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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4년 8월 3일(토) 본문

성경공부, 설교/말씀묵상(QT)자료

오늘의 말씀 2024년 8월 3일(토)

후앙리 2024. 8. 3. 05:58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

 

+ 말씀 설명

바울은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기에 죽는 것도 좋게 생각하였다.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에게도 영광이기에 그러고 싶다고 한다. ,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기에 죽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인들을 계속 돌봐야 하는 책임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택하기를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다. 즉 자신을 위해서는 죽는 것이 더 유익하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우리도 때로 너무 힘들 때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차라리 죽는다면 하나님과 대면하기에 그것을 선택하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만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가족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위해 더욱 잘 살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 묵상과 적용

나의 삶의 목표는 내게 유익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복음과 이웃을 위한 것인가?

냉철히 자신을 돌아보길 바랍니다.

 

+ 선교적 실천

우리 교회 공동체가 교인을 위한 교회가 아닌 하나님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는가?

 

+ 오늘의 기도

1.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목표로 살게 하소서.

2. 아이티에서 안타깝게 숨진 미국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기억되고, 교회와 선교단체들의 사역들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아이티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지도록

 

+ 성경 본문(1)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 이기적인 삶과 이타적인 삶

인간은 늘 질문한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사는 게 나은가? 죽는 게 나은가?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죽음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사는 것이 낫기에 삶을 선택한다. 비록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래도 사는 것이 더 가치 있기에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는 것이 왜 죽는 것보다 더 나은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은 사는 것이 왜 더 나은가? 고통보다 기쁨과 즐거움이 더 많기에 그런가? 아무것도 못하는 죽음보다는 살만한 세상이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 때문인가?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명이 바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기에 죽음을 그리 많이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소망한다. 왜냐하면 죽은 이후의 세상이 있을 뿐 아니라 죽은 이후에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 혹은 자살을 동조하지 않는다. 빨리 죽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으면 더 좋은 세상이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좋아서 사는 것만은 아니다. 이 세상의 기쁨이 고통보다 더 크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고통도 사명의 기준으로 볼 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고통보다 기쁨이 더 크기에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그자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바로 사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때로 필요하며, 때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죽은 이후에 있을 더 좋은 세상을 가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인 사명은 어떤 사명인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다. 복음으로 성도들을 인도하는 사명이다. 다른 사람이 복음으로 더 많은 복을 누리게 하는 사명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명이다. 그러기에 이것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살아야 한다. 즉 이것이 목표가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심에 있도록 살아야 한다.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죽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것이면 유익하다는 바울의 고백을 되새기면서 살아야 한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도 살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일 때도 있어야 하지만 타인 중심적일때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들의 차이이다. 물론 불신자들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 살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된다. 불신자들은 타인이 최종 목표이지만 그리스도인의 타인 중심은 그리스도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타인을 위한 일을 하는가? 무엇을 통해 이타적인 삶을 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