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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2-6강 하나님의 뜻과 소명 본문

선교 교육, 훈련 자료/선교학교 2학기

제 2-6강 하나님의 뜻과 소명

후앙리 2020. 4. 8. 22:03

I.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

II. 기도, 이성, 신앙의 역할

III. 직업과 소명

IV. 소명의 발견

 

I.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

 

1. 하나님 뜻에 대한 혼동(피터 불름필드. 2009)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 하나님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인도하신다. “내가 새벽에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39:9-10).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로그인만 하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받을 수 있는 대화 방을 개설해 놓은 것인가? 하나님은 인류사의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의사소통을 하시면서 그들 인생의 모든 우여곡절들에 대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특정한 단계들이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혼란을 주는 말씀이 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4). 하나님으로부터 지도와 인도를 받는 사람만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가지는 직업, 우리가 결혼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그토록 힘드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매사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언제나 한 가지 결과만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모든 문제에 대한 올바른 판단, 하나님의 핵심적인 뜻, 완벽한 계획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배우자를 생각할 때 단 한 사람이 내정되어 있으며 그 사람을 신중하게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을 수수께끼를 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치 퍼즐 조각처럼 찾아서 서로 맞출 수 있다는 단서와 암시들을 흘리신다는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갖는 동안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한 학생이 있었다. 물론 결혼한 학생이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학생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주위에 있던 다른 학생들은 아르바이트도 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이 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힘들다는 소리만 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라도 하라고 일자리를 구해주었다. 마지못해 일을 하겠다고 하더니 다음날 아르바이트를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유인 즉,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생각하면서 길을 가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차던 축구공이 날아와 머리에 맞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하나님이 자신을 한 대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정신 차려라,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아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축구공에 맞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 학생은 일을 하기 싫은데, 핑계 될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일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을 공으로 한 대 때리셨다는 것이다. 이 학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 해석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이 학생에게 일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공을 차게 하셨을까?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핑계로 댄 것이다.

 

2. 하나님의 뜻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유익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의 학생처럼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고 있다. 야고보서 413절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는 말씀이 있다. 그 때 당시에 다른 도시에서 장사해서 큰돈을 번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 뜻대로 돈을 벌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에게 야고보 사도는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한다. 우리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계획하고 계획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 유익대로 하나님의 뜻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위의 유학생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자기를 위한 변명의 도구 혹은 유익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혹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13, 14절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어떤 신앙인이 차를 사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친구에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을까를 물었다. “내가 그랜저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면 에쿠스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러자 친구가 하는 말이 내가 보기에 하나님은 네가 차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네가 차를 안사는 것 일 것 같애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내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조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이라는 말은 상대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괜찮으시다면 가도 되지만 괜찮지 않으시다면 안 가셔도 됩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상대가 못가겠습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다. 말은 괜찮으시다면이라고 해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서 했지만 마음은 내 뜻대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뜻대로 이루기 위해서 괜찮으시다면이라는 말을 사용할 뿐이지 상대를 존중해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사람들은 보통 많은 기도를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주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내 뜻대로 되었으면하는 마음이 더 많다. “하나님 이 기도 들어주세요, 저 기도 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해놓고 막상 하나님의 뜻이 그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서운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 계획과 내 소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그런 고백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십시오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지 우리가 편하게 살려고 찾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 필요하지 우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고 하였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자기 욕망을 버리는 자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욕심을 내려놓고 사는 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묵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내 욕심과 내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 보다는 내 욕심과 계획을 내려놓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15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는 삶 가운데서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때, 혹은 일이 잘 알 풀릴 때 이런 상황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인정하고 사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느냐고 예수님께 묻는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은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이 사람이 맹인된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맹인이 되는 것처럼 잘못되고 힘든 인생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맹인처럼 사는 것만큼 힘들겠는가? 예수님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불평하고 힘들어 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건과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뿐 아니라 그것이 바로 이미 하나님의 계획해 놓으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니 에릭슨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은 열일곱 살의 나이에 어느 날 순식간에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다. 1967년 어느 날 조니 에릭슨은 수심이 깊지 않은 물에 다이빙을 하는 바람에 목이 부러지면서 목 밑으로 마비가 되었다. 그 사건은 그녀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였고 하나님의 뜻이었는가?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하나님이 그녀의 선을 위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조니는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녀는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계획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결코 예상할 수 없었으며, 전적으로 비밀이었으며, 전적으로 주권적이었으며, 때로는 매우 불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55:9).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어떤 것을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찬성하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니는 자신이 계획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나자 많이 절망하고 원망했다. 그가 그동안 자기 일기장에 세웠던 카누 여행, 농구게임, 무도회 등은 지워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쓴 책에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이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비장애인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가 상상할 수도 없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지만 그러나 그녀는 결국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야고보서 4장에서도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고 했다. 고난과 어려움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지금의 환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8:28)고 하였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때로 너무도 불쾌해서 하나님이 실제로 통제력을 상실하신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선을 위해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각자 다르고 힘들지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려움 가운데도 우리 배후에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돕고 계신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신다. 힘들더라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힘든 환경을 아무리 많이 의식하고 바라보고 생각한다고 해도 뾰쪽한 해결책은 없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편안한 인생, 고달픈 인생 가운데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배하신다.

 

4. 하나님의 뜻 사용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선을 행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4:17). 우리에게는 내일 세워 논 계획이 있다. 오전에 잠깐 예약한 병원에 들렀다가 오후에 계획된 일을 하고 밤에 모임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이렇게 계획을 세웠지만 이것이 꼭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면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순조롭게 계획한대로 될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계획이 변경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인생은 우리가 정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많은 부분에서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변경되는 것이다. 우리는 계획을 세워놓고 살지만 그렇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오직 주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될 수 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과정은 주님의 뜻 때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뜻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과 내 욕심과 계획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일어나면 화가 나고 불평을 하게 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인생의 일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고 우리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그것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야 하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꼭 묻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민감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많이 찾으면 신앙이 좋은 것처럼 생각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한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있기에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그 계획,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미리 다 알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대신에 어떤 일을 할 때에 인간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대부분의 결정은 인간 스스로 내려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자유를 주셨다.

예를 들어 오늘 당신이 어떤 신발을 신을지에 대해서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가? 당연히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어야 할 성경구절은 어떤 구절이 되어야 하며 휴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고 결정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결정하는가? 오늘 일터에 자가용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전철이나 택시를 타야 하는가? 만약 이것에 대해 하나님이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해서 일일이 다 물어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상식과 각자의 기호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죄가 없는 첫날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었기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원예가로서 바쁜 하루를 보낸 아담은 아내 하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왔다. 아담은 집으로 올 때 나무에서 요리재료를 따 갔다. 하와가 음식을 하는 동안 아담은 개인 풀장인 비손 강에서 수영을 즐겼다. 그러나 부엌에서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하와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 많은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다. 이 많은 맛있는 과일들 중에 어떤 것으로 요리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와는 과일을 다 먹을 수 없었기에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와는 아담에게 기도 부탁을 하였다. “이 많은 것들 중에 저녁 식사로 무엇을 주님이 원하시는 물어봐주세요아담이 기도했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 먹어도 된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안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여전히 하와는 결정을 못했다. 아담은 빨강 사과를 보고 먹고 싶어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를 사과를 먹으라고 한 것 같소라고 했다. 사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와는 이 사과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저밀까? 깍두기를 썰까? 으깰까? 튀길까? 푸딩을 만들까? 아니면 그냥 먹을까? 고민이 되어 아담에게 하나님께 기도해보도록 부탁을 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완벽한 뜻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담이 기도해보고 동일하게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먹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것 같다라고 했다. 아담은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이 짓도록 하신 것처럼 밥을 먹는 것은 알아서 하도록 내벼려 둔 것으로 아담은 이해했다. 하와는 충격을 받았지만 안심이 되었다. 이 과일 중에 어느 것을 먹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금지된 사과만 안 먹으면 되는 것이다. 하와는 의사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광범위한 자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는 한,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폭 넓은 원칙들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타당한 결정들 중에서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시기를 바라신다.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폭 넓은 자유보다는 끝도 없는 규칙들을 더 편안하게 여긴다. 많은 이들은 하나님이 마치 아기처럼 자신들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아기들은 부모님께 모든 세부사항을 다 알려주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모든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폭 넓은 원칙들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 타당한 결정들 중에서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생각보다 많다. 우리가 결정하는 많은 것들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너무 협소화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의 종류>

1) 계시된 하나님의 뜻(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

(1) 하나님의 명령

(2) 도덕적인 뜻

(3) 교훈

 

2) 숨겨진 뜻(앞으로 일어날 일들)

(1) 하나님의 계획

(2) 주권적인 뜻

(3) 섭리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혼동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뜻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뜻이 있다. 알 수 있는 뜻은 이미 성경에 계시된 뜻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들이다. 도덕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뜻도 있다.

 

1) 하나님의 계시된 뜻: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

(1)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들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22:36-40)는 말씀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마땅히 행해야 할 교훈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지 말해준다. 성경에서 이것을 요약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큰 뜻이다. 이것을 야고보서 417절에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는 말씀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선을 행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말씀을 먼저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3) 겉으로 드러나는 인도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솔직한 겉으로 드러나는인도를 경험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야 할 일과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이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인도는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위대한 두 계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의 구체적인 예를 제공해주며 하나님의 판단, 찬성과 반대, 책망과 경고도 함께 마련해준다.

성경은 인생이 요구하는 모든 선한 일을 하고 모든 선한 결정을 내리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기에 충분하여 또한 전적으로 믿을 만한 책이다. 성경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필요한 지침이 다 나와 있다. 이 말은 성경이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해서 백과사전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은 수학, 의학, 공학, 혹은 법학 교재가 아니다. 어떻게 비행기를 띄우고, 어떻게 수술을 하고, 어떻게 전기를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으로서는 성경으로 충분치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분야에서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데 충분한 윤리적인 규칙을 제공해준다.

 

(4) 겉으로 드러나는 인도에 대한 성경 구절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32:8). 시편에서 하나님의 훈계, 가르침, 지도란 토라(모세의 저작들)를 가리킨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에 주어진 명령, 교훈, 심판과 법령이 들어 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119:9).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119:105,106).

 

2) 하나님의 숨겨진 뜻: 앞으로 일어날 일들

(1) 개요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숨겨진 뜻이다. 그 청사진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들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맹세를 성취해 가시는 동안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실지 다 들어 있다. 이 은밀한 뜻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천사들이 자유롭게 내린 결정들을 다스리고 지배하셔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신다. 이 날은 모든 것이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알 수 있다.

내일의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려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때가 되면 알 것이다.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과 명령 속에서 정해진 일이다. 인생의 지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있는 수십억 개의 세부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우여곡절을 안고 있는 그 지도를 알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만약에 그와 같은 인도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좌절할 것이다. 오직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을 뿐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9:29).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은 우리들이 계속 지켜야 할 일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거나 논리적으로 암시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전부다. 우리가 성경과 일관된 결정을 내리는 한 우리는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3) 우리가 장차 일어날 그분의 뜻을 안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차 일어날 일은 우리가 알아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유익이 별로 없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의도하시고 명하신 일들은 피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보여주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혼란스럽고 비생산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그리고 비도덕적 행동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모든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덕적 뜻을 어기는 많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는 역사 속의 모든 사람과 천사들의 완고함과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 충분한 안내자가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심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된 도덕적 뜻에 근거해서 심판을 받을 뿐이다.

 

(4) 배후의 인도에 대한 성경 구절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이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31:3-5).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67,71).

하나님의 뜻에는 숨겨진 뜻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 은밀한 뜻, 언약적 뜻이라고 불린다. 이 뜻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마스터 플랜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청사진이다. 이 청사진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들어 있다. 이 숨겨진 뜻은 우리가 굳이 다 알 필요는 없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들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와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그 숨겨진 뜻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내일 아침에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내일 오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때가 되면 오전에 일어나야 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 뜻을 자꾸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는 수십억 개의 세부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미리 알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신명기 2929절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니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연관해서 우리는 이미 계시된 말씀, 율법만 행하기만 하면 된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모르는 내일 일어날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의도하시고 명하신 일들은 피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보여주신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혼란스러울 뿐이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에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비도덕적 행동들이 들어 있다. 즉 우리의 죄와 실수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미리 알면 피할 것인가? 오히려 고민만 늘어갈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일 오후 3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서 특정한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우리는 인격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로봇에 불과한 사람이 되고 만다. 앞으로의 일을 다 알게 된다면 삶의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우리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러기에 굳이 이것을 결정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주신 상식가운데 우리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을 충분히 가르쳐주셨다. 더 이상 알려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 이상을 미리 알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의 모든 면과 관련된 행동 원칙들을 제공해줌으로써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준비시켜 준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태도는 바로 성경에서 이미 계시한 말씀들을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에 힘써 노력해야 한다. 그 선한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세상을 유익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노력 보다 그 선한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경의 신앙 인물들에게 고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고뇌가 아니라 그 뜻대로 살아내려는 고뇌이다(제럴드 L. 싯처. 2004).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아셨다. 그 사명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형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늘 아버지께 을 옮겨달라고 구하면서도 끝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고난과 죽음의 숙명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뜻은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동기를 살핀다.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정보다 날마다 내리는 작은 결정을 중시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은 현 순간이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몸가짐, 시간과 재능의 사용, 허드렛일도 마다 않는 태도, 봉사의 각오, 희생적 삶에 대한 헌신 등 우리가 날마다 내리는 선택으로 결정된다. 그 선택이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기 위한 것인가? 미래가 아무리 희미해 보여도 우리는 일상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다. 내일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서 오늘 그분의 뜻대로 살 책임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놀라운 자유가 생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된다. 미래에 대한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우리가 취하여 따를 수 있는 길과 방향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하나님을 구하는 한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그분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길, 우리가 택하는 길만이 그분의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 품고 계신 뜻은 하나가 아니라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분은 당신이 결혼할 사람을 정해놓지 않았다. 당신이 정해진 그 사람을 찾아내야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의 길을 택할 때 당신이 결혼할 수 있는 대상은 많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직업도 정해두지 않았다. 당신은 정해진 그 직업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다. 물론 여전히 선택해야 하면 그것이 힘겨운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내가 선택하면 된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위에 놓을 자유는 없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삶 전체를 그분께 드리기만 하면 갑자기 세상은 온통 가능성의 천지로 변한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유익을 위해 미래를 비롯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중요한 단 하나의 조건은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 땅을 사는 모든 인생의 모든 순간과 모든 사건은 그 영혼에 뭔가를 심어 놓는다. 날개 달린 무수한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영적인 생명의 씨앗도 각 순간을 타고 날아와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그 무수한 씨앗은 대부분 죽어 없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씨앗은 자유와 자원하는 마음과 사랑이 있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는 아무 데서나 싹을 틔울 수 없는 법이다”(토마스 마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에 하나님을 구함으로 좋은 토양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재량에 달린 모든 선한 선택에서 우리는 뜻의 방향이 단순해야 한다. 내가 창조된 목적만을 내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바로 우리 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의 취지는 이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로욜라의 이냐시오: 예수회 창설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것 외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최고의 지혜는 이것이다. 세상을 그 실체대로, 즉 타락하고 덧없는 곳으로 보라. 세상을 사랑하되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라. 자신의 모든 노력을 하늘나라를 이루는 쪽으로 지향하라”(토마스 아 켐피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은 지금이다. 나중이 아니라 항상 지금이다. 시작이 이를수록 좋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뜻대로 살도록 명하시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신하들의 아첨으로 자아를 추켜세워야 하는 못난 독재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미루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복종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의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와 확신과 안전을 가져다준다. 진실로 먼저 하나님을 구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길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결정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내 결정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에 안전하다. 절대 실패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이미 그 분의 뜻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리는 가장 힘든 선택은 결코 미래의 두 길 중 하나가 아니라 현재의 두 생활양식 중 하나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쉬운삶을 선택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멍에에 복종하는 첫 발걸음은 결코 쉽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은 그분께 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현 순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계획을 알게 된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고, 지난 결정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나 염려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살아온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나온 인생을 회고함으로써만 볼 수 있다.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 자체가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많은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낡은 자동차를 더 써야 하나? 직장을 옮겨야 하나? 아이를 하나 더 나아야 하나? 집을 사야 하나? 전세로 살아야 하나? 내년에는 대학에서 어떤 과목을 수강해야 하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계시된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고민하기 보다는 우리가 선택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5) 데살로니가 전서 3장 사례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시작했다. 나중에 아테네에서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곧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경험 있는 지도자가 없었기에 그는 특별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란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3 :1-3)라고 하였다. 그들은 좋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덕적 뜻에 일관된 현명하고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계시나 거룩한 암시도 받지 않았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는 쪽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그리고 느꼈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신중하게 모든 가능한 조처들을 저울질해보고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6) 빌립보서 2장 사례

에바브로 디도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방문하기 위해 빌립보에 왔다. 그런데 병에 걸려서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 그러자 바울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질병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고 에바브로 디도도 그들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2:25-26).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하도록 인도를 받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인도함을 받는 것 같아서, 혹은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알기 위해서 어떤 사인을 구했거나 기드온처럼 양털 뭉치를 두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현명하고도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린 것이다.

 

(7) 배후의 인도

하나님은 신비롭게, 그리고 섭리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한 단면이며,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방침에 따라서 일어난다. 이 배후의 인도는 예측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겉으로 드러나는인도에 의하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인도에서 사람을 속이거나, 살인하거나, 무엇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탐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부도덕적인 것들을 배후의인도에 통합시키신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택하신 백성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신다. 역사의 과정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다스리실 지를 예측하는 표준적인 규칙이 없다. 우리가 일상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그와 같은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다스리시고 인도하셔서 우리의 궁극적인 선이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와 같은 과정의 단계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 않는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29:29).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의 겉으로 드러나는인도를 잘 듣고 오로지 그 빛에만 의지해서 가는 것이다.

 

(8) 결혼과 불순종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 여성의 경우에 하나님의 겉으로 드러나는 인도는 분명하다. 상대 남자가 그리스도인이고, 유부남이 아니고, 가까운 혈육이 아닌 한 그녀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성은 비그리스도인 남성에게 끌리고 있고 성경이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여성은 하나님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같은 경우의 다른 사례들을 떠올린다. 이 말씀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다른 그리스도인 여성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 남자도 회심시켜 주셨다. 그 남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이제는 두 사람이 모두 진정한 신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배후의 인도에 대한 사례에 고무된 이 여성은 성경을 따르지 않고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한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배후의 자비에 기대는 일은 매우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때로 비그리스도인 배우자를 회심시키신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 그 여성은 성경을 따르지 않고 결혼한 다른 부부들의 아픔과 불행은 인도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는가? 어떠한 경우에든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주제 넘는 일이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6:1-2).

그 어떠한 죄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통해서 무엇인가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근거로 그것을 정당화 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근거가 되어야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은 모순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내가 신앙을 버리겠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쁘게 복을 주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의사 결정에서 우리가 행동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유일한 인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다.

이미 밝혀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을 누릴 뿐 만 아니라 숨겨진 하나님의 뜻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결정하며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II. 기도, 이성, 신앙의 역할

 

1. 기도의 역할

좋은 의사결정이 성경을 알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기도는 왜 해야 하는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결코 성경 이외의 어떤 부가적인 인도를 요구하는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기도는 성경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딤후 3:17) 하는 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지 않는 기도다.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 기도한다. “주님 제가 성경의 가르침을 문맥 속에서, 조화롭고 균형 있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내려야 하는 결정과 관련해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게 해 주세요우리는 성경의 각 부분을 전체와의 조화 속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밝히 보여주시도록 기도한다.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모든 상황들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분별력을 위해서 기도한다. 균형을 잡고 우선순위를 파악하고 부차적인 일에 매달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 유효한 대안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유리하고, 유용하고, 실제적일지를 알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

성경에 복종할 수 있는 겸손과 영적훈련을 위해서 기도한다. 성경의 가르침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를 때는 더욱 기도가 필요하다. 경건함에는 자기부인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때에 자기부인을 해야 하는지 그 적절한 시기를 알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앞세울 때마다 거기에는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리를 우리가 인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적당한 대로 우리의 계획에 복을 주시거나 그것을 막으실 자유가 있으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정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시든 간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계획이 아무런 결과도 맺지 못하게 하신다면, 혹은 심지어 질책과 고통마저도 함께 주신다면 욥과 같이 겸손하게 반응해야 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정과 계획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시도록 기도한다. 하나님을 주권적인 통치자로서 인정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합한 대로 통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기도다.

 

2. 이성의 역할

이성이란 합리적인 사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성에 합법적인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문맥이나 문법, 혹은 언어학에서 비롯되는 형식적인 규칙에 엄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이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시 문학, 속담문학, 비유문학, 과정법, 묵시 문학, 모형론 등의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 이들은 성경의 모든 구절을 수평적 차원에서 보고, 모든 구절을 서사적 산문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것을 최대한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내다 버리라, 약이나 의사는 필요없다, 믿음이면 충분하다, 속죄함에 치유가 있다고 충고한다.

이성을 최상으로 여기는 것도 잘못이다. 이들은 이성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은 모두 가짜라고 여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죽음에서의 부활, 기적과 명백한 성경의 진실들을, 이성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부인한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3:5)는 말씀은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을 거부한다. 이 구절은 네 이해력을 사용하지 말라, 합리적인 논쟁을 하지 말라, 머리를 쓰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결정을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에는 언제나 결함이 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섭리에는 신비의 요소가 있다. 가장 논리적인 결정을 내릴 경우조차도 우리는 예상치 못한 요인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성의 역할에 포함된 임무가 있다. 이성은 성경을 현명하게 사용한다. 성경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문법적,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문맥적 요소들을 무시한다.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면 성경 전체와 체계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해석들을 얻어낼 수 있다. 이성은 예상치 못한 요인들을 염두에 둔다. 이성은 언제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 플랜 B가 있는 것이다. 이성은 만약의 경우를 위해 준비하게 해준다. 특히 예상대로 풀리지 않았을 경우에 더욱 그렇다. 인간이 보기에 끔찍해 보이는 결과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참담해 보였던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선을 위한 일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성은 자유를 제대로 다룬다. 성경이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는 분야에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부동산 시장에 나와 있는 그 어떠한 집도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합법적 선택 대상이 말 그대로 수백만 개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사결정에서는 이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좋고 더 낫고의 문제다. 이성은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저울질 할 것이다.

이 집을 구입할 능력이 되는가? 여유롭게 구입할 수 있는 평균적인 집을 살 것인가? 예산은 빠듯하지만 그 보다 더 나은 집을 살 것인가? 이성은 시골에 집을 사는 것과 직장과 학교에 가까이 있는 교외의 집을 사는 것 중에 무엇이 지혜로운지를 고려한다. 내가 만약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면 수풀에 둘러싸인 집을 사는 것이 타당한 결정인가? 여러 층으로 된 집은 공간은 널찍하지만 내가 심장이 안 좋아 계단이 많은 집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런 것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의사결정을 하는데 폭넓은 자유를 주셨기에 이성의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에 단 하나의 올바른 결정만 있다면, 단 하나의 정확한 하나님의 중심적 뜻만 있다면, ‘이성은 과소평가되고 이성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덤불 속에서 바늘을 찾을 때까지 그냥 열심히 찾기만 하면 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 신앙의 역할

신앙이란 신뢰, 믿음, 혹은 확신을 말한다. 신앙은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넘친 나머지 근거 없는 가정들을 한다. 신앙의 대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들을 믿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를 믿는 것이다.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누군가 지혜롭고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현명하다는 것을 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이 말이 결코 순탄한 항해, 즉 맑은 날과 푸른 하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어떠한 결정이든 그 결과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리라고 믿을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종종 심각한 문제들을 겪게 된다. 다니엘, 예수님,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그랬다. 올바른 길은 거칠고 힘든 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길인 한 우리는 계속해서 그 길을 가야 한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을 구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좋은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사탄이 백기를 흔들며 나와서 항복하는 것도 아니다. 거친 파도를 만나지 않는 배는 물 빠진 부두에 놓여 있는 배뿐이다. 좋은 결정을 내리면 아무런 회의도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좋은 결정을 내린다고 화평한 것은 아니다. 올바른 규칙을 다 따랐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진정으로 평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평안과 확신의 마음이 들지 않는 한 그 결정은 아직 때 이른 것이며 계속해서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때는 성경이 그 결정에 대해서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 자동차를 훔쳐야 하는가에 대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결정들은 그것보다 좀 더 복잡하며 올바른 길에 제대로 들어섰는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결정에는 불확실한 요소가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게 된다면 그와 같은 감정은 건강한 것이다. 만약 이 잠언서를 그가 네 길을 지시하시리라로 해석해서 마치 하나님을 교통경찰처럼 정확하게 어디에서 회전하고,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지시해주는 분인 양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보지 못하는 증거니’(11:1) 라고 하였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배후에서 인도하시는지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암암리에 믿는다. 우리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지배하실 것이라고 우리의 신앙은 철저하게 확신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이 곧게 될 필요가 있음을 명백하게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길에는 비뚤어진 부분들, 이런 저런 우여곡절들이 있다. 그것을 곧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해가 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곧게 하심으로써 모든 궁극적인 해를 없애 주실 것을 안다. 우리의 최선의 결정도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실 것이다.

신앙의 역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지혜롭지 못한 결정들, 성급하고 무지한 결정들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는 다 설명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아신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의 역할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길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 길들이 그것 자체로는 선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른 모든 것과 함께 섞으셔서 궁극적으로 선한 결말을 맺으신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의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지배는 배후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길을 곧게 하시는지 볼 수가 없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신비롭게 보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우리의 선을 위해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없다.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은 자신의 길이 곧다고 느꼈을까? 하지만 신앙은 느낌을 넘어선다. 신앙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다 받아들인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고 믿는다. 정당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도 기도, 이성, 그리고 신앙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의사결정은 성경적 자유의 범위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해서 우리의 선택에는 자기부인이 들어갈 수도 있다. 정당성은 편의성, 그리고 이웃 사랑과 같은 요소들과 더불어 저울질 되어야 한다.

 

 

III. 직업과 소명

 

1. 직업과 소명의 구분

1) 직업

이 용어는 세속적인 용어다. 직업이란 수입을 제공하고, 교육이나 훈련이 필요하며,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한 사람의 특정한 일의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직업에는 권한과 지위가 뒤따른다. 직업이란 내가 사회에 소속하여 기여하는 일원이라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2) 소명

소명이란 용어는 신학적인 용어다. 소명이란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라고 정의할 수 있다.

 

3) 소명과 직업의 차이점

소명은 직업을 초월한다. 운동선수란 천성과 재능에 있어 존재자체이지만 운동 종목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차적 소명은 능력과 지위와 기회와 배경과 무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보통 사람이든 특출한 사람이든, 가난에 짓눌린 사람이든 배부른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순종하는 것은 만인을 향한 그분의 부르심이다. 이것은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의 일차적 소명이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그분을 섬기는 삶이며 특별한 헌신과 에너지와 방향으로 투자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도로 단호하게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며 소명이란 바로 그 진리를 말한다”(오스 기니스. 2006)

소명이 결코 직업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되지만 종종 소명에는 직업이 사용된다. 의사는 직업이 의사지만 그의 소명은 직업보다 크다. 의사라는 직업을 사용해 그는 세상 의사들이 대부분 간과하는 목표들을 이루고 있다. 소명은 전통적 직업이 가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는 보낼 수 있다. 친자녀 여섯에 입양 자녀 열네 명 도합 스무 명의 자녀를 둔 분이 있다. 집안이 난장판이 돼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기는커녕 그녀의 말에는 침착함과 기쁨과 활력이 배어 있다. 그녀에겐 전통적 의미의 직업은 없었음에도 자신의 소명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리스도인의 생의 소명은 단일 직무인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우리가 받은 소명은 복합적이다.

 

4) 소명과 하나님의 뜻

인생의 소명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소명은 기질과 재능과 인생경험에서 자란다. 소명이란 하나님에게서 온다. 소명이란 우리 존재의 일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두신 것의 일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나라를 섬기는 방식의 일부다. 자신의 소명을 찾기도 해야 하지만, 소명이 이미 우리 정체의 한 부분으로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한 번 씨를 뿌리면 해마다 살아나 꽃을 피우는 다년생 식물처럼 소명은 우리 안에서 발견되어 표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소명을 찾는 것처럼 소명 자체도 우리를 요구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부름 받은 일, 평생 하도록 부름 받는 일이다. 소명은 명령과 같다. 소명은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한다. 모든 개인의 삶의 영역은 평생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송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정해주신 자리다. 그러므로 소명을 늘 되새기며 살 때 우리는 현세의 삶을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다. 모든 소명은 세상의 유력자들과 명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 자체로 존엄성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5) 직업의 문제

직업은 사회에 유익을 주는 모종의 일이다. 직업은 특정한 교육이나 훈련을 요하고 승진을 약속하고, 보상을 제공하며, 사회에 요긴한 것으로 여겨지는 결과를 산출해낸다. 직업은 전체 사회의 필요와 복지와 이익에 이바지한다. 직업은 공생의 역할을 한다. 경제생태계라도 되는 듯 순환 체계를 만들어 자체를 존속시키는 것이다. 모든 소명이 다 구체적 직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자신의 가장 깊은 관심이나 공기와 별 상관없는데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경우가 있다. ‘죽지 못해 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때로는 직업이 오히려 소명의 발견이나 추구를 방해할 수 있다. 직업은 그 분야 사람들을 하나로 연대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단순히 가족 부양에 충분한 수입을 원한다면 파업을 정당화하는 프로 농구선수에게서 우리는 그런 연대의 결과를 본다. 직업을 통해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필요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소속 단체의 이익을 꾀하는 가치기준에 매달리게 될 수 있다.

어떤 소명은 결코 공식적 직업이 될 수 없다. 현대 사회가 직업, 특히 그 직업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지위와 수입에 집착하다 보니 무직을 택하는 이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만다. 가사와 자녀양육을 전업으로 삼은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은, 부모역할을 자신의 소명감의 핵심으로 알면서도 단지 공식적 직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문화적으로 인정받지 못해왔다. 자원봉사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기 위해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직업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은 찬밥 신세가 된다. 대부분의 직업에는 엄청난 인프라가 수반되는데 거기서 내세우는 가치관이 언제나 기독교 신앙과 병립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은 협력보다는 경쟁을, 나눔보다는 부를, 봉사보다는 권력을, 진실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직업은 사리사욕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업을 갖는 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전복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6) 소명의 의미

소명은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구할 때뿐 아니라 이미 당신을 추구하기 전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추구하는 분도 그분이지만 우리를 추구하시는 분도 그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당신과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를 주시는 일반은혜가 있다.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창조의 은혜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불신자들도 자신의 재능을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많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에 기여할 수 있다. 이사야에서 이방 왕 고레스도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귀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보다 큰 계획에 일조했다.

불신자들도 신념과 동기가 어떠하든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고 실제로 기여하고 있다. 모든 분야의 의사들은 환자를 고칠 수 있다. 변호사들은 정의를 대변할 수 있고, 사업가들은 유익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소명은 이 땅의 삶에 적용된다. 소명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뭔가 긍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그분을 높인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려 일하고 계시고, 언젠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그 나라를 세우실 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소명이란 유독 종교적 직업을 가진 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공사장 인부도, 건축가도, 재봉사도, 예술가도, 정부 관리도, 군장교도, 회계사도 다 소명이 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 혹은 불신자 할 것이 없이 의, , , 미를 창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도 사랑하신다. 그분은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서 유익한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들의 일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미를 창출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깨어진 세상을 고치는 것)을 이루어 가신다.

소명이 있는 이들은 더 높은 목표 의식을 갖고 더 큰 그림을 본다. 보험을 파는 것은 직업이다. 그 일의 성공 여부는 사람들에게 보험이 필요하든 말든 무조건 상품을 판매한 숫자로 결정된다. 그러나 사람들을 자기 자원의 훌륭한 청지기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은 소명이다. 스포츠 용품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직업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건강과 재충전을 위해 여가 시간을 잘 활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소명이다. 중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직업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과 지원과 지도를 베푸는 것은 소명이다. 비서로 일하는 것은 직업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전혀 불편을 주지 않고도 세부 업무가 효과적으로 돌아가도록 사무실을 잘 정리하는 것은 소명이다.

직업은 사람들이 수입과 권력과 직위와 위신을 생각하게 한다. 소명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필요와 도덕적 기준과 전체적 시각을 고려하게 한다. 인간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소명도 직업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인간을 규정하고 소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럴 때 인간은 자유로이 이 직업을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소명 의식이 직업 선택보다 선행돼야 한다. 소명을 발견하는 주된 방법은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되었고 재능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이 곧 너라고 말하지만 소명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일을 하라고 말한다.”(오스 기니스. 2006).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은 직업이지만 소명자다.

소명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 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에 10명이 함께 도착했다고 하자. 똑같은 사건을 목격하지만 저마다 보는 것도 다르고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한 남자는 운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교통정리를 한다. 한 여자는 사고를 세세히 관찰한 후에 119에 전화를 걸어 정확하게 현장을 설명한다. 한 은퇴한 여교사는 길가에 죽어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경악하는 두 아이를 보고는 품에 꼭 끌어안고 달래준다. 한 간호사는 사람들의 부상이 심한 것을 보고 즉시 응급 체크에 들어간다. 한 목사는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한 목격자를 보고 곁에서 진정시킨다. 한 십대 여자는 영적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기도한다. 다른 사람들은 혼란스런 상황을 보고 요긴하게 쓰이도록 자기 차에서 담요며 구명기구며 비상용품을 가져다 놓는다. 같은 사고에 저마다 반응이 다른 것은 그것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가는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나 운영상 문제가 있는 단체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그 기관에 들어가 더욱 효율적인 운영 체계로 바꿔놓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치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주택 문제만 보이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국제 헤비타트 운동 같은 비영리 기관에 몸담아 문제를 줄여 나간다. 필자는 세상에 잘못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머리 속으로 알지만 그 모두가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무능한 정부 때문에 골머리를 앓지는 않는다. 청소년 흡연이나 에이즈 확산 같은 사회 위기를 알면서도 필자는 국민 보건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는다. 지구 온난화, 해양 오염, 도심의 높은 문맹률, 동유럽의 난민 문제로 밤잠을 설치지도 않는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과 관심은 있다. 그러나 필자는 목사로, 선교사로 영적인 고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기독교 신앙을 실생활의 경험과 연결시킬 줄 모드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인다. 진로에 대해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야 할 대학생들에게 관심이 있다. 이것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이다.

 

2. 생의 본문 찾기

소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여정을 가는 것과 같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내가 미래에 하게 될 일에 대한 정보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음 근무지로 명령을 받는 군인이 아니다.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자체를 통해서다. 소명을 발견하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연인이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시도와 실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소명이란 여정과 불가분의 관계다. 소명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다.

경험은 우리를 가르치고 준비시키고 단련시켜 다가올 미래를 잘 맞이하게 해준다. 우리는 여정 중에 배우면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간다. 성품과 신앙이 자라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며 전체적으로 성숙해진다. 그러다 때가 되면 소명의식이 싹튼다. 우리가 도착한 지점은 처음에 가려고 했던 계획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드러나 유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의 길은 알 수 없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가는 곳들과 하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문제들과 성취하는 목표들과 추구하는 직업들 중에는 우리의 현 시야에는 들어와 있지 않은 것들도 있다. 가다보면 예상할 수 없는 이변들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10년 전에 미리 인생을 계획함으로써가 아니라 현 순간 당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명을 발견해 간다. 산길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점차 경치가 넓게 펼쳐지듯, 시간이 가면서 우리의 소명의식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앞에 뻗은 등산로를 단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때로는 다음 발을 내딛을 만큼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1) 소명 찾기 : 소명 찾기는 과학이며, 동시에 이에 못지않게 예술이기도 하다.

(1) 가장 깊은 동기

내 흥미를 끌고 내 힘이 나게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사람에 따라 내면의 강한 열망이나 충동이 그를 소명으로 몰아가는 듯 한 경우가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그들을 움직여 새 사업을 시작하거나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도심 학교의 교사가 되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재능만이 아니라 흥미와 에너지와 열정까지 있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속에 음악이 들어있었다. 어찌나 신동이었든지 어려서부터 연주자와 작곡가로 명성을 떨쳤다. 피카소는 청소년 때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성품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부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토마스 에디슨은 발명가가 되려고 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발명가였다. 이런 사람들은 소가 풀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고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아가지 않을 수 없듯이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블린 언더힐은 맨체스터 대학에서 종교철학 강사였는데 진정한 영적 헌신이 얼마나 실생활에서도 가능한 현실인지를 말했다. “영적인 삶이란 현실 세계와 별리된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의 한 부분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인간은 온전한 인간일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을 전부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청교도 목사이자 제 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1703- 1758)에게 신학의 마음은 그에게 심장 박동만큼이나 존재의 핵심 요소였다. 그는 거의 한평생 일기를 써서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에서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청소년 때부터 그는 이미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글을 썼다. 그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에릭 리델은 1924년 올림픽 육상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스코틀랜드와 전 세계의 영웅이었지만 그는 올림픽 1년 후에 선교사로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잊혀진 존재로 여생을 보냈다. 그로 하여금 명성과 부를 등지고 중국의 선교 사역에 뛰어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전기 작가는 리델에게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단순하고 쉬운 결정이었다고 한다. 에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소명에 자신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2) 재능

소명 발견에서 적절한 재능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의도만이 아니라 은사가 있어야 한다. 평범한 작곡가 살리에리는 자기보다 젊고 뛰어난 작곡가 모차르트의 작품에 질투를 불태우며 노년을 보낼 만큼 뛰어났다. 그는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저에게 소명을 주셔야 했다면 왜 그 소명에 걸 맞는 재능은 주실 수 없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마땅히 그 일에 필요한 재능도 주신다.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 놓아두는 편이 더 좋을 일들에 매달리게 된다. 물론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재능은 소명의 단서는 되지만 소명의 필수 조건으로는 부족하다. 능력은 보통 수준인데도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바울은 자신의 언변이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며, 교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말할 때에도 자기 모습이 보잘 것 없었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재능을 이력서 한 장으로 줄인다면 어쩌면 그는 그 직책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끈기 있고 뜻이 굳은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열심히 일하며 갖가지 고난을 견뎌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능력과 배경만으로는 다 얘기할 수 없다. 그의 동기는 다른 출처에서 왔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3) 인생 경험

인생 경험도 필요하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를 소명으로 떠미는 경우도 있다. 암으로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가 호스피스로 일하게 된다. 수년간 구타당하며 산 여자가 구타당하는 여자들을 위한 클리닉을 개설한다. 미지근한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 훌륭한 전도자가 된다. 인생 경험이 그들에게 생의 소명을 일깨워 주었다.

때로 적시에 찾아오는 사소한 경험이 도화선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당시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몰고 올 수도 있다. 영국의 여배우 엣킨스는 어린이집 자선행사에 갔다가 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의 괴로운 과거와 절실한 애정 결핍을 보면서 엣킨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경험에 마음이 크게 움직여 그녀는 여배우라는 화려한 직업을 버리고 정서 장애 아동들을 위한 가정을 꾸민다.

고난의 경험도 비슷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존 번연이 자서전 넘치는 은혜를 기록하고 천로역정을 착수한 것은 비국교도 신앙 때문에 12년 간 베드포드 카운티 감옥에 갇혀있을 때였다. 그의 작품에는 유혹과 고난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감옥 생활의 경험이 인간의 죄의 깊이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경이를 묘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다듬고 여러 이야기와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한 것도 몇 년간 시베리아 수용소에 있을 때였다. 그의 고난은 하나의 음성이 되었다. 인생의 가장 심오한 질문들을 묻고 답해야 한다는 부름의 음성이었다. 감옥 생활이 있었든 없었든 도스토옙스키는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통찰과 힘으로 글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4) 열린 문, 닫힌 문

소명의 발견과 관련된 넷째 요소는 기회다. 기회를 환경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 기회란 열린 문으로 찾아온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나 자신이 기도로 구하던 기회를 가리켜 열린 문이라고 표현했다. 과거에는 닫혀있던 곳들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감옥 같은 엉뚱하고 불쾌한 곳도 그에게는 사도의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열린 문이 되었다. 거기서 그는 경건한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며 감옥의 이방인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대학시절의 경험이 때로 소명의식을 갖는 기회가 된다. 여름 캠프 상담자로 일한 적이 있는 대학생이 나중에 중고등부 프로그램 지도자가 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한 학기를 보낸 다른 학생들은 돌아와서 경제개발 분야에서 일한다. 비영리 기관에서 한 학기 동안 인턴으로 일한 또 다른 학생들은 졸업 후 같은 기관에 들어가 일한다.

기회란 베푸는 자의 호의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폭넓은 인맥을 활용하여 젊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을 자기 소명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어떤 기회는 순전히 우연처럼 보이기도 한다.

법학도를 거쳐 변호사가 된 존 칼빈은 1530년대 초에 그리스도께 회심하고 개혁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미 철학자 세네카에 관한 주석을 펴낸 바 있었기에 그의 총명함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1536년 스트라스부르에 가던 길에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제네바 쪽으로 우회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제네바는 격변을 맞고 있었다. 시의회가 투표를 통해 제네바를 개혁 도시로 삼기로 결정한 직후였다. 물론 그것의 의미는 아직 묘연했다. 시초 단계인 이 운동의 지도자들 중 하나인 윌리엄 파렐은 칼빈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그의 호텔로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 새 교회 사역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천성이 얌전한 칼빈은 그런 지도자 일에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삶은 고독과 학문에 헌신돼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파렐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러나 파렐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파렐은 만일 칼빈이 제네바에 남아 이 운동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정죄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유명해진 말이다. 별로 반가운 기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칼빈은 왠지 그곳에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능하신 손을 내게 얹으시며 갈 길을 멈추게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두려워 여행을 계속하지 못했다”.

결국 칼빈은 시의회의 적들이 그에게 추방을 명했던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제네바를 떠나지 않았다. 그 도시에 머문 25년 동안 칼빈은 대규모 회중을 상대로 목회를 하면서 수천 회에 달하는 설교를 했고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출간했으며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해 주석을 집필했다. 그가 사역을 도왔던 그 교회는 유럽의 다른 개혁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모인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중요한 회합에 참석하곤 했다. 제네바의 목사이자 교회 지도자로서 그의 삶은 우연 같은 한 번의 우회와 윌리엄 파렐과의 짧은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열린 문도 소명에 단서가 되지만 닫힌 문도 마찬가지다. 교육가인 파커 파머는 말하기를 소명에는 한계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소명을 선택할 때 우리는 다른 가능한 소명들을 제외시키는 것이다. 선택을 내리려면 좋아 보일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한다. “사실 나는 되고 싶은 대로 다 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도 없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이상적 자아를 위해 우리를 추상적 규범에 두르려 맞추려 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타고난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잠재력과 한계를 동시에 뜻한다. 타고난 본질에 충실치 못하는 것은 곧 현실에 어긋나는 것이요 그럴 때 뒤에서 길이 닫히고 만다”.

 

(5) 사람의 목소리

소명의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것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명이 공동체와 동떨어져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은사를 평가하고 꿈을 들어주고 사고에 도전을 던져주고 계획을 격려하거나 말릴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잘 아는 사람은 친구들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의 장단점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내가 누구이며 평생 할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진공 상태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환경과 아울러 사람을 사용하여 우리의 소명 분별을 도우신다.

 

(6) 일의 기쁨

마지막 신호는 기쁨의 신호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찾는 것은 소명의 발견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 원하신다. 그분은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느낌을 통해서도 소명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 소명을 알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이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분은 또한 즐겨 일하는 종을 사랑하신다.

행복과 기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 세상은 괴로운 곳이다. 농부들은 억척스런 잡초를, 사업하는 사람들은 변덕스런 소비자를, 교사들은 버릇없는 학생들, 목사들은 미지근한 교인들을 상대해야 한다. 자신의 소명에 아무리 기쁨을 누린다 해도 우리는 일에 치이고, 직장 동료들한테 짜증이 나고 권태기를 겪으며 자신의 일을 불필요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구조들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다.

2) 듣는 법을 배운다.

소명에 대해서 어떠한 단계나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으신다. 소명이란 세월의 흐름과 경험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살면서 배움으로,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 실험을 통해, 들음을 통해 소명을 발견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침묵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도움이 된다. “나는 언제나 침묵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하나님은 심령의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마더 테레사)

 

 

IV. 소명의 발견

 

1. 소명 확신의 유익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소명의 확신은 중요하다. 마음의 확신 없이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확신 없는 일의 결과는 좋을 수 없다. 지상 대 계명을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확신 없이 시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소명은 확신 가운데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소명 확신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해준다. 선교사역은 어려움이 많은 일이다. 유혹과 좌절과 아픔이 있으며, 때로는 실패도 있다. 선교사들은 여러 차례 중도에서 선교를 포기하고픈 생각이 든다. 언어습득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고, 몸이 아팠을 때, ‘왜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할 때도 있다. 후원금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한 가운데서 선교사가 탈락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셔서 세우셨다는 확신이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선교지에서 죽을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 자리에 부르셨다는 소명 확신이 참고 견디고 이겨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선교사가 어려움 가운데서 이길 수 있도록 돕는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소명확신이다.

소명 확신은 선교사에게 정체감을 준다. 정체감이란 선교사가 정말 선교지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다. 선교사 자신이 꼭 선교지에 필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선교는 과연 무엇이며, 선교사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 물음이다. 정체감의 결여 때문에 선교사는 좌절하고 낙담하게 된다. 정체감의 결여는 다른 선교사를 비방하게 하고 선교지의 현지인들을 불평하게 한다. 이처럼 선교사에게 정체감이 부족할 때 많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정체감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소명의식이다. “나의 정체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부르셨고 나를 선교사로 부르셔서 이곳에서 일하게 하셨다는 분명한 정체감은 선교에 대한 소명 확신에서 나온다. 선교사는 지극히 나약한 존재이다. 어쩌면 쓰러지고 넘어지는 때가 더 많다. 선교 사역의 열매가 없을 때도 많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비난할 때도 있다. 선교사는 불안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럴 때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정체감은 선교사에게 큰 힘이 된다.

 

2. 소명의 종류(허버트 케인. 1991)

1)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9:24~26)이다.

성도로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화평, 소망, 영광, 거룩함, 자유와 고난을 위해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

 

2)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한 부르심이다. 평범한 직업을 떠나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것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6:4). 모두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다 사도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고전 12:29).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장막 짓는 자로 부르신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전도자로 부르신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었다. 하나님은 처음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완전히 바꾸셨다. 기독교 사역의 전임 사역자로 부르셨다. 그리스도인의 직업에 대해서 어떤 것은 신성하다거나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직업이 다 신성하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 짓는 것을 무효화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파하는 특별한 부르심은 존재한다.

바울은 자신이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딤후 1:11) 특별한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에바브라가 그리스도의 진실한 일군이라고 하면서 누구에게나 다 적용하지 않는 표현을 썼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6:2),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겠다는 말씀(행전 6:4)은 이것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특별한 소명의식이다.

 

3. 선교 소명을 받기 위한 기본 조건(허버트 케인. 1991)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마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 100%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열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내심 나를 스스로 평가해 놓고는 나는 다 할 수 있어, 그러나 아프리카 같은 곳은 싫어! 선교사로 직접 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의 음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선교사로는 안 돼, 선교사를 돕는 일이라면 할 수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평생을 가도 직접적인 선교사로서의 소명감을 받기 어렵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어떤 곳이든지 가겠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2)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한밤중에도 젊은 엄마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만 아빠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냥 잠만 자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마음의 자세, 들을 귀를 여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어떤 사람은 왜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못 들을 뿐이다. 하나님이 부르셨지만 사무엘은 들었고 엘리 제사장은 듣지 못했다. 듣고자 하는 귀가 열려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3) 일에 대한 열심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부지런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일을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신다. 모세, 다윗, 베드로, 마태와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왔을 때 모두가 바쁜 일을 하는 가운데 있었다. 주님은 자기의 포도원에 건달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부지런한 일꾼을 원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9:4)고 하셨다. 소명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해 어떤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만약 현재 하나님의 일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다. 교회 주일학교의 한 반을 맡는다든지, 심방이나 전도지를 배포하는 일이 필요하다. 구제사업, 청소년 모임을 인도한다거나 성경학교를 직접 돕는다든지, 지역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일들 중에 한 가지를 봉사함으로 그 일을 시작 할 수 있다. 선교사 기도후원회에 참여하고 선교사를 위해서 선교 후원금을 보내는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이 부르신다.

 

4. 타문화권 선교사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

1)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뜻 두 가지

첫 번째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에 대한 일반적인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이다.

두 번째는 개인 개인에게 갖는 특수한 뜻이다. 하나님은 각 신자들에게 각각의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특수한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자의 마음이 계속적인 헌신의 행위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 져야만 한다. 특수한 뜻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인 뜻을 행할 수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특수한 뜻을 나타내 주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뜻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는 듣지 않고 특수한 것에 대해서만 들으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잡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듣고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사람이 있다. 특히 신령하다는 사람들, 기도 많이 하고 은사(예언)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한마디에 자신의 장래를 결정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영혼을 인도하시는데 다른 사람의 한마디로 결정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신령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한번 물어 보는 것으로 답변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어떤 목사님께서 몸에 병이 나셨다. 아파서 고생하시던 중에 신령한 권사님께서 잘 낫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가셨다. 거기서 목사님은 늦게나마 하나님이 그 권사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 병을 주셨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자신의 병을 위해 직접 기도하셨다. 그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고 병도 고칠 수가 있었다. 목사님은 그 뒤로는 소위 신령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 자신의 인생이나 신앙에 대한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고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 직접 대화하시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좀 확실히 보여주신다면 시원하게 그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확실한 분이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종종 더 확실하고 분명한 최근의 방법은 없냐는 질문을 한다. 도대체 어느 나라로, 언제, 어떻게 선교사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기존의 방법을 통해서 지금도 너무나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신다. 조용히 원칙에 따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부족함이 없이 보여주신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원칙적인 방법에 따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원칙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2)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

(1)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찾아야 한다. 각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하지는 않는가, 혹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인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13:46, 47 119:105).

 

(2) 기도를 하면서 직접 하나님께 여쭈어 본다(1:5).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기도 제목을 정리해서 하나님께 분명히 아뢸 필요가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해 어려운 점과 그리고 가능한 점, 그리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여 날짜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확실한 자신의 뜻을 보여 주신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것을 분명하게 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3)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8:1,4).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환경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허락하시기도 하시고 또한 막으시기도 하신다. IMF사태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뜻이 있을까 하는 것을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환경이 항상 100%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유일한 도구는 아니다. 환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데 병이 걸리거나 가족에게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럴 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고 포기하게도 된다. 그러나 그 환경은 사단의 방해 일수도 있다. 환경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요소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4) 주위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조언을 구한다(15:22. 9:15-17).

하나님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사람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성이 있다. 물론 사람들의 말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거나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5) 마음의 평안이 있는지를 확인한다(요일3:21).

하나님은 마음의 평안으로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최종적으로 나타내신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확실한데 다만 마음의 평안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신다. 환경이 어렵더라도 마음에 평안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대로 행할 수 있다.

 

(6)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다(16:13).

하나님은 때로 직접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오늘날 쉽게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직접적인 음성의 방법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직접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수도 있다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상의 몇 가지 원칙들이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7) 지역 교회에 의한 확인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다(딤전 3:15).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세상으로 흘러가는데 쓰이는 통로이다(1:8). 그러므로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 일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일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선교사 선발이나 선교사 소명을 확인하는 것은 선교단체의 일처럼 되어 있고 교회와는 별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선교는 교회의 일이고 선교사 선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에 의해서 파송되었고 돌아와서는 교회에 보고를 했다. 선교사가 소명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각 개인이 소속되어 있는 지역 교회로부터 어떤 확인이 있어야만 한다. 교회가 선교사를 가장 잘 알기에 교회가 축복해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교회가 축복해 준다면 선교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교회는 부분적으로 양육하고 후원하는 조건 가운데서 선교사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선교 훈련을 향한 열정이 반드시 선교 소명은 아니다. 참된 소명은 관찰된 행동과 일치한다. 선교사는 지역 교회에서 했던 것 이상 더 큰일을 선교지에서 할 수 없기에 철저하게 지역 교회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자신이 결정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된다.

 

5. 타문화권 선교사 소명을 방해하는 요소(허버트 케인. 1991)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 수백명중에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선교사로 나가게 된다. 선교한국 같은 선교 대회를 통해서 수 천 명의 학생들이 헌신하지만 정작 선교사로 나가는 숫자는 얼마 안 된다. 그것은 선교사가 되기 위한 많은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 교육

더 높은 교육을 위해서 투자하는 동안 사명감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선교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분명히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만약 고등학생 때 헌신을 했다면 대학 4년 그리고 신학교 3(목회자 선교사일 경우, 전문인 선교사는 이에 해당하는 전문 직업에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함), 군대 3(남자일 경우), 10년이 걸린다. 10년 동안 선교의 비전이 커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헌신자들이 자신의 헌신을 잃어버린다. 한 대학생이 헌신을 했다면 이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박사 학위까지 공부하기를 바란다면 그 기간은 더 길어진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선교사가 될 확률이 점점 더 줄어들게 된다. 자신의 학문을 활용하기 위해서 선교지 보다는 대학에 남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공부가 오히려 선교사가 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교를 위해서 공부를 더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선교를 위해 필요 없는 공부라면 중단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반대로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공부하는 기간을 선교의 준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선교에 대한 실제적인 것을 계속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2) 결혼

많은 사람이 결혼 때문에 선교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 젊어서 선교사로 헌신하지만 선교사도 보통의 사람이기에 결혼하는 것은 필요한 요소다. 물론 어떤 경우에 하나님은 독신으로 부르시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결혼 상대를 선교와 연관시키지 못하여 선교를 포기하는 경우다. 허드슨 테일러는 사랑하는 여인이 선교사로 나갈 수 없다고 했을 때 그 여인을 포기 했다. 그 후 하나님은 선교에 합당한, 어쩌면 더 좋은 자매를 그의 아내로 주셨다. 우리는 허드슨 테일러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만약 선교사로 헌신했다면 선교보다 결혼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헌신은 그저 하나의 환상의 순간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3) 부모의 반대

부모의 반대는 의외로 큰 장애가 된다. 예수를 믿는 부모와 믿지 않는 부모 모두가 방해를 한다. 믿는 부모의 방해가 믿지 않는 부모의 방해보다 오히려 강할 때가 있다. 믿지 않는 부모가 반대했을 경우에는 선교사가 그 부모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어려움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 부모들은 오히려 선교사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 때문에 쉽게 허락하기도 한다. 반대로 믿는 부모는 선교사의 어려움에 대해서 잘 알기에 더 심하게 방해할 수도 있다. 자신의 자녀가 고생할까 봐서 반대를 하거나 혹은 선교사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녀들에게는 괜찮지만 내 자녀들에게는 안 된다는 생각이 믿는 부모에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성경에서 부모가 하나님의 뜻과 자녀의 헌신 사이에서 방해하거나 끼어 들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부모가 연로하거나 병이 나있을 때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는 말씀에서처럼 선교에의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을 주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기를 원하지 않고 육신적으로 사는데 별 문제 없는 부모에게는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럴 경우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고”(10:37)라는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37: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하나님은 사람에게 빚지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 2:30)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포기 한 것 이상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선교사들은 스스로 자기의 자녀들을 주님께 맡겼을 때 주님께서는 부모들인 자기들보다 훨씬 더 잘 돌봐 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며 산다. 이 같은 논리로 부모를 포기한 선교사들에게는 하나님이 부모를 돌보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체험 할 수 있을 것이다(3:20).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노년에 자녀들을 단지 슬픔을 달래 주는 존재로만 여긴다. 부모들은 자신의 안락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더 큰일을 위해 자신의 자녀를 포기하겠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선교사들이 부모를 모시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속에 산다. 때로는 죄책감까지 가질 수도 있다. 선교사의 부모들은 선교지로 보내놓고 많은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그런 눈물과 아픔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선교사들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살 수 있다. 불효하고 못된 일을 하는 자녀들이 많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한 선교사 자녀들로 인해 오히려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 자녀가 부모에게 다 하지 못한 위로로 채워 주실 것이다. 이것이 부모를 두고 가는 선교사가 가져할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잘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포기한 만큼 아니 그보다 30, 60, 100배의 것을 더 채워 주신다. 이것이 선교 헌신자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가치관과 태도, 그리고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4) 건강 문제

건강상의 문제로 선교부에서 거절하는 경우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특별한 질병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건강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서구 단체의 경우는 건강에 대해서 상당히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선교단체는 선교사에 대한 건강 체크를 좀 더 강화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선교사의 탈락 이유 중에 네 번째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건강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건강은 한국 선교사에게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한국 선교사가 건강에 문제가 된 것이 사역을 너무 지나치게 했다거나 혹은 휴가를 갖지 않는 것도 원인이 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처음부터 건강에 대해서 선교단체가 중요성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에 문제에 한국 선교사들은 이제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선교사에게 있어서 전부는 아니다. 오래전에 한 스코틀랜드 선교사는 한 선교단체에 의해서 건강 때문에 거절당했으나 영국 해외 성서 공회에 의해 받아들여 30년간 일을 잘 한 경우도 있다. 어떤 선교사는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체질적으로 나약한 선교사가 있다. 그런 선교사들은 본인 자신이 나약함을 잘 알기에 오히려 건강에 신경을 쓴다. 그렇게 되면 건강의 약함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건강을 생각하면서 사역을 하기에 너무 무리하지 않게 사역을 하며, 하나님이 주신 분량만큼 하게 된다.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선교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건강을 핑계 삼아서 선교사로의 부르심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건강의 면도 포함이 되어 있지만 건강을 핑계로 선교사를 포기하기 보다는 주님의 일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더욱 중요하다.

 

5) 확고하지 못한 결단과 방향성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신의 주관이 강하다. 사역의 전문성과 탁월성을 가지고 사역을 할 수 있는 세대이다. 개인적이며 전문적인 개발과 자원의 운영을 잘한다. 이것이 젊은 세대들에게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단점도 될 수 있다. 과거 전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으며, 어려움에 대항하는 끈기와 소명과 영성이 부족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선교 단체의 기존의 권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선교사는 모더니즘 속에서 살아 왔다. 지금의 젊은 세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하에 산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지성과 이성, 개인주의를 높이 들고 우주를 예측 가능한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기계적인 것으로 본다. 지식은 확실하며 객관적이고 선하다고 본다. 인간의 성취를 향한 길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자연을 정복하며, 더 좋은 세상을 창조하면서 우주의 비밀을 풀어 가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모더니즘에서는 과학적인 발견을 통한 기술의 진보를 목적을 향한 수단이 된다고 본다. 현대적인 정신 구조를 지닌 세계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며, 과업 중심적이고 끈기가 있으며, 힘써 일하고 낙관적이며, 복음을 위해 순종과 희생을 결단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대는 모더니즘에 대한 하나의 역반응으로 생겨났다. 이상과 원리와 가치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세대이다. 다음은 포스트모더니즘 의식의 주요 요소들이다. 세상은 현저한 기술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더 좋아지지 않는다는 현실에 대한 깊은 비관주의가 있다. 지식의 합리적인 적용은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지구상에서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각성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의 협조를 통한 생존을 위해 긴급한 행동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이성은 인간 운명의 유일한 결정 요소로써 자리를 내놓음으로써 진리의 비이성적인 면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생의 인식적인 면은 물론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면을 개발하고자 하는 바램으로 이끌었다. 이들은 인지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이고, 과업 중심적이라기보다는 관계 중심적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과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를 위해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6) 성경교육의 부족

선교사는 어떤 형태로든지 성경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은 길다. 시간이 부족한 전문인 선교사들은 성경 교육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는다.

 

7) 본국의 삶이 더 좋은 이유

본국에서 선교에 대해서 준비하는 동안 본국에서 좋은 경험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직장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직장에 대한 유혹은 선교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본문의 내용과 내가 이해한 하나님의 뜻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들은 무엇인가?

3. 직업과 소명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4. 전임 선교사로서 왜 소명이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