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020년 5월 13일(수)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 18장)
+ 말씀설명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빌라도의 말이다.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자 빌라도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허락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재판 중에 예수님께 죄를 찾지 못했다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결국 군중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하였다.
빌라도의 잘못은 죄인이 아닌 줄 알면서 사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죄가 없으면, 재판장은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데, 사형선고를 한 것은 재판장으로서 가장 큰 잘못을 범한 것이다. 재판장이 무죄인 사람을 무죄인줄 모르고 사형선고를 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불의한 재판인데, 자기 입으로 세 번씩이나 죄가 없다고 말하고서도 사형을 시킨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재판을 한 것이었다.
빌라도가 그렇게 한 것은 군중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군중들의 눈치를 본 것이다.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있을까 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재판은 공의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자기이익에 초점을 맞춘 재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고백하는 짧은‘사도신경’에서 그의 악한 재판이 역사대대로 언급되게 되었다.
자기 유익은 바로 자기욕심이다. 자기욕심을 위해 불의한 재판을 한 것이다. 알면서도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빌라도인 것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인간은 죄인지 모르고 범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줄 알면서도 죄를 범하고 있다. 욕심 때문이다.
+ 묵상과 적용
알면서도 거듭 행하는 죄는 없는가?
내가 하는 행위의 기준이 공의에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내 욕심이 우선인가?
+ 오늘이 기도
1. 제 욕심이나 이익보다 공의와 정의에 따라 사는 제가 되게 하소서.
2.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기준으로 교회가 행하게 하소서.
3. 한국 사회가 자기의 이익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공의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게 하소서. 이 책임을 한국교회가 감당하게 하소서. 한국교회가 손해보더라도 세상의 공의를 위해 행하게 하소서.
4. 교육 붕괴로 비행 청소년들이 늘어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성서 유니온의 중등교육 기관 사역이 활성화되게 하시고, 기독 교사들의 참여가 늘어가게 하소서.
+ 성경본문(요 18, 19장)
38b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 부귀영화
이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추구한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갈망한다. 그래서 부귀영화가 기준이 되는 삶, 그것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정말 인간에게 행복하며, 그것이 인간에게 의미 있는 인생일까?
인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사람이 가치 있고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았는가는 알 수 있다. 역사에서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산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역사는 신앙과 의와 거룩과 희생의 삶을 사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부러워하여 그렇게 살고자 하지 않는다. 성경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부자처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거지로 살았지만 나사로처럼 신앙을 지키는 삶을 추구한다. 참 된 그리스도인은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지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부러워한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부유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 믿음의 조상됨을 부러워한다. 사람들은 궁궐에서 40년을 평안하게 살았던 모세가 아닌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생애를 바친 모세를 존경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자 선생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을 따른 베드로는 존경한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산 사도 바울을 존경한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부패한 정치인으로서 높은 자리에 앉거나 욕심으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자보다는 정직하고 공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존중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부귀영화를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성경과 역사상의 인물들을 보면서 의인들과 거룩한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상하다.
나 자신은 어떠한가?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부귀영화를 추구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으로 사명감과 거룩함과 의롭게 사는 것, 그리고 신앙의 가치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고 초점이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행동도 그렇게 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화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그 기준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부귀영화보다 바르고 값진 인생이기 때문이다. 머리의 이해와 인식만이 아니라 행동과 삶의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