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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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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탕자의 모습 본문
문제의 핵심은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하루하루 지내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에 속한 인간처럼 보입니다. 누가 조금한 싫은 소리를 해도 화가 납니다. 별 것 아닌 거절에도 깊이 상심합니다. 의미 없는 칭찬에 화색이 돕니다. 사소한 성공에 흥분합니다. 아주 작은 일들에 들뜨기도 하고 구덩이에 처박히기도 합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그만 나룻배와 같아서 물결이 일렁이는 대로 고스란히 흔들립니다.
균형을 유지하고 자칫 뒤집혀 침목하지 않도록 조신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깡그리 쏟아 붓다 보니 삶 자체가 생존 경쟁처럼 돼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나 되게 하는 게 세상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불안한 씨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 쉴 새 없이 “나 사랑해? 정말 사랑하는 거지?”라고 묻는 한, 그 목소리에 휘둘리고 거기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한다면”으로 가득 차 있는 까닭입니다. “물론이지, 잘생기고 예쁘다면, 똑똑하다면, 돈이 많다면 사랑하지, 일류대학교를 나왔다면, 좋은 직장에 다닌다면, 멋진 친구들과 사귄다면 사랑하고 말고, 일을 잘하고, 상품을 많이 팔고, 물건을 많이 사면, 사랑하다뿐이겠어?” 세상의 사랑에는 수많은 “...한다면”이 숨어 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조건들을 일일이 다 채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므로 “...한다면”들은 결국 올가미가 됩니다.
세상의 사랑은 항상 조건적이며, 그건 앞으로도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조건적인 사랑뿐인 세상에서 참다운 자아를 찾으려고 발버둥치는 헛수고를 포기하지 않는 한, ‘코가 꿴 채’ 사는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시도했다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순환 고리를 무한정 따라갈 따름입니다. 그 쳇바퀴는 중독을 키웁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로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갈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에 깊이 배어든 고독을 설명하는 데 ‘중독’만큼 적합한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일단 중독 증세가 시작되면 세상의 자아실현의 요소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부와 권력을 쌓고, 지위와 명예를 얻고, 마음껏 마시며, 정욕과 사랑을 구별하지 않고 성적인 만족을 얻는데 마음껏 먹고 마시며, 정욕과 사랑을 구별하지 않고 성적인 만족을 얻는데 골몰하게 됩니다. 중독은 기대를 낳습니다. 하지만 중독은 인간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질 헛된 바람일 따름입니다.
세상의 이런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면, 먼 지방에 머물려 허망한 일을 좇는 중독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존감은 충족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환멸에 부닥칩니다. 중독 증세는 나날이 심각해집니다. 현대인들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습니다. 중독된 인생은 한마디로 먼 지방에 사는 삶입니다. 구원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나는 지점이 바로 그곳입니다.
가망이 전혀 없는 곳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구할 때마다 나는 번번이 탕자가 됩니다. 어째서 참 사랑이 가득한 집을 외면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걸가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늘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로 인정받는 자리를 버리고 한사코 밖으로만 떠도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활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는 대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보상을 다투는데 써먹고 있는 내 모습에 놀라고 또 놀랍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선물들을 싸들고 ‘먼 지방’으로 가서 그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착취하기에 급급한 세상을 섬기는 데 죄다 쏟아 부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으며, 제힘으로 삶을 꾸려갈 수 있고, 눈곱만큼도 간섭받고 싶지 않음을 시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입니다. 그 저변에는 노골적인 반항,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 그리고 “아버지가 얼른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무언의 저주가 깔려 있습니다.
탕자의 거부는 아담이 저지른 반역의 복사판입니다. 아담은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이어가게 해주신 창조주의 사랑을 짓밟았습니다. 그 반역 탓에 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생명나무에 다가갈 수 없게 됐습니다. ‘먼 지방’을 떠도는 처지가 된 겁니다.
빗나가 자식을 향한 연민의 몸짓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아담과 그 모든 후손들이 저지른 반역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담이 태초에 받았던 영원한 생명의 축복은 회복되었습니다. 올려놓을 어깨가 없다손 치더라도 아버지는 두 손을 언제나 앞으로 내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팔을 거두거나, 축복을 도로 빼앗아가거나, ‘사랑하는 아이’로 여기는 마음을 거두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을 억지로 집에 눌러 앉히지도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금쪽같은 자녀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면 아버지 또한 막심한 고통을 겪을 게 불 보듯 빤하지만 선선히 떠나보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고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선선히 떠나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이 자기 삶을 찾아가도록 허락하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평생 궁금해 하던 수수께끼가 이제 풀렸습니다. 내키는 대로 집을 나갈 수 있는 건 그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팔을 내민 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언제라도 자식이 다시 돌아오면 반가이 맞아들이고 그 귓가에 “사랑하는 아이야, 네게 은혜를 베풀어 주마”라고 속삭이십니다. (헨리 나우엔. 탕자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