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020년 4월 21일(화)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장)
+ 말씀설명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섬김의 삶을 제자들이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처럼 섬김을 본받아 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로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는 그런 가르침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정신은 말과 행동이 일치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나, 지식, 사상으로의 믿음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믿음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참 된 자세이다.
+ 묵상과 적용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믿음이 있는 자로서 특별히 행동과 믿음의 일치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내가 행하는 부분에서 약한 부분은 무엇인가?
+ 오늘의 기도
1. 제가 말로만 믿는 신자가 아니라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신자가 되게 하소서.
2. 우리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처럼 행동으로 그 믿음을 보여주게 하소서.
3. 한국 교회가 약한 부분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행동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인데, 행동이 변화되는 참된 개혁이 일어나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소서.
4. 코로나로 인해 온 세계의 선교가 계속해서 위축되는 상황인데, 이 기회가 선교를 가로막는 기회가 아니라 전화위복이 되어 선교의 불길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 성경본문(요 13장)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ㄱ)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
+ 말보다 행동
참 된 교육은 말보다 행동이다. 말과 지식도 교육이 되지만 행동은 교육의 효과가 훨씬 더 크다. 말 한마디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큰 교육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혹은 성도들에게 교육을 하고자 한다. 학교, 학원, 그리고 교회에서는 언어, 수학 과학이나 성경 공부 등 많은 교육을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육, 효과적인 교육은 지식적인 것 보다는 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효과적인 교육은 학교나 학원의 지식 교육보다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행동이다. 교인들에게 효과적인 교육은 성경지식을 심어주는 것보다 목회자와 장로, 권사, 집사들의 모범적인 행동이다. 말 한마디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부모나 교회 지도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잘 안 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행하는 것, 본으로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본으로 보여주는 행동은 고생과 수고가 따른다.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 자연 인간은 고생을 싫어한다. 욕심이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처럼 자신의 고생과 희생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힘들기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다.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셔야 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가장 큰 고통을 수반한 죽음이었다. 이것을 기꺼이 감당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이런 예수님의 희생위에 기독교가 세워졌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희생과 고생을 감당하실 수 있었는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사명이었다. 사명의 내용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사명이 있었기에 그는 그런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셨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수 있었고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었다. 부모가 자녀의 더러운 몸을 기꺼이 씻기는 것, 자녀를 위해 고생하며 일하는 것, 희생하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본을 보이는 것이 힘든 일이었지만 감당하셨다. 부활의 소망은 그의 고난을 참을 수 있도록 하는 요인이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본을 보일 수 있는 것과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본을 보일 수 있는 힘은 역시 이 세 가지 이유에서 나온다. 사명 때문에 고생을 감수하며 본을 보여줄 수 있다. 사랑하기에 고생을 감수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소망이 있기에 힘든 과정을 참고 행동으로 본을 보여준다. 반대로 본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이 세 가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본을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이 세 가지가 자신 속에 없기 때문이다. 진실 된 신앙인이라면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결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사명, 사랑, 소망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주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이 세 가지가 우리 속에 있도록, 이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기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