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2년 3월 7일(월)

후앙리 2022. 3. 5. 22:42

27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2)

+ 말씀설명

요단 동편에 거주하는 두 지파 반은 제단을 쌓은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런 제단의 증거가 없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손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도 있고, 가나안에 있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끊어질 수 있으며, 두 지파 반이 받은 기업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손의 신앙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묵상과 적용

한국 교회는 다음 세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 자라는 자녀들인 다음 세대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단지 구호용으로 끝날 때가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투자를 많이 하지 않는다. 다음 세대가 중요하다면 아이들을 교육하는 교육관을 본당보다 더 잘 꾸밀 수 있어야 한다. 교육비를 위해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 어른 한 사람이 교회 오는 것보다 한 어린이가 교회 오는 것을 더 환영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다음 세대를 위해 제단을 쌓아 후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한 것처럼,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많이 투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실천 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이 지금 우리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신앙, 도덕, 환경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가르쳤으면 좋겠다.

+ 오늘의 기도

1. 다음 세대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는 한국 교회와 가정들이 되게 하소서.

2.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인의 수적 성장이 지속되고, 또한 말씀에 기초하여 건강하게 성숙해 갈 수 있도록

+ 성경본문(22)

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23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24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25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6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27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사랑 이야기(하용조. 하나님의 프러포즈)

사랑이란 말처럼 흔한 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문학도 음악도 연극도 역사도 사랑이라는 주제를 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빼면 결혼도 자녀도 모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이 거짓으로 난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남용해 왔습니까?

그래서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고하는 말들을 하는가 봅니다. 사랑이 이처럼 흔하게 쓰이면서 진정한 사랑은 찾아보기 어렵고, 가장 느끼기 어려운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왕년에 사랑 한번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사랑을 해 보았느냐, 진짜 사랑을 받아 보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멈칫합니다. 진짜 사랑을 경험하는 게 흔치 않은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 만든 의식입니다. 이혼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들의 상처 자국입니다. 가출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에 상처받은 아이들의 잘못된 호소입니다. 폭력과 음란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의 변태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받고 싶고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이라고 붙잡고 보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배신감, 소외감, 섭섭함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수가 유행가 가사를 조사해 봤더니 주된 내용이 세 가지로 압축되었는데, 첫째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깨어진 사랑, 불륜의 사랑, 사랑해서는 안될 사랑 등을 주제로 가사를 쓰면 히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이라는 노래가 널리 불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고향, 떠나온 고향을 노래하면 눈물이 핑 돌고 가슴에 와닿는다고 합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사는 신세~”라는 가사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 온다는 겁니다.

세전재는 인생의 허무와 고독을 주제로 삼으면 사람들이 쉽게 공감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가 좋은 예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게 사랑을 원했는데 사랑이 없고, 고행을 그리워했는데 고향이 없고, 인생의 의미를 찾았는데 허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라고 불륜을 합리화하고, 사랑 때문에 그랬다고 불륜을 정당화 합니다.

또한 영혼에 대한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에 집착합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이 돈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30, 40대와 돈은 깊은 관련을 가진 주제입니다.

쉽게 대답할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을 묵상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집착입니다. 영혼에 대한 불안함이 현실의 집착으로 나타나고, 거기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자살하거나 막 살기도 합니다. “왜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하면 살 의미가 없으므로 사람은 쉽게 타락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이 촛불이라고 한다면 태양 같은 사랑이 있습니다. 태양이 없을 때는 촛불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태양이 뜨면 촛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깊은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데, 밝아오는 새 밤은 지나가야 합니다. 머리 아프고 고독하고 외롭고 무섭고 불안한 밤, 캄캄한 밤이 지나가고 닭 울음소리와 함께 동이 터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동이 트기를 바랍니다. 새벽이 오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하듯 진짜 사랑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모든 문학작품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노트르담의 곱추> <접시꽃 당신> 등은 모두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일망정 진실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인간의 정신병 치료제는 바로 사랑입니다. 우울증 치료제도 사랑입니다. 불안 치료제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사랑 중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자신만 압니다. 자신은 가짜이지만 타인에게는 자꾸 온전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영원해야 합니다. 사랑하다가 도중에 20, 30년하고 끝나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두 번째,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상대적이라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왜 우리는 목마름을 느낍니까? 어느 한순간 진짜였던 것이 시간이 갈수록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외롭고 겁이 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말 사랑해 줬다면 안심하고 내 인생을 맡길텐데 예전의 상처 때문에 또 배신당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세 번째,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말하는 사랑에는 예쁘다든지 돈이 있다든지 지식이 있다든지 매력이 있다든지 조건이 붙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도 조건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받는 것입니다. 부모가 사랑하지 않아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입장에서 부모의 사랑에 조건이 붙기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공부 잘하면, 말 잘 들으면 더 사랑받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아이들은 불안에 떱니다.

사람의 사랑에는 이런 조건이 붙습니다. 얼굴이 예뻐서 결혼했는데 살다가 불이 나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자가 돈이 있고 집안이 좋아서 결혼했는데 집안이 망했다면 그 사랑은 계속 될 수 있습니까? 권력을 갖고 싶어 결혼했는데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겠습니까? 결혼해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이혼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그게 사랑입니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든, 화상으로 얼굴이 미워졌든, 처갓집이 망했든, 원했던 목표를 잃어버렸든 간에 사랑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이처럼 큰 상처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없이 주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조건을 하나둘 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한테 이만큼 하니까 나도 너한테 이만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소유합으로써 자기를 확인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소유하려 하고, 부모는 아이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기에 내 말을 안 들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모두 불완전하기에 깊은 갈등과 상처와 배신감을 주게 됩니다. 진짜 사랑은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날씨처럼 변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모륻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감정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헌신 없는 사랑도 사랑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손해 본적이 없다면 당신은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