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5년 3월 19일(수)

후앙리 2025. 3. 19. 05:24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

 

+ 말씀 설명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중에 주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예수님은 희생과 고난과 섬김을 말씀하는데 제자들은 부귀와 권세, 영광만을 바라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을 시기하였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집권자들의 생각과 가치관은 권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치관은 으뜸이 되고자 하면 섬겨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세상의 집권자들처럼 높은 자리에서 권세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고 결국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된 제자는 섬김을 받는 사람, 권세를 누리는 사람, 영광을 취하는 사람, 높은 자리에서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종처럼 일하고 손해 보고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묵상과 적용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아니면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 예수님처럼 더 희생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자 하는가?

 

+ 선교적 실천

우리 교회가 예수님처럼 세상을 위해 손해 보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 오늘의 기도

1.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낮은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소서.

2. 세금 부과가 교회들을 과도하게 압박하는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고, 캐나다 교회들도 이 기회를 통해 더욱 정직하고 투명하게 지역사회를 섬겨 나가도록

 

+ 성경 본문(10)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권세와 영광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의 말씀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35년 전 강도사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도원에 갔을 때였다. 중요한 시험이라서 3일 정도 기도원에서 머물러 공부하였다. 그때 그 기도원을 운영하는 교회의 수석 부목사님이 방문하였다. 옆에 있던 한 분이 저분이 수석 부목사님이라고 하면서 대단히 부러운 마음으로 칭송을 하는 말을 하였다. 그때 내가 느끼기에는 대기업의 부회장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부목사로 대단히 존중하는 모습을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는 수석 부목사를 대단한 사람으로 인식하여 부러워하는 그 사람의 모습을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사실 나는 그때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큰 교회의 수석 부목사가 무엇이길래 저렇게 부러워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높은 자리에 오를 때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그런 모습이 내 생각 속에 겹쳐졌다. 세상의 주권자들이 갖는 똑같은 생각을 하는 기도원에 올라온 사람의 신앙관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경험이었다.

이런 일은 내가 살면서 목사님들에게도 많이 보아왔다. 선교사나 목사들이 만나 대화할 때 교회에서 목사에게 주는 사례금(월급)이 얼마이며, 대우가 어떠하며, 선교사들이 얼마만 한 후원을 받는지에 대해 얘기를 한다. 단순히 목사나 선교사의 생활을 걱정하며 하는 차원의 말이 아닌 수입이 많은 사람에 대한 부러운 마음을 담아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씁쓸했던 때가 많았다. 왜 그렇게도 목사나 선교사의 수입이 중요한지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많으면 많은 대로 나눠 쓰면 되고, 적으면 적은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면 되지 왜 그렇게도 그런 수입에 민감한지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기독교 사역자들이 돈이 적으면 불편하고 때로 비참함을 인간적으로 느낄 때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 가정의 화목, 사역의 열매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런 물질이 그 사람의 사명과 사역과 비교될 수도, 판단될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도하러 가기 위해 두 벌 옷이나 신발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 방문하는 집에서 평안을 빌며 떠날 때까지 머물라고 하셨다.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책임을 져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사역자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면 된다. 공중의 나는 새나 땅에 기는 짐승을 하나님이 먹이신다. 하물며 사람일까보냐? 라고 하셨다. 하물며 하나님은 사역자를 굶어죽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수입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사역자들이 수입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가 수입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담임 목사나 대표가 되면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부러워한다. 총회장이 되고 교단의 임원이 되면 목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나는 선교단체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했는데, 선교단체 본부에서 사역할 때는 선교사들이 내게 잘 대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은 것처럼 나를 대하고, 선물도 사 오고 하는 속된 말로 아부하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내가 본부에서 사역을 그만 두었을 때는 나를 만나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보았다. 내가 느낀 것과 같은 동일한 말을 한 선교단체의 대표가 하였다. 대표일 때는 선교사들이 다 와서 아부(?)했는데, 대표를 그만 두고 나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선교사로 불러주는 것이 좋다. 선교가 나의 사명의 자리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혹시 누군가 내게 형제라고 불러주면 더욱 반갑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부를 때 목사님이나 교수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보다 편하고 기분이 좋다. 왜냐하면 세상의 직분은 이런 서열이 있고 권력이 있지만 형제는 기독인의 동등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성도, 동등한 신자여서 그렇게 부르면 좋은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부자와 가난한 자, 직분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세상의 직업이 좋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별이 있다.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현실은 교회에 갔을 때 그런 것을 교회 안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기에 우리는 그런 자리를 더 많이 찾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직함을 부르는 대신에 동등하게 선교사혹은 형제, 자매라 부르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기독교 조직의 권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임을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