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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3-2강 선교와 문화, 세계관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3학기

제 3-2강 선교와 문화, 세계관

후앙리 2020. 4. 8. 22:22

I. 서론

II. 타문화 이해의 중요성

III. 문화 이해와 문화의 실제

IV. 세계관 이해

 

 

I.

1. 타 문화에서의 어려움

서구 아프리카의 코마 산족의 문화에서는 소녀의 나이 8-10세 가량이 되면 앞니 두 개를 뽑아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은 이 행사를 통해서 처녀가 결혼하면 출산할 수 있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선교사 가정이 코마 종족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었다. 선교사의 딸도 그들의 문화적 전통에 의해 앞 치아 두 개를 뽑는 의식을 치러할 나이가 되었다. 선교사의 딸과 함께 친하게 놀던 코마 종족 소녀가 그 선교사의 딸을 보고 왜 치아를 안 뽑느냐고 자꾸만 놀려댄다. 게다가 코마 종족 사람들이 그 선교사에게 와서 왜 당신의 딸이 치아 뽑기 의식을 치르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질문하고 있다.

이 선교사는 코마 종족 가운데서 사역하면서 이러한 곤경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러한 타문화 현장에서 그 선교사는 자기 딸을 보호하면서도 어떻게 그들의 문화를 존경하고 또 그들에게 내부인의 한 사람으로 수용될 수 있을까?

 

2. 자기소개와 문화

나는 한국 사람인 000입니다라고 선교지 사람들에게 소개했을 때 그들이 느낄 수 있는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1) 국적이 다르다. 국적이 다르다는 것은 습관과 환경과 문화가 다르다는 의미다.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고 그들은 우유와 수프, 치즈, 감자를 먹는다. 한국 사람은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신고 들어가지만 그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이처럼 그들과 한국인은 문화가 서로 다르다.

2) 글을 쓰는 순서가 다르다. 한국말은 주어+서술어+동사 순서로 쓰인다. 그에 반해 다른 나라 말은 주어+동사+서술어의 순서로 쓰이는 것이 많다.

3) 이름과 성을 쓰는 순서가 다르다. 어떤 선교지에서는 먼저 이름을 쓰고 다음에 성을 쓴다. 한국 사람은 항상 성을 먼저 쓰고 나중에 이름을 쓴다.

4) 성이 다르다. 한국인은 성을 하나만 가지고 있다. 이름도 대부분이 하나다. 선교지 사람들은 아빠, 엄마의 성 두개를 갖기도 한다. 이름도 한국 사람은 성과 이름 하나만 있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중간 이름(Middle name)이 하나 더 있다.

5) 언어가 다르다. 한국말로 이 말을 해서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이해할 수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단순한 한 문장에도 이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가 바로 문화적인 차이다.

 

3. 현지인의 선교사에 대한 오해(랄프 윈터. 2000)

폴 히버트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문화의 다른 점에 대해 설명한다. “콩고의 몇몇 선교사들은 사람들과 교감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마침내 한 노인이 왜 콩고인들이 선교사들과 사귀는 것을 주저하는지 설명했다. ‘당신들이 왔을 때 당신들은 이상한 행동 방식도 함께 가져 왔소라고 그는 말했다. ‘당신들은 깡통을 든 음식물을 가져 왔소, 어떤 깡통 겉에는 옥수수 그림이 그려져 있었소. 그리고 당신들이 그 깡통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옥수수가 들어 있었고 당신들은 그것을 먹었소. 또 다른 깡통의 겉면에는 고기 그림이 그려 있었고, 안에는 고기가 들어 있었소.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먹었소. 그리고 나서 아기를 낳자 당신들은 조그만 깡통을 가져왔소. 겉에는 아기 그림이 그려 있었는데, 당신들은 그 깡통을 열더니 내용물을 아이에게 먹였소우리가 보기에 그들이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좀 어리석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논리적이었다

 

II. 타문화 이해의 중요성

1. 복음 전파는 문화의 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문화를 통해서 전해진다. 문화라는 틀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언어가 문화의 중요한 한 영역인데 언어를 모르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문화라는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타 문화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선교지에 가면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먼저 배운다. 과거에는 선교사들이 언어나 문화를 배우지 않고 먼저 사역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1-2년 정도는 언어와 문화를 의무적으로 배우고 나서 사역을 시작한다.

문화라는 형식을 무시하고 복음을 전한다면 복음은 하나의 추상적인 것이 된다. 형식과 연관이 없는 복음이 되어 복음은 현실 도피하는 것이 되고 결국 참 복음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2. 문화가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지만 때로 문화와 복음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아닌 자기 문화를 전해줄 수 있다. 선교사의 자국 문화를 전해주면서 이것이 복음인 냥 전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문명을 전해주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선교사는 문명을 전해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주려고 간다. 과거에는 선교사들이 식민지를 만드는데 국가의 도구가 되어 식민 지배를 하는데 사용된 된 적도 있다. 그러므로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이 복음을 잘 전하는 통로가 된다. 문화를 잘 이해함으로 문화와 복음을 구분하여 순수한 복음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형식만 강조되고 복음의 진수가 가려진다면 그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니고 세속적 문화운동 또는 종교 운동이 될 것이다.

3. 선교사의 자신의 삶을 위해서다. 선교사가 문화를 이해해야 사역 뿐 아니라 현지에 적응을 잘 할 수 있다. 적응을 잘 못하면 사역도 어렵게 할 수 밖에 없다. 문화에 대한 오해로 현지 적응을 잘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문화는 선교사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화 충격이란 말은 우리가 다른 문화권에 들어갈 때 직면하는 혼동과 방향 감각의 상실이다. 곧 혼란과 착각과 의기소침의 현상이다. 외국 문화권으로 이사 가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이 크다. 음식, 언어, 물건 사는 것, 생활 습관 등, 모든 것이 충격으로 와 닿는다. 여행자들은 이 충격을 외국 호텔로 들어감으로서 피할 수 있지만 선교사는 현지인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문화 충격을 피 할 수 없다.

처음 선교사가 선교지로 출발할 때는 만족이 크다. 문화 충격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을 뿐이다. 새로운 것을 본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기에 그렇다. 1~2 개월은 여행자처럼 이것, 저것이 신기하기 만하다. 새로운 집에 정착하기 위해서 집도 구하고 물건도 사고 여행도 한다. 선교사는 이런 것으로 처음에는 아주 만족한다. 그렇지만 1~2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것이 없어진다. 그 나라의 잘못된 풍습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사는데 조금씩 불편함을 준다. 자신의 문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르다는 것은 처음에는 좋은 이상을 주지만 나중에는 지겨운 것이 된다. 어떤 선교지는 관공서나 은행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나 느린 것에 대해 불평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스트레스는 결과적으로 육체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 선교사에게는 첫 3년이 중요한 시기인데, 이때 병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병이 생기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지만 선교지에서는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기다려야 하고 참고 또 참아야 할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속에서 병이 난다. 스트레스는 육신적인 병 뿐 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병도 일으킨다. 스트레스로 정서적인 안정감이 없어진다. 마음이 불안해진다. 고국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에 도착해서 처음 1년은 외로움으로 많이 울기도 한다. 때로 스트레스는 영적인 이상을 가져오게 한다. 모든 상황이 바뀌니 영적인 교제를 나눌 사람이 없게 된다. 예배를 드려도 무슨 말인지 몰라 영적인 도전과 위로가 안 된다. 찬송도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리듬도 다르다. 예배시간에는 따라 부를 수도 없고 그저 사람들의 찬송하는 모습만 본다. 마음의 영적인 충만이 점차 사라진다. 개인적으로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문화충격에서 오는 결과들이다. 그렇지만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면 몇 개월이 지나면서 차츰 회복될 수 있다.

선교지에 도착한지 2년 정도 지나면 선교지에 대한 만족도가 서서히 올라간다. 차츰 적응을 하고 많은 것을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년 정도 지나면 본국에 돌아갈 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안식년으로 고국에 다시 돌아갔을 때에는 다시 적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국에서의 정착은 처음 선교지에 정착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시기가 되기도 한다. 자신도 변하고 고국도 변하여 서로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다. 고국의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선교사는 이런 주기로 살아가는데 이 모든 문화충격을 줄이기 위해 선교지에 도착하여 처음 2년 동안 언어를 집중적으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더 많은 문화충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워야만 문화를 익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할 수 있다.

4. 팀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다.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다른 나라 선교사, 현지인 사역자)들과 협력해서 사역을 하기 어렵다. 선교는 타문화권 사역자들과 함께 협력해야만 하는 사역이다. 타문화를 잘 이해해야만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5.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다. 어떤 문화는 인지적 측면이 강한 문화가 있다. 감정적 혹은 이성적인 측면이 강한 문화도 있다. 이런 문화 이해가 부족할 때는 선교지에 맞는 효과적인 전략을 사용하기 어렵다. 문화와 선교사역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III. 문화 이해와 문화의 실제

1. 문화의 정의

1) 문화란 한 집단 공동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조직하고 조정하고 또한 함께 나누고 있는 통일된 사상, 감정, 가치관,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된 행동 유형과 그 산물이다(폴 히버트. 1996).

2) 문화란 생각하고 느끼고 믿는 방식이며 미래에 활용하기 위해 축적된 집단의 지식이다(클럭크혼<강승삼. 재인용. 2001>).

3) 문화란 한 인간 사회를 융합시키고, 정체성과 위신과 안전감 및 지속성을 부여하는 믿음, 가치관, 관습 등을 표현하는 습득된 관례나 통합된 체제로서 인간의 행위와 산물로 표현된다.

4) 옷차림새, 말하기, 쓰기, 신호, , 우표, 종소리, 향수, 냄새 등은 문화적 상징체계의 한 단면이다. 옷이란 몸을 보호하고 따뜻하게 하는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의미를 나타낸다. 정장 예복은 공식 상황을 나타내고 작업복차림은 비공식적인 상황임을 나타낸다. 군복이나 경찰 유니폼과 계급장은 그들의 직업과 직급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5) 문화 정의에 대한 요약

문화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인간은 문화 속에서 산다. 문화를 무시하고는 살기 어렵다.

문화는 문화의 규칙들과 경향들로 발생하는 산물까지 포함된다. 가정문화, 영화, 예술을 문화라고 한다.

문화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사람과 문화마다 다른 점이 있고 구별이 있다는 뜻이다. 그 구별이 사람의 정체성을 가져오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국 문화를 가지고 산다면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화는 존엄하다. 문화 안으로 들어갈 때에 모든 문화는 죄가 들어가 있다.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화는 그 문화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는 존중받아야 한다. 물론 복음을 통해서 문화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화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문화끼리 비교될 수 없다. 어떤 문화는 고급문화이고 어떤 문화는 저급 문화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개념이 부족하거나, 한국처럼 단일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타 문화를 보면서 저급한 문화라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문화는 안정감을 준다. 인간은 자기 문화권에 있을 때 안정감이 있다. 연애하는 젊은 커플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면은 함께 있을 때 편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커플은 사랑하는데 불편하다. 이런 커플을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 있다. 결혼해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랑하는데 왜 불편한가? 이는 안정성과 관련이 있다. 세계관이 서로 다르기에 서로 불편하고 안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은 성격적인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문화는 자신의 안정된 구역이다. 안정된 구역을 컴포트 존(comfort zone)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문화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안정되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컴포트 존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화권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안정감 가운데 살 수 있다.

모든 문화는 연속적이며, 아울러 바뀐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바뀌는 문화는 한국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나라에 가서 살다오면 한국 문화가 빨리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는 연속성이 있기에 자기 문화권 속에 살 때는 문화가 변해도 조금씩 변할 뿐 아니라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한다.

문화는 무의식성이 있다. 자신의 문화권에 사는 사람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살지 않는다. 그러나 타문화권에 들어가면 자기 문화를 알게 된다. 문화에 대한 무의식성은 자기 문화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자기 문화가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 뭔가 잘못 되었어라고 말한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 왜 저러지?”라고 하는 것이다. 부부 싸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문화차이다. 물론 문화가 다르다고 다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내 문화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부부싸움은 사소한 것에서 싸운다. 치약을 사용하는 방식, 신발을 싣는 방식 때문에 싸운다. 어떤 사람은 주머니 속에 쓰레기를 넣는 습관 때문에 싸우고 심지어 이혼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빨래를 하는 부인은 남편의 옷 속에 들어 있는 쓰레기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어떤 남편은 밥을 먹을 때 소리 내어 먹는다. 남편의 가정은 어렸을 때 함께 말을 많이 하며 소리를 내면서 밥을 먹는 가정이었다. 밥 먹는 소리가 클수록 집안의 분위기는 좋았다. 그와 반대로 부인의 집안은 아버지가 군인이었고 밥을 먹을 때는 점잖고 조용하게 먹어야 한다. 밥을 먹을 때 시끄러운 것은 교육을 잘 받지 못한 가정으로 인식하고 자랐다. 그래서 남편이 소리를 내어 먹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부부가 서로가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기에 식사시간에는 상대가 외국인인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가 자기 문화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음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일 뿐이다. 타문화 적응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문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문화의 세 가지 층

문화의 세 가지 층에는 세계관, 가치체계, 행동 양식이 있다.

1) 행동 양식

행동양식은 문화의 가장 바깥층에 있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포착되는 문화영역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 그곳에서 한국과 다른 건축 양식과 의복, 음식, 음악과 미술, 예의범절, 인사법을 만나게 된다. 해외여행을 가면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다. 그것은 행동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미사람들은 축구하는 것이 밥을 먹는 것보다 중요한 문화를 가졌다. 이전에 필자가 에콰도르에서 사역할 때 그들은 월드컵 기간에 TV를 직장으로 들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음악과 춤을 추는 문화를 가졌다. 하루 종일 음악 틀어놓는 것이 선교사에게는 참 신기했다. 행동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행동양식은 겉으로 드러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행위는 사람들이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눈으로 관찰되는 행동에는 이유와 의미가 있다. 그 행동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규칙이 있으며, 이것이 문화다. 문화라는 규칙의 행동 이면에 가치와 신념이 들어 있다.

에콰도르 사람들은 줄을 설 때,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자기의 자리를 지켜 달라고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 한국 사람은 자기가 선 자리를 자기 뒤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을 한다. 에콰도르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살아 왔다.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종처럼 취급을 받았다. 종은 주인에게 당당할 수 없다. 주인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모습과 신분과 처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세계관이 있다. 줄을 섰을 때는 자신의 모습을 뒤에 서 있는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뒤로 돌아서 자기의 앞모습까지 보여주면서 자리를 부탁하는 것은 더 부끄러운 것이다.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처럼 에콰도르 사람들이 줄을 섰을 때 앞사람에게 부탁하는 문화는 이전의 식민지 때부터 갖게 된 수치심의 세계관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인사할 때 아침 드셨어요? 혹은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를 한다. 그것은 일제 식민 시대와 육이오를 겪으면서 가난해서 밥을 먹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전쟁 때는 밤새 적군에 의해 죽는 경우가 있었기에 이러한 인사말이 나왔다. 이런 인사말이 바로 한국 인사 문화가 된 것이다.

어떤 미국인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지에 세 발 자전거를 가지고 갔다. 첫날 선교사 아이들이 세발자전거를 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현지인 아이들이 선교사의 허락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선교사는 남의 자전거를 허락 없이 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적질 했다고 생각했다. 추장을 찾아가서 왜 남의 자전거를 훔쳐서 타는지에 대해서 항의 했다. 추장은 당신이 우리에게 자전거를 주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는 자전거를 준 적 없다고 했다. 추장은 아이가 어젯밤에 놀다가 대문 밖에 자전거를 놓았다고 했다. 그 문화에서는 대문 밖에 있는 물건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문 밖에 있는 것을 가져가는 것은 그 문화에서는 도둑이 아니다. 도둑의 개념이 다른 것이다. 이처럼 문화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거짓말의 기준도 역시 문화마다 다르다.

문화는 자연을 극복하고 역사적 상황을 거치면서 형성된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아침에 인사할 때 얼굴에 침을 뱉는 것으로 친근감을 표시한다. 어떻게 이 인사법이 생겨날 수 있는가? 문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알 수 있다. 물이 부족한 곳에서는 물이 많은 것이 축복이다. 그래서 물과 비슷한 침도 축복의 표시가 된다. 침을 뱉는 인사법은 당신에게 물이 풍성하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사이족에 간 한국 선교사가 있었다. 처음에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이 한국 선교사에게 침을 뱉었다. 선교사는 기분이 많이 나빴다. 화가 나서 똑 같이 더 큰 침을 뱉었다. 내 침이 네 침보다는 더 클 것이라는 심정으로 침을 뱉었는데 그것이 마사이족에게는 더 큰 축복이 되었다. 이 인사법의 의미는 물은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형식은 침 뱉는 행동이다.

침은 외형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가 있다. 외형적 의미는 사전에 있다. 침은 물로 되어 있고 입에서 나온 어떠어떠한 성질을 갖는다. 외형적 의미는 어디서나 똑 같다. 내포적 의미는 지역마다 다르다. 내포적 의미가 바로 문화다. 침을 뱉으면 축복이라는 내포적 의미가 있다. 한국 문화는 침을 뱉으면 더러운 것이고 욕하는 의미이지만 마사이족은 축복의 의미다. 문화는 이처럼 내포적 의미다. "저 여인은 장미와 같다" 고 한다면 외형적 의미는 장미는 사전에 이러이러하다는 정의가 나온다. 그러나 내포적 의미는 이 여인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문화는 상징으로 되어 있다. 시계, 표시, 십자가 모두가 상징이다. 미국에서 4는 숫자중의 하나이지만 중국에서는 죽을 사(4)자다. 그러므로 중국의 건물에는 4층이 없다. 미국에서는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보이면 심한 욕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별 상관이 없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손으로 하는 것의 의미가 달라진다. 미국 학교에서 선생님이 주는 상장을 한 손으로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한국 학교에서는 반드시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어린 학생일지라도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기에 당당하게 상장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른에 대한 공경이 개인의 개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선생님께 공손한 태도로 상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행동 이면에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행동양식은 문화의 겉모습일 뿐 아니라 그 행동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들이 있는 것이다.

2) 가치체계와 신념

문화의 형성은 가치를 따라 된다. 가치라는 것은 무엇이 좋으냐, 유익하냐, 최선이냐,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문화를 형성해 나가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해서 문화를 만들어 간다. 가치체계는 인간의 타락으로 제한되고 왜곡된 가치체계가 되었다.

남침례교 선교사가 19세기 후반에 남태평양에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선교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프리섹스하는 곳이었다. 성적으로 문란하여 선교사는 실족하였다. 그래서 선교지를 떠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문화 태동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문화의 이해가 부족했다. 이 선교사는 문화가 달라지면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몰랐다. 그 때 당시의 그곳에서는 죄가 아니었고 그냥 자연스런 행동이었는데 선교사는 문화 이해가 부족해서 실족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가치는 효에 있다. 효라는 가치체계가 물건을 파는데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귀뚜라미 보일러, 핸드폰 등 전자제품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연결시켜 광고한다. 서양 사람은 전자제품 광고에 시골할아버지가 나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 사람들은 효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할 때 더 잘 팔린다. 한국인은 효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절제와 인내를 잘한다. 일본인의 절제와 인내는 공동체의 압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너무 억압할 때 일본인들은 자살을 할 만큼 폭발을 한다. 철도원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철도원 직원은 출근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일을 하였다. 아무리 미운 아내가 죽어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출근해서 일을 한 것은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일본 사람들의 절제의 모습은 정원에도 나타난다. ‘제페니스 가든을 세계 곳곳에 정원을 세워 정원을 아주 잘 가꾼다. 자갈모양이나 나무 등 인공미, 절제미가 나타나도록 가꾼다. 한국 사람은 자연을 좋아해서 자연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라지만 일본 사람들은 잘 다듬는다. 절제가 잘 되어 있는 자연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나무 분재도 발달되어 있다. 식물도 절제를 시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도 누구를 원망하기는커녕 운동장에 줄을 길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놀랄 정도다. 일본 지하철에는 모두가 조용하다. 전화를 해도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한다. 반면에 한국 지하철은 아예 중계방송을 하는 수준이다. 지하철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사생활을 광고하는 것 같다. 약속 장소나 집안일에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큰 소리도 전화한다(지금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조심하는 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처럼 행동 이면에 있는 가치체계가 문화마다 다르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용하는 것은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일을 하는 것과 노는 것, 이것도 그 순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는 것이다. 일을 많이 하는 한국인들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나라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은 휴식을 많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좋지 않게 생각한다. 남미 에콰도르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놀기를 좋아한다. 필자가 에콰도르에 살 때 시간은 금이기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에 에콰도르 사람은 시간은 금이기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놀아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소중하기에 짧은 인생동안 놀고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인은 시간이 금이기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에 가치를 둔다.

3) 어떤 문화에서는 하층계급만 육체적인 일을 하는 것으로 기준을 두기에 자신이 상류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필리핀에서 집 주인은 청소를 하면 안 되고 하인이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교사가 육체적인 일을 하면 상류층에서는 선교사를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나이지리아에서 서구의 한 선교사가 현지인과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려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상류층에서는 자전거를 타지 않고 좋은 자동차를 탄다. 권위주의 문화에서 좋은 차는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낸다. 자전거를 타는 선교사를 보면서 상류층의 나이지리아 인들은 선교사를 존경하지 않는다. 신분에 걸맞지 않는 그 행동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각자의 선택의 기준이 다르고 가치를 부여하는 생각이 다르다. 그런 면에서 한국도 권위주의 문화이다. 권위주의 문화에서는 명함과 직함이 중요하다. 그 사람의 됨됨이나 실력보다도 그 직함에 따라 사람을 평가한다. 그래서 서구에서 오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에 올 때 명함을 따로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별로 필요 없는 자신의 과거의 직함들(박사, 회장, 총장 등)을 다 넣어서 명함을 새롭게 만든다. 그래야 그 사람의 실력에 상관없이 한국에서는 대우를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완전히 무시된다는 것은 아니다. 처음 대하는 사람을 평가할 때 명함으로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타문화권에 갔을 때 그 나라 문화를 보면서 어떤 것이 더 좋은가 하는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그 문화를 선택해서 그 문화 안에서 안정되게 사는 것이다.

문화의 형태 그 배후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그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신념이다. 신념은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치 있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규범이나 도덕규범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양심은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양심은 제 기능을 할 것이고 양심대로만 한다면 하나님의 법에 저촉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성의 전락, 즉 도덕적 전락이 있었기 때문에 양심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양심의 기능은 제한되고 왜곡되었으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성경은 만물 가운데 인간의 마음이 가장 거짓되고 부패되었다고 말한다(17:9). 그러나 양심의 기능이 제한되고 왜곡되었다고 해서 기능 자체가 소멸되거나 정지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양심은 문화 속에서 나름대로 도덕규범과 사회규범을 형성하는 기능을 감당한다. 그렇기에 문화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사회적, 도덕적 규범이 나타난다.

문화의 차이는 다양한 사회규범과 도덕규범이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문화 안에서 보편적인 사회규범과 도덕규범이 관측된다고 해도 문화에 따라 규범들 사이에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

간음과 거짓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쁜가? 물론 둘 다 나쁘다. 그렇다면 거짓말과 간음을 한 지도자 중에 누구를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는가? 한국인은 거짓말하는 지도자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짓말이 들통 난 국회의원은 다시 선출될 수 있지만 외도를 하다가 들통 난 국회의원은 정치적으로 다시 일어서기가 어렵다. 반면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거짓말이 간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 한다.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거짓말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물론 간음도 그렇지만 다른 여자와 문제가 있었던 클린턴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한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거짓말이 간음보다 좀 더 용서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물건을 훔치는 것과 화를 내는 것 가운데에서는 어느 것이 더 나쁜가? 한국인은 대체로 물건을 훔치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훔치다라는 단어가 없는 문화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문화에서는 단지 허락 없이 물건을 가져가서 쓰고 안 돌려 주는 것일 뿐이다. 케냐 마사이족 마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도해서 양육하는 현지인 가운데 한 사람이 선교사의 물건을 자주 가져갔다. 선교사는 허락을 받고 가져가고, 쓰고 나면 돌려 달라고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 현지인은 계속 그냥물건을 가져갔다. 현지인이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이 선교사는 자신도 모르게 벌컥 화를 냈다. 한국인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마사이족 현지인들은 그 다음부터 이 선교사를 보면서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를 슬슬 피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겉돌았다. 답답한 나머지 선교사가 가장 가까운 현지인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왜 나를 피하나요?”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물건을 가져가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것이 훨씬 더 나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면 소유관념이 희박해진다.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집단 혹은 사회일수록 내 것과 다른 사람의 것이 분명하지 않다. 한국에서 오래 전에 시골에서 수박이나, 참외, 닭 같은 서리를 하였다. 서리하다 들켰을 때 큰 혼이 나긴 하지만 도둑으로 몰려 형사 고발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옛 시골은 강한 공동체문화였기에 그렇다. 마을사람들은 거의 친구요, 친척이다. 동생이 언니 옷을 입고 나갔다 오면 혼은 나지만 도둑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느 문화권에서는 동생일지라도 말을 안하고 옷을 입고 가면 도둑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교지 문화는 집단 사회이고 수치심이 강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문제나 불만이 있어도 면전에서 따지면 안 되고 반드시 중재자를 통해 유감을 전달해야 하는 문화가 있다. 필리핀에서는 집 주인에게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어떤 요청을 할 때 직접 하기보다는 가정 도우미 혹은 변호사를 통해서 한다. 이처럼 중재자 문화에서는 직접적으로 아니오(NO)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NO라고 했을 때는 서로의 관계가 깨질 수 있다. 그러나 서구는 NO를 분명히 사용하는 문화를 가졌다.

서구 사람들은 집에 누군가 손님이 왔을 때 밥 먹었니?” 라는 질문을 한다. 그 때 한 번만 물어보면 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두세 번 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인에게는 수치심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 물어보아서는 손님은 부끄럽기 때문에 먹었다고 말을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주인은 손님을 배려해서 세 번까지 물어본다. 손님이 부끄러워하지 않고(쪽팔리지 않도록)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전에 한국에 왔던 선교사에게 한국 사람이 손님으로 선교사 집에 왔을 때 밥 먹었니?”라고 물어보면 한국 사람은 대부분 안 먹었다고 대답한다. 서양 선교사는 밥을 먹었는지에 대해 다시 물어보지 않는다. 그 때 한국 사람들은 선교사가 매정하고 선교사로서 사랑이 없다고 여겼다. 반대로 한국 사람이 서양 사람에게 밥을 먹었는지에 대해서 두 번 혹은 세 번 물어보면 서구 사람은 네가 나를 믿지 못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부하는 강의 시간에도 누군가 졸면, 선생님은 학생에게 잠을 자지 말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그래도 강의시간에 조금만 힘을 냅시다라고 간접적으로 말한다. 한국의 학교 교실에서 어떤 질문을 하면 한국 학생들은 대답을 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치심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답을 빨리 하지 않는 것은 틀린 답을 하면 쪽팔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틀린 답을 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만약 질문에 대답을 하여 답을 맞히면 주위 학생들이 잘 난체 한다고 비난을 한다. 공동체의 문화를 가졌기에 그렇다. 한국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면 나대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면 수치스러운 것이다. 한국인은 이런 두 가지 문화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질문에 대답을 잘하지 않는다. 서구에서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모르기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한국인 대학생들이 대답을 잘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교수들은 당황해 한다. “이렇게 쉬운 것도 대답을 하지 못하는 실력인가?”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문화는 인간의 뼛속까지 깊이 들어있다. 일본 사람들도 강한 수치심을 갖는 문화이다. 일본이 사무라이 할복을 하는 것은 수치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드러날 때 수치스러워서 할복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죄책감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인지하는 이성적인 판단이다. 아담이 벗은 줄 알고 나뭇잎으로 가린 것은 수치심 때문이고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 것은 죄책감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수치심 문화이고 독일은 죄책감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죄책감 문화는 죄를 느낄 때 죄를 자복한다. 그래서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으로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피해를 당한 나라들에게 사죄하고 보상을 해 주었다. 독일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죄책감 문화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일본은 수치심 문화이기에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사과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 부끄러움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 사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사무라이들은 잘못이 들어나면 죽는 것이 더 쪽팔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살을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수치심의 문화 때문에 부인하거나 축소하지만 독일 사람은 죄책감의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다 인정하고 보상을 한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은 나쁜 것인가? 아니면 나쁘지 않는 것인가? 한국 문화에서는 대체적으로 선의의 거짓말은 죄가 아니다. 이에 반해 서양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도 죄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상대에게 피해를 크게 끼치지 않으면 죄가 아니다. 친구가 새로 산 옷을 입고 오면 별로 예쁘지 않은 옷도 예쁘다고 칭찬해준다. 선의의 거짓말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지난번 것 보다 못하다고 직접 말해준다. 한국 사람들에게서는 공동체 문화가 있기에 사실 보다 공동체 일원과의 화목이 더 중요하다. 이에 반해 서구인들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치심 문화에서는 면전에서 화를 내면 도발적인 행동으로 여기고 화를 낸 사람이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태국은 미소의 나라다. 화를 잘 내지 않는 문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들은 화가 나도 한번 두 번 참는다. 그러나 여러 번 참다가 밤중에 찾아가서 몰래 보복을 하기도 한다. 캄보디아나 필리핀도 비슷한 문화를 가졌다. 한국도 어느 정도 수치문화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 사람들은 자서전을 써도 실패한 것이나 잘못된 것도 드러내면서 쓴다. 이에 반해 한국 사람들은 성공한 얘기만 쓴다. 그것은 잘못을 들춰내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도 자신의 사역 보고나 기도편지를 쓸 때에 잘 하는 사역만 소개를 하지 실패한 사역에 대해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교인들이 길거리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사영리를 전해주면서 영접 기도하도록 한다. 이것은 한국 사람에게는 압박하는 행위이다. 한국 사람들은 압박하는 것을 부담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좋다.

서구 사람들에게는 정확한 것이 편리하다. 무엇이든지 경계선이 분명하다. 이것을 경계집합이다. 반면에 한국 사람은 중심 집합이다.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서구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것도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 목사님이 고마워서 교회 오는 할머니는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보지만 미국이나 서구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한국 사람은 양립적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서구 사람은 둘 중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서구에서 활발한 기독교는 칭의, 성화, 이런 것들을 분명한 교리로 삼는다. 이에 반해 불교는 열반, 해탈, 성불, 이런 사상들이 있다. 서구인들이 볼 때에는 뭔가 불분명하지만 동양인에게는 이런 애매모호한 것이 편하기도 하다.

세계관이 다를 때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헬라 세계관은 초자연(하나님과 천사)과 자연(인간, 세상)으로 구분한다. 반면에 히브리 사람들은 창조주와 피조물로 나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천사는 피조물일 뿐이다.

두 사람이 싸울 때 서양 사람들은 두 사람 말을 다 들어보고 누가 잘못했는지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두 사람 말을 다 들어보고서 네 말도 맞고, 그 사람말도 맞다고 판단 한다. 서양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두루뭉술하게 말한다.

새벽 3시에 빨강 신호등에서 차가 서는 일은 한국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사람도 없고 차도 없는데 서 있는 것은 융통성이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신호를 꼭 지킨다. 누가 보건 보지 않건 간에 원칙을 준수한다. 한국인에게는 원칙보다는 융통성이 더 발달된 문화다. 그래서 신호등의 노랑불은 미국 사람은 서라는 말이고 한국 사람에게는 빨리 가라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한국 사람은 상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문화에는 선문화(Line culture)와 흐르는 문화(Flue culture)가 있다. 라인 컬쳐는 모든 기준이 라인(, )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된다. 플루컬쳐는 흐름대로 대처한다. 특별히 교통문화에서 이 두 문화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서구는 라인 컬쳐이기에 신호등이나 도로의 선등 교통 법규가 분명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플루컬쳐로서 교통 법 보다는 차량의 흐름대로 운전을 한다. 신호나 차선이 중요하기보다는 차가 어떤 흐름으로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한국 선교사들이 동남아지역에서 운전하는 것은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현지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화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독일은 라인 컬쳐가 강한 나라로서 교통법규를 가장 잘 지키는 나라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는 라인 컬쳐보다는 플루 컬쳐가 좀 더 강한 나라로서 교통 법규를 유럽에서는 잘 지키지 않는 나라다. 그런데 대형 교통사고나 사망사고는 독일이 더 많다고 한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기에 다른 사람도 잘 지킬 것으로 생각하고 방어운전을 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내가 교통법규를 잘 안 지키기에 다른 사람도 잘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방어운전을 하기에 교통사고는 오히려 독일보다 적게 일어나는 것이다.

3. 문화의 세 가지 측면들

1) 인지적인 측면(Cognitive)

인지란 한 집단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하여 공유된 지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과정이다. 한국은 무지개를 일곱 색(빨주노초파남보)으로 보고, 미국은 여섯 색(빨주노초파보)으로 본다. 남인도의 텔레주족은 여러 가지 색깔로 보는 동시에 크게 두 가지 색깔(뜨거운 색- ~, 차가운 색- 노랑~보라)로 구분한다. 인지적인 면은 존재의 여부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문화적 지식은 자연 만물에 대한 믿음과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포함한다. 예를 들면 농사 경작법, 요리 방법, 조직체 운영 방법, 종교적 예절 절차가 있다. 문화적 정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저장된다. 컴퓨터 저장방법, 구전이나 연주, 춤 예식 등을 사용한다.

인지적인 면을 고려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때 성경의 지식 내용을 중심으로 전하는 것이다. 이 인지적인 측면은 삶과 세상의 의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지적인면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서신학, 설교,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가르친다. 인지적인 측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성적인 중산층 사람들에게 효과적이다.

2) 감정적인 측면(Affective)

한 집단이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태도, 미적 감각, 의상, 식생활, 싫고 좋은 것, 기쁨과 슬픔, 예술, 문학, 음악, , 연주, 건축술 등에서 표현된 문화이다. 복음을 전할 때 감정과 느낌, 태도를 고려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표현적인 문화 즉 음악, 미술, , 드라마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하는 명상, 신비주의, 사적인 경험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이 부류에 속한다.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토착적인 음악과 예술, 상징, 의식, 드라마, 춤 등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선교사는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찬양과 기도를 활성화해서 복음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 기도와 찬양은 이성적인 측면이 있지만 감정적인 측면도 강하기에 기도와 찬양의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에게 경외감, 신비감, 안정감과 소속감, 평안과 기쁨을 제공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 미움, 슬픔, 절망감으로부터 건져낸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적인 명상과 경건과 신비적인 것을 사용할 수 있다.

3) 의지적인 측면(Values, Effective)

이 측면은 가치, 도덕, 우선권이란 것과 관계된다. 인지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측면이 평가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문화는 질병의 원인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판단하지만, 어떤 문화에서는 악령에 의한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게 된다. 정서적인 부분도 판단하는데, 아름답고 추한 것, 사랑과 미움,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맞는 의상 등이 있다. 가치를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도덕적 규범, 규례, 의와 죄에 대한 규정, 성공과 실패에 대한 규범이 있다. 복음을 전할 때 의지적인 측면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의지적인 측면을 통해서 결단과 희생을 가르칠 수 있다.

 

4) 문화는 우선 인지적 차원(cognitive dimension)에서 복음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성경적이지 못한 부분들이 변혁되어야 한다. 문화적 전제들은 끊임없이 집단의 압력을 전달하기 때문에 문화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지만, 복음 사역자들은 문화를 기본적으로 존중하면서도 복음으로 문화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인지적 차원에서 복음으로 변화되어야 했다.

문화는 인지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차원(affective dimension)에서도 큰 차이를 일으킨다. 사람들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서를 표현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사람들은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덜 지식적이며, 일반의 인식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산다. 어떤 세대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다른 세대들에게는 지겨운 것이 되는 현상에 대해서 인지적 범주로 설명하려고 하기보다 정서적 특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정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들을 오해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문화는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때도 차이를 보인다. 이 평가적 차원(evaluative dimension)에서 문화는 고유하게 형성된다. 평가적 차원에서 성화되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알고 풍부하게 느낀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위한 실제적인 결단은 하지 않는다. 가룟 유다 같은 인물이 칭송되는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만큼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올바른 평가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게 된다. 인지적, 정서적, 평가적 차원에서의 문화적 다양성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전인격을 대상으로 한 총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5) 언어는 문화의 가장 중요한 면이다. 성경은 각각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져야 한다. 중세 교회는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였다.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대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 이후 많은 번역본들이 나오게 되었다. 성경 번역 사업은 선교의 한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문화를 이해하는 선교사에게 적용되어야 할 원리는 듣는 사람 중심의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원어를 읽던 원래의 독자들이 경험하였던 동일한 의미로 읽을 수 있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번역자는 문화에 대한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흰 눈, , 메뚜기 등의 동물이 없는 나라도 있기에 그것을 고려해서 번역을 해야 한다. 필요할 때 현지인의 의견을 듣고 현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현지인의 관점에서 번역할 필요가 있다.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을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4. 자문화 이해

방문하는 나라의 문화를 심층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자기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비교를 통해서 다른 것을 이해하게 되는데 우리가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잣대가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모든 문화는 하나의 문화에 불과하다는 상식이 없으면 자문화만 우수하다는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지고 만다. 자기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다른 문화를 이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자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종교를 이해해야 한다. 종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관, 세계관, 인생관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한국인에게는 유교와 무속이라고 하는 무교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1) 집단주의: 우리 공동체를 너무 좋아하고 우리를 못 떠나는 문화다.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부인을 일컬어서 우리 마누라라고 한다. ‘돼지우리할 때 우리울타리혹은 이라는 뜻이다. 한국인이 성을 먼저 쓰는 것은 개인의 개성보다는 자기가 속한 가문을 나타내는 성을 먼저 말함으로 성씨 집안에 속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우리가 한 집단이니 뭉쳐서 우리끼리는 다 봐주고 다른 집단은 타도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집단적 이기성을 띤 말이다.

2) 효 사상: 효 사상은 유교의 기본 윤리이다. 효 사상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가족이기주의를 가져온 면도 있다. 가족이기주의는 우리 가문이나 조상을 다른 가문이나 조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차등적 형태의 사랑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내 가족만 중시하게 되고 다른 가족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의식을 갖는다. 그래서 남의 집 일에는 간섭할 수 없다. “당신이 뭔데, 남의 집 아이를...” 하는 반응이 나온다. 월드컵 같은 거국적인 일이 있을 때 우리들은 하나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국가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민족 동질감에서 나오는 원색적인 열망일 뿐이다. ‘내 새끼, 내 새끼하는 것도 혈통에 집착하는 문화이다. 찌개 문화도 가족 집단주의 문화를 드러낸다. ‘한 지붕 밑에 산다. 한솥밥을 먹었다는 하나를 강조하는 집단주의 문화이다. ‘내 새끼문화가 낳은 부작용으로써 고아 수출을 많이 하는 것이다. 한국은 해외 입양이 세계에서 1위다. 한국인이 간혹 입양할 때도 건강한 아이를 선택한다고 한다. ‘내 새끼문화는 교육에까지 영향을 끼쳐 교육의 과열을 만들어 정부의 교육 정책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한다. ‘우리주의는 외국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대학원을 갈 때도 우리 대학 출신을 먼저 뽑는다. 이것은 우리끼리만 살자는 쇄국 정책이라 할 수 있다.

3) 체면 문화: 집단주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 윗사람은 체면을 세우고, 아랫사람은 눈치를 보는 문화이다. 선교에서도 이것이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여기고, 파송 교회에서 원하는 데로 선교하는 것이다. 설령 옳지 않는 것일지라도 파송교회의 뜻을 따른다. 논리나 사실보다는 정과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의 선교 사역 자체나 선교 전략을 보고 선교후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와의 관계로 후원을 한다.

4)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문화: 한국인은 공중도덕을 잘 지키지 못하고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다. 집단주의는 결국 나만 편리하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지금은 차츰 좋아지고 있다).

5) 귄위주의: 아래위를 따져야 마음이 시원한 문화이다. 유교의 영향 때문에 생긴 문화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첫 질문이 이름과 나이이다. 호칭에서도 , 누나, 오빠, 언니가 구분되지만 연하자를 부를 때는 그냥 동생이라고만 하면 된다. 연하자에 대한 관심이 적고 연하자의 권리가 무시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윗사람 중심의 문화다.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사건이 생기면 윗사람의 잘못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아랫사람의 잘못으로 돌린다. 한국이 세계에서 감투욕심이 가장 심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교단 총회에서는 총회장이 되려는 것은 하나님도 말리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 있다. 권위주의 문화이기에 존칭이 많다. ‘먹다라는 동사를 보면, “먹어라, 먹어, 먹지, 먹게나, 먹어요, 먹으시죠, 먹으오, 먹으십시오, 드시죠, 드세요, 드십시오, 잡수시죠, 잡수세요. 식사하세요, 식사하지시오.” 이 모든 동사는 상대방의 서열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사용한다. 이것이 권위주의 문화의 결과이다.

5. 타문화 이해의 기초

선교사는 문화적 갈등을 안고 사역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문화적 갈등 속에서 선교사가 바른 사역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1) 예수님을 본받는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본받음으로 문화적 갈등 속에서 이기며 사역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무기력한 아이로 태어나셨다. 누가복음 27절에 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이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이셨다. 예수님은 성인으로 오시지 않으셨다. 전문가나 통치자나 왕족이나 우월한 문화권에 태어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천한 가정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아이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학습자로 오셨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오시지 않으셨다. 평범한 어린이로 태어나셔서 부모에게 말을 배웠으며, 또래들과 놀이를 하며 자라셨다. 30년 동안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생활 방식을 배우셨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으며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인간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배우셨다. 선교사들은 예수님처럼 선생이 되기보다는 먼저 학습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문화는 개념의 틀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개념의 틀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규제하며, 경험을 해석하고, 타인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다. 회교도들은 남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성적 행위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의 경험과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각 사회는 특정한 가치와 규칙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사회생활의 개념, 즉 문화를 형성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약 6년 동안은 전적으로 타인에 의존해서 생활한다. 부모와 다른 어른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다. 이때 부모는 보상과 징계를 통해서 행동 양식과 가치관 및 생활 방식을 가르친다. 모든 개인은 일생을 통해서 학습과정, 곧 문화화의 과정을 겪는다. 선교사는 학습 과정 가운데 경험을 통하여 평가하고 행동하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3) 문화는 공유 문화라는 것을 이해한다. 개인은 독특한 개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념과 가치 및 생활 방식을 공유한다. 개인은 공유하고 있는 기준에 순응하며 강요당한다. 어떤 선교지 문화는 마을 공동체가 함께 하는 문화를 가졌다. 개인이 어떤 결정을 해서 자신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문화다. 사람들은 마을 전체의 영향을 받는다. 만약 여행을 위해서 마을을 떠난다면 그 마을에서 공동으로 하는 일에 빠지게 되어 벌금을 물어야만 한다. 그런 규약 때문에 여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가 이런 문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공유 문화를 이해하고, 그것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시간과 긴장을 이해 한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대륙, 나라, 사회마다 다르다. 남미사람들의 시간 개념은 서구인들과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임을 갖지 않는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약속시간 후에 모임을 시작한다. 시간에 맞게 모임에 오는 것은 때로 실례가 된다. 남미 에콰도르에서 만약 밤 8시에 파티를 한다고 하자. 그래서 8시에 정확히 도착하면 그 시간은 주인이 옷을 갈아입으며 파티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준비하는 시간을 방해했기에 정해진 시간에 오는 사람은 큰 실례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그들의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반대로 서구인에게는 15분 정도 늦는다는 것은 신뢰를 잃게 만드는 행위이다.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사업상 만나는 것이라면 다시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람들 중에는 시간 성향적인 사람이 있고 행사 지향적인 사람이 있다. 행사 자체는 별 의미가 없더라도 시간을 지킴으로 만족을 느끼는 문화가 있고, 반대로 시간에 상관없이 그 행사만 어떻게든 치르면 되는 문화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정시에 예배를 시작하고 정시에 끝나야만 만족한다. 아주 은혜롭고 좋은 예배라도 시간을 초과하면 그 시간을 초과했다는 것으로 예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게 된다. 반대로 어떤 나라는 30분이나 1시간 정도 예배를 늦게 시작하여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동안 드린다. 어떻게든 그날에 예배를 드리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가? 하나님은 시간과 행사에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행사를 중요시 여기실 뿐 아니라 시간 역시도 무시하지 않으신다. 선교사가 문화 속에서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행사에 대하여 성 육신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선교지 문화의 성향에 따라 그들의 성향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은 시간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 속에 살았더라도 선교지의 문화가 반대라면 행사 중심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보다도 남을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2:3-5).

5) 타문화 속에서 위기와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람마다, 문화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위기를 대처하는 성향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위기를 미리 대처하여 처리하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위기가 발생 했을 때 그때 가서야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선교지의 문화는 대부분이 후자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문화에서 살았던 선교사들은 후자의 상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에서는 회의를 한다면 의제를 미리 나눠서 생각해 오게 하고 그것을 가지고 나눈다. 그러나 반대로 선교지 사람들은 회의를 하면 의제를 다루기보다는 인사하고 삶을 나누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사용한다. 한 의제를 다루면서 자신의 경험을 비롯하여 의제와 상관없는 것들을 나눈다. 마침내 한가지의 의제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보낸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복음에는 주저 없이 단호한 헌신을 하고 사역에는 개방적이고 비 위기의식 성향을 가지라고 한다(10:1-12). 두 가지를 상황에 따라서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6) 선교사가 관찰하여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종족이 어떤 부류인지, 자신들 스스로가 부르는 종족명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은 무엇인지에 대해 발견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 종족의 그룹 행동과 활동들을 관찰하고 다음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도록 한다.

- 그들의 일상 일정표와 생활양태가 어떠한가? 즉 그들의 일정을 어떤 순서로 진행시키느냐 하는 질문이다.

- 그들의 주간 일정표는 어떠한가? 즉 그들의 주관 일정을 어떤 순서로 움직여 나가는 가의 질문이다.

- 그들은 계절에 따라 어떠한 일정표로 움직이는가? 즉 그들의 연간 또는 계절별 일정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 출생, 결혼, 죽음 같은 중요 행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 그들의 날마다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 그들이 왕래하며 주고받는 예의범절은 어떠한가? , 그들의 인사 예절, 선물을 주고받는 것 등이다.

그들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훈련시키는가를 관찰한다. 그들의 생활의식을 관찰한다.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어떤 의식들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들은 문화적 가치 기준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 사회의 핵심 가치체계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체제의 순위를 관찰한다. 시간을 지치는 것을 가치 있게 보는가? 그들의 생활의식, 신념, 위신 또는 교육을 더 중요시하는가? 그들의 관습과 행위들을 통제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 발견한다. 현지의 연장자들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와 지금은 시행되지 않는 과거의 전통, 격언, 전설, 종교적 신념, 유며 등을 알아낸다.

6. 선교와 상황화

1) 형식과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말로 강의하는 것은 형식이다. 형식이 없으면 의미를 줄 수 없다. 문화가 달라지면 형식을 적절하게 바꾸어주어야 의미가 전달된다. 언어 번역을 해주어야 한다. 글자가 편한 사람들에게는 강의안을 준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형식이 잘못되면 의미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미의 어느 지역에서는 요한 계시록 3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외치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여기서 누구든지 먹고 먹으리라. 두드린다가 문제가 된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이 문화에서는 도둑만 두드린다. 문을 두드려보고 사람이 안에 있으면 그냥 간다. 문을 두드려서 사람의 인기척이 없으면 도둑질을 한다. 이곳에서 도둑은 문을 드리는 자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고 표현한다. 예수님이 왜 문을 두드렸을까? 훔쳐갈 분인가? 예수님이 도둑일 수 있다. 그 사람들 문화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것 때문에 성경을 상황화 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남미 사람들은 손님일 경우에는 목소리로 외친다. “안에 누가 있는가?”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두드린다라기 보다는외친다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 ‘외치는 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 어떤 문제와 연관이 있는가를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상황화 작업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2) 양에 대한 상황화: 인도네시아의 이리안자에서는 짐승이 별로 없다. 유대인에게 양이라면 인도네시아는 돼지가 있다. 돼지는 유대인의 양처럼 이리안자 사람들에게는 가까운 동물이다. 상황화를 한다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돼지로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성경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양이라는 개념은 너무 큰 개념이다. 계시록과 창세기에 양의 의미는 크고도 심오하다. 비록 인도네시아에서 돼지가 그들에게는 유대인의 양과 같을지라도 성경전체적인 면에서 양을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현지인과 성경의 두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상황화를 해야 한다.

3) 구속적 유추: 복음을 전할 때 구속적 유추라는 것이 있다. 복음의 핵심적인 것을 소개시켜 줄만한 문화를 찾아서 그 문화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정글에서는 중앙정부 법이 아니라 정글 부족 법대로 산다. 살인한자는 사형, 도둑질하는 자는 집을 허문다. 간통하는 자는 허벅지를 뚫는다. 허벅지 안쪽에 활을 쏜다. 남자들이게는 허벅지에 활이 잘 들어가지 않기에 직접 화살을 쑤셔 박는다. 여자도 그렇게 한다. 두 명의 간통자의 네 다리를 다 뚫는다. 충격인 모습이다. 허벅지 혈맥을 화살이 뚫을 때는 피가 솟아난다. 몇 명은 피가 멎지 않아 죽기도 한다. 어느 날도 간통하다 잡힌 남녀가 모두 다리에 활을 박았다. 다음 날 동네에 난리가 났다. 어떤 남자가 자기 여동생을 뚫은 남자를 죽이겠다고 했다. 자기 여동생의 다리에 활로 뚫은 남자는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었다. 이 남자는 자기 여동생의 남편을 죽이겠다고 하였다. 동생이 밤새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그놈도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서로 싸우다가 동네 사람들이 중간에 말려 결국 해결을 보았다. 그 때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그 문제를 제기한 여자의 오빠가 너무 나쁘다고 하였다. 그것은 어제 형벌을 주었으면 됐지 오늘 또 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피 흘리는 문제를 가지고 또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피를 흘렸다는 것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용서가 된 것에 대해 또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부족법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 히브리서 928절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면 이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종교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구속적 일치를 찾아보면 어떤 문화에도 있을 수 있다.

 

IV. 세계관 이해(: 안점식. <세계관과 종교. 요약> 2008)

1.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전철에서 노약자가 아닌 사람들은 노약자 보호석에는 거의 앉지 않는다. 문화의 겉 표면에는 앉지 않는 행동이 있다. 왜 앉지 앉는 행동을 보이는가?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노인에게 양보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 노인들에게 양보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세계관이 있다. 그 세계관은 유교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효의 세계관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짐승인 소에 대해서 각 나라마다 다르게 대한다. 인도에서는 소를 신으로 본다. 그래서 경배한다. 한국인들에게는 소는 농사를 짓는 도구이다. 미국인들에게는 스테이크를 먼저 생각한다. 똑같은 소를 이처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과 연관이 있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 돈은 나의 것이고 나의 행복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지만 세계관이 바뀌면 돈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된다.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면 그 전에는 사람이 원수였지만 이제는 용서해야 하는 존재로 본다. 그래서 세계관은 행동을 바뀌게 한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세계관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똑 같은 것을 다르게 본다는 것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인데 그 문화의 중심에는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허버트 사이먼이라는 심리학자가 책 한권 써서 1978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책의 내용은 제한된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 모델에 관한 이론을 담은 조직론이었다. 사람이 마음의 결정을 못하면 행동을 못한다는 이론이다. 그 때 까지는 경제를 돈의 논리로 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경제는 돈이 아니라 마음의 결정으로 보았다. 결단하지 않으면 행동을 못한다는 것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목적으로 쳐다보면 음욕을 한 것이다. 살인을 하려는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살인이다. 마음의 결정을 한 것이다. 이전의 경제학은 돈이 있으면 물건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물건을 산다는 주장 한 것이다. ‘가치라는 것은 이것만큼은 희생할 수 없다는 것이 가치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쓰는 것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따라 산다. 가르치는 데로 목사가 살지 않는 것은 문제다. 이것은 가르치는 그 내용이 자신이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삶을 바꾸려면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말씀과 기도가 중요한지를 알지만 기도와 말씀이 생활 가운데 실천되지 않는 것은 가치로 까지 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함으로 행한다. 밥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도 가치가 있기에 실행한다. 사람은 변화된 가치관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바뀌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일치가 안 되는 것은 아직도 믿음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단지 고백일 뿐 세계관까지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관이 변해야만 믿음과 문화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한다. 선교지 부족사람들은 물을 그대로 떠 마신다. 선교사는 말한다. “물에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있어서 설사를 한다. 물을 끊여서 마셔라.” 그러나 그들은 물을 끓여 마시지 않는다. 그들은 물속에 있는 벌레를 보여 달라고 한다. “보여 달라.” 이 사람들의 세계관에는 미생물이 없다. 보이는 것만 생물이다. 이들의 세계관은 보이지 않는 벌레는 없다. 물을 끓여서 먹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할 때도 세계관이 안 변하면 일시적 변화만 일어나게 된다.

세계관은 단순하게 말해서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은 마치 안경처럼 우리의 몸에 밀착되어 있다. 안경을 쓴 사람은 사물을 볼 때 안경의 영향을 받는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 렌즈에 색깔을 넣으면 온통 그 색깔대로 보이는 것처럼, 그 사람의 세계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세상이 보인다. 대신 안경을 낀 사람은 안경을 보지 않는다. 안경을 벗기 전까지는 안경의 영향을 실감하지 못한다. 안경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볼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세계관은 안경과 같다.

세계관은 전체적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안경 렌즈에 빨간색을 넣으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고 파란색을 넣으면 온통 파랗게 보인다. 부분적으로 빨갛거나 파랗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온통 빨갛게, 혹은 온통 파랗게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도 유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유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고 범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범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유물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유물론의 증거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세계관이 지식 차원이 아니라 세계관은 내면화 되어 있는 체질과 같은 것이다.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어떤 문화 안에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인도문화에서 태어난다고 가정해보면 친구가 나쁜 짓을 일삼는데 오히려 그것을 자랑할 때 당신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다음 생에서는 개로 태어날지도 몰라!” 이 말에는 윤회, 인과업보와 같은 힌두교 세계관의 핵심 개념이 담겨 있다. 인도 사람들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힌두교 세계관을 학습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그러면서도 매우 당연하게 힌두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 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즉 인도 문화에서 윤회나 인과업보와 같은 관념은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로서 아무런 증명 없이도 받아들인다. 유교 세계관을 가진 한국인은 TV 드라마에 제사 지내는 모습이 나오면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교회 예배 장면이 나오면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감정을 느낀다. 이처럼 세계관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계관은 공부를 통해서 이론적으로 학습되기 보다는 어릴 때부터 경험한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인간은 경험들을 낱개의 파편들로 남겨두지 않고 서로 연관시켜서 하나의 폐쇄적 구조물로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관은 경험들이 이성의 합리화 작용에 의해서 무의식적, 무의도적으로 구조화된 것으로 모든 사람은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 배운 사람이나 덜 배운 사람이나 모두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세계관대로 살아간다.

인간의 세계관은 무의식적으로 밀착되어 있기에 세계관을 상대화하지 못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게 된다. 선교사가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갔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다른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고 어떤 경우는 매우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문화충격이다.

어떤 가치체계나 행동양식이든 근원을 파헤쳐 들어가면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행동양식은 가치체계에서, 가치체계는 세계관에서 나온다. 한국 사람은 왜 제사를 드리는가?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은 조상을 제사 지내는 것은 효 사상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죽은 조상이 제사를 흠향하고 후손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보기 때문에 가치 있게 여긴다. 그렇다면 가치체계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사후 세계에 대한 애니미즘, 또는 샤머니즘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애니미즘 사후관은 죽은 자의 세계인 저승과 산 자의 세계인 이승에 겹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죽은 자가 산자의 세계에 출현할 수 있고 산자가 죽은 자의 세계에 가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제사나 굿을 통한 초혼招魂행위(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일)가 가능하다. 반대로 성경적 사후관은 산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겹쳐 있지 않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산자와 죽은 자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초혼행위를 금한다(18:11). 그것은 죽은 자를 가장한 타락한 천사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국이나 혹은 다른 불교권 나라에 선교사들이 가서 때때로 물질적으로 도와줄 때가 있다. 그 때 현지인들은 감사하다는 표현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도움을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충격을 받는다. 처음에는 감사함을 잊어버렸나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적개심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 그럴 때 왜 이 사람들이 감사를 못하는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불교나 힌두교권에 가면 업보라는 개념이 있다. 업보의 세계관은 좋은 것을 쌓으면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나쁜 업을 쌓으면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도와준 사람이 자기 때문에 업을 쌓았기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업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해서 당연하게 생각한다. 남미의 가톨릭에서도 업보 사상이 있다. 연옥에 죽은 사람이 있는데 후손이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연옥에 있는 조상이 천국에 간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인사를 할 때 하나님이 갚아주시길 바랍니다(Dios Le Bendiga)”라는 인사를 한다. 우리나라에도 적선한다는 말이 있다. 선을 쌓는다는 의미다. “당신이 나를 도와주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을 위해서 선을 쌓는 것입니다라는 불교적인 업보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의 갠지스 강에 가면 수도자들이 있다. 이들을 힌두교에서는 샴야신이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 가족과 집 까지도 다 포기하고 구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구걸을 해서 먹고 산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이들이 구걸한다고 경멸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존경한다. “저 사람들은 구도자구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들이 탁발하는 것에 대해 관용적이다. 그러나 승려도 아닌 사람이 구걸을 하면 멸시를 당한다. ‘빌어먹을 자식은 가장 큰 욕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유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현세 기복적 세계관에서는 복의 개념이 재물을 의미하고 높은 관직에 나아가고 장수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것이라는 것은 복이 없는 것인데 이러한 유교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인 세계관에서 적선은 존경받을 행동이지만 유교적인 세계관에서는 빌어먹는 자로써 멸시를 받는 행동이다.

한국 교회의 단기 선교 팀이 인도에 가서 무언극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있다. 찬양을 한 뒤에 십자가라는 무언극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이 목을 떨구는 몸짓을 보여주었을 때 인도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도에는 요가 등의 신비주의적 고행문화가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이 문화에서는 그 정도 고행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고행 축에도 못 낀다. 죽은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는다. 심지어 땅에다 묻는 시늉을 해도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인도에서 요가 수행을 하는 사람을 요기라고 한다. 요기들을 물탱크 속에 집어넣고 며칠 만에 꺼내거나, 혹은 땅속에 파묻어놓고 며칠 만에 꺼내도 안 죽고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고방식이다. 그들의 문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도에서는 땅에 묻는 것만으로 죽었다고 간주하지 않고 땅에 파묻고 난 후에 그 위를 지근지근 밟은 다음 손바닥을 세 번 털어야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들의 세계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계관이 바뀌면 결과적으로 가치체계도 정반대로 바뀐다. 애니미즘 세계관에서는 제사는 효의 연장선에서, 조상의 음덕으로 현세적 복을 받는다는 면에서 가치 있는 행동이지만, 성경적 세계관으로 볼 때 제사는 타락한 천사와 교제하는 행위이자 우상 숭배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행동양식이 바뀌려면 가치체계가 바뀌어야 하고, 가치체계가 바뀌려면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2. 세계관의 속성

인간의 경험들은 서로 연관되어서 하나의 구조물로 형성된다. 이러한 구조화의 작업은 이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이성은 경험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해서 폐쇄적인 구조로 만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은 인간의 이성이 경험을 합리화시키면서 형성한 하나의 폐쇄적인 사고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 틀이 정교하게 조직적으로 서술될 때,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세계관을 별로 체계적이지 못하고 허술하게 피력할 때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개똥철학이라고 한다. 세계관은 철학의 원초적 재료가 된다.

타락한 인간은 이성을 진리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성은 경험한 것을 합리화시켜서 하나의 틀(frame)을 만들고, 이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편견 혹은 고집이라고 한다. , 자기의 사고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고집인 것이다. 과학 철학자들은 이것을 패러다임이라고 고상하게 부를 뿐이다. 이러한 속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될 때에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초자연적이고 초이성적인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인간들은 자신의 경험에 고착된 이성의 역할로 말미암아 이러한 초자연적이고 초이성적인 내용들이 자기의 기존 틀에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즉 자신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강하게 거부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강팍이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타락한 인간은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원래 고집스럽고 강팍하다(3:1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 반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경험이 많지 않고 이성의 합리화 작용도 어른들만큼 완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이미 세계관이 완성되어서 폐쇄적인 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용성이 강하다. 주일학교 출신들이 방황하다 결국 하나님께 돌아오는 비율이 월등히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일학교 때 보고 듣고 경험한 성경적 세계관의 경험의 단편들이 그들의 세계관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그러한 경험의 단편들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퍅한 인간일지라도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할 때가 있다. 사업이 망한다든지 건강을 잃게 되었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보통 사람들은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데,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에 부딪히게 된다. 그럴 때 세계관, 경험과 이성을 재료로 한 구조물에 균열이 가게 된다. 동시에 이 때야 말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때 전도자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균열의 틈바구니를 뚫고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역사하게 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회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여기서 세계관이라는 구조물에 균형을 일으키시는 분도 물론 하나님이시고 그 균열의 틈을 뚫고 말씀이 들어가서 역사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시고 전도자를 통해서 말씀이 역사하게 하신다. 이처럼 균열을 일으키고 회심케 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회심케 하는데 있어서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시다.

 

3. 세계관의 변화와 선교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세계관의 변화가 인간적인 지혜에서 나온 설득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바꾼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전도한다’, ‘선교한다고 하는 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관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세계관대로 살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세계관은 경험적으로 몸에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설득을 해서 경험적으로 몸에 배여 있는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을 인간적인 지혜로 설득해서 그 사람이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좋은 말솜씨로 전도하기는 어렵다. 상대방을 논리적인 말솜씨로 굴복시켰다고 하더라도 굴복시킬 수 없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졌다고 해도 자기 몸에 배여 있는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이겼지만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다. 세계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공부를 많이 한 똑똑한 사람이었고 인간적인 설득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 유행한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학파 등 헬라철학자들과 논쟁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17:18). 그는 당시에 이름 높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22:3). 유대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 왜냐하면 바울의 전도의 핵심은 곧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5)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10:17)는 말은 세계관 형성 또는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들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물론 이 때 환경을 통해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키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회심시키는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세계관이 균열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말씀을 전파하는데 힘써야 한다(딤후 4:2).

흔히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먼저 전하고 싶어 한다. 삼위일체, 대속, 구원, 영생, 부활, 등 핵심적 교리를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 사람이 먼저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가 세상 사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면 오늘날과 같은 종교다원사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실재를 설명하는데 가장 우월하고 유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과 가치체계가 이 세상또는 이 세대를 따르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태도로 관심을 보이며 질문할 것이다. “당신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벧전 3:15).

사도행전 148-22절에 기록된 루스드라의 사건은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있었던 일로 일반의 예상을 깨는 일이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고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적은 선교사들의 영웅담의 일부로 미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기적이 동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능력대결에서 승리하고도 능력전도는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능력 자체에 감탄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또한 사도들이 배척하는 다신론적 관점에서 사람들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11~13).

루스드라 사람들의 오류는 무엇인가? 그들은 바울이 행한 이적을 헬라 세계관 속에서 해석한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을 각각 제우스와 헤르메스신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인간의 형상으로 온 신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도는 옷을 찢으면서 만류해야 했다. 그리고 여러 말로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다(18). 아직 세계관이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독교적 현상을 비기독교적으로 해석했다. 문제는 기적적인 능력이 아니라, 세계관과 진리였다. 이 사건은 전도의 본질이 능력의 대결이 아니라, 진리의 대결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두 번째 예상 밖 반응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전 사도들에게 제사를 올리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을 돌로 쳐 죽이는데 가담하게 된다(19). 우리는 그들의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했고, 그 때문에 쉽게 흔들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선교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그들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고, 그들의 헬라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이적을 설명하기 거부하는 사도들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세계관이 변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원수로 살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이튿날 더베로 갔다(20). 성경은 더베에서 또 다른 이적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고 전한다. 기적 후에 일어나지 않았던 구원의 역사가 고난 후에 일어났다.

 

4. 세계관과 혼합주의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열심히 사역하면서 현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변화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이렇게 될 때 명목상 신자들이 되는 것이다. 알맹이는 안 바뀌고 겉껍데기만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다급할 때 나타난다. 그 사람이 충성스럽고 믿음 좋고 잘 섬기는 사람인지는 고난이 닥치고 문제가 생겼을 때에야 분명히 드러난다.

성경에서 어떤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청년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했다(10:17). 그는 매우 영적인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좋아보였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계명들을 말씀해 주셨다(10:19). 그는 매우 신실한 신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가치 체계와 행동양식은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신자의 모습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10:21). 부자 청년의 깊숙한 곳에 숨겨있던 물질주의 세계관이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드러났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10: 22). 신실하게 뵈는 이 부자 청년의 깊은 곳에는 물질주의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었다.

아프리카나 남미에서는 기독교가 그곳의 정령숭배 신앙과 혼합되어 있다.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해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마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오면 본질이 드러난다. 주일 오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잘 드리고 오지만, 오후에 자녀가 너무 아프면 마을의 주술사에게 찾아가서 주술로 병을 고치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물질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바알 신앙의 세계관과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지 오티스는 지상 명령을 완수하기 위하여 극복해야 할 세 가지는 힌두교와 이슬람, 그리고 물질주의라고 했다. 오늘날 모든 연령층의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주의적인 세계관과 혼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교회도 잘 나오고 기독교인으로서의 가치체계나 행동양식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깊숙한 곳에 뿌리 박혀 있는 세계관은 대중가요’, ‘스포츠’, ‘전자 제품’, ‘자동차’, ‘아파트 평수와 같은 용어로 대변되는 물질주의이며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주도하고 있다.

 

5. 세계관과 제자훈련

세계관의 문제는 개개인의 신앙의 성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랐느냐, 참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사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성경적 세계관이 우리의 삶에 많이 녹아서 행동과 판단의 원리로 더 많이 작용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모든 교회가 성숙한 것은 아니다. 에베소나 빌립보 교회는 성숙한 공동체였지만 고린도 교회는 어리고 미숙한 공동체였다. 교회를 움직이고 교회에서 결정내리는 판단들이 보다 성경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을 때, 그 교회는 성숙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어리고 미숙한 교회 공동체의 특징은 비성경적, 세속적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 성경적 세계관이 어떤 사회의 문화적 토양에 많이 녹아서 사회구성원들의 행동과 판단의 원리로 더 많이 작용할 때 우리는 이 사회를 성숙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성경적 세계관과 비성경적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다. 비성경적 세계관이 제거되고 점점 성경적 세계관이 삶의 원리로 자리 잡아 갈 때 성숙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제자훈련을 통해서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제자훈련을 성경공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만 한다고 세계관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는 지식의 변화가 아니라 체질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 + 이성 = 세계관의 공식이 제자훈련의 공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해서 비성경적 세계관을 파하는 것은 선교의 출발일 것이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주님은 주님이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28:18-20). 제자훈련에서 반드시 순종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적용해 봅시다로 끝나지 않고 함께 현장으로 가서 배운 것을 실천하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성공공부의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6:46-49).“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2:17).

 

6. 세계관과 내적치유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는 쓴 뿌리혹은 상처가 있다. 이러한 상처들은 성숙만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사람 관계를 일으키고 공동체의 순결을 오염시킬 수 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12;15).

성숙을 위해서 쓴 뿌리나 상처를 처리하는 것을 내적 치유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내적 치유는 반드시 심리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적 치유는 회심할 때, 예배, 기도, 찬송, 죄의 자백 등을 통해서 자연히 일어날 수도 있다. 오늘날 내적 치유 세미나가 성행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예배나 기도, 찬송 등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내적 치유의 또 하나의 문제는 자신의 심리를 분석함으로써 자기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예배와 기도, 찬송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맞추기에 그 결과 자연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내적 치유라 할 수 있다. 심리학적 방법을 성경적으로 응용하는 것은 일반은총적인 부분이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힌두교나 불교 등의 동양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아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으로 흐를 수 있다.

상처나 쓴 뿌리도 일종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경험을 하는데 그 중에 어떤 경험은 매우 충격적이어서 깊은 각인을 새기는 것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같은 의미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들도 역시 이성을 가지고 합리화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합리화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경험을 왜곡된 논리로 잘못 처리해서 상처나 쓴 뿌리를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이성의 인지작용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아서 매우 단순한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이러한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의미 있는 타자가 반복적으로 비성경적인 어떤 것을 경험하게 하고 아이가 이 경험을 비성경적인 논리로 처리했을 때 그것은 쓴 뿌리가 되어서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처럼 쓴 뿌리와 상처가 자신의 세계관, 즉 폐쇄적 구조물의 여기저기에 강하고 견고하게 박혀있으면 나중에 그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이 성경적 세계관을 세우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이처럼 잘못 처리된 경험을 처리하기 전에는 올바른 성경적 세계관이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상처가 제거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어떤 방법이든지 내적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심령 속에 흘러들어가는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세계관의 형성이란 다른 말로 세계라는 실재(Reality)에 대한 지도를 그려가는 과정이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인식능력이 전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자신과 자연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즉 인간은 실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인식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듣고 보는 세계가 허구라든지 엉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경험하는 세계 안에 있는 다양한 사물들이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왜곡되어서 인식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개가 존재하지 않는데 개를 인식한다거나 개를 소로 잘못 인식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건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그 영적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감각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 실재가 참된 의미의 실재라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5:21) 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도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6:9)고 말한다. 예수님도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나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13:14-15, 12:40)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각하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적 실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하여 제한되고 왜곡된 인식능력을 가지고 실재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지도를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성경적 세계관이 온전히 지도하면 모든 사람들은 이 실재를 온전히 그리지 못하고 왜곡시킨다. 물론 어떤 사람은 실재와 매우 비슷한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즉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 안에 비성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가 만든 지도의 잘못된 부분을 원본에 맞추어 보면서 고쳐나가야 한다.

힌두교나 불교는 감각하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영적실재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감각기관에 의해 경험되어진 것들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즉 그들은 인간이 감각한 사물이나 사건 자체를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의 다양성과 경험의 다양성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힌두교나 불교는 사물들과 사건들의 영적 의미, 즉 영적 실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예 감각적 실재도 부정해버린다. 그들은 영적 실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실재의 세계마저 부정함으로써 영적 실재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도를 고쳐야 한다는 의식도 없고, 무엇을 기준으로 고쳐야 할지도 모른다. 설사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해도 자신의 지도를 계속해서 수정하는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단한 자기부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스스로 만족하면서 이 작업을 멈추고 굳어져버린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 가면 자신의 지도가 완성되었고 또 완벽하다고 착각하면서 수정하는 작업을 멈춘다. 이것이 바로 경직’, ‘굳어짐이고 완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굳어짐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일어나면 더욱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마치 자기가 온전한 지도를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사람의 충고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열지 않고 잘못된 자기 확신 가운데 고집을 피울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다. 반면에 언제나 원본 지도를 갖다 대었을 때 잘못이 드러나면 기꺼이 수정하는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쓴 뿌리나 상처는 어떤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지도가 어떤 부분에서 현저하게 잘못 그려진 것을 의미한다. 쓴 뿌리의 제거, 상처의 치료는 기본적으로 회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회개란 자신이 그려온 지도가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지도를 기꺼이 수정하기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온전한 지도, 즉 영적 실재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잘못된 지도를 수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나의 실상을 볼 수 있도록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며, 또 세계의 참된 실상에 대해서도 볼 수 있게 해주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결단과 노력을 해야 한다. 잘못 처리된 경험은 성경적 경험에 의해서만 제거되어지고 치유되어지는 것이다. 잘못된 벽돌은 뽑아내어지고 제대로 된 벽돌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적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세계관의 변화는 오직 은혜와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7. 세계관과 영적 전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것은 세계관의 충돌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충돌에는 영적 싸움이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세계관들에 역사하고 있는 악령의 세력을 결박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닐 엔더슨은 영적 대결을 진리 대결이라고 하였다. 티모티 워너는 영적 대결은 곧 세계관의 대결이라고 말한다.

사단은 인간의 말로 기도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껍데기는 바뀌어도 알맹이는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에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힘입어 복음을 전해서 비성경적인 세계관들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반드시 사단의 저항을 받게 된다. 따라서 세계관의 대결, 영적 대결에는 반드시 영적 세력들 간의 능력대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력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표적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회심케 하는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출애굽기 7-15장에 나타나는 애굽 술사와 모세의 능력대결 배후에는 애굽의 정령숭배신앙과 여호와 신앙의 대결이 깔려 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타나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엘리야의 능력대결도 바알 신앙과 여호와 신앙의 대결이라는 세계관의 대결이 전제되어 있다.

세계관의 대결은 단순히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대결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세계관과 비성경적 세계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비 성경적 세계관은 기독교 안에도 깊게 뿌리내릴 수 있다. 선교가 영적 대결이고 세계관의 대결이라면 선교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교회 내부로부터이다. 교회가 건강한 성경적 세계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온갖 잡다한 세계관과 세속주의, 물질주의의 혼합된 토양에 뿌리를 박는다면 선교도 그 토양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선교사는 자기 자신의 세계관, 자기 문화의 세계관을 이식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선교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자기 문화의 세계관을 명확히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관의 싸움은 그리스도인 내부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바알 신앙을 계속해서 훼파하고 여호와 신앙을 구축해야 한다.

 

8. 세계관과 문화변혁

선교의 목적은 영혼 구원은 물론 나아가 문화변혁에까지 이른다. 문화에 나타나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가 세계관에서 나온다면, 문화변혁을 위해서는 세계관을 변화시켜야 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 형성된 문화는 본질적으로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인간 문화에는 일반계시에 대한 반응,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의 반영,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어떤 문화든 그 안에 있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에는 일반은총적인 것이 있고,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이 반영되어 있으며,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이 섞여 있다.

인간 문화에 있는 비성경적 행동양식과 비성경적 가치체계는 비성경적 세계관에서 나온다. 비성경적 행동양식과 비성경적 가치체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 인간은 명백히 죄라고 인식하면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비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정당화된 죄를 짓는다. 우상숭배, 인신제물, 조상 제사, 여성 할례, 일부다처제, 축첩행위, 낙태, 동성애 등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비성경적 세계관을 다른 말로 말하면 거짓말이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시킬 때 왜 거짓말을 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 때문에 여아가 태어나면 영아를 죽게끔 방치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러한 비성경적 행동 양식은 남아 선호하는 가치체계에서 비롯되었다. 더 파고 들어가면 남존여비, 천존지비, 양존음비와 같은 음양적 세계관이 그 밑바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남아만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애니미즘 사후관이 더해지면서 이러한 행동양식이 나타난 것이다.

선교사역은 진공상태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문화가 있는 곳에 들어가 이미 존재하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의 토양 안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불러온다. 성경도 히브리 문화나 헬라 문화 안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성경에 담긴 메시지는 문화와 시대, 인종을 초월한 원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는 성경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성경적 가치체계와 성경적 행동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떤 문화에 복음이 전해질 때는 행동양식, 가치체계, 세계관 차원 모두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것은 성경적 절대주의 관점에서 성경이 문화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행동양식, 비성경적 가치체계, 비성경적 세계관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인간 문화에 나타나는 죄를 지적한다는 뜻이다.

 

9. 인간의 타락과 문화형성

인간의 타락 사건이 불러온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세 가지는 1) 인식 능력의 전락, 2) 도덕적 능력의 전락, 3) 자연계의 전락이다.

 

1) 인식 능력의 전락

타락하기 전에 인간은 온전하고 총체적인 인식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뒤 처음으로 인간에게 시키신 것은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다(2:19). 히브리적 의미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걸맞은 이름을 짓는다는 뜻이다. 타락 전 아담에게는 사물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 즉 지혜가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이 지은 이름을 모두 승인하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피조물을 관리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줄 권리도 주신 것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주권자로부터 관리자로서의 권위를 위임받는다는 뜻이다. 즉 이름을 부여하는 자가 권위자라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부모에게 자녀를 관리하는 권위가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곧 지혜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력과 지혜를 잃어버렸다. 존재와 인식은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다. 존재의 전락은 인식의 전락을 불러온다. 성경은 올바른 존재 상태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통찰력이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1:7, 9:10, 111:10). 지혜는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며,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인식 능력이다. 이러한 인식 능력은 '하나님 경외'라는 존재 상태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존재와 인식의 밀접한 상관성은 일상생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내 존재 상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즉 영적, 도덕적, 감정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을 때, 성령 충만함이 내 지정의를 감싸고 있을 때에는 내 통찰력과 판단력이 탁월해져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우 지혜로워 보인다. 반대로 내존재 상태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지 못할 때는 스스로 돌아보아도 내 생각과 판단, 결정과 행동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재상태가 근본적으로 전락했을 때 인간의 인식 능력도 근본적으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다.

존재는 언제나 관계 속에 있다. 인간은 결코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부모님의 관계 안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부모 자식의 관계가 있고 형제자매의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존재 상태란 곧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올바른 존재 상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그 결과 나 자신, 그리고 타인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경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가장 정확하면서도 함축적으로 묘사하는 개념이다.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관계하는 존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과도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에 있는 만물에 대한 통찰력도 상실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반영되기 때문이다(1:20).

존재를 회복하면 인식도 회복된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기 때문에 왜곡하여 인식한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성령 충만할수록 제한이나 왜곡 없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 영혼과 몸이 온전히 구속을 받아서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면(3:21) 어떤 제한이나 왜곡 없이, 마치 수건을 벗은것처럼 명백하게 사물을 인식할 것이다(고후 3:14-18).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온전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인간의 타락은 인식 능력의 전락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자신, 자연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 그리고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지식을 상실하고 심지어 인간 존재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통찰력까지 잃어버렸다. 인간이 왜 태어나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2) 도덕적 능력이 전락

인간에게 죄성이 들어오면서 부당한 욕구가 생겨났다. 이 욕구는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인간 사회를 유지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통제되어야 한다. 원래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양심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소리대로만 행해도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았을 것이다.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율법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양심의 기능은 제한되고 왜곡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하다. 양심의 소리를 잘 듣지 못할 뿐 아니라 설사 양심을 따랐다고 해도 하나님의 법에 잘 맞지 않는다. 양심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일 뿐이다. 그러나 양심의 기능이 제한되고 왜곡되었어도 기능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거나 제거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느 정도 양심이 작용하여 나름대로 윤리, 도덕, , 규범, 관습 등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문화의 세 가지 층에서 중간층에 속하는 가치체계이다.

 

3) 자연계의 전락

전락한 자연계 원리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요약된다. 인간은 원래 자연계의 피조물에 대해 주권이 아닌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은 하나님의 영적 권위에 복종하고, 관리자로서 영적 권위로 피조물을 다스렸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유기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곧 자연계의 전락을 불러왔다. 인간이 타락했는데 왜 자연계까지 전락되는가? 이것은 곧 권위의 원리다. 권위자가 타락하면 그 권위 밑에 있는 모든 존재가 전락되고 고통을 겪는다. 자연계의 피조물로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 하며, 고통 받고,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고대하고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8:19-23).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3:17-18).

인간의 타락과 그로 인한 자연계의 전락으로 말미암아 피조세계를 꿰뚫는 원리도 변화하였다. 전락한 자연계는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인간과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이 영적인 권위에 근거해서 다스리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근거해서 지배하고 굴종하게 된 것이다.

노아 홍수 시대의 대홍수 때 자연계가 또 한 번 전락했다. 대홍수 후에 인간은 이전 문명을 모두 상실하고 갑자기 원시 상태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더욱 전락한 자연은 인간에게 더욱 위험한 곳이 되었다. 인간은 전락한 자연환경에 적합하도록 의식주를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의식주의 독특한 양식은 자연환경의 독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건축 양식에서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는 지붕 경사가 가파를 수밖에 없다. 의복 양식은 열대 지방에서는 남녀 구분할 것이 없이 노출이 심한 옷이 대부분이다. 음식 양식은 추운 지방에서는 열량이 많아야 하기 때문에 돼지비계 같은 것을 직접 섭취하며 매우 귀한 음식으로 간주한다. 인사법도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음악이나 미숙의 양식도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독특한 자연환경은 문화의 세 가지 층에서 가장 바깥쪽에 위치하는 행동양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0. 결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계관 운동을 통해 체질을 변화시켜야 할 영역이 많다. 그 중에 한국교회에 나타난 비성경적 세계관은 권위주의와 성공주의다. 권위주의의 뿌리는 샤머니즘과 유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래에 와서는 군사문화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샤머니즘에서 샤먼의 권위는 주술적 능력에 기초한다. 샤먼은 신의 능력을 조종하여 인간에게 현세적 유익을 가져다주는 메커니즘적인 기술을 터득한 자로 여겨진다. 이러한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한국 기독교에는 능력숭배와 능력에 따른 권위주의가 만연한다. 권위주의의 또 다른 뿌리는 유교이다. 유교적 가부장적 서열의식은 교회에도 팽배하다.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도 위계와 질서, 신분과 직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의 또 다른 병폐는 성공주의다. 성공주의도 샤머니즘과 유교에 영향을 받았다. 통속적 의미에서 성공이란 한마디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풍요와 다산을 골자로 하는 현시기복적인 샤머니즘 신앙과 입신양면이라는 유교적 영향의 연장선 위에 있다. 샤머니즘과 유교는 현세적이며 힘 지향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샤머니즘은 능력을 지향하고 유교는 권력을 지향한다. 권위주의와 성공주의는 한국 교회의 비성경적 세계관이 자라나는 온상이다.

그러므로 세계관 운동은 지식을 넘어 갱신운동, 생활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지도자들은 세계관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선교사들이 먼저 자신의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세계관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으로 선교할 때 참다운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타문화의 경험이나 다름에 대한 경험이나 Case가 있으면 나누어 보자.

2. 선교사가 문화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선교사들의 문화충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실제 경험이나 들은 예가 있으면 나누자.

4. 문화는 행동양식> 신념, 가치> 세계관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이해되는 부분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무엇인가?

5. 세계관이 무엇이며, 세계관의 중요성은 어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