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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2-4강 교회의 선교사명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2학기

제 2-4강 교회의 선교사명

후앙리 2020. 4. 8. 21:58

I. 선교하는 교회들의 다양성

II. 역사적 교회의 특성

III. 교회란 무엇인가?

IV.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속성)

V. 교회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

VI. 선교하는 교회의 모델

 

I. 선교하는 교회들의 다양성

 

1. 선교로 어려움을 당한 교회

몇 년 전에 대구의 D교회에서 선교사와 선교 재정문제로 인해 불화하게 되었다. 재정 문제 때문에 교회와 선교사는 몇 개월 동안 서로 비방을 하는 가운데 많은 다툼을 하고 나서 결국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 후 교회는 선교사를 다시는 돕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교회와 선교사가 서로 싸우는 가운데 선교에 동참했던 교인들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교회가 선교에 동참하지 않기로 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크나 큰 손실이다. 이런 모든 결과는 교회가 선교에 대한 바른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선교사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에 대한 사명과 선교에 동참하는 방법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런 어려운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2. 잘못된 선교 동기를 가진 교회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선교사

P 선교사가 태국의 선교사로 갔다. 파송 받을 때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로부터 후원 받지 말고 파송 교회에서만 후원을 받으라고 했다. P 선교사는 파송교회의 요청대로 다른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고 태국으로 갔다. 태국으로 간지 3개월 만에 파송교회는 갑자기 파송을 중단하겠다고 선언 했다. P 선교사는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다시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같은 선교단체의 태국 선교사들이 함께 도와 선교를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선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3. 전주 안디옥 교회

전주 안디옥 교회는 개척하는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출발하였다. 교회 예산의 70%를 선교비로 사용하였다. 선교비로 인해 교회 건축을 할 비용이 없어 깡통으로 만든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일면 깡통교회라고 불렀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의 간식 비는 없었다. 교회 관리집사도 없었다. 수입예산은 없고 지출예산만 있다. 그러나 교인이 수 천 명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였다. <바울 선교회>라는 선교 단체를 만들었다. 다른 교회가 하는 사회 참여, 구제 학생 장학금, 개척 교회 돕는 일, 교인들의 어려움을 돌보는 일 등도 함께 하였다. 나중에 건축도 넉넉하게 하게 되었다. 기존의 교인들도 목양을 잘 받을 수 있는 건강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4. 성덕교회

성덕교회는 서울 동작구에 있는 장년 300~4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다. 선교하는 분위기가 전체 교인들에게 가득 차 있는 교회이다. 여러 명의 선교사가 배출되었다. 단독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0여명이 되는 협력 선교사를 후원한다. 매년 단기 선교를 간다. 일 년 동안 준비해서 한곳으로 20년째 가고 있다. 이 단기 선교는 비거주 선교와 같다. 의료팀과 여러 종류의 다른 봉사자 팀으로 간다. 갈 때마다 한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운다. 협력하는 선교사가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가서 교회 개척을 할 수 있도록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사역을 한다. 개척된 교회가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5. 교회가 선교하는 이유

교회가 선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교를 왜 하는가? 선교의 동기가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인가? 선교를 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교회가 선교하니까 우리 교회도 선교한다는 생각으로 유행에 따라 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있다. 선교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보는 것이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다른 할 일이 없어서 선교사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어떤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과정으로 사용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가기도 한다. 어느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 센터를 세워 교인들의 자녀들을 그곳으로 유학을 보내려고 한다. 그 교회가 선교센터를 짓고자 하는 곳은 유럽이었다. 교회의 이름을 내거나 자랑하기 위해서 선교를 하는 교회도 있다. 선교사를 도와 선교지에 센터를 짓고 나서 나중에 자기 교회 것이라고 선교사를 내 좇는 경우도 있다.

II. 역사적 교회의 특성

 

전주 안디옥 교회를 개척하셨던 이 동휘 목사님은 교회가 선교하지 않는 것은 중직자들이 교회의 재정을 염려해서라고 하였다. 목사님은 교회 중직자들이 예수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선교하다가 교회 재정이 부족하면 중직자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교회의 현실이다. 교회 재정이 마이너스여서 재정이 더 나아지면 선교한다는 교회도 있다. 선교에 대한 비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선교의 비전이 부족할까? 교회론과 목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론의 본질 이해에 대한 여러 유형이 있다. 여기서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본다. 네 가지 유형이 잘 되었고 잘 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강조점이 다르다는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1. 전통적 교회

1) 교인의 양육과 목양이 초점이다. 양육이란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2) 교회 자체 부흥이 교회의 중요한 목표다. 자신의 교회가 중심이 된다.

3) 사회 참여나 교회의 세상에 대한 사명 보다는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이 목표다. 회개와 믿음을 강조한다.

4) 교회의 존재론적 역할이 중요하다. 성과 속을 구분하고 교회만이 거룩한 곳으로 생각한다. ‘교회 존재 자체에 교회의 목적을 둔다. 교회는 존재함으로 위대하다. 그러기에 가톨릭처럼 교회 건물과 외형을 중요시 여긴다. 이런 교회들은 교회가 곧 성전이다.

5) 교회의 예배의 기능을 중요시 여긴다. 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신앙이 좋다고 평가한다. 모든 것이 예배 중심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예배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다.

6) 교회의 기능인 예배, 봉사, 교육, 교제, 선교가 교회가 해야 하는 동일하게 중요한 일들이다. 이런 교회는 선교참여가 대체적으로 약하다.

 

2. 성장 중심의 교회

1) 이런 유형의 교회는 성장이 목표다. 교인이 많아지는 것과 교회가 많이 개척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회의 성장이 중심이다. 그러기에 교인의 숫자가 중요하다. 모든 것이 교인(혹은 교회)의 숫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교인의 양적인 것에 초점이 있다.

2) 교회 성장을 위해 교회 개척을 중요시 여긴다. 교회 개척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중요시 한다. 교회가 많이 생기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본다.

3) 교회 성장을 위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교회성장의 교회에서는 동질성의 원리를 중요시 여긴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동질집단의 모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흑인 교회, 한인 교회들도 동질 집단의 교회다. 국제 교회는 동질성이 부족하기에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과 부자는 부자끼리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에 그렇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복음의 수용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곳에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흥 아파트 단지나 이동이 잦은 지역의 사람들이 복음의 수용성이 높기에 그런 곳에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추수지역을 강조한다. 복음의 문이 열린 지역에 우선적인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곳이 복음이 확장되기 쉽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는 농사짓는 것과 같다. 밭을 경작하고 씨 뿌리고 자라고 열매 맺는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경작해야 한다. 그리고 씨를 뿌린다. 복음의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다. 교회에 많은 교인이 모이는 것이 열매 맺는 것이다. 그러기에 추수지역의 선교를 강조한다. 추수가 밭을 경작하거나 씨를 뿌리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있는 곳이 우선지역이 되어야 하고 교회를 개척해도 수용성이 높은 곳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3. 제자 훈련하는 교회

1) 교인의 제자훈련이 중심이 되는 교회다. 교인들의 훈련과 양육에 초점을 맞춘다. 다양한 성경 공부, QT, 제자반이 운영된다.

2) 교인의 질적 훈련을 강조한다. 전통적 교회나 성장하는 교회는 양적인 면을 강조하는 반면에 이 유형은 교인의 질적인 면을 강조한다. 질적인 훈련이 중심이다.

3) 제자 훈련하는 교회는 영적 부모의 원리와 재생산의 원리를 강조한다.

4) 세상에서의 사명 보다는 교회 자체의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서의 제자보다는 교회 안에서의 제자를 더 강조한다. 자칫 빛과 소금의 역할보다는 엘리트 정신의 교회가 될 수 있다.

 

4. 선교적 교회

1) 사명을 완수하는 교회다. 사명은 선교적 사명이다.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본다. ‘Missional Church’를 선교적 교회, 혹은 사명적 교회로 번역할 수 있다. 교회를 사명적인 관점으로 본다.

2) 선교의 영역은 단순히 세계선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선교)하기 위해 하는 모든 영역을 선교활동으로 본다. 구제, 사회참여, 사회 문화를 이용한 전도, 사회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을 강조한다. 세상속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한다. 교회 대내적인 부분보다는 대외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세상에서의 사명을 중심으로 삼는다.

3) 선교(사명)는 국내 전도, 국외 선교를 포함한다. 국내 전도는 구제와 사회 참여가 포함된다. 세상에서 하는 교회로서의 역할과 활동을 말한다. 선교적 교회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세계선교도 선교적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사명이다.

4) 선교에 중심을 두다 보면 교회 존재론적 부분에 약할 수 있다. 교회내의 활동, 즉 예배, 교제, 봉사의 기능에서 약할 수 있고 선교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5. 선교적 교회와 전통적 교회(세 유형: 전통적, 성장 중심, 제자 훈련하는 교회)의 차이점

전통적 교회의 공통점은 모두 교회 자체를 중요시 여기고 교회 내 활동이 중심이 된다. 교회의 본질을 목양, 예배, 양육, 성장에 둔다. 교회 존재자체에 본질을 둔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 내의 일보다는 세상에 관심을 더 많이 갖는다. 교회의 본질을 사명과 기능에 둔다. 교회의 사명(선교)이 바로 본질이다.

 

1) 선교에 대한 이해다.

전통적 교회는 선교를 하나의 행위로 본다. 전통적 교회는 선교를 하지만 선교의 행위들, , 선교활동이나 사업을 많이 하는 교회, 선교와 관련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많이 추진하는 교회, 해외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에게 선교비를 지원하며, 단기 선교여행팀을 파송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교인들은 자신을 선교후원자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선교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인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선교사가 자신의 선교사명에 의해 나가고 교회는 이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본다. 교회는 선교적 본질을 지닌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다. 교회가 왜 선교적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선교적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선교를 교회의 존재의 표현으로 이해한다. 선교적 교회의 선교사는 교회가 해야 하는 선교의 사명을 선교사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대표자로서, 대사로서(국가의 대통령의 권한을 가지고 가는 대사처럼) 나가서 교회의 선교의 일을 대신해서 가는 것이다. 선교사는 파송 받은 대표자일 뿐이고 선교사 자신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다. 파송 예배는 선교사 개인의 일이 아니기에 교회의 행사중 가장 위대한 행사가 된다. “교회는 사랑하고, 섬기고, 전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해방하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 보내진 선교적 교회다”.

 

2) 신앙인의 삶에 대한 이해다.

전통적 교회는 주로 선교를 사업과 프로그램으로 생각하여 신자들의 인격과 삶을 선교적 지평에서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선교적 교회는 교인들의 인격과 삶을 선교의 중요한 지평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교회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교는 교회조직에 의해서 계획된 사업과 프로그램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터와 교회가 하나이다.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도를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에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교인은 제자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평신도도 선교사요, 사도적 직무를 가진 거룩한 사명자요, 선교사인 것이다. 교인은 있는 곳에서 선교사다(: 고 김인수 남서울 은혜교회 장로님이 대학 교수를 하실 때, 교수 중의 한 사람이 정직한 삶을 사는 김인수 장로님의 모습을 보고 김인수 교수님을 삶의 모델로 삼기로 하였다. 김인수 장로님이 하시는 것을 모두 따라 하고 싶었다. 김인수 장로님이 이 교수에게 교회에 가자고 하지 않았지만 교회에도 따라 나왔다. 그리고 신앙인이 되었다).

 

3) 선교의 대상에 대한 이해다.

전통적인 교회의 선교관은 해외 선교만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의 대상을 지리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해외 혹은 다른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활동을 포함하여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라고 생각 한다. 선교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사도행전 18절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서 오히려 예루살렘을 역차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동시에 나가는 것을 강조한다. 어떤 교회는 해외선교는 잘 하는데 지역 사회에서 외로운 사람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기도 한다. 국내와 해외 선교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 선교적 교회다. 그러기에 세계 선교만을 강조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한국 안에도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있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200만 명 이상이 존재하기에 국내 선교도 동시에 해야 한다.

 

4) 복음과 구원의 통합성이다.

전통적 교회는 단지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세상에서 드러나야 할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전통적 교회는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을 강조한다.

선교적 교회는 단지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필요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교회가 오늘날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영혼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교인은 사회에서 제자도를 실천하되, 정치, 경제, 문화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야 한다. 세상의 다른 종교는 신비의 요소가 있다. 비밀과 거룩의 요소만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함께 투명하게 사는 것이고 함께 도우며 사는 삶이다(: 불교도인 필자의 형님은 성직자는 다 드러내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필자에게 조언했다. 종교는 신비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하고 감춰진 삶과 드러난 삶의 일치를 추구한다).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낸다.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5)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차이다.

전통적 교회는 개교회의 이기적인 성장을 추구한다. 개교회 중심의 교회, 내 교회만 성장해야 한다는 사상이 기존의 교회에 있다(: 대 교회 중에는 주일날 개척교회 앞에 교회 대형버스를 세워 교인들을 자신들의 교회로 데리고 가는 교회가 있다. 이기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전통적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교회다.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지향한다. 개교회 중심이 아니라 연합과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를 중요시 여긴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다. 선교는 교회보다 우선한다. 그렇지만 그 선교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다.

 

6) 성육신적 방법과 권위주의적 방법의 차이다.

전통적인 교회는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며, 질서가 위에서 밑으로 간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형태다. 오늘날 양적으로 큰 교회 목사들이 교인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다. 교인들이 목사를 개인적으로 만나 보기도 힘들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처럼 선교적 교회의 성도는 세상과 사람을 섬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다. 마가복음 1045절에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오셨다고 하셨다. 섬기는 삶이 지도자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선교적 교회는 종의 모습이다.

 

III. 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에 대한 질문들

교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이전에 있었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질문들이다.

강대상이 몇 개여야 하는가? ‘두 개여야 한다, 하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쟁으로 교회가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파워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가? 없는가? 몇 년 전에는 이런 문제로 교회가 심각한 갈등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주일 대 예배 시간에 기타를 칠 수 있는가? 없는가? 가스펠 송을 부를 수 있는가? 없는가? 이런 논쟁은 지금도 교회 안에 계속되고 있으며 어떤 교회는 이런 것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성가대가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성가대를 없애고자 한다면, 교인들은 교회의 존재 자체를 흔들 만큼 크게 반응하기도 한다. 교회는 장의자를 사용해야 하고 개인 의자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싸우기도 하였다. 여성을 강대상에 세울 수 있는가? 없는가? 몇 년 전에 영국에서 한인교회 연합회에서 주체하는 집회에 김00 여자 목사님께서 강사로 초청받았는데 강대상에 오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을 하다가 결국 아래 강대상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이슈들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또한 적지 않는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런 문제로 분쟁하고 있다. 분쟁하는 이슈가 교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교인들은 이런 문제들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면 양보해야 한다. 싸우거나 분리될 필요까지는 없다. 이런 문제들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2. 인명 구조선 예화

배가 자주 파선하는 위험한 해안에 난파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작은 인명 구조소가 있었다. 움막처럼 보잘것없는 집과 작은 배 한 척 뿐이었지만 몇 사람의 헌신적인 일꾼들이 불철주야로 바다를 살피면서 난민 구호에 전력하였다. 숱한 사람들이 이 작은 인명 구조소에 의해 구출되었고 이 집은 점점 더 유명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구출 받은 사람들과 이 일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인명 구조소와 관계를 맺고 싶어 했고, 그들의 시간과 돈을 바치게 되었다. 새로운 배들을 매입하고 선원들이 증원되면서 인명 구조선도 그 규모와 시설이 점점 비대해지고 현대화 되어져 갔다.

좋은 기구와 시설이 구비된 인명 구조소는 차츰 회원들이 즐겨 모이는 사교 장소처럼 되어갔다. 인명 구조 작업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줄어들었고 마침내 자기들이 모은 돈으로 구조선에서 일할 선원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대신 구조 활동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인명구조에 대한 이상은 화려하게 변모한 인명구조소의 장식품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주요한 행사를 여는 큰 방에 구조선을 상징적으로 들여다 놓고 그것을 예배하듯 대하였으나 인명 구조에 대한 열정은 냉각되어 있었다.

그 즈음에 큰 배가 파선하여 고용된 구조선 선원들이 익사 직전에 구출한 난민들을 데리고 왔다. 누추하고 병든 사람들도 있었고 흑인과 난민들도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인명 구조소가 삽시간에 더러워지고 소란스럽게 되자 구조선 사람들은 불쾌해졌고 새로운 대책마련에 나섰다. 관리 위원회가 모여 난파당한 사람들은 구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 간이 목욕실을 만들어 먼저 몸을 깨끗하게 씻은 한 후에 들어올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그 다음날 구조소 회원들 간에 의견 마찰이 노골화되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더 이상 구조 활동을 계속하기를 반대하고 자기들의 사교클럽으로 그 집과 시설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몇 사람만이 집과 시설이 원래 인명구조를 위한 것임을 주장했으나 투표결과 그들의 의견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인명구조 활동을 원한다면 다른 곳에 구조소를 만들라는 권유를 받았고 인명 구조소를 만들어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 해가 지나자 새로 시작했던 구조소도 처음의 것과 같은 현상을 되풀이 되었고 다시 구조 사업에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구조소가 세워졌다.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 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지금도 그 해안지대에는 사교장들로 변한 인명 구조소 들만 있을 뿐 자주 난파하는 배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인명 구조소는 교회다. 교회가 사명과 비전과 본질을 잃은 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는 이야기다(서정운. 1988)

 

3. 교회가 세워진 이유

교회의 본질을 알려면 교회가 세워진 이유를 알아야 한다. 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행위가 바로 선교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선교다.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메시아 예수는 계속되는 선교를 빠르게 전파할 목적으로 제자 공동체를 형성했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도약은 선교의 우선권을 찾는데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윌버트 쉥크. 2001). 예수님은 선교를 위해서 교회를 만드셨다. 현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고 교회의 선교적 기능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특권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간과했다. 이스라엘(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복을 주신 것은 온 족속에 복의 근원(통로)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잘 나서 선택받았다고 착각하였다. 자신들의 선민사상이 이방과 모든 족속을 무시하게 했고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외면하게 했다. 특권이 있다면 그 특권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지만 이스라엘은 책임은 잊어버린 채 선택받은 특권만 누리려고 했고 이것은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이방인 선교를 무시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신약에서도 이방 구원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는 그토록 무관심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도록 하셔서 교인들을 흩으셨고 흩어진 그들로 하여금 이방에서 선교하도록 하셨다. 이방을 위해 하나님은 베드로가 아닌 바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교가 얼마나 급하시면 처음 예수님이 훈련하셨던 사도들을 제쳐놓고 이방선교에 가장 적합한 사도 바울을 선택 하셨겠는가(: 현재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이다. 한국인은 해외에 가면 제일 먼저 교회를 세운다. 일본은 자동차 가게를 세운다. 중국은 음식점이다. 그러기에 한국인이 전쟁으로 흩어지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온 열방이 선교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것이다.

에밀 부르너는 불이 타고 있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하기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교회와 선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교회는 선교함으로 그의 소명을 실천하게 된다. 교회는 선교에 동참함으로 교회의 본질적인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선교를 이해할 수 없고 교회의 선교를 간과하고서는 선교를 이해할 수 없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다. 지역 교회는 확실하게 우주적 교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선교하고 있으며 그의 선교적 본질을 실행해 나갈 때 우주적 교회로 형성되어 가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교회를 위한 교회 선교론을 정립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4. 사명으로 존재하는 교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사명을 잃은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겉으로는 성도가 모여서 예배하고 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주신 참된 사명이 없다면 그 교회는 가장 중요한 교회의 모습을 상실한 교회가 된다. 주님은 사대 교회를 향하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다”(3:1) 라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사명을 잃으면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나 마찬가지다. 교회는 한순간도 교회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명을 다시 회복하는 것만이 참된 교회가 되는 길이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고 반면에 사람은 사명으로 산다. 사람은 의미나 가치, 사명이 중요하다. 하는 행동이나 일보다 그것을 하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물질이나 돈이나 잘 사는 것보다 어떤 의미로 사느냐가 중요하다. 교회도 사명과 의미에 따라 존재해야 한다.

20세기 초반에 런던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등장했다. “위험하고 모험적인 여행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함. 낮은 급료, 쓰리도록 차가운 추위, 수개월에 걸친 어두움, 계속되는 위험, 안전하게 돌아오리라고 확신할 수 없음. 성공할 경우 명예와 인정이 주어짐”. 이 광고는 남극 탐험가 어니스트 색클턴 경이 낸 것이었다. 남극 탐험을 위해 광고를 냈는데 그 때 광고를 보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명예를 위해 도전한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도전한 것이다. 의미와 사명과 가치에 따라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일본에 있는 어느 대기업이 그 회사의 최고 경영직에 알맞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젊고 똑똑하며 정직하고 진취적이며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더욱이 그는 경영 능력을 구비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 탐문은 오랫동안 성공하지 못한 채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있음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바로 어느 선교사였다. 그들은 즉시 온갖 종류의 혜택을 관대하게 제안하였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얼마 후에는 처음보다 더 크고 좋은 또 다른 제안을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거절했다. 세 번째로 그들은 틀림없이 그가 승낙할 것으로 보이는 유혹적인 제인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역시 아닙니다였다. 마침내 그들은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급료는 아주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 일거리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치고 투자하는 선교의 일에 비하면 그 직장의 일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이야기다(허버트 케인. 1999).

 

5.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

교회는 모이고 흩어지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최동규. 2017).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한국교회의 교회의 개념 중의 하나는 건물로서의 성전이다. 그들에게는 교회는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건물로 인식된다. ‘교회 간다는 말은 이런 사고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성전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성경이 성전을 비판하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일정한 공간 안에 갇혀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조차도 하나님을 성전에 가둘 수 없음을 고백하였다(왕상 8:27). 성전은 근본적으로 공간 지향적이고 모임 중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부정하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겪는 자신의 몸을 대안적 성전으로 제시하셨다(2:19-20). 사도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으로 승화시켰다(12:4-8, 고전 12:27).

교회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는 특정한 사명을 공유하며 함께 예수님을 따르고 교제하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제자들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교회는 단순히 개별신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실 때 비로소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 교회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지역교회는 모이는 사명이 있다. 교회는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기 위해 모이는 사명들이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과 존재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양육된다. 모이는 교회에서 신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서로 나누며 교제한다. 그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며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말씀과 성례전이 포함된 예배는 선교적 백성의 정체성을 재확인한다. 교제는 선교적 백성의 정서를 함양하고 교육과 훈련은 선교적 백성으로 살아가는 원리와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러기에 모이는 기능은 선교적 교회로서 꼭 필요하며 중요한 사명이다. 선교적 교회로 모이는 백성이 없다면 선교적 백성으로 흩어지는 백성도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지역교회는 흩어지는 사명이 있다. 세상으로 나가 구제하고 전도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곧 믿는 사람들을 뜻하기에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그들의 삶에서 활동하는 만큼 움직이는 교회요, 걸어 다니는 교회가 된다. 흩어진 공동체로 존재하는 교회는 인간의 삶이 미치는 모든 지평과 차원에서 교회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믿는 사람들의 존재와 행위가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방식에 따라 교회의 모습을 형성한다. 교회가 흩어졌을 때 교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간직한 교회로 존재하고 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흩어진 교회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 성품과 행위와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알려주어야 한다. 세상 안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된다.

이 두 사명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는 모이는 것도 사명이요, 세상으로 나가는 것도 사명이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주로 모이는 사명만 강조해왔다. 그러나 교회의 궁극적 존재 목적은 흩어져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담지자로 살아가는 데 있다. 복음 전파는 흩어질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흩어져서 선교적 삶을 살지 않으면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두 개의 사명을 가졌고 그 사명이 동일하다면 시간과 재정도 각각 절반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균형 잡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어렵다.

 

6. 교회의 선교적 사명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선교의 사명은 단순히 교회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 또 하나의 기능이 아니다. 교회의 최종적인 목표요, 최종적인 사명이 선교다. 교회가 모여서 예배하고 교육하고 봉사하고 교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의 최종적인 사명인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교회의 다른 기능들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취소될 수도 있고 한시적으로 무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의 선교의 사명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무시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천국에서 더 이상의 전도는 필요 없다. 현재 교회에서 실행하는 예배, 봉사, 교제, 사랑은 천국에서 계속된다. 이 세상에서 하는 이런 행위는 불완전하다. 맛보기를 보고 있고 천국에서 완전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는 예배, 봉사, 교제, 교육, 사랑은 계속 있지만 전도는 필요 없다. 주님이 이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위해 그의 자녀들을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이다.

선교는 교회보다 더 큰 의미이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선교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 때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으로, 혹은 훌륭한 의사로, 혹은 나라를 위한 독립가로 남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이런 사역들을 감당하셨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분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분의 관심과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분에게 있어서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주님이 가지셨던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은 세계 선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훈련하시면서 기적을 베푸시거나 병을 고치시거나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셨을 때 공통적으로 십자가 죽음에 대해 예언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핵심과 최종적인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선교의 명령을 유언으로 주셨다. 제자 공동체가 해야 할 사명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제자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복음을 빨리 전할 목적으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끔씩 기적이나 일반은총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대부분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교회 안과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진 구원을 포함하는 것이 선교다. 그러기에 선교는 교회보다 더 크고 선교 안에 교회가 포함된다. 교회가 선교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교회를 품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많은 활동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배는 선교를 위해 사용된다. 예배는 모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교회로 모이게 하는 일차적인 목적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앙하고 높이며, 그분에게서 말씀을 듣고, 자신을 드리고, 선교적 백성으로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예배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이며 유일한 목적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인간의 근본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대신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 예배를 위해 필요한 것이 선교다. 선교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을 만든다. 선교가 없이는 예배가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소원은 모든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인데, 선교가 없이는 예배가 존재할 수 없다. 선교를 통해 예배가 존재한다. 그러기에 선교는 예배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한편으로 예배는 선교를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간다. 그러기에 예배는 선교의 도구로도 사용된다. 예배는 선교하는 통로임과 동시에 예배를 더욱 예배되게 한다. 선교는 예배를 풍성하게 하고 완전한 예배를 만든다. 완전한 예배란 모든 족속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이다. 그 예배를 위해 예배가 사용되는 것이다. 선교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고 예배도 선교의 도구로 사용된다.

선교는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24:44-48). 예수님은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대 위임령을 말씀하신다. 대 위임령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성경의 핵심 두 가지를 요약해서 설명하신다.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고 또 하나는 이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는 것이다(제자들이 바로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인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은 자동적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교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의 구원은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사역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교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242-47절에 초대교회에서 행한 여러 가지 일들이 나타난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예배가 있었다. 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령의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교제와 사랑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 주었다. 4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능력과 말씀과 구제와 교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칭송을 받은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더해 갔다.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교회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초대 교회는 여러 가지 다른 기능들을 감당한 것이다.

교회의 이런 기능들은 공동체로 이루어진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는 공동체성을 확보할 때 이루어진다. 공동체성이란, 사회과학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성령에 의해 창조된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의 공동체는 예배시간에 성도들이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라는 인사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도들의 삶에서 작동되어야 참다운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신자들의 신앙은 개인적이며, 또한 공동체적이다. 성도의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구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대일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그것은 또한 공동체를 통해 확증된다.

구원이 공동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세례식에서도 나타난다. 세례는 공동체적 사건이지 개인적인 신앙행위만은 아니다. 세례는 개인적인 행위에 한정되지 않고 언제나 공동체 앞에서, 공동체를 위한행위이다. 세례와 성만찬으로 구성된 성례전은 모이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구현하는 꼭 필요한 요소다. 세례예식과 주의 만찬은 단순히 개인적인 은혜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들이 가진 좀 더 큰 목적은 공동체의 삶을 확립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 공동체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성만찬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행위 앞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새롭게 살 것을 고백하는 의식으로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세례와 성만찬은 세상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예배도 함께 예배한다는 공동체성이 빠지면 중요한 것이 빠지는 것이다.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시간이다. 구원의 체험은 개별적으로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예배의 공동체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만나기를 원하신다. 예배는 개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전체구성원이 함께 하는 공동의 행위이다. 신자들은 이 공동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공유하며 세상과 대안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공동체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을 공동체적으로 준비시키고 파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배 순서 중에 마지막 축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으로 보내기에 앞서서 그들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절차이기에 선교적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행하는 훈련과 교육은 선교적 교회의 비전을 가르치고 그것을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과정이다. 신자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기 위해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 선교적 사역의 비전을 나누며 실제로 함께 봉사하며 서로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자훈련이란 단지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이유와 사명, 그리고 그 일을 위한 능력을 갖추는 과정이다.

친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마음과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의 온도를 높이는 공동체적 활동이다. 이 활동은 개인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회적 관계적 개념은 기본적으로 공동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반영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만큼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성도는 교회에서 모여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어 흩어지는 교회로서 세상에 나가 이웃을 사랑한다. 친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신자들에게 흘러가며, 그것은 다시 신자들에게 세상에 속한 이웃에게로 흘러간다. 하나님은 이 친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을 주고 격려하며 치유하신다. 교회의 공동체성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교제이다. 그 교제는 식탁 교제를 통해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 상호 견책과 용서를 통한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한다. 서로를 섬기고 돌보는 봉사를 한다. 상호부조를 통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한다.

 

 

IV. 에베소서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속성)(찰스 벤엥겐. 1994)

 

에베소서를 통해 지역 교회의 선교적 본질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지역 교회를 세상 안에서 선교활동을 넓혀가며 계속적으로 성장하는 유기체로 보았다.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을 볼 수 있다. 후에 하나의 속성을 더 추가했다. 이 네 가지 속성이 교회를 인정할 수 있는 표시다. 이 네 가지 속성이 드러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이 네 가지 속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각 속성 속에 들어있는 선교적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적 기능에 대해서 신학교에서 교회론 시간에 잘 가르치지 않는다. 네 가지 속성의 내향성과 외향성 중에 내향성만 가르친다. 성도가 교회 밖으로 나가서 행하는 외향성이 선교적 기능이다. 내향성과 외향성을 갖춘 속성이 진정한 교회의 속성이다.

 

1. 교회의 통일성 안에서의 선교

성경적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이다(4:4-6).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하나 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믿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 된다(: 필자가 에콰도르 정글에 들어가서 처음 만난 원주민 그리스도인들과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찬송을 할 때 서로 하나 된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만난 지구 정 반대편의 사람들과 처음부터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교회의 지체는 한 몸이다. 어디서나 모르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에 반갑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진정한 가족이라고 했다. 교회는 가족으로 하나가 된 지체들이 모인 존재이다. 하나가 됨으로 교회는 치유가 있다. 한 형제와 자매가 된다. 피의 혈통보다 믿음의 가족이 더 가까운 하나가 된다.

교회의 하나 됨은 내향성과 외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내향성이란 내적인 하나됨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노래한다. 그 고백과 찬양 안에 감격과 기쁨과 사랑이 있다. 내적인 하나 됨 가운데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찾는다. 외향성은 하나 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봉사를 통해 하나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성령께서 원하시는 외향적인 봉사의 일을 하도록 주어졌다(4:2).

봉사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운다. 성도들과 함께 교회 밖으로 나가서 봉사를 해 보았는가? 함께 하는 봉사 가운데 기쁨이 있다. 만족이 있고 의미가 있으며, 가치가 있다. 교회는 연합하여 봉사하러 사회로 나가야 한다. 하나 됨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에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봉사 하는가? 각양 은사를 따라 한다. 자신의 은사에 따라 세상에서 봉사하고 섬긴다. 그런 면에서 교회의 통일성인 하나 됨은 서로 마음에 맞는 열성파들끼리 모이는 내향적인 일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봉사를 위한 외향적인 일치가 진정한 통일성이다. 하나 되어 봉사할 때 세상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이 복음으로 변화된다(: 개신교는 세상에 구제를 할 때 하나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 교회별로 한다. 가톨릭은 하나로 모아서 한다. 개신교는 세상으로 나가는 창구가 여러 개고 가톨릭은 하나이기에 똑 같은 일이라도 세상에 드러나는 것에서 차이가 난다. 개신교는 구제를 많이 하는데도 세상은 모르고 있다. 종교 중에서 개신교의 구제금의 나라 전체 구제금의 70% 이상이라는 통계가 있다. 가톨릭과 불교가 합해서 30%도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신교가 구제를 많이 한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이 많이 한다고 느낀다. 이 예는 하나 되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하나 된 몸은 초대 교회 시대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전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베푸는 행함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28:19-20). 이 몸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4:32)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믿는 무리들이 이룬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을 큰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22:9-10), 세상 밖으로 나가 큰 길과 작은 길을 찾아가는 외향적인 하나 됨을 말한다. 사도행전 42-35절에 초대교회의 모습에 대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무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고 설명한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왜 존재하는가?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35절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고 했다. 성도들이 자기 것을 나누어 주니 가난한 사람이 없어졌다.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나누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의 책임 아니라 부자의 책임이다. 나누면 가난이 없어진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다. 하나 된 몸인 교회가 이 역할을 할 때 세상은 가난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직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로 통일 시키는 힘이 있다. 교회생활은 초청하고, 모이고, 받아들이는 하나로 통일된 생활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고 하였다. 교회는 하나의 몸이고 성도는 각 지체이다. 지체가 아프면 전체가 아프다. 다리가 부러졌으면 너는 지금 병원에 가서 기브스 해, 나는 직장에 갈거야라고 하지 않는다. 지체라는 말은 바로 하나라는 뜻이다. 교회에서 체육대회를 한다. 교회들끼리 교회 대항도 한다. 그런데 서로 이기겠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성도들끼리, 교회들끼리 서로 싸운다. 심지어는 교인도 아닌데 운동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기도 한다. 하나 된 지체끼리 싸우는 것이다. 형제끼리 싸우는 것이다. 교회에서 싸우면서 세상에 하나라고 말을 할 수 없다. 교회의 통일성은 교회 안에서도 하나 되고 세상에서 사랑과 봉사와 전도를 통해 하나 됨을 알게 하는 것이다.

 

2. 교회의 성결성 안에서의 선교

성도와 교회는 거룩한 존재다. 주님이 거룩하게 해주셨기에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이 교회의 성결성이다. 성결성이 없이는 교회의 참 된 표지가 없다.

그러면 성결성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성결성은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거룩성을 나타낼 때 완전한 성결성이 나타난다. 예배드릴 때 검정색 양복을 입고 거룩하게 앉아있으면 거룩해지는가? ‘거룩, 거룩, 거룩 존귀하신 주님을 찬양해하면 거룩해지는가? 그렇지 않다. 참된 거룩성이란 세상에서 교회의 지체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참다운 거룩성은 세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즉 소득세를 어떻게 내고, 가정과 사업체의 자본관리를 어떻게 하며, 정치적으로 투표를 누구에게 하며, 공석이나 사석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등 교인들의 생활이 교회의 성결성과 연관되어 있다. 성도가 거룩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사실과 교회의 성결성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우리의 문화, 우리의 경제, 우리의 정치, 우리의 교육, 심지어 우리의 생활 습관까지 성결하게 변혁시킬 것을 요구받는다. 교회에서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거룩해질 때 참된 거룩성을 유지할 수 있다.

바울은 교회의 성결성의 표현으로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서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5:6-6:20). '빛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각 지체들의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세상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밝게 비춘다(5:14).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교회의 성결성을 완결시키는 것이다.

 

[나는 몇 주 전에 너무나 안타까운 신문 기사를 접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스마트 폰으로 신문을 보고 있는데 눈에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중국의 교회가 지하교회에서 지상 교회로 올라오고 있다는 기사였다. 중국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탄압을 계속해왔다. 중국은 자본주의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종교다. 자본주의는 돈으로 지탱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상으로 지탱한다. 중국은 그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종교라고 본다. 종교가 퍼지면 사회주의 자체가 무너진다고 본다. 그래서 자본주의보다 종교를 더 무서워하기에 중국에서는 철저하게 종교를 박해해 왔다. 자연히 교회는 지하에서 존재해 왔다. 물론 정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는 삼자교회가 있지만 삼자교회는 오히려 공산주의를 지탱하게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정부 교회이다. 순수하게 신앙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은 지하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중국 공산당이 철저하게 신앙인을 박해하고 감옥에 잡아넣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 당국 입장에서는 종교가 공산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기에 박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국에 지하교회들이 지상으로 올라온다는 뉴스였다.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들이 공공연하게 세상으로 나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한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크다고 신문은 기사를 썼다. 나는 이런 기사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댓글을 보았다. 나는 댓글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는데 봐줄 수 없는 비방의 글들이 온통 쓰여 있었다. 내가 제일 충격 받은 댓글은 한국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고 도와주고 있으니 이제 중국도 망하기 시작했다는 댓글이었다. 한국 기독교가 중국에 복음을 전함으로 중국이 망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댓글이었다. 이 댓글을 보고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핸드폰을 접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너무나 아파 눈물이 났다. 왜 하나님이, 왜 교회가,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한참 동안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마음이 참으로 힘들었다. 교회와 복음이 들어가면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 분명한데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증오하는 것 이상이다. 정말 기독교에 대한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 한참을 울다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해서 이 사회가 하나님을 이렇게 욕되게 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내 마음은 하루 종일 내 자신과 우리 한국 교회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몇 년 전 필자의 고백).]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에 성결성을 보여주는 것 대신에 정반대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회가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것은 바로 공의와 사회 참여등, 바르게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결성은 교회 안에서 지켜지기 보다는 세상에서 드러내야 한다. 성결성을 상실한 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결성을 지키는 교회야 말로 진정한 교회이고 선교적 교회는 성결성을 교회 내외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3. 교회의 보편성 안에서의 선교

보편적인 교회는 그 문이 항상 열려있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공동체이다. 보편성의 반대는 편협성과 특별성이다. 현대 교회는 특별성이 너무 강하다. 우리만 택함 받았다는 사상은 보편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교회는 세계 모두를 위한 보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특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말한다. 특별한 택함은 보편의 사명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보편적인 교회는 왕의 특별 초청을 전하는 전달자로서 큰 길이나 작은 길에서 사람을 불러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곳이므로 모든 사람을 교회로 들어올 수 있도록 초청하고 불러들이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사명이며, 선교적 교회다.

보편적 교회는 사회적 신분, 경제적 수준, 피부 색깔, 성별, 인종, 문화적 배경, 속한 국가 때문에 서로를 배타시하거나 반목질시함으로 보편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선교사란 누구인가? 선교는 무엇인가? 타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타문화권은 초 문화, 초 언어, 초국가다. 초 교단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보면 학연, 지연, 교단끼리 모인다. 같은 선교단체 안에서도 같은 지역끼리 모이고 당을 형성한다. 국가, 언어, 문화를 초월한 사람들이 출신배경을 초월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보편적인 일을 위해 간 선교사들이 보편성을 무시하고 편협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물질, , 명예를 포기하는 것이 전제된다. 선교사는 이런 것들을 초월해야 한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어서 이런 포기한 것들, 초월한 것들이 선교사의 삶 가운데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선교사들이 선교사 사회에서 명예, 돈을 밝힌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보다 더 큰 욕심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들을 그렇게 초월하지 못할 바에는 선교사를 하지 않고 돈을 벌면 되고 세상의 명예로 출세하는 일을 하면 된다.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 사역은 조금하고 공부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교는 이런 공부하는 것도 초월하는 것이다. 초월하는 것이 보편성을 실행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초월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다.

보편적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민족 가운데 보내졌다. 한 선교사가 있었다. 필리핀에 선교사로 갔다. 파송 받아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딸들이 필리핀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필리핀에서 사역하다 본인이 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였지만 단 하나 딸들이 필리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것만 지켜달라고 기도하였다. 필리핀에서 사역하다가 보니 필리핀 사람도 똑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리핀 사람과 딸들이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교수생활을 위해 가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면서 기도하였다. 중요한 기도제목은 딸들이 흑인하고만 결혼 안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아보니까 피부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흑인과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보편성이다. 나만 특별하기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보편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보편성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세상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보편성을 지켜야 한다. 그 보편성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세계선교다.

 

4. 교회의 사도성안에서의 선교

교회의 사도성은 사도적인 복음을 적용하고 사도처럼 살게 하고, 세상을 향해 사도로 보냄을 받는 일을 하게 한다. 사람들은 교회의 사도성 하면 교회에서 선포하는 말씀 사역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설교권을 사도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도권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교회 안과 교회 밖인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사도성이다. 교회의 사도로 세우신 것은 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다.

사도성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진리는 교회 안에 있고 이 진리는 누구나 찾을 수 있으며, 안정감과 조직을 제공하고 또한 실제적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선포해서 교회 안에서 진리를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사도성이다.

중국의 어떤 사람이 진리를 찾아 다녔다. 아무도 진리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평생 진리를 찾다가 돌아가셨다. 이 사람이 한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듣고 진리인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진리를 찾게 되어 너무나 감격했다.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서 왜 이제야 이 진리를 가지고 왔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이 진리를 모르는 채 돌아 가셨어요라고 선교사에게 하소연했다. 이처럼 진리는 온 세계에 선포되어야 한다. 교회의 선교사명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 네 가지 교회의 속성들은 교회가 하는 선교 활동들만이 아니라 전존재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에서 분리된 것이거나 첨가된 것이 아니다. 지역 교회의 핵심적 본질은 선교이며, 그렇지 않은 교회는 실제로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지 하나의 활동이 아니다.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서 존재한다. 그 선교적 교회를 위해 교회에 모이고 흩어지는 사명을 감당한다.

 

 

V. 교회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 (찰스 벤엥겐. 1994)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이유들을 밝혀주는 성경에서의 중요한 용어들이 있다. 이 용어들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말해주는 용어들이다.

 

1. 코이노니아(서로 사랑하라: 교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더 큰 계명은 없다(12:29-31).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새로운 계명이며,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은 서로를 세울 뿐 아니라 그 사랑으로 성부와 성자를 드러낸다. 교회의 생명은 제자들이 주님과 다른 제자들을 서로 사랑하는데 있다(13:34 -35). 성도들 간에 사귐을 잃어버린 교회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과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와의 사귐마저도 잃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에서만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사랑은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사랑이진정한 사랑이다. 세상으로 퍼져나가지 않는 사랑, 우리 끼리만의 사랑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 사랑이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교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한다.

 

2. 케리그마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선포)

그리스도의 주 되 심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도록 하신다. 주님이 주 되심은 교회 안에서만 선포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 심은 전 우주와 우주적 권세자들에게 까지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4:25-30). 예수님은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4:43).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가고 싶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세상에 주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주님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셨다”(13:38-39)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목적을 가진 공동체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이 세상 사람들과 모든 창조물을 주님의 통치하심 안으로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사명을 가진 공동체다.

온 세상에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하는 일과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일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바른 제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주 되심을 고백하는 것에만 강조점을 둔다. 고백이 중요한 만큼 주 되심을 선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선포가 없이 고백이 없다. 선포가 없이 인간의 구원이 없다. 복음 선포가 오직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선포된다면 케리그마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주님의 주되심을 교회 안에서만 선포하는가? 아니면 세상에서도 선포하는가?

 

3. 디아코니아(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봉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제자들은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겸손하게 섬기신 태도를 본받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으로서 어떤 섬김의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고 예수님이 주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디아코니아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누구나 섬겨야 하는 교회의 핵심적 본질인 선교적 본질이다.

교회가 직분자를 세울 때 섬김의 직분으로 세우는 것이다. 집사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이다. ‘디아코노스는 식탁이나 다른 천한 일에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하인이나 일꾼등으로 번역되었다. 교회에서 주신 직분은 명예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섬기기 위한 것이다. 종이나 일군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고 병자들을 고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직접 식사를 지어 제자들을 먹이셨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교인들이 섬기려 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꼴지가 되기보다는 으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아랫사람 다루듯 하기 때문이다. 교회와 가정의 고통은 섬김의 사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평택의 한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에서 섬기미의 역할을 한다. 성도들이 자기가 섬길 곳을 정해 자발적으로 섬긴다. 경쟁률이 제일 높은 섬기미 장소는 화장실 청소다. 교회에 있는 일곱 개의 화장실에 43명의 섬기미가 매일 화장실 청소를 한다. 새벽 예배 차량 운행도 일주일에 하루씩 일곱 명이 섬기미로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화장실 청소 담당자나 차량 담당자를 따로 월급을 받는 자로 세울 필요가 없다. 우리 교회는 섬기는 교회인가?

토마스 선교사는 20대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기회를 포기한 섬김의 인생이었다. 24세에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결혼과 함께 상해에 도착했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병사했다. 18659월 선교를 위해 서울로 오다가 태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듬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졌다. 18669527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의 생명을 바친 섬김으로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 작은 자 하나에게 섬기는 봉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선교적 교회다. 봉사가 선교다. 이 봉사는 교회 안에서의 봉사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봉사도 포함된다.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세상의 어려운 사람과 어려운 곳을 섬길 수 있다. 교인 각자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섬기는 곳에 복음 전파가 있다. 섬기는 곳에 선교가 있다. 선교는 돈으로 동참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 몸으로 시간을 내어 예수님처럼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주인처럼 섬기는 것이 선교다.

 

4. 말투리아(나의 증인이 되리라: 증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모든 문화와 상황 가운데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목케 하며 섬기는 직책을 통하여서 대사들이 되었다. 선교하는 교회는 화목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심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교회가 하는 복음 증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세상과 화목케 되지 않고서는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 세상에서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할 때 선교는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세상을 화목케 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화목케 하는 것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사랑하고 참고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신자들은 적이 아니라 화목케 하는 대상들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과 논쟁 할 필요가 없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과 논쟁해서 자신들이 지면 기분 나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신자들이 논쟁해서 자신들이 이기면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목사님 집에 여호와 증인이 전도하러 왔다. 목사님은 여호와증인을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전 박대를 당해왔던 여호와 증인은 자신의 믿음을 전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목사님은 여호와 증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식사를 차려 주었다. 논쟁하지 않고 들어주고 섬겨주었다. 돌아가서 얼마 후에 그 여호와 증인이 또 찾아 왔다. 목사님은 이전과 똑같이 해주었다. 서너 차례 이런 일을 경험한 여호와 증인은 목사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교리보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느껴서 이 사람은 여호와 증인으로부터 나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목사님처럼 성도들은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케 하는 존재다. 화목케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VI. 선교하는 교회의 모델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과 선지자이다(벧전 2:9). 세상에서 , 제사장, 선지자이 세 가지 직분을 갖는 교회의 역할이 있다.

 

1. 선지자적 역할

교회는 세상의 정의와 살롬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 교인은 인간관계와 사회 조직에서의 정의와 평화를 향하여 일하는 소명을 갖는다.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교회가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는가? 교인들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어렵다.

필자가 미국에서 보냈던 안식년 때의 일이다. 필자는 친구 목사와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운전은 필자가 하였고 친구 목사는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운전하는 도중에 자동차가 많이 정체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LA5번 프리웨이로 바꾸어 타는 곳이었다. 바꾸어 타는 차선이 맨 우측 차선 하나뿐이었다. 이 차선은 언제나 정체되어 이곳을 빠져나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차량이 길게 밀려 있는 반면 옆 차선은 차들이 잘 빠져 나갔다. 그래서 옆 차선으로 가다가 5번 프리웨이로 들어가는 앞 지점에서 끼어들기를 하는 차들이 있었다. 앞에서 끼어들면 긴 줄을 서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다. 필자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 목사는 차가 잘 뚫리는 차선으로 가다가 끝에 가서 차선을 바꾸어 가자고 했다. 친구 목사는 운전 초보자만이 길게 늘어선 차선에서 기다린다고 하였다. 자신은 초보자가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친구 목사의 요구를 못 들은 척 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차선을 바꾸지 않는 필자에게 친구 목사는 화가 나고 있었다. 친구는 필자를 재촉하였다. 몇 번씩의 화내는 요구에 필자는 그렇게 가는 것은 얌체 같은 짓입니다. 하면 안 되지요라고 한마디 하고 그대로 갔다. 필자가 고집을 부린 것이다. 필자는 평소에 그 길을 가면서 끼어드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 사람들로 인해 그 차선은 정체가 더 심해진 것이다. 필자는 그들처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친구 목사는 그 순간에 필자에게 몹시 못 마땅했다. 필자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삶인가를 많이 생각하는 기회였다. 적은 것에라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선을 지키고 기다리며 느리게 가는 것이 비록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쳐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고 있으며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차를 같이 타고 가다 화를 냈던 친구 목사와 다시 만났다. 그 때 일을 기억하면서 그 때 화가 났지만 결국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 필자를 더 존경하게 되었다는 말도 아울러 하였다. 필자는 처음에는 미움을 당했지만 조그만 것이지만 옳은 것을 할 때에는 주위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차선한번 지키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훌륭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작은 삶을 통해서 자신의 자리에서 선지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선지자의 역할은 대단한 말씀 선포가 아니라 있는 곳에서 세상에 예수님의 의와 샬롬(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2. 교회의 제사장적인 역할

교회의 제사장적 역할은 교회의 성례 집행과 하나님과 또한 교인 서로 간에 교회 안에서 화목하라고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제사장의 역할은 주께로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속을 소개하는 일이다. 교회 내에서만 성례집행이 아니라 세상에 성례를 통한 구속을 소개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구속은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안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 제사장의 일만이 아니다. 세상에 구속을 소개하는 일을 하는 것도 제사장 역할이다. 교회가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선교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가 화목하도록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3. 교회의 왕의 역할

교회가 속한 이 세상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역할, 혼돈 속에 조화를 가져오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다. 왕은 사람들을 돌보는 정부에 대한 책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하는 일 등을 감당하는 것이다. 세상의 왕처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와 성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가 왕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왕처럼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왕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밴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1706-1790)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다. 100달러짜리 지폐의 주인공이다. 그의 수식어는 신문발행인, 성공한 사업가, 발명가, 정치가, 철학자, 저술가다. 미국 헌법의 기초 작업에 참여했고, 미국 우편제도를 개혁했다. 소방서를 창설하고 이중초점 안경을 발명하였다. 고화력 스토브를 발명하였고, 피뢰침을 발명하였다. 식민지 자주 조세권 획득했다. 회원제 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설립 한 것, 등이 그의 업적이다. 그의 신앙 고백은 나는 하나님이 우주의 유일하신 창조자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우주를 섭리하시고 지배하시기 때문에 경배를 받아 마땅하다. 내가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영원하며,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따라 저 세상에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믿는다이었다.

 

* 프랭크린의 13가지 덕목(20대 부터 매일 점검하며 실천했던 덕목)

절제: 배부르게 먹지 말라. 취할 정도로 마시지 말라

침묵: 자신이나 타인에게 유익하지 않는 말을 하지 말라. 쓸데없는 말을 하지말라

질서: 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두라. 모든 일은 제 때에 하라

결단: 할 일은 반드시 하겠다고 결단하라. 결심한 일은 실수 없이 행하라

절약: 자신이나 타인에게 유익되지 않는 돈은 쓰지 말라. 그래야 낭비하지 않게 된다.

근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언제나 유익한 일을 하고 불필요한 일은 하지 마라

진실: 타인을 속여 해하지 마라. 깨끗하고 공정하게 생각하고 말하라

정의: 옳은 일을 하되 타인의 이익을 훼손하지 말라. 의무를 행하지 않으므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중용: 극단을 피하라. 타인의 비난과 분노가 당연한 것이라면 감수하라

청결: 몸과 의복, 주택에 불결한 것이 있으면 깨끗하게 하라

침착: 사소한 일 또는 불가피한 일이 생겼을 때 평정심을 잃지 마라

순결: 성생활은 가정의 화평과 자손의 번성을 위해서가 아니면 남용하지 마라.

겸손: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본받으라.

이런 모습으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왕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삶이다. 교회의 사명, 본질, 존재 이유, 교회의 역할은 모두가 선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요, 교회의 목표요, 교회의 비전이다. 교회가 올 인해야 할 것은 바로 선교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인가? 아니면 선교하지 않는 교회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4가지 교회 유형 중에서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 유형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우리 교회와 자신은 세계 선교에서 어떤 참여를 할 수 있는가?

4. 세계 선교에 지금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 방법들을 논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