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1년 9월 10일(금)

후앙리 2021. 9. 10. 12:08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1)

 

+ 말씀설명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이 구원에 멀어진 것에 대해 많은 부담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보면서 시기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다. 원래 유대인은 원감람 나무였고, 이방인은 그것에 접붙인 자들이었다. ,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을 구원하셨으며, 이방인은 유대인의 뒤를 이어 구원받은 자로서 원가지라기보다는 접붙인 가지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에게 구원받은 것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고 말한다. 원가지인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거역하면 구원에서 멀어졌는데 하물며 접붙임을 받은 가지는 더욱 더 그러하니 겸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구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준엄하심이 나타나 심판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기억하면서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생각하며 더욱 겸손한 삶을 살도록 이방인 신자들에게 촉구하시는 것이다.

 

+ 묵상과 적용

-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생각하고 내가 잘 나서 구원받은 것처럼 교만한 것은 없는가?

- 하나님의 준엄하심 앞에서 고쳐야 할 나의 잘못된 것이 있다면 어떻게 고치겠는가?

 

+ 오늘의 기도

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기억하여, 너무 교만하지도, 너무 주눅 들지도 않으며 살게 하소서.

2. 중국 중앙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써온 홍콩의 빈과일보(Apple Daily)2021624일자 신문 발행을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난 후 지난 1년 동안 홍콩의 언론자유가 통제됐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가 발행하는 언론 자유지수에서 홍콩은 지난 10년 동안 54위에서 80위로 급락하였다. 또한 홍콩 언론인협회가 5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90% 이상의 응답자들이 홍콩의 언론자유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홍콩에서 중국정부의 압력과 보안법시행으로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언론과 종교의 자유가 다시금 회복하며, 신앙과 선교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성경본문(11)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계속되는 큰아들 이야기(헨리 나우엔. 돌아온 탕자)

잔뜩 화가 난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친루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큰아들이 느끼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큰 아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화가 치민 나머지 돌아온 탕자를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 아들이란 표현만 가지고도 맏이가 아버지는 물론이고 동생과도 거리를 두고 있음을 충분히 집작할 수 있습니다.

큰아들 눈에는 현실감을 잃어버린 채 처음부터 끝까지 터무니 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아버지와 동생이 별종으로 보였습니다. 머리에는 동생의 방탕한 생활에 관한 생각들뿐이었습니다. 큰아들 눈에 더 이상 아우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없었습니다. 둘 다 남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동생을 죄인이라고 깔봅니다. 아버지는 종의 주인으로 우러러보고 두려워합니다.

큰 아들이 바른 길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자기 집에서 이방인의 신세가 된 겁니다. 진정한 교제는 사라졌습니다. 어둠이 모든 관계에 스며들었습니다. 두려워하든 얕잡아보든, 복종하든 지배하든, 압제자 노릇이든 당하는 사람의 역할이든 그것은 모두 빛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이들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죄를 고백할 수도, 용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교제는 기대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곤경에 빠진다는 건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디서도 자연스러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자의식이 강해집니다. 계산적이 됩니다. 걸핏하면 넘겨짚습니다. 신뢰가 깃들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미미한 움직임에도 곧장 대응합니다. 별것 아닌 말도 낱낱이 분석합니다. 사소한 몸짓에도 평가가 따릅니다. 그 모든 것이 어둠의 병리 현상입니다.

탈출구가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습니다. 어둠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칠 수 있도록 사방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흑암을 몰아낼 빛이 필요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낼 능력은 없습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자가 생산하지 못합니다. 제 힘으로는 분노의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교제를 나누지도 못합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고, 기다리고, 기도도 해보지만 진정한 자유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남은 방도는 누군가에게서 받는 것 뿐입니다. 나는 이미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가 나를 찾아내고 달려와서 집으로 데려가주실 기대할 따름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권면하고 강청하십니다. 죽음의 권게에 의지하지 말고 그토록 소원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룩한 팔에 몸을 맡기라고 사정하십니다.

귀향이라는 영적인 사건을 돌아볼 때마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필오한 것을 다 채워줄 능력이 없는 인간 아버지에게 기대는 잘 못된 태도를 버리고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시는 하늘 아버지께 의지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평하고, 비교하며, 원망하는데서 벗어나 거리낌 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자아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여태까지 무수한 방해가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살다 죽을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