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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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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부재를 통해 계시되는 임재 본문
때로 인간은 함께 있을 때만이 아니라 떨어져 있을 때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존재로만 아니라 부재로도, 함께 함 뿐 아니라 떠남으로도 더 가까워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떠나고 다시 돌아오면서 더욱 친밀해진다.
때로 우리는 집을 떠나 가족과 헤어져 지냄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얻고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자랐으므로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부모님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 부재를 통해 부모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다. 나는 집을 떠남으로 부모님께 새로운 친밀감과 교감을 느꼈다. 마치 부모의 사랑이 함께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서 거리를 좀 띄워야만 깨닫는 듯이 말이다(한국 이민자들은 “해외에 살아보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한다. 떠나 보아야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음으로써 나는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집에서 주방이나 거실에 부모님과 함께 앉아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마냥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멀리 있어 보니 떠나기 전에는 보거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 보이고 또 느껴져다. 이렇든 나와 부모님의 관계는 부재를 통해 한층 깊어졌다.
이런 예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방문하여 그저 평범한 대화를 나눈다고 하자. 흥미롭게도 그 방문에 대한 기억이 방문 자체만큼이나 힘을 발휘할 때가 많다. 몸이 아픈 사람은 나중에 “내가 아플 때 그가 문병을 와 주었지”라고 되짚게 된다. 문병을 와 준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사와 사랑이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서 더 깊어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를 방문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방문 가운데 대단한 일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떠남도 함게 있음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를 방문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짧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가고 나서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너와 함께 할 테니 말이야. 나는 여기 없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네 곁에 머물 거야.”
우리는 종종 이런 일을 경험한다. 상대가 떠나고 나서야 그 사람에게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를 깨닫는다. 그 사람 앞에서는 표현할 수 없을지 몰라도 떠난 뒤에는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편지를 쓰는 동안 우리 안에 친밀함이 자란다. 부재한 사람이 내 마음속에서 더 커지고 애틋해진다. 마치 상대의 영이 내 안에 있는 양 그와의 교감이 느껴진다. 이런 새로운 친밀함은 부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사람이 또 보고 싶어진다. 떨어져 있지 않다면 사무치도록 그립지는 않을 것이다.
부재를 통한 임재를 가장 깊이 보여주는 예는 죽임일 것이다. 우리의 죽음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그렇다. 나는 사별한 사람과의 사랑도 자라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살아생전에는 서로를 부분적으로 알 뿐이지만 신앙의 사람인 우리는 죽음을 통해 서로를 새롭게 알게 된다. ‘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형제자매여, 내가 죽어서 떠나는 것이 당신에게 유익합니다. 내가 죽으면 당신이 나를 새롭게 발견할 테니 말입니다. 죽어서도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당신 곁에 있습니다.”
알고 보면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간 이들은 마음속에 남아 계속 우리를 양육한다.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 삶을 심화시킨다. 이는 위대한 신비다. 이 신비를 예수님이 가장 적나라하게 계시해 주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분이 죽으셔야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더없이 친밀한 교제로 인도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부재는 유익했다.
마침내 성령이 오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야 그들이 보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역사에 몸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성령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녔을지언정 그리스도 안에서 다닐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할 수 없었다. 그때는 불가능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한 말이다. (헨리 나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