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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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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타당성 구조 본문
오늘 아침 사무실에 오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중에 라디오를 들었다. 나는 CBS(기독교 방송) 음악 FM을 자주 듣는다. 오늘 방송을 진행하는 진행자의 맨트를 듣고 든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진행자는 청취자에게 온 문자 하나를 소개하였다. “진행자님, 목소리가 많이 피곤한 것 같아요. 방송 끝나면 점심 맛있는 것 드시고 푹 쉬시고 내일은 건강한 목소리를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자는 자신이 지난 주말 일정이 좀 많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이 덜 풀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토요일과 주일날 했던 자신의 스케줄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주일날 진행자가 했던 일은 잠이 안 와 아침 일찍 일어난 것과 오전에 양평에 조상 산소에 성묘(?)하러 갔다 온 것, 오후에 밀린 집안 일을 하느라 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행자의 이 설명을 들으면서 기독교 방송국에서 진행자의 주일 하루 일과를 설명하는데, 예배드림에 대한 언급은 없고 성묘를 다녀온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진행하는 사회자의 태도에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문화를 공부하면 “타당성 구조”라는 개념에 대해서 배운다(타당성 구조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붙인다). 기독교 방송이라면 타당성 구조에 따라 당연히 예배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다. 주일날 예배를 드림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거부감이 없이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행자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은 일상의 일이기에 언급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일날 오전에 성묘를 간 얘기는 했다는 사실에서 뭔가 아쉬운 부분이 남는다.
기독교 방송의 음악 FM은 성경 구절이나 예배, 하나님, 교회에 대한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찬양곡도 거의 없다. 왜 교회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 방송국에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정이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듣는 프로그램이어서 그들에게 거부감을 줄여주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기독교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굳이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독교 방송이라고 굳이 기독교를 표방해서 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가 있겠지만 그러나 기독교 방송이라면 주일날 성도의 삶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드러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도의 삶이 주일날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FM 방송에서 찬양을 내보내지 않는 것까지도 한편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일상의 일, 즉 가장 중요한 예배까지도 무시한다면 기독교 방송에 음악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진행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아니면 어제만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일정을 보낸 것에 예배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기에 생략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일정에 예배를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바로 타당성 구조 때문이다. 기독교 방송에서는 기독교 용서를 사용하거나 기독교인의 예배가 타당한 구조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기독교인의 냄새를 내지 않는 음악 프로그램이라도 모든 프로그램의 이면에는 기독교 세계관, 혹은 기독교의 타당성 구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마저도 외면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굳이 기독교 방송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강요하는 듯한 기독교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조심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기독교 방송이기에 기독교의 타당성 구조를 이 사회에 만들어 가는 것도 기독교 방송의 하나의 역할과 책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일상의 삶에서도 기독교의 타당성 구조를 만들어 가는 방향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타당성 구조란 무엇인가?: 안점식 “세계관, 종교, 문화”)
인간은 진공상태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어떤 문화 안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사회화와 문화화 과정을 거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가 태어나 자란 문화적 토양에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성장해간다. 여기서 “문화적 토양”이라는 개념은 피터버거가 제시한 종교사회학적 용어로, 말하지면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를 뜻한다. ‘plausible’은 한국어로 ‘그럴듯한’ 이라고 번역한다.
당신이 배가 아프다고 가정해 보라. 옆에 있는 친구가 “혹시 장염 아니냐?” 라고 한다면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친구가 의사라면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의사가 하는 말은 더 ‘그럴듯해서’ 개연성과 타당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와 그의 따른 세계관, 가치체계, 행동양식이 어떤 문화에 토양이 되면 타당성 구조를 형성한다. 결과적으로 그 문화는 특정한 행동이나 가치를 전제로 받아들이고 더 그럴듯한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럴듯한 행동이다. 따라서 증명이 필요 없는 전제로서 당연시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고 당연시 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대중적 인기가 높은 동양 철학자가 EBS, KBS와 같은 공영방송에 나와서 노자 도덕경, 불교 금강경, 논어 등을 강의했다. 강의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거나 방송 그 자체에 반발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가운데,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공영방송이 도덕경, 금강경, 논어 등을 방영했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공영방송에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의 어떤 사람이 나와서 성경을 강의한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많은 한국인이 방송 그 자체에 반발심을 느낄 것이다. 왜 특정한 종교를 광고하느냐는 시청자의 항의 전화가 빗발치는 등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왜 그런가? 한국의 문화 토양은 샤머니즘, 불교, 유고, 세속주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국어 시간,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불교나 유교 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용비어천가’를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유교 세계관의 핵심적 개념과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수학여행을 가서 보는 문화제들은 거의 유교 아니면 불교 유적지다. 텔레비전에서 사극을 반영한다. 불교 사찰을 배경으로 고려시대 이야기가 전개된다. 고승이 나와서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에는 불교 세계관의 핵심이 담겨 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임금과 신하가 대화를 주고받는다. 신하가 엎드려서 “전하, 전하는 만백성의 어버이십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대사가 나온다. 여기에는 내성외왕이라는 유교 세계관의 핵심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불교적, 유교적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이러한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흡수하고 내면화 한다.
한국에서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공영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성경 구절을 언급한다면 방송 사고로 처리할 것이다. 녹화방송이라면 편집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 토양이 다른 미국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토크쇼에 대담자로 나온 사람이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성경을 인용한다. 그래도 사회자는 그의 말을 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맞장구를 치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프로듀서도 이 부분을 편집하지 않는다. 시청자에게 항의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미국의 문화 토양은 기독교와 세속주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교나 불교도 외부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종교이다. 그런데도 불교나 유교는 매우 한국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들 종교가 한국 문화를 형성하는 데 오랫동안 기여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 토양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독교를 외래적이고 생소하게 생각한다. 이는 기독교 역사가 짧아서이기도 하지만, 기독교가 토착화되어서 여러 가지 문화적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그리스도인 비율이 전 국민의 20% 정도인데 비해,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인이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은 그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똑같은 한국인인데도 중국에 가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10% 미만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미국의 문화 토양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사회적 유익이 될 수 있지만, 중국의 문화 토양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 토양, 타당성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