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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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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영성/일상의 영성

+ 상대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라

후앙리 2021. 6. 23. 05:41

교사 선교회 선교학교 두 번째 강의(세 번의 강의를 하게 됨)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 하나를 소개했다. 꼭 그것이 사실이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대나 내게도 좋다는 의미에서 이런 얘기를 하였다.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음에도 안한다고 생각하여 이해하지 못하거나 화가 나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자세히 따지고 보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왜 그렇게 쉬운 일을 안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못하는(혹은 안하는) 사람을 그렇게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잘못이나 못하는 행동에 대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을 말했다.

이 말은 강의의 내용 중에 잠간 언급한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참가한 한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였다. “교회에서 목사님께 목사님의 잘못을 몇 차례 얘기했는데 그것을 고치지 않는다. 교인들이 볼 때는 목사님이 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목사님이 못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그 목사님의 사정을 내가 어떻게 다 알 수 있으랴! 그러나 상당 부분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게다. 안하는 것 자체도 연약해서 안하는 것이기에 그것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성도들 입장에서는 해결책이 있다. 아무리 목사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달라고 해도 목사님은 쉽게 고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고등학교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미적분을 쉽게 푼다. 그런데 대학을 나온 사람이 미적분을 풀지 못하는 것을 보면, 미적분을 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해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서 풀지 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을 못하는 대학 나온 사람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대학생 정도면 저 정도는 풀어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목사라면 당연히 저 정도의 행동은 보이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기에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사람들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라는 것이다. 상대가 모르는 약한 점이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는 어떤 사람에게 대화를 좀 하자고 하는데도 대화를 회피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대화를 하기 싫은 것으로 이해한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대화하는 것은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안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를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대화에 나서지 못하는 사정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많기에 그렇게 이해하라는 것이다.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임 목사님도 성도들이 볼 때에는 충분히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담임 목사님 입장에서는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서로가 좋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즉 목사님은 못하는 것이기에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성도들이 이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목사님이라면, 성도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목사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담임목사를 고치려 하기 보다는(왜냐하면 못 고치기 때문에) 기대치에 부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그러려니 이해하고 성도 자신의 눈높이를 낮추고 그 교회에 계속 다니던지, 성도가 자신의 일을 결정해야 한다. 성도가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 교회에 계속 다닐 수 있다. 목사님은 그런 분이기에, 목사님을 고치려 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편하게 교회에 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안 되면 교회를 떠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이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때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님과 대화를 해서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이나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서로 협의 하에 진행할 수 있다는 아주 드문 예이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안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변하도록 요구하기 전에 자신의 처지나 행동에 대해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을 바꾸지 말고 나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누군가 나의 행동의 변화를 요구했을 때, 내 입장에서도 내가 안하는 것일 수도 있고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고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도 사실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남의 조언을 듣고 쉽게 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이 나도 평안으로 사는 방법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때, 소극적으로 대하라는 말은 아니다. 잘못을 회피하라는 말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라는 말도 아니다. 분명한 잘못에 대해서는 그것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판결을 해야 한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말 애매한 부분, 관계 면에서 어려운 부분, 그리고 죄 문제가 아닌 것에서 고칠 수 없는 부분이라면 좀 더 다른 사람을 이해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