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원망할 수 있을까? 자신의 출생을 후회하고 저주할 수 있을까?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움과 기쁨임을 고백하면서도 그 말씀을 거부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였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원망과 절망을 토로했을까? 예레미야는 우리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다. 그는 선지자다. 다른 모든 선지자가 악하게 행하는 중에 그 선지자들과 싸우다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육체적인 폭력까지 당하고 이것을 이겨낸 선지자다. 요즘 상황으로 보면(사실은 아니다), 목사님들이 모두가 하나의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데 그 의견이 잘못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목사는 왕따를 당하고 심지어는 목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목사들의 악행에 의해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였다는 사실이다. 예레미야는 그래도 꿋꿋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는데, 그런 계속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다.
오늘날도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다. 속으로, 내면으로는 썩었으면서 겉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행동하는 수 많은 성도들과 목사들보다는 오히려 더 솔직한 태도이다. 그러나 그 원망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기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해결자이심을 믿고 고통을 토로하는 것이다. 고통 중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인간은 고통을 의연히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기에 그렇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듯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없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른인 척할 필요가 없다. 물론 평상시에는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원망과 불평, 후회의 표현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무 거룩한 척할 필요 없다. 너무 완벽한 척할 필요도 없다. 아픔을 혼자 이겨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둘째 아들인 탕자도 받아주신 분이시다. 그때 당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는 것은 죽은 아버지로 취급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은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그를 품어주고 안아주었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 오늘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두렵고, 무기력과 좌절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으며, 또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고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