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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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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5년 3월 14일(금) 본문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장)
+ 말씀 설명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묻기를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하였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면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굳이 금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각자 자기의 은사에 따라 사역을 하면 같이 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각자 다른 위치와 사정에서 복음을 전하는 되는 것이지 일괄적으로 반드시 한 팀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방식이 다르더라도 각자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기나 경쟁이 아닌 이해와 격려로 사역을 해야 할 것이다.
+ 묵상과 적용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나와 다르다고 외면하거나 방해한 적은 없는가?
+ 선교적 실천
방식의 차이 때문에 싸우거나 경쟁하는 교회 안에서의 일이 있다면 어떻게 고칠 수 있을 것인가?
+ 오늘의 기도
1. 나와 드리지만 주님을 위해 일하는 분들을 이해하고 협력하게 하소서.
2. 하루속히 전 세계 곳곳의 분쟁들이 중단되어 질병과 가난 속에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에게 적실한 도움과 지원이 전달되도록
+ 성경 본문(막 9장)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 전인/ 균형
리차드 포스터의 <영성을 살다>에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인용한다(영성을 살다. 리차드 포스터). 성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 다음으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밀라노 정원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악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게 해줄 능력을 가진 분은 그리스도뿐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를 자유롭게 하셨다. 어쩌면 지나치게 많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탈리아에서 그의 삶을 지배했던 난잡한 성생활과 직업으로 인한 교만을 청산하고자 자기 아들을 낳은 하녀도 내버려 둔 채 밀라노에서 가르치던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아프리카 타가스테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를 세우고 히포의 주교로 알려졌다. 솔직히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다른 길을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 하녀를 버리지 않고 결혼했다면 그는 아마도 인간 사람의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이 세상에 제시했을 것이다. 내게는 그가 인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나의 현대적 감성을 고대 저자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당시 거룩함이란 수도원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하녀와 결혼을 해서 우리에게 더 탁월한 방식으로 사랑(적어도 인간적인 수준에서의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줄 수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합동신학교를 세웠던 박윤선 목사님의 따님이 적었던 책이 생각났다. 챗 GPT에서 박윤선 목사님의 따님의 책에 대해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고(故) 박윤선 목사님의 딸인 박혜란 씨는 2014년에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저자는 아버지인 박윤선 목사님과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족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 사회와 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특히 보수적인 신학계에서는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부 합동신학교 교수들은 박혜란 씨의 책에 대해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목사의 딸』은 한국 교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의 가족사가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한국교회의 병폐인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율법주의 신앙의 문제점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나는 박혜란 씨의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읽고 대단히 많이 화가 났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박윤선 목사님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박윤선 목사님의 딸을 비판하는 합동신학교 교수들도 똑같은 사람들로 보여 존경했던 교수들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인데, 사랑이 결여된 교리와 신학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상심했던 기억이 있다.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나의 결론은 결국 기독교의 세계관보다 유교의 가부장적인 사상과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벗어나지 못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합동신학교 교수들도 마찬가지이며, 한국교회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 사랑이 없는 내면이 바뀌지 않고 겉모습만 교인으로 살아가는 한국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성 어거스틴에 대한 리처드 포스터의 글을 보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감히 성 어거스틴을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자격이 없겠지만, 리처드 포스터가 말한 것처럼 자기 아들을 낳은 하인을 버리고 수도원을 만들어 회심의 모습을 보인 것이 기독교 세계관에 부합한가, 하는 질문을 던질수 밖에 없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분들의 대부분은 가정과 자녀들을 내팽개친 채 사역을 하였다. 한편으로 가족을 내팽개쳤기에 그런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이 목사님들이 한국교회에서 사역을 잘하여 인정을 받았을지라도 가족들은 뒤에서 눈물과 고통으로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목사님들 중에 몇 분은 다시 태어나 목회를 한다면 가정을 팽개치고 사역은 하지 않겠다고 후회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음으로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간 것을 경험하시면서 후회하는 고백들이라는 사실이다.
너무 지나치면 아니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다른 부분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면 아주 뛰어나거나 좋은 부분도 깎아 먹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균형을 이루는 삶, 전인적인 건강성을 유지하는 삶이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쳐 어떤 일을 성취한들, 다른 쪽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녀와 사생아를 버리고 고백한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성경 주석과 설교를 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딸과 한 번도 제대로 대화하지도 않은 박윤선 목사님, 다시 태어나면 교회 사역을 줄이고 가족을 위해 시간은 내겠다고 후회하는 유명한 목사님들을 보면서 큰일(?)은 못하더라도 전인적으로 균형 있는 건강한 삶과 사역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인간 사랑의 정신이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자신부터 전문성, 사역의 성과, 권력, 부, 잘 나감보다 인간 사랑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