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 Today
- Total
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1년 4월 5일(월) 본문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장)
+ 말씀설명
사도 바울은 사명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머무는 곳마다 제자들은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한다. 가이사랴에서도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함께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제자들은 성령의 말씀에 따라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저지한다. 그러나 바울은 “왜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고 하면서 가기를 고집한다.
사실은 바울도 성령의 뜻으로 알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고 제자들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기를 고집하였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도 분명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제지하였다. 그러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핍박과 고난에 차이가 있다. 바울은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바울이 당할 고난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다른 것이다.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바울이 고난당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간적인 마음으로 안타까워했고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한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똑같다. 그러나 사람마다 해석할 때 초점이 다른 것이다. 바울은 고난도 감수하려고 하였고 고난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제자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지 말고 고난도 감수하겠다는 바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 묵상과 적용
나는 요즈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확신 가운데 하루하루의 삶을 사는가?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부분은 없는가?
하나님의 뜻이면 고난도 불사하겠다는 바울의 의지와 결단처럼 나도 고난을 피해가고 있지는 않는가? 요즈음 고난을 감소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는가?
+ 오늘의 기도
1.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지 알면서도 인간적으로 고난을 피해가려는 의지를 버리고 고난도 감수할 수 있는 각오의 믿음을 주소서.
2.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Yogyakarta)에 있는 한 개신교 교회는 2019년 취소당했던 교회 건축 허가를 다시 받게 되어, 마침내 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필요한 교회 건축에 있어 주민과 당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데, 현지 교회가 필요한 장소와 공간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하자.
+ 성경본문(행 21장)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을 참고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해석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일을 하는데 정말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 혹은 아닌가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기에 힘들어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선교사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에 대해 확실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것은 어떤 대학 혹은 어떤 직장을 갈 것인가? 여행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집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는 주식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일상의 대부분의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면 살기에 더 편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몇 가지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님의 뜻의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힘듦을 감수하기 싫기 때문이다. 선교사로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물론 선교사로 나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이 많지만 그런 물음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선교사로 나가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선교사로 나갈 때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그것을 회피하고 싶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선교사로 나가는 것으로 보여졌고 주어졌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세밀한 뜻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뜻은 그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아는 것은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만약 내일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내일 죽더라도 오늘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임에도 불구하고 내일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 것이다. 내일 죽는 것을 안다면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원망으로 오늘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미리 안다면,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알고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의 아바타에 불과하다. 즉 결정하고 판단할 자유의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인격적인 존재이기보다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 이성의 작동이 안 되는 로봇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일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모르는 것이 큰 그림에서 하나님의 뜻이다.
세 번째,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행해야 할 대부분의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세밀한 것은 십계명에, 복음서에, 온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 때로 하나님의 뜻은 고난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양보하라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다 보면 손해 볼 일도 있다. 그럴 때 손해보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알려달라고 고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고난과 손해와 아픔을 감수하기 싫어서가 대부분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