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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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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2년 3월 26일(토) 본문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 119편)
+ 말씀설명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한다고 고백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이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명철함은 그의 스승보다 나으며, 노인보다 낫다고 한다(99,100). 그 명철함 때문에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고 한다(104).
지혜는 지식과는 다르다. 지식은 많이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삶을 현명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지식보다 지혜가 더 중요하다. 비록 지식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하며, 원수를 이기고, 환란을 극복하고, 고난을 견딜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 묵상과 적용
나는 지혜로운 자인가?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삶 가운데 풍성하기 때문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는가?
+ 오늘의 기도
1. 하나님의 말씀이 제 삶에 풍성하도록 말씀을 더 가까이하게 하시고 말씀만을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2. 부르키나파소의 이슬람 극단주의가 종식되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또한 핍박받는 교회와 신자들을 보호하시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 성경본문(시 119편)
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98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01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이 주간의 말씀: 제 28장 예배 때 여자들은 수건을 쓰라. 고전 11:2-16절
서론
혹자는 본문을 남자의 우위를 말하는 구절로 사용하려고 하지만 남녀차별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더더욱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기를 바라는 말씀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설교하면 안 된다는 구절로 본문을 사용하지만 그런 의미도 아니다. 본문은 단순히 여자는 예배 때에 머리에 수건(너울)을 쓰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 이외의 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면 바울이 왜 여자가 너울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왜 이처럼 복잡한 말씀을 하면서 그것을 이처럼 강조해야 했는가? 왜 이 내용이 그렇게 중요했는가?
본론
전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2절).
바울은 자신이 전하여 준 전통을 고린도 교인들이 잘 지킨다고 칭찬하였다. 전통은 그 시대의 문화다. 문화는 삶의 양식, 방법, 습관이다. 이런 것들을 지킬 때 동질감과 정체감을 갖게 된다. 한국 사람은 한국 문화를 지키기에 한국 사람인 것과 같다, 신앙의 전통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물론 전통과 문화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화는 신앙의 본질과도 연관되어 있다. 혹은 전통을 훼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이 있는 전통 훼손은 신앙에 대한 훼손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 즉 진리의 직접적인 문제는 아닐지라도 그 전통과 문화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될 수 있기에 여자들이 수건을 쓰는 문제를 이렇게 강조를 하는 것이다. 신앙의 전통과 문화를 복음의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10).
그때 당시의 교회는 여자와 남자가 따로 머리를 가리고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유대교 회당의 전통에서 여자는 장막 뒤의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전통을 깨고 여자도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단순히 예배 참석만이 아니라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을 해석하며 성도들을 권면하는 포괄적인 의미다. 즉 요즈음 말로 하면 설교다. 여자들도 기도와 설교를 할 수 있었는데, 그때 머리에 수건을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났을 때 어떤 여자들은 여자들도 자유롭게 복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머리의 수건을 벗는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수건을 벗는 것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3). 여기서 머리는 기원, 원천을 의미한다.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여자의 기원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즉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 남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다.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그때 당시에 남자의 수치가 되고 하나님께도 수치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자는 수건을 써서 질서를 지켜야 했다. 물론 남녀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고 서로 차별이 없다. 그러나 순서는 있다. 그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가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위치와 질서를 지키며 예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복장을 단정히 하는 것은 성별에 대한 구분을 명확히 하는 행위이다. 바울 시대에 머리와 옷 모양은 성별을 표시했다. 그런데 아마도 고린도 교회 여자들은 그것을 무시한 것 같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주인이나 다 하나라는 말씀을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여 머리에 써야 할 수건을 벗어던지고 기도와 설교를 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 중에는 성별을 구분해야 한다.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창조질서다. 여자와 남자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처음 창조된 참 자아를 지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처럼 행세하며 선을 흐리지 않고 본래 자신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배를 통해 창조세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그들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권위를 되찾으려 한다면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릴 때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언하고, 그분의 형상으로 자신들이 창조된 본래 모습으로 새롭게 되며, 하나님이 주신 성별을 기뻐할 때 일어날 것이다.
3. 남자와 여자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11-16).
바울은 남자도 여자에게 낫다고 말함으로써(11, 12) 지금까지의 창조질서에 대해 말한 것을 번복한다. 이렇게 번복하는 것은 ‘주 안에서’는 남녀가 차별이 없고 남녀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기원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즉 남녀는 둘 다 그리스도께 종속된 존재이다. 이것은 사실 가정에서의 부부 관계, 세상에서의 위계질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여자가 설교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그 때 당시에 고린도에서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은 채 다니는 여자들은 창녀들뿐이었다. 여기에 바울은 그런 것을 언급을 하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창녀 같은 여자들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교회안을 들여다보다가 보았다면 오늘날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비키니를 입는 것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교회를 오해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거침이 되는 복장을 해서는 안 되기에 바울은 여자들이 너울을 머리에 쓰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하고 있는 여인이 오늘날로 말하자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설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보는 남자들은 설교하는 여자를 보면서 성적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면 예배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것이 되며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없기에 이렇게 수건을 쓰는 것에 대해 강조한 것이다.
결론
오늘날 남자는 목욕 가운을 입고 결혼식에 가지 않을 것이며, 여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해변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때 당시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설교하는 것은 이와 같이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여자와 남자가 성별을 구분하는 복장을 해야 하며, 그것이 참된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예배를 통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오해를 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