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2025년 6월 24일(화)
오늘의 말씀 2025년 6월 24일(화)
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창 21장)
+ 말씀 설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사라의 아들 이삭을 조롱하므로 쫓겨나게 된다. 쫓겨나 광야에서 갈 길을 잃고 하갈은 아들과 서로 마주 보며 울고 있었다. 얼마나 비참하고 두려웠겠는가? 남편이 없이 광야에 내몰린 아들을 가진 어미의 심정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아이의 소리를 들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아이를 일으켜 세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축복하시기를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샘물을 주셔서 마시고 살게 하신다.
비록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이 이삭과는 다른 육신의 자식인 이스마엘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도 보살피고 그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외롭고 힘든 인생을 돌보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살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 묵상과 적용
내가 가장 비참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경험이 있는가?
+ 선교적 실천
하나님처럼 내가 찾아가 위로할 하갈처럼 외롭고 힘든 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 오늘의 기도
1. 오늘도 힘든 제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우소서.
2. 일본 정부가 고독사 증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지역사회 내에서 일본 교회들도 노인들과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는 일에 힘을 보탤 수 있도록
+ 성경 본문(창 21장)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 결단의 포인트 (자전적 자기 관리 계속)
나의 결단의 포인트의 첫 번째는 ‘대학’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시골이었고 나의 집은 80가구가 함께 사는 동네에서 가장 가난하였다. 동네의 10명의 초등학교 동창생 중에 3명은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나의 셋째 형님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다. 왜 이런 마음을 품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아마도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 상황에서는 목사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꿈조차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광주시에 진학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께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도시로 고등학교를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대학가는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시절에 시골 고등학교에 간다는 의미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자포자기 상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였고 학교를 졸업할 때 당연히 대학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결단을 하였다. 시골에서 학교에 다닌 친구들 대부분은 서울로 올라와서 직장을 구했다. 나는 재수를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재수를 시도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울 남영동 세종학원 종합반에 등록하여 다니기 시작하였다. 2개월 만에 학원을 그만 두었다. 매달 보는 시험에서 2등을 하여 학원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교만한 생각이 들었다. 학원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내 수준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럴바에야 나 혼자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내게는 큰 착오였다. 학원에 계속 다녔어야만 했다.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를 잘할 만큼 나의 의지는 강하지 못했다. 독서실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자 환경 탓을 하고 시골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혼자 공부하면 잘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것 또한 큰 착각이었다. 시골에 내려가서는 아버지께서 농사일을 도와달라고 하셔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재수 생활 일 년을 보내고 시험을 치렀는데, 성적이 별로 오르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갈 만한 점수가 아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보다는 나은 점수를 맞았기에 삼수를 하더라도 대학에 원서라도 한번 내고 싶었다. 당연히 내가 꿈꾸던 신학 대학에 지원을 하였다. 나는 시골에서 살았기에 대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주변에서 우연히 총신대학이 신학대학 중에서는 가장 좋은 대학이라는 말을 들었다. 총신대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면접을 하는 날 대학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 예배를 드리면서 다짐하기를 한해 더 공부를 하여 이 대학에 꼭 오리라고 다짐하였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 넓은 강당에서 많은 사람이 하는 찬양이 얼마나 웅장하고 좋았다. 그때의 감동과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천국에서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예배하는 그런 위엄이 가득한 찬양과 예배였다. 시골 조그만 교회에서 찬양을 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웅장한 찬양은 내 마음에 굳은 결단을 하게 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이 학교에 다음 해에 꼭 오리라. 당연히 떨어질 것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학교에 갔다. 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이 붙었다. 그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3.2: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것이었다. 그때 서울 소재의 대학에 진학하는 고등학교 졸업생 중의 비율은 12%로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 10명 중에 약 한 명만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나는 전국 대학생의 12% 안에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은 합격이었다. 나의 예비고사 점수는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높은 경쟁률과 높은 합격점에도 불구하고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높아진 내신 비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시골 학교에는 내신이 좋은 편이었기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한다. 어떻든 나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그런 결단을 초등학교 때부터 했던 것이 결국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