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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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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영성/일상의 영성

선택

후앙리 2020. 4. 8. 13:49

 

때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을 때가 있다. 당신의 정체가 좌파냐? 우파냐? 분명히 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도 있다. 진보가 옳으냐, 보수가 옳으냐에 대한 선택을 요청받을 때도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과 같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가 아니라 둘 다를 인정하신 것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 것이다. 예수님만이 진리이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상황에 따라 옳을 수도 있고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에 굳이 극단적인 하나를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함이 필요하다. 사물을 판단할 때 유연성이 필요하다.

현대 의학과 한의학이 어떤 것이 더 좋은가?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의학을, 어떤 사람은 현대 의학을 더 신뢰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 사람의 경험이 한의학으로 효험을 경험했으면 한의학이, 현대 의학으로 효험을 받았으면 현대 의학을 신봉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개가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로 한의학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을 현대 의학에서, 현대 의학에서 고칠 수 없는 병을 한의학에서 고칠 수 있다고 본다. 현대의학은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된 치료 방법을 추구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실험에 의해서 대부분 부작용이 없을 경우에 그 치료법(약을 포함)을 사용한다. 현대의학은 일반화시킬 수 있는 방법만을 사용한다. 그에 반에 한의학은 사람의 체질과 상황이 다 다르기에 그 중에 특별히 치료가 되는 사람에게 맞는 때가 있다. 그 치료는 때로 현대의학에서 치료하지 못한 것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그 약과 치료 방법이 그 사람에게는 최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일반화시키기에는 현대 의학보다는 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의학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한의학과 현대의학은 서로 보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 어떤 때는 현대의학이(수술이 항생제를 써야 하는 경우는 당연히 현대 의학), 어떤 때는 한의학이 그 병이나 사람에 따라 더 효과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의학적인 부분에서는 내가 잘못 알 수 있는 부분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내가 경험한 것이 이런 것이니 이것 또한 나의 입장이라는 이해를 부탁한다).

이처럼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을 수도 있고 때로 그것이 죄가 될 수도 있다. 유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술(특히 맥주나 포도주)을 적당히 마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한국 상황에서는 때로 죄가 된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는 것이 죄냐, 혹은 아니냐를 따지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요구라는 것이다. 술은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때는 마셔도 된다고 하고 어떤 때는 마시지 말라고 한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문화나 습관이나 전통, 사상을 볼 때 유연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 아니면, 저것만을 선택하려는 그런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각, 둘 다 맞다, 라는 유연성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코로나19시대에 교회에서 예배를 꼭 드려야 하느냐? 혹은 드리면 사회에 해가 되기에 안 되는가? 답을 찾기 보다는 우리의 사고를 넓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예배를 모여서 드려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교회에서 드리지 않고 가정에서 드려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서로 이것이 옳다, 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더 큰 잘못일 수 있다. 사탄은 이런 사상의 선택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전략이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 되는 것이다.

 

유연성에 대한 하나의 예화가 있다.

네 마리의 원숭이를 한 방에 넣었다. 방 가운데에는 큰 막대기가 세워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바나나가 한 다발 묶여있었다. 배가 고픈 몹시 고픈 원숭이 한 마리가 바나나 한 개를 잡으려고 열심히 막대기에 기어올랐다. 그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는 순간, 머리 위에 설치된 샤워기에서 찬물이 쏟아졌다. 그 원숭이는 비명을 지르며 막대기를 내려왔다. 네 마리 원숭이들이 차례로 바나나를 얻으려 시도했지만 모두가 똑같이 차가운 물세례를 받으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놀라서 내려왔다. 반복되는 물세례를 받게 되자 마침내 원숭이들은 바나나 먹기를 포기했다. 이렇게 길들여진 원숭이들 중, 원래의 네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실험에서 빼고 새로운 한 마리를 추가했다. 이 순진한 새 원숭이가 막대기를 향해 올라가려고 들자 다른 동료 원숭이들이 다가가서 잡아 끌어내렸다. 얼마 후 그 원숭이는 막대기를 올라가지 말라는 동료들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그 새로운 원숭이는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거나, 차가운 물벼락을 받지도 않고 바나나를 얻으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찬물 세례에 길들여진 세 원숭이들은 하나씩 새로운 원숭이로 차례 교체되었다.

새로 들어 온 원숭이들은 이미 들어와 있는 원숭이들로부터 막대기에 올라가지 말아라는 같은 교훈을 받았다. 새로 온 원숭이들 중 어느 한 마리도 막대기에 꼭대기에 오르는 일이 없었으며 막대기에 달린 바나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더 이상 차가운 물은 쏟아지지 않았다. 왜 원숭이가 막대 오르기를 단념해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들은 모두 완전하게 확립된 전례를 존중한 것이다. 샤워기가 치워진 뒤에도 원숭이들은 막대기에 오르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차가운 물세례를 받은 원숭이가 한 마리도 없는데도 그 막대기는 터부시 되었다. 더 이상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바나나에 눈길도 주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원숭이 한 마리가 교체되었다. 새로운 원숭이는 바나나를 보자 그것을 잡으려고 막대기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원숭이들이 겁 없이 오르는 새 원숭이를 잡아채며 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새 원숭이는 왜 바나나를 두고 오르지 못하게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신입 원숭이는 다른 세 원숭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신입 원숭이는 눈에 보이는 바나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신입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가 자는 틈을 타서 막대기를 기어올라 마침내 바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은 더 이상 쏟아지지 않았다.

-자기만이 생각과 경험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과 현재의 습관과 전통에 대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유연성을 갖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나의 생각과 잣대와는 다를지라도 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는 관점을 갖는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전통과 문화를 고집하는 것이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내게 유익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