-14절에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한다. 자신에게 더 가진 것이 있으면 더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똑같이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 각자에게 다른 달란트를 주셨다. 모두가 다 똑같다면 서로 도울 이유도 없고 사랑할 이유도 없다. 더 가진 사람이 없다면 누가 덜 가진 사람을 도울 수 있겠는가? 모두가 똑 같다면 우리가 가진 사랑이나 돈이나 나누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덜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혹은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게 주시는가? 하나님은 왜 가난한 사람들과 억울한 사람들이 이 땅에 있도록 하시는가? 하나님은 부자는 잘 먹고 잘 살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은 왜 록 어렵게 살도록 하시는가? 그래서 그 하나님은 공정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덜 가진 사람들을 도우라고 다르게 주신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가졌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다르게 주신 것이다. 그것은 재능일 수도 있고, 재산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더 가진 사람은 더 큰 책임이 있다. 우리가 책임을 잘 감당함으로 인해 이 세상이 평균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어떤 여성이 미스 코리아로 선발이 되었다면 그것은 타고난 것이다. 물론 몸매를 잘 가꾸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았으면 미스 코리아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미스 코리아가 된 사람이 그 사람이 잘 나서 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 어떤 것들은 내가 원하거나 노력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내게 주어진 것들이 있다. 우리가 노력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 노력이라는 것이 타고난 조건들을 대신할 만한 것은 못 된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노래를 잘하는 것, 운동을 잘하는 것, 모두가 노력보다는 타고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진 것으로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진 것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 전세 집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자. 그 집은 내가 빌린 전셋집이지 내 집이 아니다. 내가 팔거나 내가 내 소유로 쓸 수 없는 집이다. 언젠가는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내 집이 아니고 되돌려 주어야 할 집이기에 관리도 잘 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가진 모든 것은 바로 전셋집을 사는 것과 같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자녀도, 재산도, 재능도, 건강도 모두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되돌려 주어야 한다. 주인에게 되돌리는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책임이고, 청지기적 삶이다. 현지인이나 선교사나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잘 섬기며 책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5. 현지인들도 할 수 있는 능력과 신앙이 있다.

현지인들은 선교사와 비교할 때 가난하고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 더 가진 선교사가 현지인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문제는 선교사가 앞에서 인도하다보면 현지인들이 할 수 있는 부분들이 그만큼 없어진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이 할 수 있는 능력과 신앙을 키워주지 않고 선교사 자신이 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인들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현지인들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그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선교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 현지인과도 함께 일하고 계신다. 오히려 선교사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고 자신의 것으로 일할 수 있지만 현지인은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현지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할 수 있다. 그들이 연약하기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현지인들이 선교사들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선교사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일하지만 현지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의지하여 일하기 때문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 광야에서 도시락 한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도시락 한 개를 가져온 사람이 바로 어린 아이였다. 어린 아이의 적은 정성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불러 온 것이다. 복음서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어린 아이가 도시락을 드린 것은 단순한 정성이 아니라 헌신이었다. 그 헌신이 있어서 오천 명이 원하는 데로 풍성하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어린 아이는 아마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을 했을 것이다. 물론 이 아이가 도시락을 엄마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 도시락을 그 자리까지 가지고 갔다는 것은 자기의 것은 자기가 챙길 줄 아는 아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도시락도 준비하지 않았을 때 이 아이만은 자기의 도시락을 준비한 책임 있는 아이였다. 자기의 일에 충실한 아이었고 성실한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어린 아이의 도시락은 자기가 먹어야 할 꼭 필요한 도시락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도 배고프면 못 참는다. 이 아이에게 도시락은 어쩌면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에게는 명예나, 돈이 배고픔보다 중요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명예나 돈이 아닌 배고픈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렇다. 또한 어린 아이들은 주는 것보다도 받는 것에 길들여 있는 존재다. 배가 고픈 상황에서 자기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린다는 것이 어쩌면 어린아이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 아이가 드린 도시락은 자신의 생명을 드린 헌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신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이룬 것이다. 이름도 없는 작은 아이의 헌신이 이처럼 위대한 기적을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희생으로 이루어져 나간다는 것을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서 보여준다. 우리들도 어린 아이처럼 많은 것을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어린아이가 드리는 헌신의 모습은 가질 수 있다. 비록 어린 아이처럼 이름도 없는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우리의 드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드림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평범함을 인정해주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평범함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

 

선교사는 현지인들의 잠재력을 보아야 한다. 그 잠재력은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발휘된다. 그 잠재력은 바로 하나님의 힘이다.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현지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선교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현지인들이 할 수 있는 것까지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을 세워주고 현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들 중에는 가끔 현지인들에 대해 헌신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한다. 헌금도 잘 안한다고 한다. 헌금을 안 하기에 선교사가 모든 것을 다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현지인들이 헌신을 안 하고 헌금을 못하는 것은 선교사들의 책임이요, 잘못일 가능성이 많다. 현지인들이 드리고자 해도 선교사가 알아서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일을 다 하기에 현지인들에게 헌금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의 어려운 형편만을 보고 도와주려는 그런 마음이 오히려 현지인들의 헌신의 기회를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선교지는 현지인들의 헌신과 신앙에 의해서만 복음이 확장될 수 있다. 현지인들의 신앙과 잠재력을 인정하고 그 잠재력을 개발해주는 일이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주님은 크고 대단한 사람들을 칭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작지만 정성스러운 헌신을 받으시고 칭찬하셨다. 주님께 왔던 부자는 자기 자신의 재산 때문에 걱정하며 주님을 떠났다. 그러나 주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보시고 칭찬하셨다. 현지인도 과부처럼 두 렙돈 밖에 드릴 수 없는 입장일 수도 있다. 세상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될지 몰라도 현지인의 조그만 헌신이 놀라운 주님의 기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마리아의 향유를 귀하게 보시고 칭찬하셨다. 마리아는 아마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멸시 받았던 죄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마리아를 귀하게 생각하셨다. 이제 주님은 주님 나라를 위해 현지인들이 헌신하기를 원하신다. 그 길을 선교사가 안내해야 할 것이다.

 

 

 

V. 사역(doing) 보다 존재(being)가 우선 되는 철학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주어진 말씀을 선교사의 입과 삶을 통해 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선교는 선교사의 영성과 선교사의 인격만큼 된다. 물론 인격과 영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어떤 성과가 있을 수도 있다. 말이나 설교만 잘 해도 어떤 결실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결실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당장은 더 위대해 보일지 모르지만 인격과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선교사의 사역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반대로 반석위에 세운 집은 세우는 과정이 힘들다. 고통과 아픔이 있다. 빨리 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집은 견고하다. 선교사의 삶을 통한 말씀의 전파가 바로 반석위에 세운 집이다. 선교사의 사역의 겉모습(doing) 보다는 선교사 존재의 됨됨이(being)이가 견고한 사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으로 선교사는 무엇을 하느냐가 우선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내면과 인격, 그리고 삶의 진정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선교다.

 

안타깝게도 선교지에는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선교사들이 있고 때로 그런 선교사들의 사역의 열매가 더 많아 보일 때가 있다. 선교사들은 보이는 열매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보이는 결과에 따라 선교사역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선교란 선교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가고 성숙시켜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선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성화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선교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선교 후원금과 후원자가 있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느냐보다는 사람들과 얼마나 관계를 잘 맺으며 사람들과 사랑을 얼마나 잘 나누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느냐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철수하면서 가르쳤던 신학생들로부터 이별 카드를 받았다. 그 중에 필자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했던 카드 한 장이 있었다. 그 내용은 그 신학생이 자기 일생에 만났던 사람 중에 필자가 제일 겸손한 사람이었고 그 겸손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사역자로 살아가는 방향을 배웠다고 하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필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그 학생의 칭찬에 걸 맞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 평가에 기분이 좋았다. 그 학생은 필자를 과대평가한 것이 사실이지만 잘 가르쳤다는 말보다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기분을 좋게 했다. 왜냐하면 필자가 의도하고 원하는 선교사로서의 평가였고 필자에게는 잘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삶으로의 영향력을 끼치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작은 목표였기 때문이다.

 

선교사에게 중요한 것은 선교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 가운데의 삶이다. 선교사는 예수님처럼 성육신하여 현지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선교사의 목표 중의 가장 큰 것은 바로 현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현지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이 선교다. 선교사의 진정성은 얼마나 크고 많은 사역을 하느냐 하는 것 보다는 선교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현지인을 함께 얼마나 사랑했느냐에 있다. 그럼으로 선교사는 눈에 보이는 열매, 사역, 결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철학 가운데 한사람의 현지인을 세우고 선교사 한 사람, 곧 자신을 세워나가는 선교사가 될 때 진정한 선교는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의 개혁은 대부분 교회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변두리에서 교회 개혁을 위해 직접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먼저 개혁의 주체가 되어 바르게 살 때에 개혁이 일어났다. 부패한 교회를 보면서 교회를 떠나 수도원을 중심으로, 혹은 경건주의 운동으로 자신을 먼저 개혁하였다. 중세시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 자기 성찰과 자기 절제가 중심이었다. 수도사들의 삶은 청빈의 삶이요, 고난을 감수하는 삶이었다.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그 모습 자체였다. 그들의 자기 개혁을 통한 부흥은 기존 교회에 영향을 주어 교회들이 자성하는 기회가 되어 교회가 갱신하게 되고 교회의 갱신은 사회를 개혁하는데 까지 이어져 갔다. 그 부흥과 개혁은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런 면에서 교회 역사에서의 선교는 자기 개혁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지오반니 프란시스는 13세기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향락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환자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자인 아버지의 재산을 낡은 성당을 보수하기 위해 사용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준 것이다. 그는 나는 청빈이라는 부인과 결혼을 하였다고 고백 하였다. 그는 빈 몸으로 이 세상에 왔기에 아버지의 유산이 필요 없다고 하여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돈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음식을 구걸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이 프란시스의 자기 갱신과 성찰이었다. 선교사들도 프란시스와 같이 자기 성찰과 갱신이 우선이다. 자기 성찰과 자기 성숙이 우선이 되어야 참 된 선교가 이루어진다.

 

개신교의 수도원이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의 재세례파 운동과 18세기의 모라비안 운동과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 부흥운동은 교회 변두리에서 시작된 교회 갱신 운동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경건이 그들의 삶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을 중요시 여겼다. 그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가 선교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볼 때 선교의 모체는 바로 경건한 삶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경건한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이 결여된 선교는 불가능하다. 현지인을 사랑하며, 검소하며, 경건한 삶이 선교의 핵심이 되고 선교사의 자기 성찰과 자기 발전, 그리고 자기 성숙이 선교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 선교사가 우선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1. 존재와 가치

한 사람에게 4살짜리 딸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딸은 말썽을 부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 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부모의 단잠을 방해하는 일이다. 그래도 그 딸은 엄연한 가족이다. 딸이 가족으로서 대우를 받는 이유는 무엇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중에 그 딸이 커서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될 수 있어서도 아니다. 아이를 키우려면 당연히 비용이 들어간다. 아이 하나를 키워서 결혼을 시키기까지 드는 비용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러나 가족의 경우에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너를 이만큼 대학까지 보내놓고 이제 좋은 직장에 취직도 했으니 그 동안 너를 키우는데 투자한 돈을 이자까지 합쳐서 갚도록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 나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곳이 아니라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귀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사역의 결과를 비교하거나 결과가 좋은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존재 자체로 그의 자녀들을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신다.

 

 

 

2. 선교사들의 삶의 태도

선교 본부 사무실에서 사역을 하다 보면 다양한 선교사들을 접하게 된다. 선교사들의 태도를 보면서 때로는 선교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교사들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의 삶과 사역이 어떠할 것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떤 선교사는 있던 자리의 흔적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가령 선교부에서 선교사에게 차량을 대여해 줄 때, 어떤 선교사는 차량을 사용한 후에 선교사가 연료도 채우고 세차도 잘 해서 반납을 한다. 반면에 차량을 쓰던 그대로 반납을 하는 선교사도 있다. 선교관을 사용하고 나서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돌려주기도 하지만 뒷정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선교사도 있다.

 

선교사들끼리 동료 선교사가 한국을 방문할 때, 물건을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꼭 필요한 경우에 아주 가까운 사이에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별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님에도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물건이 약품이나 선교지에서 구할 수 없는 꼭 필요한 것이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본인이 노력하면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무례하게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가 한국에 잠시 방문할 때 어떤 선교사는 자기가 아는 사람 모두에게 한국에 귀국했다고 알리는 선교사가 있다. 물론 아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선교를 일깨우기 위해 만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도를 넘어 지나치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선교사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선교사의 후원자가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그 방문자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두었다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 방문자에게 전화해서 찾아가는 경우다. 그 방문자, 즉 다른 선교사의 후원자를 찾아가서 자기 후원자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에 방문한 목적 이외에 지나치게 후원자들을 계발하려는 태도는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예를 통해서 선교사가 있는 자리에서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하는 선교사의 됨됨이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선교사들에게는 한국에서 선교지를 방문하는 손님들이 있다. 손님들을 맞으면서 때로는 선교사가 지나친 환대를 하는 경우가 있다. 선교사의 주도로 선교사의 입장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보다 방문하는 사람들의 입맛(?)만을 맞추면서 지나치게 아부(?)를 하는 것이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일이지만 때로는 손님들의 후원을 염두해 두고 지나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케 한다.

 

선교는 삶을 통해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교사의 삶이 곧 말씀이 될 수 있다. 아주 기본적인 생활의 태도를 지키지 못하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모순일 수 있다. 상식과 도덕성에서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거나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그 사역과 (전파되는) 그 말()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능력이 있는 선교사는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육신으로 나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이었다. 있었던 자리를 깨끗하고 말끔하게 정리해서 역시 선교사는 신사적이라는 칭송을 받는 선교사가 진정한 선교사다.

 

3. 선교사의 자기 관리

사람들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사람은 타인과 싸우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일이 안 되고 어려운 것은 결국 그 문제가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다.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어떤 선교사는 상대가 잘못했다고 열변(?)을 토해내지만 문제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 핵심에는 선교사 그 본인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자신이 변하면 환경에 상관없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그리 커 보이지 않게 된다. 비록 인간관계나 주어진 환경이 어렵더라도 자신에게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할 때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자신에게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자기 관리에서 나온다. 자기 관리란 외형적으로 보이는 시간관리, 재정 관리 뿐 아니라 내면의 관리, 마음의 관리, 감정과 이성의 관리가 포함된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도 자기 관리에 포함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것도 자기 관리가 포함된다. 자신을 알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이 곧, 자기 관리의 시작이다.

 

자기 관리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 완벽한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 관리의 필요성과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자기 관리도 안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 차례 내면의 문제인 절제와 인내의 덕목에 대해서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이는 부분보다 더 강조함을 볼 수 있다. 죄도 눈으로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내면의 마음의 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한다. 성숙이란 외형적인 성숙보다도 내면의 성숙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경은 겸손의 마음, 섬기는 마음을 강조한다. 사랑을 강조한다. 그 사랑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사랑과 희락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인내다. 내면의 문제들이다. 우리의 싸움도 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들과의 싸움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은 믿음의 싸움이요, 내면의 싸움이다. 사람이 어떤 소망을 가질 때, 그 소망을 이루는 것은 환경이나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내면이 중요해서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기도하였다. 믿음은 행위 이전에 마음의 결단으로 시작한다. 곧 믿음은 내면의 문제이다. 내면의 문제는 자기 관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4. 선교사의 자질: 거룩한 삶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선교의 자질은 선교에 대한 강한 헌신, 희생에 대한 각오, 철저한 도전 정신, 강한 영적 능력, 다양한 성경 지식과 가르침의 능력,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 등을 생각한다. 거기에 리더십과 사역의 능력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선교사의 기본 자질은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인격에 있다.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생활 형태와 삶의 태도가 선교사가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어떤 교회가 신앙인으로서 바로 살도록 교육하고 훈련한다면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선교사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 훈련을 한다면 그것 자체가 선교 훈련이다. 그 훈련이 타문화권에서 어떻게 사역 하는냐 하는 직접적인 선교 훈련보다 우선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삶과 인격이 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선교사가 타문화권에서 사역할 수 있는 모든 기능들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고 하더라고 그의 인격이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는데 부족하다면 그것은 선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반대로 어떤 선교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아름답고 그 삶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선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타문화권에서의 사역의 기술이 좀 부족하더라도 진정한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선교의 훈련은 지역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훈련이 바로 되어 있다면 이미 그 사람은 선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선교는 선교사의 거룩한 삶이 중심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선교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선교는 복음의 확장이나, 위대하고 열매 맺는 사역이 목표가 아니라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목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 전파의 결과는 하나님의 종들의 삶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다. 선교사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고 복음의 결실은 그 거룩한 삶의 결과로 하나님이 맺으시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는 사역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더 큰 고민과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만이 아닌 선교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져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투명하고 정직한 삶을 기뻐하신다.

한국은 비자금이 존재하는 나라다. 옛날부터 비자금은 하나의 문화였다. 비자금이 한국인의 정과 사랑을 나누는 통로였다. 서로 어려울 때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기도 하고, 여행갈 때 여비를 주기도 하였다. 비자금은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는 데 힘과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였다. 비자금이 좋은 전통으로 자리 잡았지만 언젠가부터 비자금은 부정과 뇌물의 원상이 되었다. 숨겨진 돈을 통해 어두움의 일들이 행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비자금은 사회의 부패를 대표하는 표식이 되었다. 비자금이 없이는 사업을 하기가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비자금 속에 숨겨진 한국인의 정서에는 투명한 것을 방해하려는 마음이 들어있다. 비자금 안에 정직과 옮음보다는 불투명과 비밀이 자리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비자금의 문화가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 많은 교회가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재정을 공개하는 것이 자랑거리도 아니고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정 공개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도 비자금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비자금을 잘 관리하는 것이 지혜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비자금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의 투명성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투명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어떻게 신용사회가 되겠는가? 우리가 불투명한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하나님은 투명하지 않는 삶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재정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투명한 삶을 사는 가운데 믿음이 존재한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는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믿고 신뢰하는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 서로의 삶을 믿고 서로 인정하는 사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이 된다. 서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비자금의 문화가 선교의 영역 안에도 존재한다. 선교부나 선교사가 재정적으로 투명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의 선교부는 재정적인 투명성을 위해 선교사들의 선교비 구좌를 선교부에서 관리한다. 선교사 개인 계좌를 허락하지 않음으로 선교사들의 재정이 투명하도록 한다. 선교사의 수입과 지출이 정확히 보고되도록 하는 것이다. 후원자들은 이런 선교사를 믿고 후원을 한다. 그 믿음에 실망시키지 않고 투명하게 사는 것이 선교사의 책임이다.

 

선교부는 투명한 선교를 위해 이런 정책을 가지고 실행하지만 때로 일부 후원자들은 선교사에게 재정을 선교사에게 직접 후원하고자 한다. 선교사에게 직접 가야할 선교비를 선교부가 행정비를 공제하여 선교사의 후원비가 삭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내는 후원금은 전액 선교사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인 이런 후원자들의 마음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교사의 재정을 투명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선교단체의 재정 관리를 받지 않고 직접 선교사에게 가는 후원금은 선교사가 자기 마음대로 재정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이는 선교사의 재정사용을 불투명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게 위해 선교사는 선교단체의 재정 시스템을 통해 투명한 재정 관리의 도움을 받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선교사 스스로도 재정적으로 실수하는 것을 방지 할 수 있고 후원자들도 자신들이 낸 선교비가 잘 쓰여 졌는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교후원금이 선교부에서 지정한 계좌로 후원되어질 때, 선교사와 후원자들이 재정의 유혹을 이기고 투명하고 정확한 재정 관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3:21)"

로마서 921절에 보면 토기장이 비유가 나온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토지장이에 비유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인간은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이다. 그릇은 토기장이가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도구이다. 토기장이는 자신이 쓸 그릇을 용도에 따라 만든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 중에는 금 그릇, 은그릇, 질그릇이 있다. 토기장이는 필요에 따라 그릇을 종류대로 만들어 사용한다. 토기장이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릇을 사용하실 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1)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일

그릇은 주인이 사용할 때 그 가치가 있다. 그릇은 자신을 만든 토기장이가 원하는 그곳에서 쓰임 받을 때 필요한 그릇이 된다. 그릇이 토기장이가 아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그릇으로서 존재가치가 없다. 그릇은 토기장이가 원하는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행할 때 그릇으로써 제 몫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필요하신 곳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하겠다는 정신이 필요하다. 그 일이 비록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자기가 즐겨하는 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라면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는 일일지라도 그 일을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하면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고 세상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일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거절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 자신도 싫어하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릇 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온 세상의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큰 뜻이다. 그 일이 바로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우선순위이다.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문을 품고 질문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순종해야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릇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든 토기장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2) 빈 그릇

그릇의 역할은 물건을 담는 것이다. 담을 자리가 있어야 그릇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릇은 속이 꽉 차여 있는 상황에서는 쓰임 받기 어렵다. 그릇이 가득 차 있으면 아무 것도 넣을 수 없다. 주인인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릇 안으로 들어가셔서 말씀하실 마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실 빈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뭔가 가진 것이 있어야 든든하다고 한다. 빈주머니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사람이 배가 고픈 것도 참기 어려운 것이다. 물질이나 지식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속에 뭔가를 채우려고 한다. 그 채우려는 마음이 욕심이 된다. 이 욕심이 세상적인 가치관 속에서 경쟁하게 만든다. 만약 그 마음에 욕심과 세상적인 가치관이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아직도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이 속마음을 지배한다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가 덜 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야고보서 311절에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찬송이나 혹은 저주 둘 중에 하나만 나와야 한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의 몸에서 둘 다 가질 수 없고, 둘 다 나올 수 없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채워진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자 할 때 저장 공간이 없을 때가 있다. 또 다른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전에 찍었던 사진을 지워야 한다. 사진 하나를 지워야 다른 사진 하나를 저장할 공간이 생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비워야 한다. 비우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명예욕을 버려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무언가를 채우시고자 하실 때 우리 속에 있는 잡다한 것들을 비우는 작업을 먼저 하신다. 그러므로 비우는 삶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첫걸음이다.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욕심을 버릴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다.

 

(3) 깨끗한 그릇

주인이 어떤 그릇을 사용하고자 할 때는 깨끗한 그릇을 먼저 찾는다. 그릇은 깨끗해야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릇의 종류가 어떤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금 그릇이라도 그릇이 더러우면 쓰임 받기 어렵다. 반대로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깨끗하다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사는 처음에 선교사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일을 위해 세상적인 기준과 성공을 포기한다. 세상적인 부와 명예를 포기한다. 세상적인 권력과 쾌락을 포기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포기했던 것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온다. 선교사가 될 때 포기했던 명예와 물질과 쾌락들이 유혹의 손길로 다가온다. 선교사가 처음에 물질의 풍요를 포기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오히려 물질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나타난다. 처음에 세상적인 권력을 포기했는데 다시 선교의 조직체에서 그 권력을 되찾고자 한다. 특별히 요즈음 인터넷이 선교사를 유혹한다. 인터넷을 통한 게임이나 성적인 사진이나 영상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선교지에서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감각적으로, 순간적으로 달래준다. 그런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들이 선교사들에게 가끔씩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 선교사로 헌신하는 단 한 번의 결단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거룩한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이겨내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만 첫 결단을 유지할 수 있다.

 

3) 거룩한 유머

필자가 선교 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을 때 원장님께서 선교사는 성적인 부분에서 특별히 조심하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농담(유머)이라도 성적인 것을 농담으로 하지 말라고 하셨다. 더러운 농담은 선교사 자신을 더러움에 내어 놓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성적인 유혹을 경계한다. 잠언서에서는 창녀에게 끌려가는 소년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에 비유했다. 성적인 부분에서 실패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 부분에서 깨끗할지라도 앞으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선교사는 자신을 위해 주님 제가 성적인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들랑 그전에 차라리 저를 천국으로 불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선교사가 아무리 위대하고 성공한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성적인 부분에서 실패한다면 모두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범죄 하기 전에 불러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그저 듣기 좋은 윤리적인 교훈만은 아니다. 그것은 선교사 각자에게 경고하는 예수님의 강한 요구이다. 선교사는 거룩성과 정직성, 그리고 순결성을 유지하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4) 거룩이 곧 선교다

선교에서 거룩이 중요한 이유는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삶이 거룩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전하기가 어렵다. 선교지 사람들이 선교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성을 배우지 못한다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거룩이 제외된 기독교와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결국 거룩이 없는 선교는 열매가 없는 것이다. 거듭 반복하지만 선교사의 사역보다 그 생활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교는 선교사의 일상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교는 장소만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선교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삶으로 통해 보여주는 행위인 것이다. 선교는 선교사가 하나님처럼 거룩해져가는 과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선교사역의 행위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거룩하지 못하면

아메리카 P국의 선교사 두 사람이 길거리에서 몸싸움이 일어났다. 현지인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나라에는 한국인 선교사가 많지 않았다. 더구나 동양인인 선교사가 아메리카 대륙의 한 마을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 마을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누구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목격한 현지인들이 선교사와 복음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거룩은 적극적인 선()이다

거룩한 삶은 소극적인 삶, 즉 자기만 깨끗하게 살겠다는 외침이 아니다. 거룩은 적극적으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 거룩은 불의를 향해 마음 안타까워하면서 함께 고쳐가는 것이다. 거룩은 질책만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을 돕는 것이다. 거룩은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거룩은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돕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길거리에 버려진 휴지를 줍는 것도 하나의 선이다. 공공질서를 지키는 것도 선이다.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는 것도 선이다.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도 선이다. 고생하는 사람을 볼 때 격려하는 것도 선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도 선이다. 잊혀진 사람에게 조건 없이 안부 전화를 하는 것도 선이다. 길에서 약자를 돌보는 것도 선이다. 사람들에게 격려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선이다. 이런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다.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다. 거룩한 삶을 통해서 이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5) 거룩은 용기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이는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은 소심하고 부딪히지 않는 나약한 삶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필요한 삶이다. 거룩한 삶은 용기 있는 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일이다. 거룩한 삶은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를 갖는 삶이다.

 

(1) 용기가 없어서 실패한다.

필자가 아직까지도 후회하면서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영어시간의 일이다. 그 때 당시에 영어 시험을 매일 치렀다. 매일 치르는 시험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많은 도움을 주는 시험이었다. 매일 치르는 쪽지 시험은 항상 다섯 문제였다. 모두 맞으면 100점이고 한 문제라도 틀리면 빵점이었다. 다녔던 중학교가 남녀 공학이었는데, 빵점 맞은 사람은 쉬는 시간에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어야 했다. 여학생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뛰어야 하기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했다. 필자는 감사하게도 한 번도 팬티를 입고 운동장을 뛰는 일은 없었다. 뛸 수 있는 단 한번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넘어갔다. 영어 선생님께서 시험 채점을 하실 때 실수를 하셔서 하나를 잘못 써서 빵점을 맞았어야 했는데 빵점이 아닌 100점을 주신 것이다. 그 때 필자는 용기 있게 선생님께 가지 못했다. 하나 틀렸다고, 빵점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사건은 운동장을 도는 벌은 모면했지만 지금까지 필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건이 되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서 정직이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받는다. 정직을 위해서는 사춘기 남학생이 공부를 못해서 여학생들 앞에서 팬티 입고 뛰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정직하고 거룩한 삶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삶은 고통과 희생과 손해가 따른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피 눈물 나는 아픔이 있다. 손해 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2) 부정직은 실패를 가져온다

필자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의 이야기다.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학생으로 공부를 하였다. 약속된 도움이나 경제적인 보장이 없이 가족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선교지에서 건강 문제로 철수하여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필자는 허리가 좋지 않아 적잖은 고생을 하였다. 건강이 좋지 않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도 힘이 드니 마음의 고통은 더욱 더 컸다. 건강이 좋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 때 미국에서 학생은 법적으로 학교 밖에서는 일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아르바이트를 한지 두 달 만에 몸이 더욱 지치게 되었고 힘든 상태로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일이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간 정도 신문을 돌렸다. 두 달 동안 2,200달러 정도의 금액을 벌었다. 필자는 공부를 하면서 할 수 있고 새벽이기에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일도 아니어서 이 일을 하였다. 나중에 신문 돌리는 일을 그만두고 계산해 보니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2,200달러가 총 수입이었는데 차량 기름 값으로 600달러 정도 들어갔다. 도중에 한 번의 차량 사고를 냈다. 물론 보험으로 처리를 했지만 780달러가 지출되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하루에 60마일씩 달리다 보니 차량이 무리가 되어 차를 바꾸기도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는 것이 몸에 더욱 무리가 되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든 약 값만 500달러 이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중단하고 나서 200 달러의 세금을 냈다. 필자가 번 돈은 2,200달러였는데 일하면서 쓴 비용은 2,800 달러가 들었다. 거기다 계산되지 않는 차량 바꾸면서 들었던 비용과 몸이 안 좋아 고생한 것을 계산하면 그 손해의 비용은 훨씬 더 컸다. 유학생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은 불법이다. 물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과, 학교 내에서 일을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지만 신문을 돌리는 일은 불법이었다. 아내는 돈이 없어도 일하지 말고 법을 지키며 살자고 했는데, 필자는 가장의 입장에서 경제적으로 당장 어려웠기에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손해를 보았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불순종을 했을 때 그에 대한 대가는 엄청난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살 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가슴으로 체험을 하였다.

 

6) 거룩은 평안을 가져온다.

거룩한 삶을 살 때 무엇보다도 평안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한다면 평안의 삶을 살 수 없다.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철수하기 전에 토플 학원을 한 달 정도 다닌 적이 있었다. 안식년 때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어공부가 필요했다. 미국 문화원에서 하는 토플 클래스였는데, 금요일 밤과 토요일 오전에 하는 수업에 참석하였다. 학원에 가는 첫날, 필자는 수업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화장실에 도착했을 때 화장실 안에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들어가고자 한 문을 밀었을 때, 무언가 문에 부딪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문은 화장실 문이 아니라 창고 문이었다. 필자가 잘못 알고 열었던 것이다. 창고 안의 문에 기대놓았던 물건이 넘어지면서 다른 몇 가지 물건들이 부서졌던 것이다. 필자는 순간 너무 당황하여 조용히 문을 다시 닫았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무엇이 깨졌다면 학원에 손해를 끼친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그런 부담이 마음에 들었다. 필자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은 토요일이기에 학원 강사만 와서 가르쳤고 학원의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대로 얘기할 수가 없었다. 다음 주 금요일에 학원에 갔는데 너무 늦게 가서 역시 학원 직원들은 퇴근을 하고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 주 금요일에는 일찍 학원에 갔다. 학원 총 책임자를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하였다. 필자의 말을 듣던 총 책임자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손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런 일을 알려주는 것에 대해 정직하다고 하면서 감사해 하였다. 필자는 학원 책임자를 만나고 사실을 말하고 나서 마음이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몇 주 동안 마음에 부담이 컸었는데, 해결이 되니 마음이 날아갈 것 같은 평안함이 있었다. 비록 큰 잘못은 아닐지라도 손해를 끼친 것이기에, 그리고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숨기는 것이 힘들었었다. 실수를 고백하고 난 다음에 그 평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경험하면서 죄짓고는 못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도둑을 당한 사람은 발 뻗고 잘 수 있지만 도둑질을 한 사람은 발 뻗고 잠을 못 잔다는 말을 기억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자신의 평안을 위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 거룩하지 못한 삶은 마음의 평강을 빼앗아 간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면 평안히 살수가 없는 것이다.

 

7) 거룩은 전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에콰도르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많이 맡겼다. 정비소 직원들이 필자에게 이런 말을 늘 하였다. “언제 자동차를 팔거냐? 곧 팔거면 부속품을 그냥 싼 걸로 임시로 넣으라는 조언이었다. 그럴 때 마다 필자는 많은 고민을 하였다. 과연 싼 것으로 고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에콰도르에서는 부속품이 정품과 비품의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싼 부속품으로 바꾸고 나서 차를 바로 파는 것이다. 그렇지만 차를 사는 사람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부속품이 정품이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차를 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차를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속품을 임시로 싼 것으로 끼어 넣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된다. 비록 곧 팔더라도 내가 계속 오래 오래 탈 차로, 그리고 내차로 생각하고 부속품을 정품으로 바꾸는 것이 정직한 삶이다. 바로 이것이 거룩한 삶이다. 모든 사람들과 사회가 정직하게 산다면 다음에 자신이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면 자신도 나중에 속임을 당할 것이다. 때로 더 큰 손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정직한 삶은 곧 자신을 위한 것이다. 안정되고 믿고 편안하게 사는 방법이 자신이 먼저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거룩하게 살 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이 행복한 삶이며,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서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라면서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하였다. 윤동주 시인이 부끄럼 없는 삶을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괴로워해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 때 거룩한 삶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근본이 되며 도구가 된다. 거룩한 삶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올 뿐 아니라 이 사회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바로 거룩한 삶이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은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요, 찬양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선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