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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2년 4월 15일(금) 본문

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2년 4월 15일(금)

후앙리 2022. 4. 15. 04:30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137)

+ 말씀설명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은 이스라엘에게 조롱하여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이방 땅에서 거룩한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대신에 바벨론에 대한 저주의 노래를 한다. 바벨론은 멸망할 것이며, 멸망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조롱에 응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멸망하기를 노래해야 한다. 물론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하는 책임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시에 있다.

+ 묵상과 적용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노래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합당한 노래와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의 죄와 악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상의 죄와 악이 멸망 받을 것을 노래해야 한다.

나는 거룩한 하나님을 노래하는가? 죄와 악을 노래하는가?

죄와 악을 떠나기 위해서 결단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는가?

 

+ 오늘의 기도

1. 오직 하나님만을 노래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소서.

2. 라틴 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마약밀매와 관련되어 일어나고 있는 살인과 폭력 등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강력하게 근절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하도록 기도하자.

+ 성경본문(137)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함께 밥 먹기

코로나19가 시작 된지 2년 동안 교회는 대면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었다. 주일 오전 예배는 온라인을 비롯해서 대면예배를 드리긴 했지만 다른 예배는 코로나 발생 1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에서 함께 밥을 먹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오후에 드리는 예배(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교회는 주일 오후예배를 드린다)도 드릴 수 없었다. 반갑게도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오는 5월부터 교인들이 주일날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오후예배도 2년 만에 대면예배로 재개된다고 한다.

교회의 기능 중에 교인간의 친교의 기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배는 온라인으로라도 드릴 수 있지만 친교는 온라인으로 한계가 있다. 청년들은 친구나 연인 사이에 각자 집에서 음식을 시켜놓고 인터넷을 통해 함께 영화를 본다든지, 혹은 친교모임을 한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서 나누는 교제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한계가 많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년 만에 교회에서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마을 공동체, 교회 공동체, 가족 공동체로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성경은 사람이 공동체로 함께 사는 것을 중요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은 공동체의 문화의 배경가운데 기록되었다. 공동체란,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며 사는 관계이며, 모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마을이 한 공동체였다. 마을의 애경사나 어떤 행사가 있으면 모두가 한 가족처럼 모여서 함께 일을 한다. 설날에는 마을 모든 어른들께 세배를 갔던 기억이 있다. 세배하는데 하루 온종일의 시간을 다 보냈다. 세배하러 가면 집집마다 음식을 내놓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의 도시에는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함께 더불어 살기 보다는 각자 개인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교인들을 심방하는 것은 중요한 교회의 행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심방이 많이 줄어들었다. 서울의 강남에서 교인들의 집으로 심방을 가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목사님이 심방을 가더라도 교인을 카페나 식당에서 만날 뿐이다.

공동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밥을 함께 먹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 밥 먹는 사이야하면 친하다는 뜻이다. 미운 사람과는 같이 밥을 먹지는 않는다. 한편, 밥을 먹으면서 화해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한다. 어느 정치인은 전에 어떤 대통령이 반대당인 자신을 초청해서 밥을 같이 먹었다고 했다. 밥을 얻어(?) 먹고 나서 그 대통령에게 심하게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밥은 위대한 힘이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있다. 일용할 양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없이는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런 양식을 함께 먹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바로 성찬식의 기원이 되었다. 세례와 성찬식이 교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예식이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밥을 지어 먹이셨다.

오늘날 노숙자들에게는 밥 한 끼가 참으로 중요하다. 그들이 노숙자가 된 것은 먹을 수 있는 밥이 없어서 노숙자가 된 것이다. 노숙자가 되어서도 밥을 먹기가 어렵다. 그들에게는 밥이 생명이다. 밥이 없으면 죽는 것이다. 노숙자들에게만이 밥 한 끼가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생명이 되는 동일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건강을 나누는 것이다. 정성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밥 먹기 위해 일한다.’는 직업을 비하하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 밥을 먹기 위해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밥을 먹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만큼 비참한 상황은 없다. 그래서 쌀을 나누고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최고로 대우해 주는 것이 된다.

한국교회가 점점 쇠퇴해지고 있다. 세상에서 교회의 권위도 잃어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나는 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교회가 밥을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 밥을 퍼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교인들이 이웃에게 밥을 대접하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자기 집을 개방하여 이웃에게 밥을 대접한다면 전도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친척들도 집에 초청하지 않는 이 시대에 이웃이 자기 집에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한다면 사람들은 마음을 열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한국교회의 모든 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씩 노숙자들에게 밥을 대접한다면 아마도 노숙자들의 배고픔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전도하기위해서만 밥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밥을 나누는 것은 이웃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며, 이웃과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교인들은 단순히 삶과 사랑을 나누는 차원에서 세상과 밥을 나눈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오늘 내가 밥을 대접할 사람은 누구인가? 미워하는 사람,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밥을 먼저 대접해보라. 그러면 내 마음이 풀리고 상대도 마음을 열 것이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며,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밥 한 끼의 위력을 생각하며 밥 잘사는 교인이 되어 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