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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5년 4월 21일(월) 본문

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5년 4월 21일(월)

후앙리 2025. 4. 21. 05:21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

 

+ 말씀 설명

예수님의 시신이 장사되고 사흘이 지난날 두 명의 마리아와 살로메 여인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다. 무덤으로 가는 중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염려하였다. 그때 당시의 무덤은 동굴에 넣고 돌로 막아놓았다. 도착하여 보니 아주 큰 돌이 굴려져 있었다. 깜짝 놀란 상태에서 한 청년(천사)너희가 찾는 예수는 부활하여 여기에 없다라고 하였다.

죽은 자를 찾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예수님은 살아나셨다고 하였다. 여인들은 죽은 자를 위한 일을 하려 했고 걱정과 관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이미 죽은 자를 산자로 만드셨다.

사람은 죽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미 살리시고 살리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 그 살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 묵상과 적용

나는 죽은 자들에게 대한 일에 관심과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 선교적 실천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살리시도록 의지 하는 것,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생명을 살리는 일 등)

 

+ 오늘의 기도

1. 부활의 소망으로 부활의 참된 증인으로 살게 하소서.

2. 태국의 상황과 문화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복음의 진실성을 담은 신학이 잘 세워지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현지 사역자와 선교사들의 협력이 태국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 성경 본문(16)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죽은 자와 부활

며칠전에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와 장례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나라의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이 경황이 없는 사이에 바가지를 씌우는 풍토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특별히 유족들의 고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이용해서 비싼 용품을 고르게 한다는 것이다.“마지막 가는 길이기에 잘 해 드려야지요하면서 저렴한 용품을 사용하면 불효자가 되는 것처럼 눈총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조회가 생겨서 이런 문화를 많이 개선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죽은 사람에게 좋은 것을 해 드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살아계실 때 단 한번 사용하더라도 비싼 옷을 입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은 후에 비싼 옷(수의)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한 번 더 찾아보고, 한 번 더 맛있는 음식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죽은 후에 제사를 잘 드린다든지 혹은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사정이 있어서 살아계실 때 효도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후회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잘 해드려야지 죽은 후에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명이 있을 때, 즉 살았을 때만 느끼고 사는 존재이다. 이것은 너무 평범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묘지를 호화롭게 한다든지, 납골당에 찾아와서 고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문화가 있다. 죽은 자를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기리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그분의 좋은 뜻을 기리며 사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는 것은 이미 죽은 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이후의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부활을 주신다. 그 부활을 생각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향품을 준비하여 간 것은 아마도 그 때 당시에 고인을 존중하고 고인을 기념하는 문화였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못했다. 부활하실 주님을 상상조차도 못했다. 그래서 죽은 자에 대한 그들의 문화 속에서 죽은 자를 기념하는 행동을 하였을 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혹은 지인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기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고 우리도 죽은 후에 부활한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죽은 자를 생각할 때 부활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부활 후에는 하나님이 완전한 형상으로 회복시키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것을 믿어야 한다. 부활의 관점에서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나 기념을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지만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은 여인들과 같은 믿음이 아니라 영원히 산다는 부활의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장례문화나 장례식, 그리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기념이나 추도가 부활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때 죽음은 한편으로 소망이 된다. 죽음은 분명 슬픔이고 절망이지만, 그러나 부활은 그 죽음을 소망되게 한다. 부활의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천사의 말을 되새긴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주님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도 죽음이 있지만 부활이 있다. 죽음과 같은 아픔이 있지만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