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0년 8월 18일(화)

후앙리 2020. 8. 18. 18:03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전 6)

 

+ 말씀설명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간에 다툼이 있을 때, 세상 법정(믿지 아니하는 자)으로 끌고 가 고발하지 말라고 바울은 권면한다. 고발하는 것 자체가 뚜렷한 허물이라고 말하면서 차라리 교인들 간에 싸워 손해를 당하는 것(불의를 당하거나 속은 것)이 낫다고 한다. 불의를 당하고 손해 보게 하는 자는 형제이기에 그것을 감당하되, 세상 법정으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세상으로 끌고 간다면 그것이 진정한 불의이며,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 내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으로 가는 데 그것 자체가 불의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한국 교회가 들었으면 좋겠다. 교회 내의 문제로 인해 고소 고발이 난무한 이때 비록 교회에서 다툼이 일어나 손해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불의를 당하는 손해보다 더 큰 손해는 세상 법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감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손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으로 교회 문제를 가지고 가서 고소 고발하는 것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 묵상과 적용

- 성도간의 다툼이 일어났을 때 나는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 세상을 판단할 권세를 지닌 성도답게 내 삶에서 제거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 오늘의 기도

1. 한국 교회가 다툼을 그치게 하시되, 혹시라도 다툼이 일어나거든 이기려고 하지 말고 손해를 감수하는 믿음을 주소서. 세상 법정으로 교회 문제를 가지고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크나큰 죄임을 깨달아 그것을 그치게 하소서.

2. 오염된 물로 수많은 전염병의 위기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 영혼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이들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허락하셔서 마실 물이 넉넉히 공급되게 하소서.

3. 수단에 혼합주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영향이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교회에서 선명한 복음이 선포돼 예수의 제자들이 길러지게 하소서.

 

+ 성경본문(고전 6)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

 

+ 복음과 법

성경에서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극명하게 나타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복음은 죄를 용서해준다. 율법은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는 것이며, 복음은 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자유를 주는 것이다. 복음이 오면 율법은 사라진다. 율법은 몽학선생의 역할을 할 뿐이다. 아이가 일정한 나이가 될 때,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몽학선생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복음이 오면 율법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복음이 와도 여전히 유효한 기능이 있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죄를 알려주는 역할이다. 죄의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복음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순서가 있다. 율법이 복음을 앞설 수 없다. 율법이 복음을 포용할 수도 없다. 오히려 정 반대다. 복음은 율법을 앞서고 율법을 포용하며 율법을 완성시킨다.

오늘날 세상에서 사용하는 법과 복음과의 관계도 비슷하다. 세상의 법은 양심과 도덕을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법을 집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법이 세상을 평화롭고 완전하며 죄를 없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법은 벌을 줄 뿐이고, 법은 복음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법이 최종 기준이 아니라 복음이 최종 기준이다. 복음이 법 위에 있다. 법은 복음으로 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복음이 자유와 생명을 주는 목적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복음이 세상의 법 아래에 있다. 복음 안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법으로 가져간다. 법으로 심판을 받으면 복음은 더 이상 역할을 할 게 없어진다. 복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법이 대신한다. 복음이 기준이 아니라 법이 기준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기에 교회 안에서 분쟁이 생기면 복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고소고발이 교회 안에서도 난무하다. 그리고 법으로 이기려고한다. 법 앞에서는 복음이 힘이 없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참다운 복음이 교회 안에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당장의 해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왜 복음이 고통을 주는가? 복음은 십자가의 희생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희생을 하면 법의 지배가 아니라 복음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희생을 안하면 복음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복음의 능력과 복음 안에서 누리고 살려고 한다면 희생해야 하는데 인간의 본성에 손해 보기 싫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손해보지 않고 이익을 얻으려고 세상 법정에 문제를 가지고 가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이 작동할 여유가 없다. 복음은 그 사람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희생하자는 말은 하지만 당장의 손해가 따르면 그것은 말에 불과할 뿐이다. 손해보기 싫은 인간의 죄성, 본성이 나타난다. 물론 희생하고 손해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진실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성경말씀에 따라 법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재산이나 명예에 있어서 손해가 따른다할지라도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복음을 지켜야 한다. 복음을 지킬 때, 이렇게 손해를 감수할 때 그 사람은 복음의 풍요로움을 누리면 살 수 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