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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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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0년 2월 24일(월) 본문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장)
+ 말씀설명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쳐준 38년 된 병자를 며칠 후에 성전에서 만나셨다. 그에게 예수님은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의 행위나 죄성을 보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그에게 공의와 정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로 살 것을 말씀하셨다. 그의 존재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의 존재를 은혜로 인정하셨다, 그의 귀중한 존재를 위해 은혜로 고쳐주신 것이다. 또한 그런 그에게 그의 행동을 위해 공의를 말씀하셨다. 공의로운 행동의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용서와 공의, 은혜와 진리, 사랑과 율법의 조화를 이루셨다.
+ 묵상과 적용
나는 은혜 때문에 나의 행위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고 존재를 인정받은 것을 믿는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나의 행위는 공의를 이루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공의롭지 못한 행동이 있다면 어떻게 고칠 것인가?
+ 오늘의 기도
1. 제가 은혜와 공의의 균형을 잘 지키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소서.
2. 우리 교회가 은혜와 진리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함께 충만하게 하소서.
3. 북한 땅에 자유가 임하여 신앙의 자유가 있게 하시고 자유로운 행동과 굶주림에서 회복하게 하소서.
4. 경작지가 국토의 1%에 불과한 최빈민국 모르타니가 만성적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린이와 노약자 보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도움이 계속되게 하소서.
+ 은혜와 진리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공짜로 베풀어주시는 호의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용납이다. 은혜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이다. 아담과 하와는 사랑받으며 모든 것을 공급받았다. 은혜는 모든 것을 용납한다. 모든 허물을 덮어준다. 심판이나 저주는 없다. 그냥 값없이 용서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진리는 실제 그대로다. 진리는 사실 그대로가 어떠한가를 말해준다. 진리는 정의이고 공의이다. 진리는 바름이다. 진리는 (율)법이다. 진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둘은 함께 가야 한다. 혼자 가서는 안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은혜 없는 진리나 혹은 진리 없는 은혜에 있다.
은혜 없는 진리는 냉정하고 은혜로부터 오는 용서, 호의, 자비, 동정이 없다. 은혜 없는 진리는 심판만 남는다. 은혜 없는 진리는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기에 모두를 지옥으로 몰고 간다. 그러기에 은혜 없는 율법은 우리를 멸망시킨다. 은혜보다 진리를 먼저 취하면 죄의식, 불안, 갈등, 분열, 분노 등의 고통스러운 감정과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은혜 없는 진리로 자녀를 키웠을 때 자녀는 숨이 막힌다. 신앙이 좋은 부모도 너무 율법적이고, 바름을 강조한다. 이런 부모에게 자란 자녀는 질식해서 죽을 지경이고 반항적인 자녀가 된다.
그러면 진리 없는 은혜는 어떠한가? 사랑은 있지만 방향성이 없다. 진리 없는 은혜는 방종이 된다. 진리 없는 은혜는 기준도 없고 선한 행함도 없다. 진리 없는 은혜의 부모를 둔 자녀는 책임성이 없게 된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부모가 다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은혜와 진리는 함께 가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가운데 거하셨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예수님의 모습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이다. 인간은 두 가지를 동시에 갖기 어렵다.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은혜를 강조하면 진리가 약해지고 진리가 강해지면 은혜가 약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가지의 균형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은혜와 진리를 다 성취하신 사건이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용서해주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벌을 받으셨다) 공의(죄로 인한)를 이루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던 것처럼 인간 세상에서도 은혜와 진리를 다 이루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먼저 희생해야 한다. 내가 손해를 봐야 한다. 내가 용서해주고 내가 죄에 대해 대신 벌을 받아야 은혜와 진리가 함께 갈 수 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상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손해보고 희생해야 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를 고치시고 나서 네가 낫게 되었으니(은혜),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진리)고 하셨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은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말라(공의)’고 하셨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 중의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은혜만 강조하면 진리가 없어지고, 진리만 강조하면 은혜가 없어진다. 은혜와 진리가 함께 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 성경본문(요 5장)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