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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영성/영성 자료

+ 큰 아들

후앙리 2021. 9. 8. 05:08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탕자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지 모릅니다. 자유와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먼 지방에서 길을 잃은 작은아들뿐만 아니라 고행에 머물던 아들 역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어른이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잘해낸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지만 큰아들은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맏아들에게는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살며 그 뜻을 잘 따르고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소릴 듣고 싶어 하는 특유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첫째들은 칭찬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저 좋은 일을 마음껏 하는 동생들을 아주 어려서부터 부러워합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도 제멋대로 집을 나가버린 아들에게 부러움 비슷한 감정을 마음 깊이 품고 살았습니다. 죄스러운 일들을 천연덕스럽게 저질러가며 즐겁게 지내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내 안에서 불끈불끈 그런 느낌이 솟구쳤습니다. 비난받을 짓이라거나 심하게는 비도덕적인 행위로 규정하기도 했지만, 전부는 고사하고 한두 가지도 따라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남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순종하고 효도하는 삶이 때로는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이 되어 계속 나를 짓눌렀습니다. 나중에는 제아무리 몸부림쳐도 떨어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려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내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라고 불평하는 큰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큰 아들의 불평을 들어보십시오, 순종과 효도는 짐이 되었고, 섬김은 종살이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된지 얼마 안 된 친구한테서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문제가 됐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화가 치밀었습니다. 겉으로는 별 말 안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감히 누구한테 기도를 가르치려 드는 거야! 여태까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아온 주제에, 이래봬도 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 산 모태신앙이란 말씀이야! 회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속으로 이렇게까지 화를 냈다는 것은 그만큼 큰 탈선을 보여줍니다. 집을 떠나 방황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노하고 시기하는 모습 자체가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된 종의 신세라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나만의 문제일가요? 사실 집에 있으면서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맏아들, 큰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판단과 정죄, 분노와 원망, 원한과 시기로 뒤범벅이 된 탈선은 인간의 마음에 말할 수 없을 만큼 해롭고 치명적입니다. 보통 탈선이라고 하면 눈에 확 띄는 대단한 일을 떠올립니다. 작은 아들은 그런 통념에 딱 들어맞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탕자의 탈선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돈과 시간, 친구, 나아가 자기 몸까지 잘못 사용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큰 아들의 탈선은 분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선 그르다고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분고분했고, 효도를 다했고, 규율을 잘 지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들 큰 아들을 존중하고 높이 평가했으며, 칭찬하고 모법적인 아들의 전형으로 여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암흑의 기운이 중심에서 솟구쳐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마음 깊이 숨어 있던 분노하고, 오만하며, 몰인정하고, 이기적인 자아가 몇 년 새 점점 더 강해지더니 마침내 사납게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을 찬찬히 살피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과연 정욕과 원망에 찬 분노 가운데 무엇이 더 해로운지 궁금했습니다. 바르고 착하게 사는 이들 가운데 분노가 넘칩니다. 이른바 성도라는 이들 사이에 판단과 정죄, 편견이 횡행합니다. 죄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이들이 분노에 사로잡혀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일쑤입니다.

원망에 사로잡혀 길을 잃은 성도들의 방황은 선하고 의로워지려는 소망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으므로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나만하더라도 더 착하게 살고, 누구한테나 받아들여지며, 누구나 좋아할 만하며, 남들이 보고 배울 만한 모범이 되려고 얼마나 꾸준히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죄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늘 정신을 똑바로 차렸고 유혹에 빠질까봐 항상 조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심각해지고 도덕적으로 엄숙해져서(광신적으로 보일만큼) 아버지의 집에 있는데도 통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부자연스럽고 자연스럽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차츰 엄격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주변에서도 눈치 챌 정도가 되었습니다.

독선적이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데다 질투심으로 가득한 아버지를 공격하는 큰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불만의 뿌리가 상당히 깊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제몫으로 돌아와야 할 대가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푸념입니다. 그것은 적개심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가 온갖 은밀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통해 분출되는 불평입니다. “열심히 노력했어, 오랫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일도 많이 했어, 하지만 아무 대가도 받지 못했어, 남들은 다 쉽게 얻는데 말이야, 어째서 아무도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는거지? 초개하거나 함께 어울리려 하지도 않고, 왜 제대로 대우를 해 주지 않느냐고 대충대충 가볍게 사는 이들한테 그렇게 신경들을 쓰면서 말이야.”

속으로 생각만 하든, 입 밖에 내든,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내 안에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을 봅니다. 사소한 거절이나, 불친절, 무관심에도 푸념을 늘어놓곤 합니다. 아차 싶어서 돌아보면 벌써 투덜거리거나, 칭얼거리거나, 으르렁 거리거나, 탄식하거나, 잔소리 하고 있기 일쑤입니다.

석연치 않은 문제에 매달릴수록 형편은 더 나빠집니다. 분석을 거듭할수록 불평거리는 더 늘어납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상황은 더 심하게 꼬여만 갑니다. 은밀한 불만으로 끌어들이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정죄와 자책, 독선과 가지 거부 등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아주 고약한 방식으로 상승 작용을 합니다. 꼬임에 넘어갈 때마다 자신을 거부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일단 불평불만이라는 광막한 미로에 발을 들여놓으면 순식간에 길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세상이 자신을 몰라주고 거부하며 무시하고 멸시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불평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며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동정심을 자극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무언가를 얻을 욕심에 푸념을 늘어놓으면 백발백중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매사 불만스러워하는 상대와 어울리는 건 골치 아픈 일입니다. 자기 부정적인 이가 늘어놓는 불평에 대처할 묘수를 터득한 이는 흔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건 불평을 내뱉고 나면 머잖아 가장 두려운 상황에 몰린다는 사실입니다. 더 심한 거절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큰 아들의 심리를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들판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북치고 장구 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집안에 경사가 났음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순간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자기부정적인 불만이 마음에 가지 잡으면 기쁜 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큰 아들은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다시 따돌림 받았다는, 무슨 일이 있는지 누군가 이야기해주었을 법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중요한 자리에 끼지 못했다는 두려움이 짙게 밴 반응입니다. 즉각 어째서 아무도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지?”라는 불만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인은 신이 나서 열심히 희소식을 전합니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즐거운 외침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큰 아들은 안도하고 감사하는 대신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쁨과 원망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음악이 연주되고 춤추는 소리를 큰아들을 기쁨으로 끌어들이기는커녕 더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날 상황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왠지 적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한테 함께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했습니다. 상대는 바빠서 안 되겠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바로 그 주인공을 파티가 한 장이던 다른 동료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눈길을 딱 마주치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어서와 반가워!” 하지만 파티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게 얼마나 괘씸하던지 어울릴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인정받지도, 선택되지도, 사랑받지도 못했다는 불만이 들끓었습니다. 나는 문을 꽝 닫고 뛰쳐나왔습니다. 완벽한 소외였습니다. 방안 가득하던 기쁨을 받아들일 수도, 거기에 낄 수도 없었습니다. 즐거움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분노의 근원이 됐습니다. 기쁨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경험은 곧 분노하고 원망하는 심정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큰아들은 집에 들어가 아버지와 기쁨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이 불만으로 꽉 차 있는 탓에 감정이 무뎌졌고 어둠에 빠져 있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의 마침표는 어떻게 찍었는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이 잔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집에 돌아온 뒤에는 아버지와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큰아들과 동생과, 아버지와,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 화해했는지 그 여부도 알 수 없습니다. 한 점 의심 없이 분명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마음뿐입니다. 한없이 사랑을 베푸는 그 넓은 마음 말입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큰 아들의 모습을 돌아볼수록 이런 형태의 타락이 얼마나 내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서 돌이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차가운 분노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비하면, 정욕에 눈이 멀어 벌인 일탈 행위에서 돌이키는 건 훨씬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노는 쉽게 구분해서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이는 훨씬 치명적입니다. 개인의 장점들과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요. 순종적이고, 성실하고,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일하고, 자기희생적이라는 건 누가 봐도 좋은 자질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원망과 불평이 바로 그 칭찬할 만한 태도들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니 정말 이상한 노릇입니다. 그 탓에 절망감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으로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는 바로 그 순간,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을 끌어모으는데 집착합니다. 맡은 일을 멋지게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바로 그 순간, 왜 남들은 나만큼 헌신하지 않는지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유혹에 넘어간 이들을 은근히 부러워합니다. 고결한 자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원한에 사무친 불평꾼이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허약한 나의 진짜 모습과 마주칩니다. 나에게는 원한을 완전히 뿌리뽑을 능력이 없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내 속사람이라는 토양에 너무 단단히 박혀 있어서 그것을 힘껏 잡아당긴다는 건 곧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도덕적인 장점들을 다치지 않으면서 원한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스스로 어찌해볼 길은 없습니다. 이건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탕자와 같은 자아를 치료하는 것보다 큰아들 같은 자신을 고치는 것이 더 크고 급한 일입니다. 제 힘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통감하게 된 지금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3:7).

진정 내 힘으로 일으킬 수 없는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날 길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심리적인 깨달음으로는 거듭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난날, 불평불만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하고실패하고, 또 실패해서 결국 정서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심각하리만치 피폐해졌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치료는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주실 때만 가능합니다. 내게는 불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1:37).

(헨리 나우엔, 탕자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