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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18년 11월 23일(금) 본문

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18년 11월 23일(금)

후앙리 2018. 11. 22. 22:11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

 

+ 말씀설명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섬길 사역자로 두 사람을 추천한다. 곧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다.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 아들로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희생적 사랑으로 수고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한 동역자와 군사 된 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섬겼다. 바울은 이 헌신된 두 사람을 통해 빌립보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였다.

 

+ 묵상과 적용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적 섬김과 순종을 행했던 두 사람을 보면서 무엇은 느끼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일보다 내 이익을 구하는데 집중하는 영역은 무엇인가?

 

+ 김춘수의 꽃(‘인문학을 하나님께’ (한재욱 저)에서 발췌해서 요약한 내용)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해서 2004년 가을, 시 전문 계간지인 <시인세계>는 현역 시인 246명을 대상으로 평소 즐겨 읽는 애송시를 조사했다. 결과는 1위가 김춘수의 <>이었고, 그 다음이 윤동주의 <서시> 였다. ‘은 어떤 이유로 뭇 시인들의 가슴을 그토록 시리게 문지른 것일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의 첫 소절이다.)

 

이름을 불러 주면 관계가 시작된다. 들판에 널려있는 꽃들은 그저 몸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꽃은 수많은 꽃 중의 하나가 이니라, 너와 나의 관계를 이어주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하이데커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이 말과 형제인 구절이 있다. ‘이름은 존재의 집이다. 우리 주변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잡초 취급을 당한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목각인형에 불과하던 피노키오가 숨을 쉬고 춤을 추도록 혼을 불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수없이 배달되는 스팸 메일들은 그 속에 아무리 덕담이 들어있을지라도 거침없이 지워버린다. 그런데 수 없이 쌓여 있는 이메일 중에서도 이영 님께라고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이메일은 반드시 열어본다.

누구든지 특별한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이 되기 위해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가(43:1)

 

땅 속의 돌은 그저 돌맹이 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에 의해 발견된 수천 년의 혼이 깃들은 유물이 되어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힘과 자부심을 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는 순간 몸짓에 불과하던 우리가 하늘의 꽃으로 피어난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그 부름에 응답하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에는 여명이 찾아온다. 이는 마치 바다에 몰아치는 폭풍의 밤바다에서 등대를 찾았을 때의 환희와 같다.

신영복의 <담론>에 보면 수번으로 호명하는 것이 규칙인데 고암 선생이라는 분은 꼭 자네 이름이 무언가?” 라면서 이름을 물어보고는 수번 대신에 이름을 부르셨다고 한다.

 

<“이름은 왜요? 그냥 번호 부르세요, 쪽 팔리게.”

어쩔 수 없이 자기 이름이 응일 應一이라고 했더니, 한 일자를 쓰느냐고 또 묻더랍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뉘 집 큰 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혼자 말씀처럼 그러더래요. 이름 자에 한 일자 쓰는 사람이 대게 맏아들입니다. 영일이, 정일이, 태일이 등입니다. ‘뉘 집 큰 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 하는 말을 듣고 나서 그날 밤 한 잠도 못 잤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큰 아들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부모님과 누이동생 생각으로 잠잘 수 없었습니다. >

 

이름을 불러 주었더니 그는 잠을 자지 못했다.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그의 공리성이 아닌 존재성을 불러 주는 것이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참 스승이다.

시몬은 우유부단하고 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베드로’, 반석이라고 부르셨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1:42)”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자 시몬은 진짜 하나님 나라의 반석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삭개오야!”, “사울아!”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다니! 이에 더 이상 의미 없는 몸짓과 눈짓으로 살지 않겠다고 아멘하며 응답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0

 

시인 장정일은 김춘수 님의 <>을 패러디해서 재미난 라디오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전파가 되었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또한 모 음악가전 회사 광고 공모전에서 수상한 카피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음악은 세 번 태어납니다.

베토벤이 작곡했을 때 태어나고

번스타인이 지휘했을 때 태어나고

당신이 들을 때 태어납니다.

 

이름을 불러 줄 때 잡초가 되지 않고 꽃이 되낟. 단추를 눌러 줄 때 사각 입면체 라디오는 전파가 된다. 감동으로 들어줄 때 음악은 다시 태어난다. 구군가를 살리고 싶으면 불러 주고 눌러주고 들어 주어야 한다. 김춘수 님의 <>의 후반부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고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어떤 인생이라고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 어느 누구도 하나의 몸짓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꽃으로 피고 싶고, 눈짓이 되고, 의미로 남고 싶은 것이다.

키케로는 명예를 가볍게 여기라고 책에 쓰는 사람도 자기 이름을 그 책이 쓴다라고 했다. 그만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하늘나라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하는 거룩한 행위다. 한 영혼의 이름을 불러 주어 그가 하늘나라의 꽃으로 피어나는데 쓰임 받는다면 이처럼 보람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다.

 

+ 성경본문(2)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