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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4-6강 문화(상황)와 리더십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4학기

제 4-6강 문화(상황)와 리더십

후앙리 2020. 4. 21. 19:11

 

차례

I. 리더십, 문화적 가치와 성경

II. 리더십과 상황

III. 리더십과 권력

IV. 리더십과 개인주의

V. 리더십과 불명확성

 

I. 리더십, 문화적 가치와 성경  (: 제임스 E 프루드만. <범세계적 교회와 선교적 리더십>. 2013. 요약정리)

 

1. 서론

한스는 토고에서 사역하는 스위스 선교사이다. 그는 현지인 목사 루카와 함께 수도인 로메에서 AIDS 환자들을 위한 사역을 계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긴장이 일어났다. 한스는 설비, 재정, 인원에 대해 시간에 따른 12개월짜리 작업 계획서를 기안했다. 루카목사는 다음 달에 당장 센터를 열기 원했다. 그는 세밀한 계획이 없이도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오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루카 목사는 센터 책임자로 카리스마를 가졌고 지역사회의 깊은 존경을 받는 사촌 한 사람을 지명하기 원했다. 한스는 의료와 행정 경험을 가진 지도자를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카 목사는 AIDS 센터가 지역사회의 존경을 얻기 위해 책임지는 새 자동차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가정했으나 한스는 이러한 사치스러운 지출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갈등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한스와 루카 목사 둘 다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 구절들을 즉각 인용한다.

한스는 루카 목사가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울지 모르고 정당하게 행정을 집행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돈을 무책임하게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루카 목사는 한스가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왜 한스가 아무 관계도 없는 행정가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세우기를 원하는지 왜 센터가 지역 사회로부터의 존경을 받는 것을 그가 원치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예는 세계화된 오늘날, 토고에 있는 이 팀이 스위스, 가나, 미국, 프랑스, 에티오피아, 호주로부터 온 선교사들로 구성된다면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리더십에 대한 기대는 현재 선교 팀들이 직면하고 있는 도전적 현실이다.

 

2. 다음의 지침들은 다중 문화적 팀의 리더십 긴장을 해소하는 것을 도와준다.

자신이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들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가치들에 대해 거의 성찰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능하고, 무례하거나 제대로 양육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한 신임 선교사는 현지인 목회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 선교사는 어렸을 때 엄마에게 밥 먹을 때는 모자를 벗으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교육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지 목회자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문화에서는 모자를 쓰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이들의 문화적 가치들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가치가 보편적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음을 선교사는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무례를 범하려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을 성경 전체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문화적 가치들과 대체로 일치하는 성경 내용들에 자기도 모르게 끌리게 된다. 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자주 성경에서 근거 구절을 찾기를 시도하고 있다. 많은 성경 교사들이 느헤미야를 리더십의 이상적 모델로 사용한다. 극도의 권위적인 리더십을 찾는 사람은 느헤미야가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았다”(13:25)는 말씀을 인용하고자 한다. 평등주의 리더십 가치를 가진 사람은 바울 사도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라고 한 말씀을 인용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문화와 평등주의적 문화, 양자 모두가 서로 반대되는 가치들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은 성경 전체로부터 나와야 한다. 다중 문화적 상황 속에서 리더들은 다른 문화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탐색하는 기회를 가진다. 성경에서 나온 근거 구절들을 찾기 보다는 원리들의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함축적인 성경적 원리들은 성경 이야기들 뒤에 묻혀 있다. 성경적 원리의 한 가지는 지도자들이 인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이웃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3. 성경과 문화의 패러독스

하나님이 모든 문화 속에 역사하고 계시듯이 사탄도 그러하다. 따라서 리더십의 나쁜 예는 문화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문화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인간 타락의 영향 역시 명백하게 나타난다. 모든 문화의 리더십 스타일은 리더의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을 반영하는 잠재력을 갖는다. 모든 문화의 리더들은 교만의 죄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가진 타락의 본성 때문에 권력은 타락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사랑과 이기심의 원리가 인류의 마음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 다양한 리더십 스타일에서 입증된다. 어떤 평등주의 리더가 사람들을 속임수로 조정하고 자기 유익을 추구할 수 있는 반면, 어떤 가부장적인 리더는 자기를 돌보지 않고 사랑이 많을 수도 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가정들을 의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우리 문화의 리더십 스타일을 낭만적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어떤 선교사는 개인주의는 나쁘고 집단주의는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집단주의가 종족갈등을 일으키고 개인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한다. 개인주의적 문화와 집단주의적 문화 양쪽 모두에서 선악의 동기가 작동한다. 자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나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 모두가 적절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자문화중심주의는 자신의 문화가 최상이며 다른 문화들은 열등하다고 가정한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모든 문화가 본래적으로 고상한 것이라고 전제한다. 자문화중심주의와 상대주의 양쪽 모두 문화에 내재한 죄성을 간과한다.

다중 문화적 리더십의 딜레마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문화의 표면 아래를 파고 들어가 다음의 질문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1) 리더십에 대해 내가 가진 근본적인 문화적 가정들은 무엇인가?

2) 다른 문화들과 다른 근본적인 가정들은 무엇인가?

3) 모든 문화에서 따라야만 하는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4) 성경적 원리들을 반영하기 위해 언제 리더십이 바뀌어야 하는가?

5) 성경은 언제 리더십 스타일에 있어 융통성을 허용하고 있는가?

삼각구도가 있다.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 리더십에 대한 자신의 문화의 가치들/ 리더십에 대한 다른 문화의 가치들: 위의 질문들 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신들이 가진 리더십 가치들이 완전히 성경적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문화는 없다.

2) 모든 문화는 성경적 리더십 가치들의 어떤 면을 반영하고 있다.

3) 리더십 가치들에 있어 문화마다 많은 다른 점들을 보여준다.

4) 문화들이 가진 어떤 리더십 가치들은 다른 문화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5) 대부분 문화들은 다른 문화들과 겹치게 되는 부분을 보유하며 또한 성경적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

 

4.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

성경의 예들로부터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을 이끌어 내는 것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성경에는 수백 가지의 리더십에 대한 예들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나쁜 경우에 관한 예들이다. 리더십에 대한 성경의 묘사들이 오늘날 리더들을 위한 규범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히틀러나, 이디아민, 모택동의 리더십 스타일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엎으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을 때 그의 독재적 리더십 스타일을 나타내셨다(2:15). 리더십에 관한 너무나도 많은 기독교 책들이 단일 문화적 관점에서 집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구절들을 내세우며 리더십에 관한 보편적 성경 원리들이라고 선전되어 왔다. 리더십에 관한 성경적 원리들을 다른 문화권에 제시할 때 깊은 겸손의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고 오류가 없지만 우리 자신의 해석은 그렇지 않다. 그러기에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 원리들은 무오한 진리이기보다 하나의 가설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 나타난 성경적 원리들을 우리 문화의 안경을 통하여 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모든 민족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문화의 신자들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문화의 모든 백성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다. 성경적 내러티브와 신학을 연구하면서 문화를 초월하여 적용할 수 있는 리더십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을 인해 그들을 진멸하고자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용서해주시지 아니하시려거든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씀드리기까지 했다.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33:14)”고 약속 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세 개의 층이 나타난다.

바깥층에서 낙담한 모세가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위해 간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가장 깊은 신학의 핵심에서는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특성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만 죄악과 반역을 향해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서 알게 된다. 중간층에서는 리더십의 원리가 있다. 모든 문화의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자신들이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중보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무한한 가치를 지녔으나 죄악된 성향을 가진 신자들을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신학과 리더십의 원리들은 경전의 본문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끌어낸 것이다. 성경적 원리가 성경의 내러티브 뒤에 놓여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가치는 겉으로 드러난 문화의 표현 뒤에 감추어져 있다. 어떤 문화적 가치는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열려있고 다른 가치들은 우리가 인생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깊은 핵심에 숨겨져 있다.

 

5. 세계관

문화의 핵심에는 세계관이 있으며 그것은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에 대한 실재에 관련된 가정들이다. 모든 인간의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 인생의 목적이란 개개인이 부를 축적하고 명성을 쌓는 것인가?

- 가족의 명성을 증진시키는 것인가?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 행복하게 되는 것인가?

-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인가?

- 실재의 성격에 관하여는 어떠한가?

-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나를 알고 나를 돌보시는가?

-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 물리적 세계가 정말 존재한다면 거기에 질서가 있는가?

- 사람들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졌는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삶이 통제되는가?

- 악령들과 천사들은 존재하는가?

-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전제들은 미묘하게 모든 문화적 가치에 영향을 주어 리더십 실행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분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정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6. 문화적 실행

옷 입는 법, 선호하는 음식, 결혼식 전통, 음악 형태, 농사 기법 및 가족 전통들은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수많은 외부적 실행들의 몇 가지 예이다. 외부적으로 선호하는 것의 문화적 차이들은 매우 뚜렷하다. 음식 부문에 있어 우리는 인도의 향료를 넣은 카레, 한국의 김치, 에디오피아의 인지라바 와트를 음미한다. 우리는 단조 멜로디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똑똑 떨어지는 리듬에서부터 한국에서의 엄숙하면서도 순수한 합창 음악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외부적 실행들은 관찰하기가 쉽지만 그것들을 형성시키는 근본적인 세계관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관과 실행 사이의 연결점은 무엇인가?

자아실현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세계관을 가진 한 국가에서 산다고 가정해본다. 이 문화 안에서는 뿌리 깊은 세계관을 외부적 가치들이 어떻게 반영하는가?

사람들은 개인 사무실이나 칸막이 속에서 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낼 것이다.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들을 것이다. 바쁘게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차를 혼자 운전한다. 부모와 교사들은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며 그들이 혁신적이고 자신감을 갖기를 원한다. 학교는 창의성을 격려하고 아이들의 감정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경쟁과 규격화된 시험 또는 점수매기는 것을 피한다. 집에서 아이들은 분리된 침실을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국가의 정치인들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을 지시적으로 대하지 않고 열등감 콤플렉스를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잘 들어주려고 한다. 법을 어긴 십대들은 범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자존감 문제를 가진 청소년이라고 묘사한다. 이 가상의 국가가 약간 억지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한 문화의 근본적인 세계관과 외부적으로 나타난 선호하는 것들 사이의 연결을 예시하는 것이다. 개인의 실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선호하도록 몰아간다.

 

7. 문화적 가치

한 문화의 세계관은 인생의 목적과 실재의 성격에 대한 깊은 철학적 가정들을 묘사하고 있다. 문화적 실행들은 외부적이고,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들로서 건축, 음악, 음식, 의복, 언어, 교통수단과 머리 스타일 같은 것들이다. 위 둘의 사이에 가치가 있다.

가치는 문화적 이상들로서 추상적 철학을 구체적 실행과 이어준다. 예를 들어 한 문화의 세계관이 물질주의적이라면 사람들은 급하게 실행하고 돈을 벌기 위해 많은 것들을 행한다. 이 세계관과 실행을 함께 묶어서 효율성이라는 내적 가치를 가설로 세울 수 있다. 그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며, 업무적 목표가 인격적 관계보다 중요하다. 명상을 실행하는 문화는 내면적 조화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으로 실존적 신비주의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리더십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는 사람들이 권력, 불명확성 처리, 개인보상, 획득한 지위, 미래를 위한 계획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한 잠재의식 속에 있는 가정들이다. 다중 문화 리더십의 어려움은 내면적 가치로부터 나온 긴장들로부터 나타난다. 이러한 가치는 기정사실로 가정되며(assumed), 감춰져 있고(hid- den), 포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subtle) 언급되지 않는다(unspoken). 리더십에 관한 내면적 가치는 표면 아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오해들을 일으키며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데 가치의 차이점들이 혼란과 긴장의 원인들이 될 때 놀라게 된다.

문화적 차이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깊은 의미에서 인간들은 다르기보다는 비슷하다. 신체적으로 비슷한 DNA, 혈액형, 뼈의 구조, 얼굴 표정과 수천가지 다양한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소속감, 수용 안전과 성취에 대한 비슷한 필요를 가지고 있다. 인지적으로 인간의 차이점들은 한정된 주제들 안에서의 편차일 뿐이다. 영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모든 인간은 대체적으로 비슷하지만 모든 개개인이 독특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인간은 공통된 인간성(human nature), 문화(culture), 개인적 성격(persona lity), 이 세 가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1) 인간성: 인간은 문화 때문에 동질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문화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나와 다른 면보다는 같은 면이 더 많다.

2) 문화: 문화마다 소통하는 방법이 다르다. 문화적인 요소가 있다. 자녀교육, 시간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문화적 차이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다문화 상황 속에 문화적인 것을 볼 때 이 차이를 더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됨 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

3) 개인적 성격(인격성): 사람들마다 성격이 다 다르다. 고대로부터 네 종류의 기질이 있다.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은 대체로 모든 문화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은 개인의 성격에 대해 한 유기체와 그것의 생채 문화적 및 사회문화적 환경 사이에서의 일생에 걸친 교류를 통해 나타난 결과물이다. 이러한 외부적 요소들의 효과는 사람 안에 조직적인 차이들을 만들어낸다. 즉 다른 문화에서 양육된 사람들마다 그에 따른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8. 문화는 중요하다.

어떤 비평가들은 냉전시대의 종식, 세계화의 진전, 즉각적 소통 및 경제 발전과 더불어 문화적 차이들은 더 이상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기 선교사들이 멀리 떨어진 문화를 여행하고 돌아와서는 그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다라고 말한다. 물론 세계가 가까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많은 공통된 전통들을 확산시켰지만 지역 문화적 가치들의 영향도 확산되었다. “냉전 이후 세계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특색들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것들이다. 나라와 국민들은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인간이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 답변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가 그 질문에 전통적으로 답변해온 방법들이었다. 즉 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을 언급함으로 답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조상의 계보, 종교, 언어, 역사, 가치, 관습과 제도를 정의 한다

외적인 부분에서 의복, 음식, 음악, 교통수단 및 인터넷은 세계가 더욱 동질적인 곳으로 변하게 된 반면 깊은 문화적 가치들은 어느 때보다 더욱 안정적이고 지속성을 지닌 듯 보인다. 세계화는 외부적으로는 우리들을 더욱 비슷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지역화는 우리 정체성의 가장 깊은 존재를 강화시키고 있다.

세계화의 이러한 이중적 효과와 지역 문화의 강화현상은 세계 교회들의 리더십과 어떻게 연관을 맺게 되는가? 우리가 서로 더 교류하게 될수록, 서로의 저변에 있는 문화적 가치들을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서구와 아시아의 교회들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들과 동역하게 될 수 있도록 리더십에 관한 가정들 속에 문화가 얼마나 많이 스며들어가 있는지를 더 깊게 의식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리더십 안에 있는 외부적 유사점들은 우리를 자칫 자기만족으로 몰아갈 수 있다. 실상은 무지 때문에 심각한 오해를 일으킬 때에도 다른 문화의 지도자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 세계화란 외면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이 더욱 비슷해 보이지만 문화 내면의 심층 가치들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는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준다. 문화는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시스템과 사람들이 자신들을 표현하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이동하는 방법, 도시들의 설계방법, 교통 시스템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문화의 영향은 매우 광범위하기에 지도자들의 문제해결, 권한 위임, 목표설정, 교회 조직과 선교여행 계획 세우는 방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교회들이 세계적 전망을 갖게 되고 선교사들의 모든 곳으로부터 파송되어 모든 곳으로 가게 됨에 따라 리더십에 관한 문화의 충격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조화롭게 일하기 위해서는 세계교회의 지도자들은 외면적 선호와 내면적 가치 양쪽 모두에 있어 문화적 차이들을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II. 리더십과 상황

 

한 선교사가 어느 아시아 나라의 교회에서 그룹의 지도자를 뽑는 장면을 보았다. 한 사람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 모두가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당사자에게 물었을 때 그는 여기 있는 분들이 저를 지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선교사가 볼 때에는 모두 지지한다고 했는데 당사자는 지지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의아했다. 그러나 선교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미묘한 문화적 신호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외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지지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 외부적으로는 동의했지만 문화적인 신호들을 보내면서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표면적 문화 아래,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인간 성품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궁극적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1. 상황성 문화(: 제임스 E 프루드만. <범세계적 교회와 선교적 리더십> 2013. 요약 정리)

1) 사람들과 문화들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자신들 주변 상황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민감성의 정도이다. 어떤 문화는 그 주변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미묘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상황의 의미가 암시하는 것들에 잘 조율할 것을 격려한다. 또 어떤 문화는 물리적 상황이 아니라 관념의 세계에 사람들이 더욱 깊이 연결되도록 만든다.

 

2) 높은 상황성 문화(High-context culture: 고맥락)

자신들을 둘러싼 구체적으로 세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물리적 배경 속에 있는 모든 것들- 방의 분위기, 소리, 냄새, 얼굴표정, 신체언어-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전달한다. 실제 삶에서 미묘한 차이들은 의도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의사소통 혹은 메시지는 대부분의 정보가 물리적 환경 또는 사람 안에 이미 들어있다. 코드화되거나 겉으로 드러나게 전달되는 것이 거의 없는 메시지다. 높은 상황성 문화의 예로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와 중동을 들 수 있다. 높은 상황성 문화에서는 조화로운 관계에 특별한 가치를 둔다. 집단이 개인보다 더욱 가치가 있고 경쟁보다 협력을 선호한다. 질적 시간이 양적 과업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욱 소중하다. 변화는 자주 저항을 받게 된다.

 

3) 낮은 상황성 문화(low context culture: 저맥락)

대부분의 정보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코드에 확정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의사소통과 개념들을 중요시 여긴다. 이 상황이나 맥락은 특별히 말로 표현된 것들만큼 중요하지 않다. 목소리의 억양보다 정확한 단어가 더욱 중요하다. 높은 상황성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현란한 언어는 낮은 상황성 사람들에게는 진실치 못하거나 심지어 속이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중요한 대화의 큰 개념은 기억될 수 있지만 그 토론에 관여했던 사람의 이름은 기억 되지 않는다. 높은 상황성 문화의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깊이 젖어 있는 반면에 낮은 상황성 사람들은 관념, 원리 및 개념들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들의 생각은 현재 상태를 초월하고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의사소통은 직설적이기 때문에 포착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말이나 글로 이루어진다. 표정이나 제스처가 아니다. 정확한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시간은 질이 아니라 양으로 표현된다. 의사소통이 모호하지 않기 때문에 내부인들 뿐 아니라 외부인들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개인성과 경쟁은 가치를 부여받으며 변화는 일반적으로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4) 낮은 상황성 문화와 높은 상황성 문화의 관계

낮은 상황성문화의 의사소통은 높은 상황성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차갑고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비췰 수 있고, 높은 상황성 의사소통은 개념 지향적인 사람들에게는 곤혹스럽고 심지어 부정직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서부 아프리카에 사역을 하고 있는 한 미국인 선교사는 어느 날 갑자기 현지인들로부터 이 나라를 떠나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모금을 하느라고 2년을 어렵게 보냈고 지역 언어를 배우기 위하여 2년을 더 보냈다. 그들은 높은 소득의 사업 경력을 포기하고 선교지로 와서 향수병과 말라리아를 견디어 냈다. 그들은 선교지 문화에 민감했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부인 선교사가 현지인 지도자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들을 화나게 한다고 왜 말하지 않았나요? 우리는 얼마든지 바꿀 의향이 있었다구요!” 현지 지도자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에 대해 말했지만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 선교사 부부는 현지 목회자들이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현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분명한 의사소통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선교사들은 민감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은 미묘하게 시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고, 아프리카 목회자들은 말할 때 억양이나 혹은 말로 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신중하게 의사를 전달했을 것이다. 양측 모두 상황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많은 슬픔을 야기하게 된 것 이다.

비록 상황과 관련된 문화적 가치들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단순한 범주들 안에 딱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럽인들은 낮은 상황성 사람들이고 아프리카인들은 높은 상황성 사람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논리이다.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들로 인해 광범위한 가치들이 각 문화마다 존재한다. 동일한 가정의 아이들도 시간, 목적에 대해 매우 다른 가치와 기질들을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기아를 변속함으로 자신의 문화적 가치들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효율성을 지향하는 법률가들도 휴가 때에는 느긋해질 것이고 물고기가 미끼를 물 때 까지 기꺼이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가치들을 따라 편안하게 느끼는 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낮은 상황성과 높은 상황성 문화, 양쪽 모두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대한 특별한 의식은 높은 상황성 문화의 강점일 것이다. 낮은 상황성 문화로부터 온 지도자들은 이러한 의식을 갖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높은 상황성 문화에서 온 지도자들은 낮은 상황성 문화의 강점인 전략 세우기로부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인내가 필요하다. 모든 문화들은 양쪽 관점을 양극으로 하는 연속체 위에 존재하게 되는데, 각각의 문화는 양쪽 중 사건, 혹은 개념에 가치를 부여하는 한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가족, 교회, 그리고 조직들 역시 높은 상황성이나 낮은 상황성 중 한쪽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동양의 상황론과 서양의 본성론(: 리처드 니스벳. <생각의 지도>. 2004. 요약정리)

1991년 미국 오아이와 대학 물리학과 박사 과정에 있던 중국인 학생 루강은 우수 논문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했다. 그는 즉각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후에 교수직을 얻는 데도 실패했다. 그해 1031일 그는 학과 건물에 들어가서 자신의 지도교수를 총으로 쏘고 근처에 있던 다른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한 후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미시간대학 신문은 루강의 개인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루상의 심리적 약점들(성격이 매우 안 좋았다. 본성이 사악했다) 이나 개인적인 태도(그의 원한을 해결하는 데 총이 제 격이라 믿었다). 그리고 심리적 문제들(성공과 파괴에 몰두한 어두운 성격, 남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면만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중국 신문은 주로 루강의 생활환경에 초점을 맞추어 루상의 인간관계(지도 교수와의 불화, 학교 내에서의 치열한 경쟁, 중국인 커뮤니티와의 단절된 생활)나 중국 사회의 학력에 대한 압박, 그리고 미국 사회의 문제점(총기 구입이 쉬운 점) 등을 그 사건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이는 민족적 편견이나 가해자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판단한 것은 아니다.

미국 미시간 주의 오크밸리라는 도시에서 우편배달부로 일하던 토머스 매킬베인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일자리를 잃었다. 그 해 1114일에 그는 자신이 일하던 우체국에 들어가 상사와 동료, 그리고 고객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 신문 기자들은 예외 없이 메킬베인의 내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폭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계속 위협했다. 급한 성격이었다. 무술에 빠져 있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등으로 표현했다.

중국의 기자들은 매켈베인에게 영향을 주었을 법한 상황적 요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최근에 해고당했다. 상사가 적대적이었다. 최근에 텍사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등으로 분석하였다.

미국 대학생들은 살인자의 개인적 속성에 중요성을 더 많이 부여한 반면, 중국 학생들은 상황적 변수를 더 중요시 했다. 루강이 직장을 잡았더라면, 혹은 그 도시에 메킬베인의 친구나 친척이 많았더라면 하는 질문을 대학생들에게 했다. 중국 학생들은 상황이 달랐더라면 살인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에 미국 학생들은 살인 사건의 원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 사람의 내부적 특성 때문인 만큼 상황이 달랐어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조앤 밀러는 인도인들과 미국인들의 귀인 방식을 비교하기 위해 양국의 성인들에게 자신이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 최근에 저지른 나쁜행동과 좋은행동을 한 가지씩 적게 하고, 왜 그가 그런 일을 했는지 설명하게 했다.

미국인들은 성격적 특질이나 여타의 내부적 속성을 통해 그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셀리는 남을 잘 배려하고, 활달하고,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식이다. 미국인들은 인도인에 비해 이와 같은 성격에 의거한 설명을 두 배나 더 많이 시도했다.

반대로 인도인들은 미국인에 비해 상황요인에 의한 설명을 두 배나 더 많이 시도했다. 예를 들면 그때는 매우 어두웠고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와 같은 상황 위주의 설명을 많이 시도했던 것이다.

스포츠 결과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선수의 능력으로 경기 결과를 설명한다. 예를 들면, “심슨은 11골을 기록하여 팀 내에서 선두지만 그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사실 그의 수비 능력에 있다. 우리 팀에는 작년 결승전 MVP인 뛰어난 골키퍼 스미스가 있기 때문이다와 같은 식이다. 동양인 선수와 감독들은 주로 상대팀이나 당시의 상황들을 근거로 경기 결과를 설명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전반전을 마칠 때 우리가 한골 앞섰던 것은 운이 좋았어, 아마도 상대팀이 중국에서 있었던 16강전 때문에 많이 지켜 있었던 것 같아와 같은 상황 위주의 설명을 주로 했던 것이다.

물고기의 행동을 비디오 화면으로 보여준 결과, 미국인들은 물고기의 행동을 물고기의 속성으로 설명했지만 중국인들은 상황 요인으로 설명했다

홍콩은 100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홍콩의 어린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영어를 배우며 자랐고 따라서 홍콩 사람들은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문화적, 언어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홍콩인들은 동양 문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보게 되면 동양식으로 사고하고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보며 서양식으로 사고하게 된다.

사람의 성격을 기술하는 특질의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성격 특질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동양인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의 힘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교사들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때 전체적 맥락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중요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고 각 사건의 선행 사건들과 관련시킨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현재 상황과 역사적 인물이 처했던 상황을 관련시켜 생각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이 느꼈던 심리적, 정서적 경험들을 느껴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를 바탕으로 역사적 행위들을 설명하도록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역사적 인물과의 정서적 교감을 역사적 사고라고 강조하고 심지어 일본의 적이었던 사람의 행동조차도 같은 방법으로 이해하기를 권장한다.

미국의 교사들은 사건의 맥락을 기술하기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사건의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하며 선행 사건이나 촉발 요인은 덜 다룬다. 연대기 순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일도 거의 하지 않고 중요한 인과적 요인들을 바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오크만 제국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에 멸망했다는 식이다. 학생들에게는 사건의 인과적 설명에 부합하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훌륭한 역사적 사고라고 강조한다. ‘어떻게라는 질문보다는 라는 질문이 일본 교실에 비해 2배 정도 더 많이 올라간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세상을 덜 복잡한 곳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적은 수의 요인들만으로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복잡한 곳이라고 동양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기에 동양인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대해 서양인들에 비해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모델을 가지고 세상을 파악하는 약점이 있지만 반면에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인과적 요인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니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

서양인들의 단순한 세계관은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서는 매우 유용한 시각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모델은 검증이 쉽고 따라서 개선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이론은 검증을 통해 대부분이 오류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중국의 물리학 이론들과는 달리 검증이 가능한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이후의 검증 과정을 통하여 올바른 물리학 원리들이 확립되는 토대가 되었다.

서양인들이 과학에서 거둔 성공인과적 설명에서 범하는 오류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란 다름 아닌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모델을 만드는 자유’, 그리고 그 모델을 이용하여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델은 사물과 그 사물의 속성에만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탓에 맥락의 역할을 놓치고 있다. 따라서 맥락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기본적 오류를 범하고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서양인의 단순성 추구 경향과 동양인의 복잡성 추구 경향은 인과 관계에 대한 접근 방식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세상을 바라보고 조직하는 방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3. 상황과 의사소통

다중문화권에서 사역하는 많은 사역자들의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직접적 혹은 간접적 의사소통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고맥락과 저맥락의 상황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한 현지인 목회자 아래에서 일하였다. 여러 명의 인턴들이이 목회자 밑에서 일하는데 6개월 만에 목회자와 인턴들 사이에 항상 갈등이 일어났다. 좋은 인턴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워 선교사는 당회를 소집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일로 목회자와 선교사 사이는 갈라지게 되었다. 선교사는 그 목회자의 문제를 공개함으로서 체면을 잃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돌이켜보면 공적인 자리에서 그 문제를 언급하기 보다는 목회자와 사적으로 이야기했어야 했다고 했다. 높은 상황적 문화에서 그 목회자의 명예를 유지했을 것이다. 낮은 상황성 문화에서는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갈등을 다루는 적합한 방법으로 보이겠지만 높은 상황성 문화 안에서는 수치감을 가져올 수 있다.

낮은 상황성 문화들은 관계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사실을 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높은 상황성 문화에서는 무엇보다 관계들을 보존하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진실은 매우 미묘한 형태로 언급된다. 일대일로 직접 대면하기보다 종종 변호인이나 중개인을 활용한다. 이것은 상호작용을 부드럽게 만들어 관계들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오스카 무리유의 나이로비 채플의 목사의 말이다(:The Africa church Planter: Christianity today, 2007, 51일자). “아프리카에서 의사소통할 때 우리는 말하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합니다. 우리는 실족시키기를 원지 않습니다. 서구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이 정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듣기 원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용무는 언제나 평생 가는 관계로 발전하거나 평생의 우정관계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는 매우 관계 중심적인 대륙입니다.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 관계들입니다. 미국에서는 일들이 관계와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만일 관계를 가진다면 그것은 때때로 사실상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정반대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의사소통에 있어서 조심하며 너그러워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사랑가운데 진실을 말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사랑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내가 당신과의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그리고 그 진실이 관계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는 관계로 인해 일어나는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르지요. 여러분의 상황에서는 관계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조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설사 대가를 치른다 해도 만일 관계가 상처를 입는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그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미국인 친구들과 말할 때보다 명확하게 말해야 그들이 내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미국인들도 우리들처럼 관계적 측면에 대해 듣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높은 상황성 문화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뉴스가 될 수 있는 일에 동의하기보다는 오히려 결정을 미루는 것을 선호한다. 정책을 바꾸는 것이 아주 명백히 필요할지라도 만일 이 정책이 분열을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면 어떤 확정적인 형태의 결정사항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아직 검토 중이다는 답변은 낮은 상황성 문화에서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들은 나쁜 결과라도 차라리 사실을 말해주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선호하는 반면, 높은 상황성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실망키시지 않는 것을 선호하기에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할 것이다.

 

4. 상황과 시간

높은 상황성 문화는 다중 시간적인 반면 낮은 상황성 문화는 단일 시간적이다. 다중시간적 문화에서는 몇 가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반면 단일 시간적 문화 안에 사는 사람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사람들과 북유럽 사람들은 단일 시간적으로 시간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스케줄 및 분할과 신속성을 중요시 여긴다.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중동 및 아프라카에서는 다중 시간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몇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특징이 있으며 현재의 스케줄을 고수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개입과 일이 성사되도록 하는 것을 강조한다.

공간은 시간에 영향을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항상 방해를 받는다면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단일 시간적 문화의 사무실 공간은 높고, 소리를 차단시키는 문이나 칸막이를 가진 사무실 안에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다. 다중 시간적 사무실은 누구든지 볼 수 있는 커다란 방으로 되어 있다. 다중 시간적 환경에서 사역하는 단일 시간적 문화를 가진 선교사가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느라 일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선교사는 공식적인 사무실 뒤에 혼자만이 숨을 수 있는(?) 2의 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일을 해야 할 때면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서 일을 한다. 다중 시간적인 문화를 불평하기보다는 단일 시간적 공간을 만드는 지혜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다중 시간적이며 높은 상황성 문화들은 사람들 및 사건들과의 상호 교류에 가치를 둔다. 시간은 미리 결정된 약속들로 나뉘지 않으며 공간은 사무실과 거실로 분리되지 않는다. 낮은 상황성 문화들은 단일 시간적이기에 업무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처리되는 한편, 가족 및 친구들과의 교류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다.

 

5. 상황과 교회

낮은 상황성의 교회에서의 성가대와 악기 연주자들은 그들의 얼굴표정이나 몸의 움직임이 메시지를 압도하지 않도록 회중 뒤에 있는 발코니에서 연주한다. 이러한 배치는 높은 상황성 회중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낮은 상황성의 교회를 높은 상황성의 성도가 볼 때에는 열정적이지 않다고 할 것이며 손을 들어나 박수치지 않음으로 인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높은 상황성 교회는 손을 들고 찬양하며 박수를 칠 뿐 아니라 춤도 추면서 찬양을 한다. 낮은 상황성의 교인이 본다면 이 교회는 감정주의에 빠졌다고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지하고 경외심을 갖지 않는 예배라고 생각할 것이다. 높은 상황성 교회에서는 보통 예배시간도 30분에서 50분 정도 늦게 시작한다. 주보도 없고 예배도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다. 주보가 없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설교자는 한 주제에 대단한 감정과 생생한 예화들을 들어 풀어나간다. 예배가 끝나는 시간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날 때 끝난다.

낮은 상황성 교회들이 그처럼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들이 높은 상황성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교회들이 신학보다는 음악 스타일에 둘러싸고 나뉘어져 있는 것 같다. 현대 크리스천 음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의미없는 반복으로 채워져 있고 오래된 찬송에 담겨진 사려 깊은 신학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 현대 음악 지지자들은 그 음악이야말로 오늘날 젊은이들의 문화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것은 대부분 신학적인 문제이기보다는 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다음의 도표는 높은 상황성 교회와 낮은 상황성 교회의 특징들을 설명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두 가지의 모습을 혼합하고 있다.

 

 

높은 상황성 교회

낮은 상황성 교회

설교

주제 설교들로, 성경에서 이끌어 낸 것이지만 사람들의 현재 필요를 채우는 데 중시함

강해설교들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였는가에 집중하고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느끼는 필요에 대해서는 언급이 적음

설교

스타일

친근한 목소리와 손동작 사용: 설교자가 사람들 사이로 걸어다님

품위를 중시하고 직선적 논리 사용: 종종 설교자는 강대상에서 설교 원고를 읽음

음악

스타일

활기찬 음악에 맞춰 사람들은 손을 들고 몸을 움직이기도 하며 하나님이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나에 대해 자주 찬양함

조용하여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찬양, 경외심을 강조

의자배치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있게 앉음

사람들이 설교자를 바라보고 있음

예배순서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인쇄된 주보에 따라

예배시간

예배가 진행되는 만큼

정확하게 규정된 시간만큼

기도

격정과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고 가끔씩은 모두가 동시에 기도함

지도자가 조용하게 생각하며 기도를 인도함

환경

깃발, 비디오, 데이터, 프로젝트, 비공식적, 예배당에서의 커피

평이함, 메시지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도록 함

 

높은 상황성과 낮은 상황성 문화들로부터 온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귀중한 관점들을 배울 수 있다. 교차문화적인 뒤섞임의 묘미는 상이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상황성 문화에서 예배의 위험은 그것이 경박한 감정주의 또는 자기중심성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인 반면, 낮은 상황성 문화의 지나치게 개념 지향적 예배의 위험은 그것이 생명력 없는 정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지성을 가지고 찬송할 것을 상기시켰다(고전 14:15). 초대 교회가 받았던 유혹은 지성을 결여한 높은 상황적 감정주의와 열정 없는 낮은 상황적 예배로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조용히 찬양하고 기도하도록, 어떤 사람에게는 팔을 뻗고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다양성을 즐거워하고 계실 것이기에 우리가 예배 스타일을 두고 서로 비판하는 것을 원하실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6. 상황과 리더십

낮은 상황성 문화의 사람들은 시간과 자원 같은 추상적 변수들을 측정하여 열두 달치 사역을 한눈에 보여주는 계획 도표를 만들기를 좋아할 것이다. 일을 할 때 전문가를 세우기를 원할 것이다. 자동차는 재정을 감안해서 효율성을 중요시 여길 것이다. 높은 상황성 문화의 사람들은 사람을 세울 때 전문가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세우기를 원할 것이다. 리더가 값비싼 차를 타고 다닌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단체에 대해 더 존경심을 갖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중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둘 다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두고 상호이해를 넓히는 가운데 각자 상대편이 가진 사건과 개념에 대한 태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각자 자신의 문화가 가진 리더십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는 것이 상호 효율성을 향한 첫 걸음이다. 다중 문화의 사람들은 함께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성경적 원리가 문화적 가치들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성경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융통성의 여지를 남겨둔 것들에 대해서는 통상적으로는 현지 지역 문화의 가치들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평소에 지역 문화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가져온 리더십에 대한 통찰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한다.

 

 

III. 리더십과 권력

(: 제임스 E 프루드만. <범세계적 교회와 선교적 리더십>. 2013. 요약정리)

 

어떤 문화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지위 격차가 크다. 이러한 사회들은 높은 권력거리(high- power-distance) 문화들이라고 부른다. 어떤 문화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권력 거리를 없애는 것에 가치를 두고 지위에 따른 상징이나 불평들을 최소화 하려고 한다. 이러한 문화들을 낮은 권력 거리(low-power-distance) 문화라고 부른다. 모든 문화들이 권력 거리의 연속체 위에 한 위치를 차지한다.

 

1. 권력거리에 관한 연구

CLOBE(Culture, Leadership and Organizational Behavior Effective- ness) 연구는 권력거리를 한조직의 구성원들이 불평등하게 나누어지는 권력에 대해 예측하고 동의하는 정도라고 하였다. 홉스테드는 권력거리를 한 나라의 제도나 조직의 힘없는 구성원들이 권력의 불평등한 분포를 예측하고 수용하는 정도라고 정의하였다. 높은 권력거리 문화들에서는 지도자와 추종자들 양자 모두 지도자는 더 많은 권위와 존경 및 지위와 상징들을 가져야 한다고 가정한다. 지도자는 저항 없이 복종될 일방적 결정들을 내릴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사회들에서 고용인들은 관리자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도전하지 않으며 자녀들은 부모나 연장자들에게 저항 없이 복종한다.

낮은 권력거리 문화들에서는 그 반대이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자신들에게 결정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기를 기대한다. 고용인들은 경영자에게 제안하도록 초대되고 교사들은 학생들이 어려운 것들을 질 문 할 때 즐거워한다.

높은 권력거리 사회에서는 공식적 권위가 중앙집권화 되는 경향이 있다. 우두머리들에게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결정은 위로부터 아래로 전달된다. 높은 권력거리 문화에서 지도자가 아랫사람에게 조언을 요청한다는 것은 어떻게 지도하는지를 모른다는 표시일 수 있다.

낮은 권력거리 문화의 지도자들은 서로 의논하고 참여하는 민주적 의사 결정 형태를 선호한다. 권력은 팀 구성원이나 소위원회에 이양된다. 아주 낮은 권력 거리 문화에서는 아랫사람들이 중요한 결정마다 투표하기를 기대 할 수 있다.

높은 권력거리 문화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리더들이 그들만의 주차 공간, 넓은 사무실, 더 좋은 옷, 개인적 식사 장소, 더 많은 봉급과 운전수가 딸린 자동차와 같은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낮은 권력거리 문화의 리더들은 그런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런 것은 고용인들을 화나게 만들 것이다.

 

2. 나라별 권력거리

과도하게 일반화된 면이 있지만 홉 스테드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와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권력거리 가치들을 보여준다. 영국, 미국, 이스라엘, 뉴질랜드, 호주와 몇 개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그리고 북유럽은 낮은 권력거리 가치들을 지향한다. 과테말라, 에콰도르, 콜롬비아는 권력거리 실행에 있어 매우 높은 점수를 나타낸데 반해 코스타리카와 볼리비아는 거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나이지리아, 짐바브웨, 잠비아는 권력거리 실행에 있어 매우 높게 나타났는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관리자들은 낮은 수준의 권력거리를 실행하였다. 인도는 매우 높은 권력거리를 보인 반면, 일본, 중국, 싱가포르는 약간 측정되었다.

나라들 사이에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데이터가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일반화 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인도와 중국은 각각 십억이 넘는 사람들의 고향인데 이 나라들 안에서의 다양성은 아마도 나라간의 평균 차이들보다 클 것이다. 사회 계층, 교육 수준, 도시 및 농촌 인구와 직업은 모두 권력거리 가치들에 영향을 미친다. 나라들 간의 차이가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주지만 교차 문화적 실천가들은 각 사람을 대할 때 열린 마음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3. 종교와 권력거리

계급적 구조를 가진 종교는 높은 권력거리 리더십 가치를 증진시키거나 혹은 높은 권력 거리 문화가 계급을 가진 종교 조직을 선호한다고 본다. 이슬람은 평등주의 경향을 가진다. 한 가지 주요한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알라 앞에서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라는 것이다. 모스크들 사이에는 명령 계통이 없으며 리더십의 세계적 성직 계급도 없다. 메카로 순례 여행을 하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여행의 똑같은 과정을 통과한다. 많은 무슬림들은 내적 신앙과 외적 정부 기관들 및 율법을 연결시키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통상 높은 권력거리로 귀착된다. 이슬람 국가들 중 몇 나라는(모로코, 터키,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쿠웨이트) 권력거리가 높은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이슬람의 역사가 높은 위계질서 가운데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높은 권력거리 또는 낮은 권력거리 중 하나를 지지할 수 있는 교훈들을 지닌다. 각 사람의 영혼은 신성하고 정결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개인의 차이는 각자의 업보 또는 행동에 기인한다. 카스트 제도는 베다경(힌두교 경전)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인도에서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여전히 사회생활 전반에 퍼져있다. 카스트 제도는 권력거리에 강력한 영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유교는 이론적으로 종교가 아니지만 강력한 사회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지배자-신하, 아버지-아들, 남편-아내, -동생, 선배-후배라는 다섯 가지 위계질서와 상호관계를 가르쳤다. 상급자는 낮은 직위 사람에게 지원과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 기대되는 한편, 낮은 직위의 사람은 상급자에게 충성과 존경을 바칠 것이 기대된다. 중국과 싱가포르는 권력거리가 높고, 한국, 홍콩, 일본은 중간 정도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교적 가치가 리더십 문화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리더십에 두 가지 방향으로 영향을 주는 것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는 낮은 권력거리 리더십에 가치를 두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제국의 종교가 되기 전의 기독교는 리더십과 신학이 분산되어 있었다. 교회 리더십의 영향이 점차적으로 커져서 마침내 그것은 국가 수장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교회 성직 계급의 성장은 문화에 영향을 주어 권력거리가 높게 만들었다. 종교개혁의 두 가지 신조는 교회 성직 계급위에 성경의 권위가 있다는 것과 모든 신자가 사제직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에 의해 영향을 받은 나라들 안에서 공식적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강조는 성경과 평신도 신자들에게로 이동되었다. 이러한 나라들- 스위스, 독일, 영국, 미국,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가장 권력거리가 낮은 나라들에 속해 있다. 종교개혁에 영향을 덜 받은 나라들- 스페인, 포르투칼, 이태리-은 높은 권력거리를 지향한다. 높은 권력거리 가치들을 지향하는 사회들이 대개 계급적 종교들에 끌렸는지, 아니면 계급적 종교들이 높은 권력거리의 문화적 가치들을 촉진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가 명백하지 않다. 중국의 지배자들이 사회적 혼란과 해체를 피하기 위해 유교적 가치를 증진시켰다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어떤 이유가 먼저였는지는 상관없이 권력과 종교에 대한 가치들은 서로를 강화시켜준다.

 

4. 높은 권력거리 사회들을 향한 도전

홉스테드와 CLOBE는 연구 둘 다 높은 권력거리와 부패의 빈도사이에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높은 권력거리 나라들이 부유하지 않기 때문에 빈곤이 부패를 양산할 수도 있다. 혹은 높은 권력거리를 가진 나라들이 견제와 균형이 없기 때문에 부패와 빈곤으로 떨어 질 수도 있다. 이 연구들로부터 나온 데이터는 어느 쪽도 지지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높은 권력거리는 가진 사회들은 또한 경제적 번영, 기대수명, 사회적 건강, 일반적 만족도 및 양성 평등에 낮은 지수를 가지고 있다. 누구도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 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건강의 부족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게 만들 수도 있고 혹은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부패와 빈곤으로 이끌 수도 있다. 조사된 모든 나라들이 권력거리가 낮아지기를 원했고 높은 권력거리를 가진 나라들도 강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높은 권력거리가 역기능적 사회의 한 부분적 현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5. 성경과 권력거리

높고 낮은 권력거리 문화들에 관한 예들이 성경 안에서 발견된다. 성경적 관점에서 높은 권력거리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절대적 권력거리에 대해 묘사한다. 높은 권력거리에 대해서 말씀한다.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느냐?”(40:18)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도전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리셨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셨고 저울들로 산들과 언덕들을 달아 보셨으며 열방은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다고 이스라엘에게 상기시켰다.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고 사람들은 메뚜기 같다. 이분이 하늘의 모든 별들을 이름으로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40:12, 15, 22, 26).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과의 거리는 연약한 인간에게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미리암과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12:2)라고 낮은 권력거리 질문으로 모세의 권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의 더 높은 지위에 대해 반대하였고 그들은 모세와 가진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진노하셨고 그녀는 나병환자가 되었다. 후에 고라의 자손들이 모세의 리더십에 반항하였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높은 권력거리를 가졌다고 비판하면서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16:3) 라고 낮은 권력거리를 주장하였다. 주님의 진노가 모세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고 고라의 추종자들에게 내려졌다. 땅이 갈라져 고라의 추종자들을 삼켰다.

예수님은 미움을 받던 로마 통치자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셨다(12:7). 성전세를 내셨다(17:27). 베드로는 젊은 신자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할 것을 상기시켰다(벧전 5:5). 바울도 로마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통치 권력에 복종하라고 지도했다(13:1).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고 말씀한다.

성경에는 아울러 가까운 하나님, 권력거리가 가까운 것에 대해 말씀한다. 별들을 이름으로 불러내시는 이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실제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14:23, 15:4). 온 우주의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라 부르신다(15:15). 가장 초월적인 존재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 높은 권력거리와 낮은 권력거리가 동일한 인격 안에 있는 놀라운 예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잔치 자리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회당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추구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높은 권력거리의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23:5-7).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 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23:8-11).

예수님은 자신의 옆에 있는 높은 권력거리의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당시 문화 안에 편만했던 높은 권력거리 가치들에 도전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5-28)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도 그가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할 것을 상기시켰다(딤전 4:12). 높은 권력거리 문화 안에서 디모데는 그의 연소함 때문에 낮은 위치를 가졌을 것이다. 바울은 젊은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는 높은 권력거리 문화에 대해서 도전한 것이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바울은 그 당시 문화와 아주 대조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낮은 권력거리를 가지고 갔다. 그것을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묘사했다. 고린도에 왔던 거짓 교사들은 현란한 언어 구사 기술력과 높은 권력 거리 가치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 권력 투쟁으로 인한 분열을 초래했다. 바울은 약함의 낮은 권력거리 위치를 취함으로 의도적으로 문화에 대항하는 가치들을 고취시켰다.

성경은 권위를 가진 자들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면서도 또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높은 대우를 받으려고 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높은 권력거리 문화 속의 지도자들은 직위에 대한 자만심과 따르는 자들을 지배하려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낮은 권력거리 문화 속에서 따르는 자들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적절한 존경을 표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자와 따르는 자들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해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5:5)이다.

성경은 높은 권력거리와 낮은 권력거리 가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라는 질문에 분명한 답을 주고 있지는 않다. 권력거리의 가장 명백한 예들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나온 성직계급과 직위 상징인데, 그것은 성령께서 모든 신자에게 주어져 모든 신자가 제사장 직분을 가지게 되기 이전의 가르침이다.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교리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발전이다. 제사장 직분은 더 이상 레위 지파의 아론 가문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이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와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온 사람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이지만 그들을 거룩한 나라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불렀다(벧전 2:5, 9)

요한은 모든 족속, 방언, 백성과 나라들로부터 온 신자들이 부르는 새 찬송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고 있다(5:9-10). 구약과 신약 성경들 사이의 계시의 점진성은 높은 권력거리 가치로부터 낮은 권력거리 가치로의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높은 권력거리 가치 중 하나인 권위에 대한 존경은 구약 성경은 물론 복음서들과 바울 및 베드로 사도의 서신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성경은 높은 권력거리 지도자들이 거만하게 권력을 오용한 것에 대한 나쁜 예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는 따르는 자들은 지도자를 존경해야 하고 지도자들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따르는 자들의 유익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죄악 된 세상에서 이것은 실행하기 쉽지 않다. 타락의 보편성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지도자들이 교만과 지배의 유혹에 기울이도록 만든다. 성경은 모든 문화의 거만한 지도자들을 심판하고 있다. 성경은 리더십 스타일에 있어 권력거리와 관련한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 같아 보이지만 리더십의 태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모든 지도자들은 겸손해야만 하며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자신의 동기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6. 범세계적 교회의 리더십을 위한 함축된 의미들

권력거리와 관련한 문화적 차이들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범세계적 교회 간의 건강한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 교회와 교회 간 파트너십

대부분의 파트너십은 부유한 나라들의 교회들과 개발도상국에 있는 교회들이 동역하는 것이다. 낮은 권력거리 문화에서의 파트너십은 동등성을 가정하지만 높은 권력거리 문화 안에서는 연소자와 연장자 개념의 파트너가 있어야만 한다. 높은 권력거리 파트너십은 후원자와 피보호자를 상상한다. 많은 서구교회들은 동등한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반면, 높은 권력거리 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교회들은 서구교회의 파트너가 자신들보다 권력이 더 많거나 혹은 작다고 가정한다. 자신들이 상이한 가정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어떤 문화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파트너십 관계에 있어 많은 오해들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낮은 권력거리 문화의 교회들이 높은 권력거리 교회들과 파트너십 관계를 추구할 때 불필요한 오해들이 자주 생긴다. 전쟁을 겪은 한 작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교회들과 파트너가 되어 병원을 세우고 직원들을 구할 때 현지 지도자들에게 파트너십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였을 때 당신들은 병원을 제공하고 우리는 환자를 제공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파트너십은 높은 권력거리 가치들을 기대하고 인정하는 문화에서는 완전하게 뜻이 통하는 말이다. 동등하게 되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풍요한 나라의 높은 권력거리 문화를 가진 교회들은 덜 부유한 나라들의 교회들과 파트너십 관계를 가질 때 자신들을 후원자로 보고자 하는 미묘한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한편 상대적으로 가난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심지어 연소자 파트너 역할을 기대하거나 좋아할 수 있다. 파트너십 관계의 초기에 권력거리에 관한 솔직한 토론을 가질 필요가 있다.

 

2) 자원 나눔

오늘날 선교에 있어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이슈들 중 하나는 도움이 많이 필요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부유한 교회들이다. 어떤 이들은 현지인들을 지원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재정을 사용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현지인들을 지원하는 것이 그들의 헌금 생활을 약화시키고 일시적인 외부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게 하는 좋지 못한 습관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권력거리 높은 사회에서는 주는 교회와 받는 교회 양쪽 모두가 후원자 - 피보호자 간에 종속적 관계를 가정하고 좋아한다. 낮은 권력거리 교회들은 그런 관계들을 비열하고 비인간화시키는 가부장적인 것으로 가정한다. 권력거리 이슈에 관한 대화가 이 논쟁에 이해와 자각 및 신뢰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교회와 선교회 관계

높은 권력거리 문화에서 나온 새로운 신자들은 선교사들이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을 책임져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높은 권력거리 선교사들은 통제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새로운 신자들이 더 많은 책임을 지기 원하거나 혹은 선교사들이 지역교회에 책임을 넘기고 더 낮은 권력거리 관계를 취하고자 할 때 오해들이 발생할 것이다. 선교회가 현지 교회에 병원, 학교, 서점, 재산 등을 이양할 때 현지 교회는 역할이 역전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선교회가 통제했다면 이제는 현지 교회가 선교회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교회는 동등한 파트너십을 원했지만 높은 권력거리 문화 안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이해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4) 다중 문화적 팀

더 많은 다중 문화적 팀이 생길수록 리더십에 대한 오해들이 생길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리더십에 있어 더 많은 인내와 권력거리에 관한 겸손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높은 권력거리에 있는 리더의 행동은 낮은 권력거리의 팀원들에게 권위주의적으로 보일 것이다. 반면 낮은 권력거리의 리더에게 높은 권력거리의 팀원들은 우유부단하고 리더의 자질이 없다고 볼 것이다. 이런 다중 문화에서는 서로가 어떤 문화에서 왔는지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5) 의사 결정

낮은 권력거리 문화 속에서 결정은 조직의 어떤 수준에서든지 내려질 수 있지만 높은 권력거리 사회 속에서는 최고 리더십에 의해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져야만 한다. 권력거리의 미묘함은 매우 경험이 많은 선교사들까지도 당황하게 만든다. 권력거리가 높은 문화에서는 최고 권위자의 싸인이 있어야 최종 결정된다. 그것도 문서나 도장 혹은 사인이 있어야 한다. 보통 모든 구성원이 허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최고 권위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7. 리더십의 역설에 대한 재고

한 미국인 선교사가 한 기독교 교단의 교육 분과에서 대표직을 맡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길거리를 달렸다. 다음날 한 목사가 선교사에게 교단에 불명예를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자동차를 타야지 자전거를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선교사는 현지 목사에게 딱정벌레차로 불린 폭스바겐 차를 사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때 현지인 목사는 좀 더 큰 차를 타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라는 것과 더불어 가정과 교회에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 할 것이니라”(딤전 5:17). 이 구절은 높은 권력거리 가치에 주의를 돌리게 한다. 하지만 교회를 몸으로 은유한 구절을 통해 볼 때 아무도 다른 이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하거나 아무도 나는 몸에 붙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전 12:12-31).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도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후에 초대 교회 안에서의 주요한 문제들은 권력 오용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어떤 이들은 아볼로를 다른 이들은 게바를,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함으로 분쟁이 일어났다. 높은 권력거리 리더십은 고린도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

리더십을 새로운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공식적 위치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사랑 안에서 서로 존경하며 복종하는 한편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원리를 따른다면 지도를 하든 따르든 간에 우리는 다른 문화적 가치들에 적응할 수 있다. 어떤 리더십 가치가 성경의 분명한 보편적 가르침에 위배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그 실행에 대해 사람을 가지고 대결 할 필요가 있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롭게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이중 문화적 리더는 성경에 위배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사도 바울의 충고를 따를 것이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 밑바탕에 있는 문화적 가치들을 인식하는 것이 리더십과 관련된 모든 오해들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도움을 줄 것이다. 성경에서 분명한 원리들이 제시되지 않은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리더십 형태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 자신이 선호하는 것에 독단적이 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자전거를 탔던 선교사의 고백이다. “나이지리아에서 나이 많은 목사님이 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때, 나는 그의 동기를 의심했고 왜 그렇게 나를 비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스타일로 사는 것과 현지 사람들과 동일시하려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었다. 자전거를 타므로 나는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하우사 언어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나는 그 목사님이 물질적이거나 아니면 그가 내 차를 태워 달라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였던 것이다. 이제 나는 그가 현지 사람들 눈에 나의 사역을 더욱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했고 나를 실제로 도우려고 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또한 내가 푸조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는 것은 다른 나이지리아 교회 지도자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임을 깨닫도록 했을 것이다.”

 

IV. 리더십과 개인주의

(: 제임스 E 프루드만. <범세계적 교회와 선교적 리더십>. 2013. 요약정리)

 

다중 문화권에서 온 선교사들은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서로 같은 팀 안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주의적 성향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독특성을 살려주는 것이 필요하고 집단주의에서 온 문화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는 것에 대한 민감함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1. 딜레마

개인의 필요들을 채우기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개인들이 그룹의 선을 촉진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 공동체에 높은 가치를 두는 문화가 있는 반면 개인에 가치를 둔 문화가 있다. 어떤 사회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스물한 살이 될 때에 독립적이 되도록 양육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자녀들이 평생 충실한 가족 멤버가 되도록 양육한다. 사회학자들은 그 차이점에 대해 개인주의(individual- 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 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화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지만 각 문화마다 둘 중 하나를 더 강조한다. 개인주의 문화는 개인을 목적으로 보기 때문에 공동의 능력의 개선을 개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공동체주의 문화는 집단을 목적으로 보고 개인 역량의 개선을 집단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개인주의는 개인적 자유와 책임을 증진시키지만 또한 자기중심주의로 이끈다.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치료는 공동체 가치를 세우고 집단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한편 그것은 순응주의로 이끌게 되고 느린 의사 결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주의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개인주의 선교사는 팀이 사역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그대로 놔두고 살 곳을 찾아주고 정부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는 것과 좋은 언어학교를 찾는 것만 도와달라고 한다. 이것이 개인주의의 딜레마이다. 문화적 가치들 중에서 범세계 교회 지도자들을 가장 매료시키기도 하고 또한 좌절시키기도 하는 것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이다. 대다수 세계로부터 온 많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은 개인보다 집단에 가치를 두는 반면, 서구의 많은 이들은 집단 보다 개인을 우선시한다. 일본에 이런 속담이 있다. “튀어 나온 못은 망치질을 당한다”. 아프리카는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고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는 격언이 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뜻이 완전히 통하는 것이지만, 독특한 개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개인주의적 문화에서는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개인들이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지나치게 간섭하는 공동체는 개인의 발전을 억누른다는 것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2. 개인주의/집단주의 연구

생존을 위해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던 가족들은 개인주의적 책임의 가치를 가르쳤다고 어떤 이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룹들이 마을, 읍과 도시를 형성하기 위해 모이면서 협력과 집단주의적 책임의 필요가 커졌다. 기원전 1700,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은 개인보다 사회의 권리를 보호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모세에게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과 서로에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규정을 주셨다. 공동체는 하나님만 예배할 것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탐내는 것을 하면 안 되었다. 이러한 법들은 공동체 삶을 위한 기준을 제시했고 개인의 권리들은 단지 부차적이었다. 심지어 오늘날도 유랑하는 유목민들과 어부들은 개인의 책임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는 반면, 농촌과 마을 및 읍에 모여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집단적 협력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비인격적인 거대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개인주의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다. 일반적으로 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국가들은 함께 일하는 집단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유럽 및 북유럽 국가들은 개인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루마니아와 덴마크가 집단주의의 최고점에 있음을 보여줌으로 혼합의 양상을 나타냈다.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사회에서는 확대가족의 욕구들이 개인의 욕구보다 더욱 중요하다. 가까이 모여 사는 가족은 통상적으로 부모 형제자매뿐 아니라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모와 고모, 삼촌을 포함한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은 통상적으로 부모와 형제자매들로만 구성된 핵가족 안에 태어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혼자 일을 처리하고 개인적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독립적인 교육을 받는다. 성장한 아이들은 집을 떠나 먼 지역으로 가서 살 것이 기대된다. 미국, 호주, 영국과 캐나다는 대부분의 유럽나라들과 함께 개인주의 특성이 아주 높다. 일본, 인도, 브라질과 많은 중동 국가들은 척도의 중간에 가깝다. 중국, 아프리카와 대부분의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개인주의적 특성이 가장 적었다. 사람들이 현재 자신들의 실행(Practice)하고 있다고 한 것과 자신들의 문화가 되어야만(Should)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앵글로계 응답자들은 자신들 소속 집단에서 집단주의 실행이 낮은 것으로 표시했으나 집단주의에 대해서는 가치를 부여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개인주의자라고 보지만 좀 더 집단주의자가 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중국, 인도,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을 집단주의적이라고 인식하였지만 개인주의에 더 가치를 부여했다.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가치들의 변화속도는 느리다. 문화적 유산은 현대 선교사 운동에 있어 몇 대를 두고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령 스위스에서 온 선교사와 에콰도르에서 온 선교사가 함께 인도에서 사역하는 경우와 같이 매우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온 선교사들이 매우 강력한 집단주의적 가치를 가진 선교사들과 팀을 이루었을 때 야기되는 상황들은 상상할 수 있다. 팀이 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동양의 더불어 사는 삶과 서양의 홀로 사는 삶>(리처드 니스벳. 2004).

1930년대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딕과 제인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딕이 뛰는 것을 보아라. 딕이 노는 것을 보아라. 딕이 뛰면서 노는 것을 보아라한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들은 서양의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똑 같은 한 남자아이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형이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구나. 형은 어린 동생의 사랑해, 그리고 동생도 형을 사랑한단다.” 이 문장들은 독립된 개인의 개별행위가 아닌 개인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어린이들이 처음 접하는 교과서에 이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동양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자신을 기술할 때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정도가 일본인이 미국인보다 2배나 높았다는 보고가 있다. 미국인이나 캐나다인은 주로 성격 형용사를 많이 사용하거나(친절하다, 근면하다), 자신의 행동(나는 캠핑을 자주 한다)을 서술한다. 반면에 동양 사람들은 나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직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한다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동양의 격언은, 동양문화에서 개인의 개성이 자유롭게 표현되기 보다는 억압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개인의 성공을 덜 중시하며 그보다는 집단 전체의 목표 달성이나 화목한 인간관계를 더 중시한다. 개인의 독특한 개성을 무조건적으로 환영하지도 않는다. 동양인들에게 있어 개인의 만족감은 자신이 집단 성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그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동양인들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특수하며 각자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 동양인은 서양인들이 가정에서 식사테이블을 정리해줘 고마워’, ‘세차를 해주 고마워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렵다. 동양에서는 각자가 마땅히 엄수해야 하는 엄격한 의무를 이행했다고 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개인의 선택은 상대적으로 그리 중요하게 간주되지 않는다.

한 동양 사람이 말하기를 슈퍼마켓에서 40개가 넘는 시리얼을 놓고 선택하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동양적 사고에서 바라본 개인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맥락 속에 있는 존재이다. 동양은 구체적인 어떤 사람과 구체적인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을 분리시켜 그의 행위나 속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양의 사고방식에서는 매우 낯선 일이다.

철학자 도널드 먼로는 말하기를 동양인들은 인간을 가족이나 사회의 원리와 같은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한다’, 인간은 인간관계 속에서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독립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리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행위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조정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동양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내집단에 대해서는 강한 애정을 보이지만 외집단이나 그저 아는 사이인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리를 둔다. 그들은 자신이 내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끼고, 그들을 외집단 구성원보다 훨씬 더 신뢰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자신과 내집단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며 내 집단원이나 외집단원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보편주의적 행동 원리를 따른다. 저맥락 사회인 서양에서는 사람을 맥락에서 떼어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개인은 맥락에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러나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 인간이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서 주변 맥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동양과 서양의 자기 개념의 차이는 자신을 얼마나 독특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인들은 독특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양인들은 그러한 착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여러 대상의 그림을 보여주고 그 중 한 사물을 선택하게 하는 연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미국인들은 가장 희귀한 것을 고르고 한국인들은 가장 보편적인 것을 골랐다. 볼펜을 고르라고 했더니 미국인들은 가장 희귀한 색의 볼펜을 고르고 한국인들은 가장 흔한 색의 볼펜을 골랐다. 미국인들은 항상 남의 눈에 띄고 싶어하나 한국인들은 늘 남들 정도만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좋은 감점을 느끼는 경향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생소하다. 미국인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는 것에 매우 자연스럽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많은 영역에서 평균 이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동양인들은 많은 속성들을 평가하는데 있어 자신을 평균 이하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동양인들은 자기 안에 긍정적인 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쁜 특성이 많이 있다고 보고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저 더 겸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신을 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이다.

동양인들이 자신의 특성을 일부러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동양인들에게는 자신이 특별하다’, ‘남들보다 탁월하다라고 믿게 하는 문화적 압력이 없다. 동양에서는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화목을 유지하고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기비판이 필수적이다.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다른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집단의 과제 달성을 방해하는 개인의 단점이나 특성을 반드시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남들과 마찰 없이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지만 서양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도록 가르친다. 캐나다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창의력 검사의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에 참가한 한 그룹에게는 검사 결과 창의력이 매우 높다는 거짓 정보를 주고 다른 그룹에게는 창의력이 매우 높지 않다는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들이 문제를 푸는 과정을 관찰하였다. 그 결과 캐나다인은 창의력 점수가 높다는 통보를 받은 경우에 과제를 더 오랫동안 풀었지만, 일본인들은 점수가 좋지 않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그것을 자신이 더 향상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노력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처음부터 잘했던 몇 가지 기술에만 능숙한 반면, 동양인들은 처음에 익숙하지 않았던 기술이라도 꼭 익히고야 마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독립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훈련은 아이들의 잠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와 다른 침대에 잠을 재우지만 이는 동양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에 나타나는 두 문화 간의 차이는 훨씬 더 심하다. 중국에서는 어린아이를 가운데 두고 어른들이 빙 둘러 앉아 아이를 지켜보고 귀여워하고, 일본의 아이들은 늘 어머니와 붙어 다닌다. 일본인들은 어머니와의 친밀성을 평생 동안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는 미국인들에게는 매우 우스꽝스럽고 당황스러운 주장이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의 독립성을 키워주기 위해 어릴 때부터 매우 분명하게 훈련을 시킨다. 서양의 부모들은 자녀가 스스로 자기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동양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녀의 일을 자신들이 결정하려 한다. 서양의 아이들은 독립성에 대한 훈련이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자신의 선택의 자유가 침해되면 심하게 반항한다. 미국의 아이들은 자기가 선택한 조건에서 가장 강한 학습 동기를 나타내는 반면에, 어머니가 선택해준 조건에서 가장 낮은 동기를 보인다. 아마도 엄마가 선택해준 경우 자신의 선택권이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 반면에 동양 아이들은 어머니가 선택해준 조건에서 가장 강한 학습 동기를 보인다. 미국의 어머니들은 자녀와 함께 놀이를 할 때 특정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물의 속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반면에 일본의 어머니들은 사물의 감정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르친다. 예를 들면 네가 밥을 안 먹으면, 고생한 농부 아저씨가 얼마나 슬프겠니?’, ‘인형을 그렇데 던져버리다니, 저 인형이 울고 있잖아!’, ‘담장이 아야 아프다고 하잖아!’와 같은 말들로 꾸중한다.

사물의 속성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훈련받은 아이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행동을 하도록 교육받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미리 예측하도록 교육받는다. 서양인에 비해 동양인들이 타인의 진짜 속마음과 감정을 잘 읽어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도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의사소통을 가르칠 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화에 임해야 하며, 대화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면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강조한다. 동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것을 강조한다. 어떤 아이가 노래를 잘못 부르고 있을 경우, 미국의 부모들은 애매하게 둘러말하지 않고 그만 하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 동양의 부모들은 , 노래 참 잘 한다라고 말한다. 아이는 처음에는 우쭐하지만 점차 부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고 결국 노래를 그친다. 미국인들은 동양인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푸념하는데 이는 동양인들이 간접적인 화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동양인들은 미국인들이 가끔 무례하다 싶은 정도로 지나치게 직설적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적인 사회와 상호의존적인 사회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개인적 행위에 대한 자유 선호 대 집합적 행위에 대한 선호

2) 개인의 독특성 추구 대 집단과의 조화로운 어울림 추구

3) 평등과 성취 지위의 추구 대 위계질서와 귀속 지위의 수용

4) 보편적 행위 규범(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행동원리)에 대한 선호 대 특수적 행위 규범(유형과 종류와 상황에 따른 융통성 있는 행동 원리)에 대한 선호

개인의 독특성과 집단 내 조화의 상대적 중요성을 알아보기 위한 연구가 있다. 두 종류의 실험을 하였다. 1)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자율권을 실현할 수 있는 직업. 2) 일을 잘 했다고 해서 특정 개인만이 부각되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일해야 하는 직업.

실험 결과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경영자의 90%이상이 a를 선택했지만 일본이나 싱가포르 경영자는 50%미만이 a를 선택했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 경영자들의 선택은 이 둘의 중간쯤이었다. 흔히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지역번호를 5년마다 바꿔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 회사를 자주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일단 취직하면 그 직장과의 관계, 그리고 그 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직장을 자주 바꾸는 것은 그리 좋지 않게 여긴다. 만일 어떤 회사에 지원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을 옮길 것이라는 설문을 한 결과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네덜란드 등은 90%이상 그럴 것이라고 한 반면 일본 사람들은 40%만이 그렇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게 될 때에 갈등을 겪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보편주의적 행동 규범에 익숙한 사람과 특수주의적 행동 규범, 즉 그때 그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각각 다른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는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는 규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호 작용할 때는 더욱 그렇다. 서양인들은 보편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규칙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규칙을 저버리는 행위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긴다. 동양인들의 눈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때로는 비정하게까지 보인다.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인 규칙에 대한 집착은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사이의 계약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계약이란 한번 맺어지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상황이 변해서 계약 내용이 한쪽에게 불리해지더라도 계약을 변경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호의존적이며 고맥락 사회인 동양에서는 상황이 변해면 계약의 내용도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계약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국가 간 마찰을 가져오기도 한다. 1970년대 중반 일본과 호주의 설탕 계약문제가 있었다. 일본의 설탕 제조업자들은 호주의 설탕 공급자들과 1톤에 160달러로 5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 후 세계 설탕 가격이 폭락하자 일본은 상황이 변했으니 계약 내용을 변경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계약은 계약이라며 정색을 했다. 계약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광고의 경우에서도 미국의 광고들은 주로 개인의 선호를 자극하거나 제품 구입으로 인한 개인의 해택을 강조한 반면 한국의 광고주들은 주로 집단의 선호를 자극하거나 집단이 받게 될 혜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개인주의적 광고집합주의적 광고를 제작하여 그 효과를 측정했을 때, 개인주의적 광고는 미국인에게, 집합주의적 광고는 한국인에게 더 효과적이었다.

동양인들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호의존적 단서들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인 사람이 되도록 유도(점화)되고 있고, 서양인들은 독립적 단서들을 통해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늘 점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면 독립적 단서에 노출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게 되고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지내게 되면 상호의존적 단서에 점화되어 상호의존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 예로, 캐나다 출신의 젊은 심리학자는 학위를 마친 후 일본에서 수년간 연구를 한 후 미국의 여러 유수대학에 교수직에 응모를 했는데, 그때 그가 쓴 자기 소개서를 보고 그의 지도교수는 당황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소개서의 앞머리에서 그 젊은 심리학자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장황하게 기술해놓았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일본 생활 때문에 완전히 동양적인 사고에 물든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지내느냐가 따라 자존감 점수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서양에서 일정한 정도의 시간을 보낸 일본인들의 경우 자존감 점수가 그 사이에 매우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반대로 똑같은 절차를 통해 일본에서 지낸 케나다인의 자존감 점수는 그 사이에 심하게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아마도 서양에서는 개인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요소가 많고 동양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특성들은 전적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결코 변할 수 없다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문명이 처음 시작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점차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개성, 자유, 합리성, 보편주의 같은 가치들이 보다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보편적인 법을 만들었고, 그보다 서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 개인의 독특성을 강조했고 다시 더 서쪽의 그리스인들은 그 개성을 더욱 강조하고 거기에 개인의 자유, 논쟁, 형식 논리를 가미시켰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재발견하여 소위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업적을 만들어 내었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개인의 책임 의식과 직업에 관한 소명의식을 만들어냈으며 또한 개인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가족과 내집단에만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보다 신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든 가치들은 청교도와 신교를 포함하는 영국 내의 칼뱅주의 문화에서 정점을 이루게 되는데 그 평등주의 사상은 훗날 미국 정부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미국의 한 저명한 사회 과학자는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들도 사회과학도였다. 1970년대 미국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아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서 아들의 직장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위치에서라면 얼마든지 쉽게 직장을 구해줄 수 있었다. 이는 동양적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논쟁에 있어서도 미국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했다. 최근에야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자유로워졌다. 서양인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은 지난 5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북한은 전적으로 실패한 체제를 고수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과 북한을 비교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논하는 논쟁이 벌어진다면 모두가 한국의 우월성을 인정할 것이 자명하지만 논쟁에 대해 전통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옳은 주장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이 결여되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북한에 관한 정보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했고 북한에 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북한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자국민을 설득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논리적 구조를 학습하기 때문에 대학원생 정도가 되면 이 구조를 거의 제 2 천성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양인들에게 이러한 수사 구조는 상대적으로 낯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미국 교수들은 매우 성실하며 똑똑하다고 믿고 선발했던 동양 학생들이 제출하는 첫 번째 논문을 읽고 나서 대개는 크게 실망한다. 단순한 영어가 서툴러서가 아니라 그 학생들의 논문에 논리적 구조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미국 교수들은 동양학생들의 그러한 문제가 근본적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서양식 수사법에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동양에서는 분쟁을 해결할 때도 논쟁을 잘 벌이지 않는다. 대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제 3의 중재자를 찾는다. 이 사람의 주 임무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보다는 두 당사자 사이의 적대감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대체로 그들은 중용의 도를 내세워 타협을 유도한다. 동양에서는 서양식 해결법이 너무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동양인들은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의 일부분으로 생각한다.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성공과 성취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광을 의미하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인의 업적을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인간관계 속에 조화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비판을 하지만 서양인들은 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관계의 조화를 추구하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인간관계를 희생해서라도 정의를 추구한다. 동양인들은 위계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통제를 수용하지만 서양인들은 형평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선호한다. 동양인들은 모순과 논쟁을 회피하지만 서양인들은 법률, 정치,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논쟁을 끌어들인다.

 

3. 권력거리와 개인주의/집단주의

일반적으로 권력거리가 큰 국가들은 또한 보다 집단주의일 것이며 권력거리가 작은 국가들은 보다 개인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코스타리카는 매우 집단주의지만 권력거리는 상당히 낮은 반면, 불어권 유럽은 높은 권력거리를 가졌음에도 강한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개인주의적이며 낮은 권력거리를 가진 호주와 미국으로부터 온 선교사들은 팀 리더가 특별한 지위를 갖거나 지도자 행세를 하지 않는 일반 회원이 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집단주의적이고 높은 권력거리를 가진 서부 아프리카와 한국으로부터 온 선교사들은 팀 리더가 특별한 카리스마와 높은 학위를 가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4. 수치심과 죄책감

조화를 중시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수치심 혹은 공중의 책망은 적절한 행동을 위한 일종의 강력한 자극제이다. 한편 개인주의 사회는 죄책감의 문화로 표현된다. 사회의 규칙을 어긴 사람들은 종종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내부에서 안내자의 기능을 하는 개인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수치심은 사회적인 것이고 죄책감은 개인적인 것이다. 수치심은 한 사람이 공동체의 규범을 어겼음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알게 될 때 느끼는 결과인 반면, 죄책감은 개인이 내면적 원리에 맞추어 살지 못했을 때 느끼는 결과이다. 공중 앞에서 체면을 잃게 되는 위협은 수치심 중심인 집단주의 사회에서의 강력한 자극이 된다. 체면을 세우거나 사회적 명예를 얻는 것은 집단주의적 사회에서 중요하다. 개인적 자아존중은 죄책감 중심인 개인주의적 사회 안에서의 추진력이 된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집단주의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개인주의 사회에서 얻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죄책감은 내재하는 절대적인 도덕률의 기준이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아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른다할지라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다. 한편 수치심이란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의 책임이나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개인적으로 갖게 되는 창피스러운 느낌이다. 옳고 그른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고 남들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를 행하는 것이 자존심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심각한 오해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죄책감 중심인 문화에서 온 리더들이 집단주의적이고 수치심 중심적인 문화에서 온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격려 또는 평가를 하고자 할 때에 일어난다. 개인주의적 문화의 영국으로부터 온 리더는 집단주의적 문화의 중국인 팀 멤버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데 심지어 그 사람을 대중 앞에서 칭찬을 했을 때에라도 그렇다. 그 반대의 경우 또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집단주의적 문화의 가나 목사는 개인주의적 문화의 미국으로부터 온 단기 팀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으려고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팀의 사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안들을 하지 않을 수 있다.

 

5. 개인주의/집단주의 경영

집단주의 문화에서 고용주는 한 개인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내집단(in-group)에 소속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가족 중 한 사람을 고용하거나 이미 회사의 멤버인 사람 혹은 매우 존경받는 가족의 일원을 고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런 경우 종업원이 일을 잘못해도 해고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좇아내지 않는 것과 같다. 반면에 연고자를 고용하는 것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종종 불법이거나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가족이 함께 일할 때는 이해의 갈등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의 연관은 가족 관계라기보다 계약상 합의이며 따라서 고용인은 수행 능력에 따라 고용되거나 해고될 수 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을 평가한다. 집단주의에 사회에서는 집단의 효율성을 평가한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평가하는 일은 기이하게 보이는 일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과업을 성취하는 것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관계를 증진하는 것이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6.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단계들

1) 중동의 격언은 개인주의가 집단주의의 발전 단계로 가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형제를 대적하고, 나의 형제와 나는 사촌을 대적하며, 나의 사촌과 나는 외부인을 대적한다.” 개인은 그의 형제를 대적하지만 그 두 형제는 좁은 집단주의를 형성하며 그것은 또한 사촌을 포함하는 좀 더 넓은 집단주의로 이끈다. “나의 형제와 사촌들은 가까운 친척을 대적하고 가까운 친척은 멀리 있는 친척을 대적한다”. 지도자들의 세계관이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로부터 세계중심적인 집단주의로 그 지평이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조약돌 하나가 고요한 호수에 넓게 퍼지는 파문을 만드는 것처럼 관점이 확장될 때 지도자는 성장한다.

 

2) 자기중심적(egocentric) 개인주의 단계

갓 태어난 아기가 만드는 파문을 연상할 때, 그 동그라미의 크기는 매우 작다. 온 우주는 자기중심적이며, 실존주의적인 현재 상태에 묶여 있다. 아기들은 자기중심적이지만 우리는 그들이 개인주의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은 완전히 정상적인 발달 단계이다. 미성숙은 아기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지만 만일 사람들이 자기중심주의에 고착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자기중심적 개인주의는 좋고도 필요한 발전단계이다. 개인적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집단에 공헌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중심적 개인주의의 미성숙한 관점을 가지고 행동하는 지도자는 조직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유아가 아닌 성인 지도자에게 그것이 발견될 때에는 언제나 갈등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 가운데 많은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들이 아무리 섬기는 지도자라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다. 예수님은 이리가 올 때 양 떼를 버리는 사람들을 악한 목자라고 묘사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 떼를 전혀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목자들이 좋은 지도자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일차적으로 자신을 돌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지도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이 올라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밀쳐낸다. 자기중심적 지도자들도 가족으로부터 친족으로, 그리고 더 넓은 사회로 움직여 나가면서 지평을 넓게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우주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좀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다.

 

3) 가족 중심적(Family-centric) 집단주의 단계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 형제자매, 조부모 또는 친척 등을 가진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들의 세계관 연못의 파문은 바깥쪽으로 확장되면서 자기의 가족 및 확대 가족, 모두를 포함하게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기중심주의는 좀 더 넓은 가족 중심적 관점으로 발전된다. 유아기의 가족이라는 넓은 집단주의로 발전해간다. 역시 정상적이고 건강한 발전의 단계이다. 가족들은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덜 자기중심적이 되고 부모, 형제자매, 조부모, 이모, 고모 및 삼촌들의 필요를 보게 된다. 가족 중심적 지도자들은 확대 가족을 위한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친족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한다. 자아는 다른 이들과 한데 얽히게 된다. 이 단계의 리더십은 가족이라는 원안에서 돌보고, 희생하는 온정주의적인 모습이다.

가족 중심적 리더십은 자기중심을 뛰어넘는 반면 우리 대 그들이라는 사고방식을 통해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목회자들은 자신이 이끄는 작은 교회의 성장을 추구하며 다른 교회들과 경쟁한다. 청년부 목사는 교회 안의 청소년들에게 열정을 가지지만 청소년 사역이 전체 교회의 더 넓은 비전이 어떻게 맞아 들어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보지 못할 수 있다. 기독교 기관들 안에서 자기 구역 보호혹은 자기 자신의 부서나 위원회에 자원을 끌어오고자 다른 부서들에 손해를 입히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더 큰 기관에 해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속한 무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자민족 중심적(ethnocentric) 집단주의 단계

십대들의 지평은 자신의 동료들을 포함하여 다른 가족들, 이웃들, 멀리 있는 친척들 및 이웃 동네의 사람들에게로까지 넓혀진다. 가족중심주의는 자민족 중심주의로 확장되는데 그것은 내가 아는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점이다. 자민족중심 관점은 가족 혹은 자기중심적 우주보다는 넓다. 자민족 중심주의는 내가 속한 가족, 마을로부터 내가 속한 씨족, 지방, 국가 혹은 인종으로 그 수준이 옮겨 갈 것이다. 연못의 파문이 밖으로 확장되듯이 거기에는 계속 확장되는 많은 원들이 있을 것이다. 자민족 중심 지도자는 가족중심 지도자보다 더 넓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목회자는 자기 교회를 지역사회 안의 많은 교회들 중 하나로 볼 수 있고 전체 교단의 유익을 추구할 것이다. 그 교회는 지역사회의 다른 교회들과 동맹을 맺고 글로벌 파트너십에 관심을 갖게 될지 모른다. 자민족 중심 지도자의 이러한 전망의 성장은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환영받을 만한 발전이다. 하지만 자민족중심 지도자는 여전히 한계를 지닌다. 자신들의 문화의 리더십 가치의 전망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세계 다른 지역으로 나아갈 때 자신들의 국내의 성공적인 교회들로부터 배운 것들이 모든 문화에 적용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태도는 범세계적 교회와 파트너십에 있어 긴장을 일으킬 수 있다. 제한된 전망을 가진 교차문화적 일꾼들은 자신의 문화적 가치들이 성경적이고 보편적이라고 가정한다. 한 대형교회를 이끄는 자문화 중심적 목회자는 자기 교회를 성공하게 한 원리들이 어떤 문화에서든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것이다. 집단주의의 강점은 소속감이며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갈망이다. 집단주의의 불가피한 위험은 우리 대 그들이라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 또는 공동체의 사람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관심을 갖지만 너무도 흔히 민족의 범주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열등하다거나 심지어는 속이고 압제해도 되는 원수로 인식한다.

 

5) 세계 중심적(Global- centric) 집단주의 단계

인간에 불과한 우리는 전 세계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시도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세계중심적 집단주의의 지평은 개인, 가족 및 모든 나라들을 포함시키는데 그것은 우리의 친구들은 사랑하고 우리의 원수들을 멸시하라는 우리 대 그들의 사고방식을 벗어난다. 하나님의 전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신 중심적(theo-centric) 집단주의이다. 신중심적 집단주의는 흔치 않으며,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지도자는 사회 규범과 자민족중심 집단주의가 가진 좁은 관점에 반대하는 개인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자는 자기중심적 개인 주의자가 아니라 실제로 원리 중심적 개인주의자일 것이다.

이 세계 중심적 집단주의 단계에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의 구별은 융합된다. 개인도 완전히 살아있고 공동체는 우리 대 그들사고방식의 좁은 경계선을 무너뜨린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자들은 그들의 집단주의적 사회의 법을 다음과 같은 답변을 통해 도전하였다.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5:29). 하나님의 원리가 사회의 규칙들보다 더 높은 충성을 요구한다. 유대종교법에 의해 세워진 선례들을 거슬렀던 제자들이 개인 주의자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들의 관점은 세계중심적인 것으로 발전했다. 유대인 지도자들 중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다.

 

 

V. 리더십과 불명확성

(: 제임스 E 프루드만. <범세계적 교회와 선교적 리더십>. 2013. 요약정리)

 

삶이란 모든 문화에서 예측불가능하다. 어떤 사회에서는 불명확성이 심각한 문제가 되기에 지도자들은 그것을 축소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기를 시도함으로 불확실성을 피한다.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장기 계획을 세우며, 약속을 잡고, 위기 대책을 기안하고, 보험을 사며, 실행 목록을 만들고 두꺼운 정책 매뉴얼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들은 불명확성과 함께 살면서 인생에 대해 느긋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불확실성 회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공동체들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각종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곤혹스러워한다. 반대로 불명확성에 대한 관용성이 낮은 지도자들은 인생에 대해 될 대로 되겠지라는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불확실성을 관용하는 데 있어서의 차이는 중대한 오해들을 초래할 수 있다. 낮은 상황성 문화들이 불명확성을 두려워하는 한편, 높은 상황성 문화들은 그것을 당연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틴 아메리카 안에 있는 한 교회에 단기 선교를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독일 목사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독일 목사는 여행의 정확한 목적, 단기 선교 여행의 시작과 마치는 정확한 시간 및 여행 경비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하고자 할 것이다. 라틴 목사는 독일 팀이 도착해서 책임을 맡겨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계획이 명백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짜증낼 것이고 라틴 사람들은 미래를 통제하려는 독일인들의 강박증에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양측 모두는 서로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1.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에 대한 연구

불확실성은 삶의 일부이다. 불명확성에 대해 관용이 낮은(높은 불확실성 회피)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정책과 시간표 및 자세한 계획을 세움으로써 불안감을 최소화시키기를 원한다. 불명확성에 대해 관용이 높은(낮은 불확실성 회피) 사회 속의 사람들은 더욱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불확실성 회피를 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불명확한 상황이나 미지의 상황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는 정도이다. 이러한 느낌은 긴장성 스트레스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예측 가능성에 대한 필요성, 성문율 혹은 불문율의 필요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볼 수 있다. 불확실성을 강하게 회피하고자 하는 사회가 더 많은 불안을 경험하고 결과적으로 높은 자살률과 알콜 중독 지수를 나타내는 것을 발견된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확실성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확실성에 가치를 두는 문화들은 규칙을 존중하고 법을 더 잘 지킬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더 오래 종사할 것이다. 불확실성에 대해 관용이 높은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삶의 정상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스트레스를 적게 경험하고 덜 공격적이며 또한 느슨한 가족의 삶의 살며 법을 덜 존중하다는 것이 보여 주었다.

 

1) 불확실성 회피 사회들의 경향은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과 교류를 공식화한다.

(2) 법적 계약의 동의 사항들을 문서화한다.

(3) 기록을 체계 있고 자세하게 유지한다.

(4) 공식화된 정책과 절차들에 의존한다.

(5) 규칙적으로 세우고 따른다.

(6) 기록으로 의사소통을 확인한다.

(7) 더욱 온건하고 계산된 모험만 시도한다.

(8) 변화에 더 강력한 저항을 나타낸다.

(9) 규칙을 어기는 것에 적게 관용을 베푼다.

 

2) 불확실성을 관용하는 사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들과 교류함에 있어 보다 비공식적이다.

(2) 동의 계약서보다 그들이 믿는 사람들의 말을 신뢰한다.

(3) 질서 정연함이나 기록 유지에 있어 적은 관심을 가진다.

(4) 공식화된 정책과 절차 및 규칙들보다는 비공식적 교류와 비공식적 규범들에 의존한다.

(5) 모험을 시도할 때 덜 계산적이다.

(6) 변화에 저항을 덜 나타낸다.

(7) 행동을 규제하기 위한 규칙을 세우는 것을 덜 원한다.

(8) 규칙을 어긴 것에 관용적이다.

지역적으로 북유럽과 독일계가 불확실성 회피에 있어 최고 높은 지수를 기록하였다. 중동, 라틴 아메리카와 동유럽은 가장 낮은 지수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계 유럽은 중간 정도 지수였다. 불확실성 회피는 권력거리와 부정적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낮은 권력거리 사회에서 법이 왕일 가능성이 더욱 높은 반면, 높은 권력거리 사회들에서는 왕이 법이다. 법의 지배는 왕의 지배보다 불확실성이 적은 사회를 지향한다. 불확실성 회피 국가에서는 기술적으로 보다 발전한 경향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더욱 발전했으며 경쟁을 지지한다. 불학실성에 대해 낮은 관용을 가진 사회들은 민주주의를 존중하는데 있어 더 높은 지수를 나타난다. 장기적인 관점의 계획을 세우는 경향이 있다.

 

3) 질문들

(1) 나는 이 척도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2) 내가 가진 가치들이 더욱 타당하지 않은가?

(3) 나의 방법이 더욱 성경적이지 않은가?

(4) 그 데이터들이 다중 문화적 팀과 교회 대 교회 동역, 국제 선교단체 리더십에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가? 연구를 통해 얻어진 발견들이 세계선교를 위해서 어떻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것인가?

 

2. 성경적 페러독스

확실성에 가치를 두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을 들고 나올 것이다. 성경은 지혜로운 자는 앞서 계획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우리는 비용을 계산해야만 하며 율법에 순종해야만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인류가 함께 일하고 계획하며 목적을 정할 때 어떤 일이든지 성취할 수 있음을 아셨다. 이것은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왜 다음과 같이 말씀했는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11:6). 하나님은 사람들이 악을 도모할 수 있는 엄청한 잠재력을 가졌음을 아셨기에 언어를 혼잡케 만드셨다. 계획은 불확실성을 회피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잠언은 계획을 세우라는 권면으로 가득차 있다.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20:18).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제자도의 비용을 계산하라고 명령하셨다. 지혜로운 건축가는 망대를 건축하는 비용을 계산하고 지혜로운 왕은 자신이 가진 군사들보다 두 배나 많은 적들과 대적할 수 있을까를 고려한다(14:24-33). 오로지 어리석은 건축가와 장군만이 불명확성을 좋아한다. 예수님은 그의 삶의 계획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의 삶에 있어 사건들의 순서를 의식하고 계셨고 그 순서에 맞도록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셨다. 그는 끝을 마음에 두고 사셨고 그분의 인생 목적에 대해 불명확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불명확성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었지만 미래를 위해 가능한 많은 계획을 세웠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가 계획을 신중하게 세우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계획할 때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고후 2:17) 게으른 자는 오로지 현재를 위해 산다. 잠언은 너무 게을러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서 가서 심지어 감독자가 없을 때라도 어떻게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는가를 배우라는 말을 듣는다(6:6-8).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대신에 게으른 자는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지”(6:10)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가난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그는 무시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10:4).

불확실성을 묵인하는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흐름에 따라 가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할 것이다. 내일 일에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을 댈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순종하여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11:8).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부자들은 불확실한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딤전 6:17).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19:21). 성경은 지도자가 특정한 시간 안에 성취해야 할 숫자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사례나 권면도 없다. 성경은 인생에 대한 확실성과 불확실성 양쪽 모두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성경적 패러독스와 함께 사는 것

성경은 믿음으로 맡기는 것과 계획 세우기, 안식하는 것과 분투하는 것, 결과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믿는 것과 전략 세우기, 양쪽 모두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믿음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패러독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11:1). 인간적 견지에서 보자면 볼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잠언은 계획 세우기와 신뢰하는 것 양쪽 모두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경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6:3). 지도자는 계획을 필요로 하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계획한 것의 결과를 이끌어 내실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고 종종 그가 목적을 알기에 먼저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은 확실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시면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아브라함은 400년 동안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에게 되어 괴롭힘을 당할 것이지만 때가 되면 주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15:13-1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들의 미래에 대한 불명확성을 갖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불명확성과 계획 세우기의 패러독스를 가지고 살았다. 성벽 건축이 단지 절반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대적들이 공격하겠다고 위협할 때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파수꾼을 세웠다(4:9). 자신들의 능력으로 미래를 통제하기 원하여 시간을 설정하는 지도자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도자들은 단지 기도 모임을 가진 후 잠을 자기 위해 가버릴 수 있다. 느헤미야는 둘 다를 하였다. 그는 기도했고 조치를 취했다.

예수님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조합한 여러 가지 비유들을 말씀하셨다. 가장 흥미로운 비유 중 하나는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농부에 관한 것이다. “그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4:27-29). 농부는 미리 계획을 세워 밭을 준비하여야만 했고, 언제 어떻게 씨를 뿌릴지를 알아야 했으며, 추수 때에는 열심히 일해야 했다. 비록 농부가 불확실성을 회피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고 해도 그는 씨가 자라는 신비를 온전히 인식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왕국의 리더들은 주도권을 가지고 가능한 만큼 계획을 수립할 책임이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추수의 과정과 열매를 위해 추수의 주인을 신뢰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사이에 잘못된 이분법을 만든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리더들은 일중독 자가 되고 미래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리더들은 게으르게 된다고 가정한다. 야고보서에서 믿음과 행함은 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순종했다(2:21-24). 위대한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은 위대한 행동의 사람들이었다. 그 두 가지 사이에 어떤 긴장감도 없다. 불확실성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염려하는 지도자는 율법 주의적으로 될 수 있고 긴장이 많아진다. 반면에 불확실성에대해 너무 염려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될 수 있다. 성경은 건강한 균형을 가리킨다.

 

4. 범세계 교회와 리더십을 위한 함의

1) 선교사들을 적절한 사역과 연결시키는 것

농촌지역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시골 지역에서 사역할 때 뛰어난 선교사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 농부들은 공동체를 이해하고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께 일하는 법을 알고 있고 그들을 둘러싼 아직 다 알 수 없는 상황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기대치 않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에 혁신적으로 대처한다. 런던이나 상파울로의 비즈니스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델리의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성공하기 위해 그들은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조직화하며 재정 기록을 신중하게 유지하여야만 한다. 불명확성에 대한 관용이 적어야 그들은 성취할 수 있다. 불명확성과 관련한 문화적 차이는 국적보다는 나이, 거주 지역, 또는 교육과 직업의 차이들과 더욱 연관이 있다.

 

2) 조직

SIM 이나 OMF 같은 경우에 처음에는 본부에서 선교지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정들은 실행되어야 하는 곳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위임하게 되었다. 세계 선교가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진행되면서 조직 문화는 더욱 분권화되고 불명확하게 되어 갈 것이다. 선교회의 두꺼운 매뉴얼은 불확실성을 회피하는데 유용한 도구이다. 그러나 선교회가 다중 문화적으로 바뀌게 되면 획일화된 정책들은 페루에서 중국, 에티오피아에서 인도, 인도에서 수단 등 선교사들에게 적절치 않게 된다. 다국가적이 될 수록 단일 문화적인 지침은 별로 유용하지 않게 된다. 국제단체가 이사회를 구성할 때는 목회자와 기업가, 교육가, 여성 및 법률가로 골고루 구성되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목회자로 구성된다. 선교 조직들이 다 문화적이 될수록 분권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지역적 자유를 허용하고 불명확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엄격한 통제를 통해 불확실성을 회피하고자 시도한다면 조직들은 소중한 문화적 가치들을 억누르게 될 것이며 단일 문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많은 조직들은 넓은 범주의 분산화를 통한 합성 조직이 되어야 할 것이다.

YWMA 같은 선교단체는 겉으로 볼 때는 중앙집권적이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의 책임은 수행하는 그 지역에서 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단체는 선교사가 총 몇 명이나 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YWMA는 다중 문화적 조직으로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 “불가사리와 거미<오리 프라프만(Ori Brafman)과 로드 백스트롬(Rod A, Beckstrom)>에 기록된 내용이 있다. 거미 조직은 국제 본부와 중앙 집권화된 구조를 가지고 단일 지도자를 조직의 최고 높은 자리에 둠으로 불명확성을 회피한다. 만일 거미의 머리를 공격하면 조직은 죽는다. 거미와 대비되는 것이 불가사리이다. “불가사리는 머리가 없다. 몸통은 심지어 에너지를 축척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주요한 기관은 각각의 모든 다리들로부터 복제된다. 만일 당신이 불가사리를 반으로 자르면 그 동물은 죽지 않을뿐더러 놀랍게도 곧 당신은 두 마리의 불가사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동물은 단지 다리 하나만 있어도 자신을 복제할 수 있다.”

분권화를 너무 많이 한다면 비전과 핵심 가치들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만일 분권화를 너무 적게 한다면 계속 서구 지향적인 선교회로 갈 것이며 하나님이 세계 모든 나라들로부터 선교사들을 일으키고 계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연방주의는 사항에 따라 큰 것이 되기를 추구하기도 하고 작은 것이 되기를 추구하기도 한다. 어떤 사항에서는 중앙집권화를, 다른 사항에서는 분권화를 추구한다. 그것은 상호의존의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독립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쓴다. 차이점을 격려하나 한계를 정한다. 그것의 중심은 부분들을 섬기는 데 헌신하는 중심이지만 강력하게 유지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중앙으로부터 지시를 받지만 부분들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SIM은 일종의 마을 연방 제도를 채택하였다. 본부는 핵심가치들을 강화하고 비전에 초점을 맞추도록 돕는다. 국제 매뉴얼을 축소시키고 각 나라의 문화적 필요에 맞게 정책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다. 모금과 전략적 주도권을 분권화시킨다. 지역 리더들은 새로운 사역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창의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도전받는다. 주님은 중앙집권화와 분권화된 조직들, 모두를 강력하게 사용해오셨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통해 불명확성을 회피하는 것은 선교단체들이 전 세계의 자매기관들과 다중 문화적 파트너십을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 더욱 더 어려워질 것이다.

3) 목표

불확실성 회피 문화들로부터 온 선교사 리더들은 지정된 시간 틀 안에서 정확한 결과들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분명치 않은 목표들로 인한 불명확성을 싫어한다. 결과가 명확해야 할 뿐 아니라 시간의 계획도 지정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목표는 이후 3년 안에 10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라든가, “우리는 이후 18개월 동안 중국 안에서 목회용 책 15,000세트를 분배할 것이다이다. 2,000년 동안 많은 선교 기관들은 정확한 목표들을 수립했었다. 기독교 방송국들은 2000년까지 100만 명이 넘는 모든 언어 그룹들 안에 적어도 한 시간씩 방송을 내 보낸다는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단결하였다. 주목할 것은 방송 시간의 양, 언어, 그룹의 크기, 특정 날짜까지 정확하다는 것이다. 선교기관들은 모든 종족 그룹 안에 교회를 세운다는 ‘2000년 운동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 한국 해외 선교 협의회에서는 2030년까지 10만의 선교사를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세부적인 정의가 없이는 너무나 명료하지 못하다. 불확실성을 강하게 회피하는 문화에 속한 교회의 선교위원회는 자신들의 재정을 위해 포괄적인 목표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많은 단체들이 그들의 회원들 중 50%를 단기 선교 여행을 보내거나 5년 안에 10개의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동역한다고 한다. 불명확성에 대해 관용이 낮은 문화의 교회와 선교회들이 정확한 목표들을 세울 때 많은 좋은 일들이 있다. 목표를 설정할 때 지역교회와 선교단체들 안에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선교사는 100명의 세례 교인을 목표로 했는데 70명 밖에 세례를 주지 못해 낙심해서 선교 사역을 잘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교사의 자격이 없어서 그만 두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한 것이다. 때로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문화에서는 이처럼 구체적인 계획이 실망을 낳기도 한다.

 

5. 범세계적 이해를 만들어 가는 것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들이 불확실성에 대해 높은 관용을 가진 나라들에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나라들은 정확한 목표 설정이나 장기 전략 계획 혹은 정확한 숫자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특별히 부흥하는 고난 받는 교회들은 불확실성을 참아내고 온전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불명확한 상황 속에서 산다. 서구 선교는 일반적으로 관리적 선교학을 추구한다. 모든 일이 관리 가능한 사업이다. 그러나 제 3세계 선교학자들은 관리적 선교학을 조심스럽게 비판한다. 총체적 선교는 관리 할 수 없는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사역은 예측하거나 숫자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높은 혹은 낮은 불확실성 회피를 지향하는 선교 시도는 양쪽 모두가 중요한 강점들과 심각한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귀를 기울리는 것이 필요하다. 불변하는 복음을 새로운 선교학과 배합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예측불가능하고 계속 변화하고 있는 문화 상황과 조율될 수 있는 선교학이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높은 상황성 문화와 낮은 상황성 문화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2. 서로 다른 낮은 권력거리 문화와 높은 권력거리 문화에서 온 사람들이 팀 사역을 할 때 어려움은 무엇이 있는가?

3.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문화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4. 출신 지역이나 문화에 맞는 곳을 선교지로 정할 때 왜 유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