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말씀과 뜻
코로나19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단 한 번의 전염병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전염병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최근에 일어난 메르스, 사스 뿐 아니라 최초의 대역병으로 기록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키프리안 전염병, 유럽 인구의 30-40%를 사망에 이르게 한 흑사병, 말라리아, 에이즈(HIV/AIDS), 역사상 가장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스페인 독감, 1855년 중국에서 발생하여 100여 년간 지속된 3차 대역병, 로마 제국 전체의 정치, 경제, 군사적 위기를 초래한 안토니우스 역병, 발진티부스, 천연두, 결핵, 페스트, 장티푸스, 홍역, 백일해, 콜레라, 독감 등의 많은 전염병이 있어 왔다. 이런 전염병이 일어날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들을 보였다. 그러면 코로나19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신학자 톰 라이트는 전염병의 원인을 찾거나 원인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기보다 위기를 만난 자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고 했다(하나님과 팬데믹).
전염병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들이 있었다. AD 249년부터 262년까지 키프리안 전염병이 있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 때 당시 전염병이 일어날 때 이교도들은 병자들을 돌보는 대신 그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은 평소에서 가족 중에 병자가 생기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행동하였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을 아끼지 않고 다른 사람만을 생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는가에 상관하지 않고 병자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고 돌보며 섬기다가 병자들과 함께 고요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이웃의 질병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했다.”(알렉산드리아 주교 디오니시우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기에 고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셨던 것처럼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 결과 불과 300년 만에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국교로 삼은 기반이 되었다. 전염병이 없었더라면, 전염병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았던 그리스도인이 없었다면 로마의 복음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당시에 기독교는 핍박의 대상이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것도 금지되었고, 예배하다 잡히면 죽임을 당했다. 이런 시대에 복음이 확장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소중히 여겨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람들을 사랑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염병이라고 일컫는 14세기의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0-40%가 목숨을 잃었다. 이 시대에 일반 사람들은 병자인 가족과 이웃을 버리고 달아나거나 그들을 마을에서 쫓아냈다. 심지어 가톨릭 사제들도 신자의 고해성사를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친척은 서로 외면하고 형제는 형제에게 버림받았으며 남편은 아내에게 버림받았다. 더구나 믿기지 않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치 낯선 사람처럼 자녀의 운명을 방치했다”라는 기록이 있다(데카메론).
이 때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환자들의 집을 청소해주기도 하였다. 그녀가 정성껏 돌봤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나병과 흑사병 환자들이었다. 가타리나의 헌신적인 돌봄에 감명받은 환자들은 그녀를 ‘가족’ 혹은 ‘어머니’로 불렀다. 가타리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알고 이 일을 감당하였다. 이웃을 돌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그렇게 실행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바로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 고통당하는 이웃, 코로나로 두려워하는 이웃을 위해 교회와 성도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들을 편안하게 할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인 그들이 이 시기에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에 주신 사명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런 사명, 이웃 사랑의 계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자기희생의 사명을 업신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행동을 하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인가? 드리지 말라는 예배를 드리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인가?
예배를 드리는 것을 고집함으로 불신자들이 교회에 돌을 던지는 것을 핍박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와전하는 목회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땅에 떨어지고 있다. 그들은 전도가 가로막히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배를 못 드리게 하는 것을 사단의 장난이라고 하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싸움을 계속한다. 우리는 이런 편협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대다수의 교회들은 비록 억울함이 있어도 방역규칙을 잘 지키지만 몇 안 되는 일부 목회자들은 지금도 예레미야시대의 거짓 선지자인 스마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잘못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더 어려운 것은 ‘내’가 내게 맡겨진 이웃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도 잘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감당하는가?”를 돌아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전염병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그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