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선교교육 연구원(IMER)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본문

선교와 영성/영성 자료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후앙리 2021. 9. 10. 12:07

큰 아들이 이야기는 그 모든 고민스러운 질문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이 탕자를 맏아들보다 더 사랑하셨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큰아들한테도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하며 간곡히 말했습니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관심을 두고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말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아들에 해당하는 말로 테크논teknon’이라는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조제프 A 피츠마이어에 따르면 이 단어는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애정을 담은 호칭입니다. 직역하자면 내 아이야쯤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애정이 짙게 배어 있는 점근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이 거칠고 모질게 대들어도 비난섞인 꾸지람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되받아치지도, 잘못을 꼬집는 법도 없습니다. 변명하지 않을뿐더러 큰아들의 처신을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평가를 단숨에 뛰어넘어 곧바로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한 마디는 큰아들보다 탕자를 더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단숨에 날려버립니다.

맏이는 집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돠 모든 것을 다 나누었습니다. 큰아들에게는 그 무엇도 감추지 않았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일부로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은 무한정 사랑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렇게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두 아들 모두에게 온전히, 그리고 공평하게 쏟아부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극적으로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한 없이 기뻐했지만 그것이 어떤 면으로든 큰 아들을 덜 사랑한다거나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거나, 덜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각각 걸어온 삶의 여정에 따라 온전한 사랑을 쏟습니다. 형제의 됨됨이와 형편을 속속들이 압니다. 저마다 가진 독특한 은사와 부족한 점들을 꿰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의 열정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비록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서 간혹 불순종하기는 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큰아들의 순종도 같은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열정이 부족해서 생동감이 모자라는 것이 아쉽지만 상관하지 않습니다. 큰아들에게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처럼 작은아들에게도 낫고 못함을 가리거나 더하고 덜함을 재려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가진 독특한 특성에 맞추어 반응합니다. 작은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잔치를 열었습니다. 큰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는 함께 어울려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자고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에 저마다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주님의 거처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비교와 경쟁의식, 다툼을 모두 비워낸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자면 신앙의 도약이 필수적입니다. 여태까지는 비교하지 않는 사랑을 체험해본 적이 거의 없으며 거기에 담긴 치유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 밖, 어두운 곳에 머무는 한, 비교에서 비롯된 원망과 불평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빛이 비치지 않는 자리에서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예 동생이 동생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설득하십니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빛 속으로 즉시 들어서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품안에 안긴 자녀들을 하나하나 특별하고 온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빛 가운데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침내 이웃을 나와 같은 하나님께 속한 형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헨리 나우엔. 돌아온 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