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1년 3월 15일(월)

후앙리 2021. 3. 14. 22:28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

 

+ 말씀설명

오늘의 말씀은 종교심, 즉 영적 관심이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바울이 하는 말씀이다. 아덴 사람들은 단에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놓고 섬겼다. 대상도 분명치 않은 신앙을 가진 것이다. 그 신이 행복을 줄지, 아니면 기도를 들어줄지에 대한 확신도 없이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인간은 신을 섬기기는 하지만 아덴 사람처럼 대상을 알지 못한 채 섬기고 있다.

반면에 바울이 설명한 하나님,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하다. 그분은 만물을 만드시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이 섬겨야 할 유일하면서도 참 신이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을 받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은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을 허락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족해서 어떤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의 섬김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에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섬김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날도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인 것이다.

 

+ 묵상과 적용

나는 나도 모르게 믿고 따르는 신은 없는가? 때로 돈이 행복을 준다고 돈을 섬기는 그런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사랑의 하나님을 어떻게 더욱 사랑하겠는가?

 

+ 오늘의 기도

1. 알지 못하는 신에 매여 사는 자들에게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전하게 하소서.

2. 불법과 불의가 판치는 세속 문화 속에서도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업하는 기업들이 많이 나타나게 하시고, 경제계에도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소서.

3. 루마니아. 기독교 라디오의 텔레비전의 복음 사역이 활발한 가운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성경적 프로그램이 많이 제작되게 하소서.

 

+ 성경본문(17)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

 

+ 교회에서 인간 회복이 일어나야 한다.

세상에는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잘 의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생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는 것과 같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국가는 사회 시스템을 통해 도움을 주어야 한다. 국가는 사회 복지 제도를 개선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인간의 기본권, 즉 먹고 사는 부분에서는 책임져 주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이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편견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국가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편견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불쌍하기에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정을 뛰어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동정을 뛰어넘는 생각이란 내가 더 가진 자로서 의무감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고 존귀한 존재이기에 함께 살기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인격은 나와 동일하며, 그들도 하나님과 동일한 형상을 지녔다는 생각을 갖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격이나 사람됨에 있어서 경제적인 차이 때문에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고귀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갖는 것이 그들의 경제적인 부분을 도와주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며, 가난하거나 부자나 모두가 똑같은 존엄한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교회가 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외형적인 것 때문에 차별받는 인간을 동등하게 인정하여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돈 몇 푼 집어주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가 많은 부분에서 세상의 사상과 똑같은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한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그냥 적선하듯이 도와주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을 대하듯 대해야 한다. 외형적인 부분으로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야고보서 기자는 부자가 교회에 오면 앞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저기 뒷자리 아무데나 앉든지 말든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비판하였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는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차별받지 않고 올 수 있도록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너무 화려한 교회 건물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찾아오기에는 너무나 문턱이 높다.

나는 코로나19 시국에서도 스타벅스커피숍에 사람들이 몰리는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사는 집 바로 옆에 스타벅스 커피숍에 있는데 코로나19가 심해서 테이크 아웃만 할 수 있을 때에도 줄을 서는 모습을 보았다. 드라이브 스루에도 차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오히려 평상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타벅스 커피숍을 찾는 것 같다.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커피 전문가들이 유명 브랜드 카페의 커피 맛에 대한 순위를 매겼다. 스타벅스는 5위였다. 그런데도 스타벅스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간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을 만나 대화를 하려고 스타벅스 커피숍에 들어갔다. 테이크 아웃이 아니면 자리가 없기에 커피를 팔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스타벅스가 잘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자기 집처럼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에 그렇다(내가 몇 해 전에 스타벅스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었는데 그곳에서 말한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스타벅스는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을 보여도 제재를 하지 않는다.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는다. 커피 한잔으로 편하게 하루종일 머물 수 있다. 심지어는 커피를 시키지 않고 그곳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어도 그것에 대해 눈치를 주거나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이처럼 모두를 평등하고 차별없이 대하기에 사람들이 커피 맛이 일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는 것이다.

나는 스타벅스 직원이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스타벅스 로고가 우상을 섬기는 로고라고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종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스타벅스의 정신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스타벅스는 자유로운 곳이고 누구에게나 편견과 차별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스타벅스 커피숍에는 모두가 동등하다. 진상(?) 고객도 대우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교회 문턱을 낮추고 누구나 편하고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 술취한 사람이 오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처럼 대우받는 곳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도 교회에서 목사들이 존중받는 것처럼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가 더 많은 차별을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교회가 적어도 스타벅스만큼은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용서함을 받는 곳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가정보다 더 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 외형 때문에 차별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 대접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다. 교회는 세상을 품고 세상의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기에 온갖 차별로 가득한 세상에 참 된 평등과 자유와 용서를 가르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서 가장 좋은 쉼터와 회복터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