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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새로운 선교 전략을 위한 사역의 기초

후앙리 2020. 4. 21. 19:22

 

선교사가 훈련을 잘 받고 선교지에 간다고 하더라도 선교지의 실제 상황은 많이 다르다. 받았던 훈련이 주로 인성과 영성 등 내적인 부분이 대부분일 경우에는 더욱더 선교지에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는가를 찾기 어렵다. 때로 선교사의 내면적인 자질과 사역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선교사의 사역의 기본과 방향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건강하고 바람직한 선교를 하기 위해서 한국인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주의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을 살펴본다.

 

문화 이해

한국인은 단일 민족, 단일 문화와 단일 언어를 가진 민족이다. 지금은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100만 명을 넘어 타 문화를 접할 기회가 과거보다는 높아졌지만 아직도 타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들은 한국인의 문화를 가지고 현지인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는 현지인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현지인의 문화와 입장에서 복음을 전할 때 현지인들은 복음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문화를 배워야 한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할 때 만저 죄에 대해 설명을 한다. 이 때 죄에 대한 개념이 선교사와 현지인이 다를 수 있다. 어떤 선교지에는 다른 사람의 것을 말없이 사용하고 가져가는 문화가 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죄가 아니다. 때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것을 가져가도 문제가 안 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당신들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갔으니 죄를 지은 것이고,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으니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문화를 배워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들이 현지 문화에 민감하지 않을 경우에는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많은 실수를 할 뿐 아니라 결국은 선교사로서 일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게 된다. 남미에서는 사람을 앞에 놓고 직접 항의하거나 싸우는 것을 자제한다. 할 이야기가 있어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직접 지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통해 지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은 길거리나 어디서든지 쉽게 싸운다. 심지어는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큰소리로 싸운다. 누군가 잘못하면 쉽게 항의한다. 그러나 남미에서 이런 행동을 보였을 때 그들은 야만인으로 취급한다. 다시는 상대하지 않는다. 한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이다. 그래서 남미인 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직접적으로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남미인 들이 직접적으로 싸울 때는 서로 마지막까지 가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까지 간다는 말은 다시는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인 선교사들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현지인들과 자주 싸운다. 현지인 동역자가 잘못했을 때도 그 자리에서 훈계하고 야단을 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현지인들의 마음을 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 될 때 남미인 들은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선교사를 배반하던지 손해를 입힌다. 그 때 한국인 선교사는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배반할 수 있느냐고 원통(?)해 한다. 그러나 이는 배반이 아니라 선교사가 잘못 행동한 결과이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그들 속에 사소한 일로 큰 분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화를 모르면 이런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 실수는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태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태국에서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 한 한국인 선교사가 태국 사람에게 전도하였다. 그 태국인이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선교사는 그동안 섬겼던 우상들을 불사를 것을 요구하였다. 태국인은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그 일을 하기가 두려웠기에 선교사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그 선교사는 태국인과 함께 우상들을 불살랐다. 마침 한국에서 단기 선교팀이 방문했을 때였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그 광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감격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진이 어느 날 다른 현지인의 손에 들어갔고 그것은 바로 신문기자에게 전해졌다. 신문에 그 사진이 나오게 됨으로 그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다시는 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상을 태우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선교사는 그 광경을 은밀히 했어야 하고 사진을 찍지 말았어야 했다. 그 부분이 현지인들에게 얼마나 예민한 부분이었는지 알았다면 그처럼 사진을 관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기념이 될 만한 사진이었지만 태국인에게는 그들의 생명을 불사르는 것과 같다. 선교사가 문화를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가 선교지 문화를 오해하는 것 뿐 만 아니라 선교지 사람들도 선교사의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오해를 할 수 있다. 폴 히버트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문화의 다른 점에 대해 설명한다.

콩고의 몇몇 선교사들은 사람들과 교감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침내 한 노인이 왜 콩고인들이 선교사들과 사귀는 것을 주저하는지 설명했다. ‘당신들의 왔을 때 당신들은 이상한 행동 방식도 함께 가져 왔소라고 그는 말했다. ‘ 당신들은 깡통을 든 음식물을 가져 왔소, 어떤 깡통 겉에는 옥수수 그림이 그려져 있었소. 그리고 당신들이 그 깡통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옥수수가 들어 있었고 당신들은 그것을 먹었소. 또 다른 깡통의 겉면에는 고기 그림이 그려 있었고, 안에는 고기가 들어 있었소.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먹었소. 그리고 나서 당신들이 아기를 낳자 당신들은 조그만 깡통을 가져왔소. 겉에는 아기 그림이 그려 있었는데, 당신들은 그 깡통을 열더니 내용물을 아이에게 먹였소우리가 보기에 그들이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좀 어리석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논리적이었다(윈터 랄프. 스티븐 호돈 공동편저. 2000 "미션 퍼스펙티브" (Mission Perspectives), 정옥배 역. 서울:도서출판 예수전도단. p.321)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의 시간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남미 에콰도르 사람들은 약속 시간보다 좀 늦게 나가야 한다. 정확한 약속 시간에 나가는 것은 그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면 어떤 집에서 사람들을 초청하여 삐에스타(Piesta: 서구의 파티처럼 함께 모여 춤을 추고 노는 행사)를 할 경우 그 시간이 오후 8시라면, 에콰도르 사람들은 오후 8시에 도착하지 않는다. 만약 선교사나 외부인이 이를 모르고 정확히 오후 8시에 간다면 그것은 아주 큰 실례가 된다. 오후 8시란 말은 오후 8시부터 삐에스타를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 시간은 주인이 옷을 입고 준비한다. 오후 8시에 가면 주인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시간에 가는 것이다.

 

선교사는 현지 문화를 알기 위해 현지인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현지인들의 행동 중에 선교사가 느끼기에 좀 어색하거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을 해야 한다. 한국인의 정서나 문화에 맞지 않는 특별한 행동 양식이 바로 현지인의 문화이고 그 속에는 현지인의 세계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되려고 할 때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선교사로서 선교지 문화를 이해하고 문화를 관찰하는 방법과 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훈련 받을 때 배운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훈련 때 배운 것은 그저 이론적인 것일 뿐 선교 현장에서는 자기 문화를 고집하며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현지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사 자기 문화를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 한국 교회 문화를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통성 기도를 했으니 선교지 사람들도 하도록 가르친다. 한국에서 새벽기도를 하니 선교지 사람들도 반드시 해야 한다. 한국에서 예배 시간에 찬양대가 있으니 선교지에서 찬양대를 만든다. 설교할 때는 반드시 넥타이를 착용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선교사들이 거의 없지만 과거에는 주일 예배를 오전 11시로 고집하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문화에서 주일 11시는 도저히 모일 수 없는 시간이다. 이런 부분은 한국의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복음이 아닌데 복음처럼 가르치고 강요한다. 이런 부분들은 단순히 한국 교회의 좋은 문화일 뿐이다. 그런 문화가 잘못되었다거나 무시할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의 장점들인 아름다운 교회 문화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한국인에게 아무리 좋은 문화라고 하더라도 선교지에서는 그들의 문화와 대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국 교회의 장점들을 강요할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인의 문화를 인정할 줄 아는 태도부터 배워야 한다. 한국 문화는 고급스런 문화이고 현지인들의 문화는 저급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 현지인이 손으로 밥을 먹으면 야만인이고 비위생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밥은 오른손으로 먹고 다른 일들은 왼손으로 한다. 밥을 먹을 때는 손을 깨끗이 씻는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 선교사들이 수저나 포크로 밥을 먹는 것을 보고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자기 손으로 밥을 먹지만 수저나 포크는 다른 사람의 입에 들어간 것이기에 오히려 더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현지 문화를 인정할 뿐 아니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국 문화를 전파하고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현지인들이 자국인들의 문화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 현지 문화를 존중하려는 태도, 배우려는 태도, 문화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 한국 문화를 이식시키지 않으려는 태도, 문화의 이론을 적용하는 태도가 한국 선교사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섬김의 선교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지는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들이다. 한국의 교육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불과 40-50년 만에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대 선진국으로 발전함으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 한국인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열악한 환경과 가난은 선교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선교사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된다. 현지인보다 나은 학력, 성장한 한국 교회, 경제력으로 뭔가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헌신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게 된다.

 

이런 자부심이 때로 현지인들 앞에서 권위주의로 나타날 때가 있다. 선교사와 현지인은 서로 다른 사회적 계급을 가진 사람처럼 착각하게 된다. 힘든 일은 현지인 동역자에게 맡긴다. 가정일은 현지인 파출부에게 맡기면 된다. 심지어 자녀를 키우는 것 까지 파출부에게 맡긴다. 이전과 달리 한국 선교사는 대부분이 자동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현지인의 입장에서는 선교사는 주인(Master)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된다. 자연히 선교사는 현지인을 몸과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오히려 현지인에게 명령하게 된다. 선교사와 현지인과의 관계는 고용자와 피고용자 관계가 된다. 선교사는 명령하는 사람이 되었고 현지인은 이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다.

 

선교사가 현지인의 명령을 받고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님처럼 성육신하는 선교라고 말할 수 있다. 현지인을 섬기러 간 선교사가 현지인의 섬김을 받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 현지인의 밑으로 들어가 현지인의 명령을 받고 사역하는 한국인 선교사가 얼마나 될까? 주님은 말씀하신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선교사는 이 주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보아야 하고 선교사의 삶에서 적용해야 한다. 주님처럼 현지인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권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교사는 명령하고 현지인은 일을 하는 것이 반대로 되어져야 한다. 그것이 선교의 원리이다.

 

어떤 이는 선교사들이 당연히 권위적인 선교를 해야만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현지인은 교육이나 신앙, 경제적인 면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선교사가 우위에 있기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 주셨다. 이것이 주님의 섬김이다. 선교사가 콜라를 사오고 현지인이 설교를 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는가! 주님의 섬김의 마음을 깊이 되새기지 않고는 선교지 교회가 바른 주님의 도를 따를 수가 없다. 선교사의 권위주적인 태도로 인해 기독교는 잘못된 인식으로 심어질 수 있다. 기독교는 말만의 종교가 아니라 행동의 종교이다. 선교사가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교가 선교지에 전파될 수 없다. 권위적인 선교는 단지 선교사가 잘못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왜 한국 선교사들은 복음을 말과 지식과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만 이해하는지 모른다. 복음은 선교사들이 현지인 밑에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선교가 되지 않으면 선교는 없는 것과 같다. 그만큼 현지인과 함께 하고 몸으로 보여주는 선교, 섬기는 선교가 필요하고 중요하며, 그렇게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은사에 따른 선교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나 능력이다. 혹은 후천적으로 얻은 전공분야를 포함한다. 성경은 은사를 강조한다. 성경은 은사에 따라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셨다. 각자 다른 은사를 주신 이유는 함께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한 사람에게 지나친 집중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은사를 가졌거나 너무 큰 은사를 가졌을 경우에는 스스로 하나님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은사에 따라 사역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은사에 따라 사역하는 분위기보다는 권위나 서열의식에 따라 사역하는 것을 좋아한다. 은사가 없어도 연장자이기에 하는 경우도 있다. 은사가 없어도 현실의 필요가 있기에 하는 경우도 있다. 은사보다는 주변의 환경에 따라 사역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현지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있기에 자신의 은사가 아니어도 그 일을 하게 된다. 은사에 따라 사역하는 것은 때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은사에 따라 사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은사에 따라 사역하기 위해서는 협력과 팀이라는 기본 틀 속에서 해야 하는데 그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은사에 따라 사역하지 못한다. 협력 사역을 할 경우 때로는 지도자가 아니라 추종자의 위치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 선교사와 후원 교회는 추종자가 되기 싫어한다.

 

한국인들에게는 혼자 하는 것이 함께 일하는 것보다 익숙하다. 그러나 은사에 따라 협력사역을 해야 한다. 은사의 원리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기본 원리이다. 그래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다. 지금 가진 은사가 있다면 그것에 집중해서 일을 할 경우에는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된다. 어떤 분야이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기여하는 것이 된다.

 

한국 선교사에게는 전문성이 부족하다. 선교사들은 서로 비슷한 사역을 하고 서로 사역을 바꾸어 놓아도 별 이상 없이 돌아간다. 그 결과 현지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전문성이 많지 않다. 계속 발전되고 성장되어야 할 그 분야의 탁월함이 부족하다. 이것은 선교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 선교사는 빨리 자신의 은사에 따라 사역을 하도록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사역지나 사역 형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사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문성을 현지인에게 전수해야 한다. 그럴 때 참다운 선교지 독립이 이루어진다. 그럴 때 선교지의 선교가 활성화 된다. 그럴 때 선교지에서 복음이 확장되어 나간다.

 

선교사 각자의 전문성이 탁월할 때 협력 선교를 할 수 있다. 협력 사역을 못하는 것은 서로 은사나 실력이 비슷하기에 못한다. 비슷한 사람끼리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 대신에 각자가 자신의 은사가 탁월할 때는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협력이 이루어진다. 다른 부족한 분야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 된다.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을 혼자 다해야 하기에 자신의 은사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없다. 자연히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는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좀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은사와 전공에 따라 사역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싸우는 일도 줄어든다. 그래야 화목하고 협력 사역을 할 수 있다. 협력과 팀 사역의 기초는 각자가 은사에 따라 사역할 때 이루어진다. 팀 사역이 중요하다고 팀 구조를 짜고 실행에 옮기려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각자의 은사와 전공이다. 은사가 부족하거나 비슷비슷하다면 협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협력의 기본은 은사를 따라 사역하는 것이기에 한국 선교사들은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팀 구조를 만들고 비전이 큰 이상적인 사역을 구상해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기본은 각자의 은사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위임하는 선교

한국인 선교사에게 또 다른 약점은 사역 위임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사역 위임이란 선교사가 하던 사역을 현지인에게 적당한 시기에 넘겨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사역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는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사역을 하면서 위임하는 것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위임을 잘 못하게 된다. 위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유형의 선교사가 있다.

 

첫째는 아예 위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도 없이 사역을 하는 선교사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을 때 하는 사역이 전부이다. 선교사가 철수하면 그 사역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런 종류의 선교사에게 위임이 없는 이유는 위임 할 사람을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 사역의 방향이나 철학이 사람이 아니라 사역 그 자체에 있기에 위임할 사람을 키울 여유가 없다. 사람을 양육하는 것에 중심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역이 초점이기에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런 선교사들이게는 위임을 논할 이유도 없다. 이런 종류의 선교사의 사역은 현지인에게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기에 결국 선교는 현지인 중심이 아니라 선교사 중심의 선교로 마무리가 된다.

 

두 번째는 위임을 너무 빨리 하는 선교사다. 위임을 받을 만한 현지인의 상태가 되어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위임을 하는 것이다. 위임은 되었지만 현지인이 능력이 안 되기에 당연히 그 사역은 이어지지 못한다. 위임을 너무 빨리해준 선교사는 위임을 해 주었는데 현지인이 그것을 잘 유지하지 못한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임의 시기를 잘 못 잡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위임을 너무 늦게 하는 선교사다. 위임의 시기가 이미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선교사가 위임을 안 하는 것이다. 때로 일부 위임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문성과 독립성이 결여된 단순하고도 사소한 일일 경우가 있다. 이런 선교사는 단순한 일을 맡겨놓고 위임을 하고 있다고 변명한다.

 

네 번째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위임하는 선교사다. 이런 선교사는 위임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있다. 이들에게는 사역의 초점이 사람을 양육하고 세우고 훈련하는 데 있다. 위임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이 준비되어 있다. 현지인의 양육 수준에 따라 그 때 그 때 위임을 해준다. 이런 선교사는 현지인의 독립과 전문성을 인정한다. 이처럼 위임이 적절히 잘 된 선교 사역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는 것이다.

 

한국 선교는 사역 위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사역이 건강한 사역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위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위임만 보면 선교사의 사역과 책무에 대한 평가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된다. 위임이 사역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요소다. 위임이 잘되면 선교사역의 목표가 분명하다는 증거가 된다. 반대로 적절한 위임이 안 되는 사역은 선교사가 사역을 잘못된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지금이라도 한국 선교사들은 위임의 방법과 철학에 대해 나누고 함께 그 과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 한국 선교의 전문성과 발전을 평가하기 위해서 위임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위임을 잘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 중의 하나이다.

 

현지인 중심의 선교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한다고 말하지만 조금만 깊게 들어가 보면 선교사 위주의 사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지인 중심의 사역은 바로 주님의 성육신적인 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육신하셨다. 성육신은 인간의 편에서 하신 구원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류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면 굳이 성육신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때 자신의 주권적인 말씀이나, 기적이나, 권능으로 충분하셨다. 하나님은 선택한 인간을 그대로 천국에 데려가실 만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고 말씀 한마지로 천사를 통해 전 인류 구원을 쉽게 이루실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방법을 구원을 위해 사용하셨다. 우리가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성육신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선교는 우리가 가진 능력과 재물과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육신처럼, 현지인과 같아지고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현지인이 중심이 되는 선교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의 방법이다. 현지인 중심의 선교란 무엇인가?

 

1. 현지인의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현지인 중심의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현지인을 알아야 한다. 선교사가 언어를 배울 때 현지 문화를 함께 배우는 시간으로 삼으면 좋다. 선교사의 첫 1-2년 기간에 대한 용어도 언어 훈련 기간보다는 언어와 문화 습득 기간으로 불렀으면 한다. 선교사가 처음 언어를 배울 때 한국을 소개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생긴다. 그러나 소개 보다는 현지 문화를 배우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 언어를 배우면서 문화 뿐 아니라 현지인의 역사와 세계관을 배우면 더욱 더 좋다. 선교지에 대해서 모르면서 선교 한다는 것은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언어의 중요성만큼 문화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선교사들이 현지 문화에 좀 더 예민해지는 것이 선교를 좀 더 발전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2. 선교사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현지인 중심의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문화를 내려놓아야 한다. 선교사 자신을 내려놓고 현지인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일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선교사를 훈련하는 과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이 선교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에 대해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다(고전15:31).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날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가 자신에 대해 날마다 죽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 선교다. 선교사가 주인이 아니라 현지인이 주인이 되도록 선교사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3. 현지인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선교는 현지인을 위해 무엇을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현지인과 함께 사는 것이다. 현지인을 위해가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하는 것이다. 현지인 친구를 만들고 현지인과 함께 즐기고 노는 것이 선교다. 선교사가 현지인을 선교 대상자 이전에 친구로 삼고 그 친구와 삶을 나누는 것이 바로 현지인 중심의 선교이다. 현지인이 친구라면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돕는다든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개념은 아니다. 친구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선교사가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고, 아파해주고, 울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친구다. 함께 식사도 하고 소풍도 가고 운동도 하고 그렇게 함께 즐기는 것이 친구관계이다. 선교사가 물질이 부족할 때 현지인이 참 된 친구라면 헌금해 주는 관계까지 가야 한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현지인에게 얼마나 많은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가도 현지인과 친구 관계를 잘 맺었는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선교사도 부족할 때 현지인에게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실한 친구이기에 그렇다. 한국 선교사들에게 이런 현지인 친구가 많을 때 현지인 중심의 선교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4. 현지인이 직접 하도록 한다.

선교사는 현지인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고 위로하고 비전을 나누어 준다. 선교사가 주인처럼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이 주인이기에 그들이 일을 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일을 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현지인들도 얼마든지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현지인이 수동적이 되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선교사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하려 하기 때문이다. 현지인 훈련이 안 되는 것은 현지인에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인도 스스로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현지인도 스스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 현지인도 병원을 운영할 수 있다. 현지인도 구제하고 나누어 줄 수 있다. 현지인이 안하거나 못하는 것은 선교사의 책임이다. 바로 현지인 중심이 아닌 선교사 자신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기에 현지인이 일을 안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현지인이 할 수 있도록 과감히 맡겨야 한다. 일의 진행이 안 되어도, 일을 실패해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현지인이 수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알 수 있는 능동성을 길러 주어야 한다. 현지인이 일을 했을 때 일단 잘 안 되는 것이 있으면 그 책임을 선교사 자신에게 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지인에게 맡겼는데 안 되는 것은 훈련의 과정으로 생각하면 된다.

 

5. 현지인을 주인으로 인정한다.

현지인은 선교사에게 있어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엄밀히 따지면 현지인은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사역 그 자체이다. 곧 현지인이 진정한 주인이라는 말이다. 사업하는 데 있어서 손님이 왕이라는 의미는 손님 중심으로 모든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선교도 현지인이 선교의 왕이다. 현지인이 선교의 전부이다. 선교사는 종이요, 섬기는 자요, 이방인이요, 잠시 있다가 갈 나그네다. 선교사는 책임질 사람이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에 불과하고 현지인이 최종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선교사는 이런 현지인 중심의 철학을 날마다 되새겨야 한다. 선교사는 현지인을 존경하고 그들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모든 일의 핵심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선교사가 현지인에게 이런 말을 자주하고 행동도 그렇게 했으면 한다. “당신이 주인이고 저는 종입니다.” 그리고 종이 주인처럼 행세를 하지 않아야 한다.

 

6. 현지인의 자존심을 세워준다.

선교사는 한국과 선교지 국가를 비교하지 않아야 한다. 선교지 나라의 정부와 국민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현지인들의 약점을 들추어내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선교사들은 현지인이 게으르다고 말한다. 현지인들이 도둑질을 잘 한다고 말한다. 성실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동네와 사람들이 더럽다고 말한다. 나라의 잘못된 점을 쉽게 불평한다. 문화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한다. 선교사의 이런 행동과 말들은 은연중에 나타난다. 현지인들은 선교사의 말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쌓이면 그들도 선교사를 존경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 나중에 선교사를 배반하게 되는 것은 이런 작은 실수들이 쌓임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선교사는 선교지의 장점을 자주 말해야 한다. 질책보다는 칭찬을 자주해 주어야 한다. 자존심을 세워주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은 동일하다. 가난하게 살아도 감정이 있고 못 배웠어도 자존심이 있다. 그래서 선교사는 현지인의 감정을 좋게 만드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가끔 방문하는 시골 교회가 있었다. 그곳은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들어가는 곳이다. 길도 험하였다. 그들의 삶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그곳 교인들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 산다. 그들의 모습만 보아도 안타깝기 그지없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산다. 어느 날, 미국 선교사와 함께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미국인 선교사는 도착하면서부터 카메라로 사람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선교지에 있으면서 가능하면 사진을 찍지 않는 원칙을 세웠었다. 사진을 찍다 보면 가난하고 열악한 모습을 담을 수밖에 없고 그 사진 속의 주인공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국인 선교사는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그 교회 교인 중의 한 사람에 필자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하였다. “저 미국 선교사는 이곳에서 사역도 안 하면서 왜 사진을 찍느냐? 그 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선교 후원금을 모금하려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 시골 외진 곳에 사는 사람이 처음 방문하여 사진 찍는 미국인 선교사를 보고서 후원금을 모금하려고 자신들을 찍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은 선교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선교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현지인들의 눈에 세심하게 관찰되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선교사들의 그런 행동들의 의미까지 알고 있는 현실은 현지인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현지인들은 선교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현지인들도 선교사의 행동에 예민하다.

 

7. 선교지의 경제적인 수준에 맞게 일한다.

교회를 개척할 경우에는 다른 현지 교회들이 하는 수준에서 물건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른 교회들은 OHP(Over Head Project)도 사용하지 못하고 흑판을 사용하는데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는 빔 프로젝트(Beam Project)를 사용한다. 이럴 때 현지인들은 겉으로는 좋아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의 수준과는 맞지 않기에 어색하게 느낀다. 그래서 선교사는 최첨단의 기구를 사용할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현지인들은 아직 컴퓨터를 갖기 어렵다. 선교사가 이런 도구를 사용할 때 선교사가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교사가 떠나고서도 아무 문제없이 모든 것이 진행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현지인 중심의 선교이다. 선교사가 현지인의 수준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너무나 큰 프로젝트성 사역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후원 교회에서 원하는 사역일지라도 현지인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프로젝트 사역은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렵다. 좋은 선교 사역이란 현지인의 마음을 얻고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함께 해 나가는 사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관점의 선교

선교사는 문화가 다른 곳서 사역을 한다. 문화를 넘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세상과 인간의 관점과 틀을 넘어서는 사람이 선교사다. 선교사는 문화를 넘고, 세상의 전통을 넘고, 사람들의 가치관을 뛰어 넘는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선교사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실제 생활에서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다르게 행동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문화를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하고, 교단을 초월하고, 신앙의 색깔을 초월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좁고 소극적인 세계관으로 행동 한다. 이런 세계관으로 현지인을 대할 때 바른 기독교의 세계관을 가르치기가 어렵다.

 

선교사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사는 선교사는 사람중심, 제자훈련 중심, 교회 개척 중심의 사역을 한다. 이런 사역들이 사역의 초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세계관으로 사역하는 선교사는 현지인의 독립과 재생산을 목표로 사역하는 선교사다. 이런 선교사는 선교의 목표가 분명하다. 그것을 위해 장기 계획을 세운다. 사역을 할 때 단회적 혹은 단기적으로 하지 않는다. 아무 계획 없이 하지 않는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역을 한다. 자기 공적을 세우는 것을 내려놓는다. 자기 욕심을 내려놓는다. 후원 교회의 요구가 잘못되었을 때 아니라고 거절할 줄 아는 선교사가 된다. 후원 교회의 후원을 눈치 보지 않는다. 돈 중심의 선교를 하지 않는다. 모든 기준이 자기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 있다. 자기의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 비판을 받아들일 줄 하는 열린 마음을 가졌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역하는 온유한 선교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사는 선교사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익이라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실행하는 선교사다. 예를 들어 협력 사역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협력하는 것이다. 선교사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을지라도 다른 선교사에게 이익이라면 기꺼이 감사하며 도와준다. 자신의 교회가 비록 이익이 없더라도 다른 교회에 이익이 된다면 그 일을 행한다. 자신이 손해 보더라도 선교부에 도움이 된다면 그대로 순종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선교사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사는 선교사다.

 

선교사 중에는 이중 회원(Dual Membership)선교사가 있다. 동시에 교단 선교부와 초교파 선교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중 회원 선교사가 가능한 것은 교단 선교부와 선교 단체가 협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행정비 공제 문제로 이중 회원 선교사가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두 단체가 각자 자기 단체의 행정비를 그대로 공제할 때 선교사의 행정비는 이중 선교사가 아닌 사람에 비해 두 배를 내야 한다. 그래서 선교 단체들이 협약을 할 때는 이중 회원 선교사를 고려하여 행정비 공제를 낮추어서 결정한다. 그래서 이중 회원 선교사의 입장에서 손해가 안 되도록 해 준다. 문제는 이중 회원이 아닌 선교사들이 가끔씩 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중 회원이 아닌 선교사는 자기가 속한 단체에 온전한 행정비를 내는데 이중 회원 선교사는 자기보다 50% 정도 덜 내게 되는 것이다. 재정적인 면에서 이중 회원 선교사는 자기 단체에 기여도가 다른 선교사에 비해 절반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각자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는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풀 때 해결책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풀 수 있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이중 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좀 더 희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만약 재정이 충분하다면 두 선교부에 각각 온전한 행정비를 공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중 회원 선교사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행정비를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두 배를 내게 되기에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두 배의 기여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닌 것이다.

 

또 이중 회원이 아닌 선교사들은 이중 회원인 동료 선교사가 재정적으로도 두 배를 지출하게 되었으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교 단체들이 협약한대로 행정비 공제를 삭감해주는 것을 기쁨으로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서로가 돕고 자기가 희생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결론

선교사역의 기초가 되는 선교사들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선교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 현지인 중심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현지 문화를 배우며, 현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국인 선교사들은 은사에 따라 사역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현지인에게 위임을 잘 하는 선교를 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현지인과 현지 복음화를 위한 선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