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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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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큰 아들 본문
잔뜩 화가 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개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 잘 들어보십시오, 큰아들이 느끼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큰아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화가 치민 나머지 돌아온 탕자를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 아들’이란 표현만 가지고도 맏이가 아버지는 물론이고 동생과도 거리를 두고 잇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큰아들 눈에는 현실감을 잃어버린 채 처음부터 끝까지 터무니 없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아버지와 동생이 별종으로 보였습니다. 머리에는 동생의 방탕한 생활에 관한 생각들 뿐이었습니다. 큰아들 눈에는 더 이상 아우는 없습니다. 아버지도 없습니다. 둘 다 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동생을 죄인이라고 깔봅니다. 아버지는 종의 주인으로 우러러보고 두려워합니다.
큰아들이 얼마나 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났는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자기 집에서 이방인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사라졌습니다. 어둠이 모든 관계에 스며들었습니다. 두려워하든 얕잡아보든, 복종하든 지배하든, 압제자 노릇이든 당하는 사람의 역할이든 그것은 모두 빛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이들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죄를 고백할 수도, 용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나누는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교제는 기대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곤경에 빠진다는 건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디서도 자연스러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자의식이 강해집니다. 계산적이 됩니다. 걸핏하면 넘겨짚습니다. 신뢰가 깃들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미미한 움직임에도 곧장 맞대응합니다. 별것 아닌 말도 낱낱이 분석합니다. 사소한 몸짓에도 평가가 따릅니다. 그 모든 것이 어둠의 병리 현상입니다.
탈출구가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습니다. 어둠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사방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흑암을 몰아낼 빛이 필요하지만 스스로 만들어 낼 능력은 없습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자가 생산하지 못합니다. 제 힘으로는 분노의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교제를 나누지도 못합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고, 기다리고, 기도도 해보지만 진정한 자유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남은 방도는 누군가에게서 받는 것뿐입니다. 나는 이미 길을 잃었습니다. 목자가 나를 찾아내고 달려와서 집으로 데려가 주길 기대할 따름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도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권면하고 간청하십니다. 죽음의 권세에 의지하지 말고 그토록 소원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룩한 팔에 몸을 맡기라고 사정하십니다. (헨리 나우엔. 탕자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