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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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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질적 선교

후앙리 2019. 3. 30. 23:23

 

얼마 전에 목회를 하는 한 친구 목사를 만났다. 얘기하는 중에 친구 목사는 자신이 목회 하는 교회 성경 공부반 운영이 안 된다고 하였다. 주중에 하는 성경 공부 반을 개설해 놓고 다섯 명 만모이면 하려고 했는데, 다섯 명이 안 되어 결국은 열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 목사가 섬기는 교회는 장년 출석이 100명 이상이고, 교인들의 연령은 대부분 30-40대다. 교인 가정들은 대부분 맞벌이 부부라고 한다. 거의 모든 교인들이 일을 하기에 교회 성경공부에 참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친구목사는 자신의 교회 뿐 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들이 교회 봉사나 모임을 위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20-30년 전만 해도 교회에 모이기를 잘 했다. 한국의 사분의 일이 개신교인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숫자가 많이 줄었다. 개신교인 400만 명 정도가 20년 사이에 줄어들었다는 말도 있다. 교회나 교인 숫자 통계가 정확하지 않지만 현실을 보면 교인들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교회의 쇠퇴와 교인의 감소 영향으로 선교도 열기나 참여도가 줄어들고 있다. 선교를 위한 어떤 행사나 교육을 하는 것이 교회의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선교와 관련된 행사들은 점점 줄어들고, 선교사 헌신자도 감소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후원을 받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 선교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 것인가?

 

필자는 한국교회와 선교가 거품이 있었다는 말에 동의한다. 지금은 그 거품이 빠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교회와 성도를 거품으로 비유해서 죄송하지만). 교회와 선교의 쇠퇴는 거품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판단할 때, 지금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정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왜 정상이 아니었는가?

 

두 가지 면을 지적한다면 첫 번째는 왜곡된 구원관이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구원관은 주로 믿음을 하나의 지식과 고백에 치우친 면이 있었다. 예수 믿는 것을 전인의 삶이 아닌 지식적인 면과 그리스도를 입으로 고백하는 면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은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 믿음의 고백으로 끝이 나는 것이 문제다.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실제 삶에서의 신앙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별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일부 교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악한 행위와 삶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구원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당연히 한국교회의 복음의 힘은 약화되었다. 삶이 강조되는 신앙이 뒷받침 되지 못함으로 한국 교회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두 번째, 한국 교회의 문제는 양적 중심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숫자와 보이는 것을 강조하였다. 교인들의 질적인 교육과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 보다는 숫자의 성장, 즉 부흥에 치중했다. 어떻게든 교인 숫자만 많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강했다. 자연적으로 교인들의 질적인 면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제자로서 훈련이 안 된 교인들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갔고 이는 한국교회의 쇠퇴로 나타났다.

 

한국 교회의 수적인 거품이 빠지고 정상의 길로 들어섰다면 한국 교회는 이제 앞에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생각하면 된다. , 신앙과 구원을 지식과 고백을 넘어선 전인적인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양적인 면보다는 질적인 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한 것이 바로 소수(적은 숫자)’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소수가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왜 소수가 해결책인가? 소수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의 변화는 단순한 지식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지식은 다수를 통해서 가능하지만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소수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소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수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양적인 다수를 포기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성경공부에 모이지 않는 것이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소수는 단 한 사람도 포함되는 숫자다. 어쩌면 한 사람이면 더 좋을 수도 있다. 전인적인 훈련과 양육을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가 핍박 중에도 복음이 확장된 것은 교인들의 삶을 통한 훈련과 변화 때문이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받았기에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카타콤(무덤)에 들어가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교회는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훈련하였다. 교인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며 삶으로 복음을 드러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삶은 헌신과 희생의 삶으로 변화되었다. 이처럼 소수는 진정한 삶의 변화와 복음의 질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오늘날 해외 선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선교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 중심과 소수의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는 사람보다는 돈이 우선인 느낌이 든다. 사람을 키우고 양육하는 것보다는 보이는 건물이 우선인 것 같다. 소수 보다는 다수를 선교의 목표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 가운데 진정 변화되어야 할 중요한 사람은 소외되거나 선교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도 소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수는 대중, 보이는 성과, 성공, 와 반대 개념이다. 선교를 하면서 이런 소수와 반대되는 개념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은 참 된 제자를 양육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선교의 목표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마음으로 사람 중심의 선교를 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의 제자를 세우겠다는 심정으로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선교해야 한다. 화려한 건물을 짓고, 크고 이름난 일이 아닌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지만 진정한 사람을 세우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존 스타트는 참 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8가지 특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세상의 사상에 불순응, 그리스도를 닮음, 깊이 있는 성숙, 창조세계를 돌봄, 단순한 삶, 균형 잡힌 삶, 그리스도만을 의존하는 것,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이 중요하다. 세상은 결과와 열매를 중요시여기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삶의 과정을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가 과정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날임을 인정하고 그날, 그 순간을 거룩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이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라는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선교사는 어떤 결과와 열매를 맺기 전에 오늘 하루의 삶이 기쁨과 행복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선교의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일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행함(doing)보다는 존재(being)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선교는 사역이라는 공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단순한 말이지만 의미가 크고, 다시 새겨보아야 할 말이다. 이 세상은 사람이 목적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들도 현지인들이 자신의 사역을 위한 수단일 경우가 있다. 선교사의 사역이 목적이고 현지인이 수단인 것이다. 한국 교회 선교는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이 목적이라면, 그 어떤 사람도 소외되게 해서는 안 되고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 사람이 목적이라면, 싸워서는 안 된다. 사람을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어떻게 그 사람과 싸울 수 있겠는가? 사람과 싸우는 것은 사람이 수단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그것을 위해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다. 사람이 목적이라면 싸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후원자도 후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목적이다. 후원자들을 후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면 선교사가 후원자들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목적이 된다. 선교사는 후원자들이 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선교사 개인의 사역을 위해 후원하는 그런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에 동참하는 목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열 두 명의 제자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3년 동안 제자를 훈련하기 위해 같이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함께 여행하였다. 같이 사역하였고 말과 행동으로 제자를 세우셨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통해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하셨다. 그 열두 명은 소수였다. 그리고 대중을 대하면서도 소수를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셨다. 4천명이 굶주려 있을 때, 예수님은 자신도 배가 고프셨지만 그들을 그냥 보내면 가다가 기진해질 것이라고 하셨고 사람들 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으니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다수를 소수처럼 대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셨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선교는 한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선교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는 것이다. 선교사가 아닐지라도 언젠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은 단 한가지다. “내가 세운 사람, 내가 도운 사람이 누구였는가?”를 보고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얼마를 벌었고, 언제까지 살았으며, 어떤 지위로 살았는지는 보고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사람들을 얼마나 세웠으며, 사람들과 얼마나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만이 남을 것이다.

 

한국 교회 선교의 과제는소수, 단 한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상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국 교회와 우리 자신은 오늘도 한 사람, 즉 소수를 세상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