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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1년 3월 5일(금) 본문

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1년 3월 5일(금)

후앙리 2021. 3. 4. 10:47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15)

 

+ 말씀설명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참으로 중요한 교리를 만들어낸 말씀이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다. 베드로의 증언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보고를 듣고 나서 야고보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줄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기에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한다. ,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과 목매어 죽이는 것, 피를 멀리하는 율법은 성도의 거룩함과 정결함과 관련됨으로 이방인들도 이는 지켜야 한다고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는 결론이었지만 신앙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 짓는 아주 중요한 결정이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율법만 시행하도록 하고, 복음과 상관없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는 따르게 하지 않는 지혜로운 판단을 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인해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할례로 구원받지 않는 것이 명백한 성경의 구원교리를 만들었고, 구원 받은 자는 불신자들이 행하는 우상숭배나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해 좋은 기준을 마련해 준 것이다.

 

+ 묵상과 적용

-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본질과 비본질을 잘 구분한다고 생각하는가?

- 말씀의 기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하는가?

 

+ 오늘의 기도

1. 내 생각과 기준을 내려놓고 말씀의 기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2.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처럼 잠들어 있는 한국 교회 성도들의 영성이 깨어나게 하시고, 나라와 민족을 복음화 하는 그리스도의 계절이 속히 오게 하소서.

3. 북한, 보급률이 높아진 스마트폰이 복음 전파의 통로가 되도록 북한 교회와 사역자들에게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고, 박해 속에서 성도들을 지키시며 복음의 그루터기로 쓰임받게 하소서.

 

+ 성경본문(15)

12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 "날마다 솟는 샘물"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

 

+ 이신칭의, 이행칭의

마틴 루터는 로마서 117절을 바탕으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으로 종교개혁을 하였다. 믿음을 강조한 루터는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다. 이런 배경에는 그때 당시의 가톨릭이 이행칭의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가톨릭 교회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만큼 행함을 강조하였다. 그만큼 성경에서 멀리 떠났고, 부패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어떠한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다가 행함이 사라졌다.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지칭했던 야고보서는 믿음이 있으면 행함을 보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선한) 행함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즉 부끄러울 만큼 행함에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분명히 한국교회는 행함을 잃어버렸다.

이 시대에 오히려 야보고서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라 참된 복음 서신이어야 한다. 그만큼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신칭의와 이행칭의의 논쟁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 둘을 단순 비교하는 것부터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그 결과(증거)로 행함을 보여야 한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 한 면만을 가지고 동전이라고 할 수 없다. 양면이 다 있어야 동전이듯이, 참된 기독교는 믿음과 행함이 둘 다 필요하다.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기본이다. 그것이 전제된 상황에서 행함이 따라와야 한다. 이것이 완벽한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거짓 믿음일 수 있다. 참된 믿음은 믿음의 고백으로 이미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의 고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바울 서신서를 보면 전반부에는 대부분 (이신칭의에 대한) 구원교리를 말한다. 하반부에는 구원받은 자의 행함에 대해 말한다. 행함이 뒤따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로 인해 한국교회에 드러난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머물러 있는 초보신앙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초보에서 자라나야 한다. 믿음의 증거를 보여야 한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면서 동시에 행함의 종교다. 둘이 서로 보완하고 함께 가는 것이 기독교다.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은 다른 종교들의 보편적인 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울러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주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서신서의 전반부를 강조해왔다면 이제는 후반부를 강조해야 한다. 로마서 1장을 강조했다면 이제는 야고보서를 강조해야 한다. 행함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 복음의 빛을 발하는 방법이다. 복음의 본질, 믿음과 행함, 둘 다 같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비본질은 무엇인가?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음만 강조한다거나 행함만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균형 잡힌 한국교회가 되어야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