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021년 9월 7일(화)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장)
+ 말씀설명
유대인들은 구원에는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신들은 유대인이기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이방인은 이방인이기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차별하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고 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단,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믿는자 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자신의 행함이나, 믿는 가정이라는 혈통이나, 세상에서 중요한 부와 권력, 지식에 따라 구원받는 그런 차별은 없는 것이다. 오직 믿음의 기준에 의해서 믿는 자는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은 것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하나님이시다.
+ 묵상과 적용
- 아직도 내 속에는 세상에서의 구별 혹은 차별에 따라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없는가? (참고로, 뭔가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속에는 구원에도 차별이 있다는 그런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를 살겠는가?
+ 오늘의 기도
1. 믿음으로 구원을 주심에 감사하고, 세상에서 내세울 것 없어도 구원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차별 받을 만하더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살게 하소서.
2. 기독교 자선단체 Aid to the Church in Need의 세계 종교자유에 관한 2021년 보고서에 의하면, 유럽과 북미의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중동이나 인도, 공산국가 등에서의 개종금지법 테러, 범죄 등과 같은 박해는 없지만, 미디어, 기독교 교육기관 내에서의 종교활동에 대한 법적 제한, 종교 기관의 세속화 요구, 안락사와 낙태 등의 비성경적인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기독 의료인들에 대한 제재 등의 인권과 평등으로 포장한 법적 제재에서 오는 박해의 정도가 커지고 있다. 과거 기독교 국가였던 나라들에서 거세지고 있는 법적 제재, 보이지 않는 세계관의 공격 등이 멈춰지고, 교회와 신실한 성도들이 믿음을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성경본문(롬 10장)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다시 찾은 아들의 자리(헨리 나우엔. 탕자의 귀환)
잃어버린 게 무엇이든, 돈이든, 친구든, 명예든, 자존감이든, 내면의 기쁨과 평안이든(어느 하나든, 그 전부든) 상관없이 아버지의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자는 중얼거렸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 속으로 그 말을 곱씹으며 탕자는 발길을 되돌려 먼 지방을 떠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사건의 의미는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라는 표현에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감히 자식이란 말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잃어버릴 자격이 있었다는 건 미우나 고우나 아들임에는 틀림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탕자의 귀환은 비록 자격을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자리를 되찾는 바로 그 시점에 시작됩니다. 사실 작은 아들을 천하고 천한 신분으로 끌어내린 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실이었습니다. 아들로서는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 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리 안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의식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길을 선택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자식이라는 지위를 다시 실감하게 되면서 탕자는 ‘사랑하는 아이야’라고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나마 그 은혜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여전히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느끼고 확신한 뒤부터는 잘한 것 하나 없어도 아들이라고 떳떳이 말할 힘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지위를 당당하게 내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변 세계에서 들려오는 더움의 소리들은 자기 말을 들으라고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합니다. 나는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임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한 칸씩 쉬지 않고 올라 의로워지지 않은 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들아’라고 부르시는 음성은 성공이나 갈채와 상관없이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지만, 어둠의 소리들은 그 메시지를 순식간에 망각하게 만듭니다. 나를 향해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에 빛을 주시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지워버립니다. 나를 존재의 주변으로 밀어내고 사랑의 하나님이 그 중심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점을 의심하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먼 지방에서 떠나는 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면서 무얼 해야 할까요? 탕자의 행동은 대단히 명쾌해 보입니다. 작은 아들은 시나리오를 준비했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내고 발길을 돌리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의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
본문을 읽어나갈수록 나의 내면생활에도 이런 식의 대화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사실 나는 머릿속에서 줄곧 가상의 만남을 이어갑니다. 자신을 설명하고, 자랑하거나 사과하고, 비난하거나 변명하고, 칭찬을 자아내거나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예상되는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준비해가며 보이지 않는 상대들과 쉴새 없이 긴 대화를 나누는 꼴입니다.
이런 내면의 되새김질과 웅얼거림에 투자하는 정서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엄청난지 깜짝 노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먼 지방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나는 중입니다. 맞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이야기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진정한 정체성을 찾기는 했지만 아직도 주님이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거룩한 사랑을 조건적인 애정으로 생각하고 집을 미심쩍은 장소쯤으로 여깁니다. 고향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집에 도착했을 때 정말 환영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합니다. 나의 영적인 여정, 다시 말해서 집으로 가는 멀고도 고단한 나그네 길을 살펴보면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미래에 관한 걱정이 가득합니다.
무수한 실수를 저질렀으며 아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롬 5:20) 되었다는 사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아들보다 훨씬 아래쪽에다 자기 자리를 잡습니다.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용서를 쉽사리 믿지 못합니다. 용서란 한마디로 복수를 포기하고 얼마쯤 자비를 베풀려는 상대편의 의지를 가리킨다는 인생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