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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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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쳐라 본문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우리 자녀들을 위해 성경적 지식과 묵상을 그들의 삶에 통합하는 교육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이다. 불행하게도,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몇 년 전 보수적 복음주의 계열 대학에서 가르치는 세 면의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복음주의자가 아닌 내가 복음주의자들이 자녀들을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내 왼편에 있던 교수는 내가 복음주의자들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미 시효가 지난 평가를 견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감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학교에 오는 학생들이 성경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놀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경악했다. 나는 교수들에게 그런 불평은 내가 가톨릭 대학 교수들에게 듣곤 하던 것이었는데 그런 상황이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정말 사실이냐고, 보수적인 대학에서도 장말 그러냐고 말했다.
나는 탁자를 둘러보았다. 그들 모두 긍정의 표시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 교수들은 대부분의 아이가 교회와 교회 청소년 그룹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들의 신학적 배경은 놀랄 정도로 피상적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4년 동안만 그들을 데리고 있을 뿐이죠. 그들이 이전에 전혀 해 오지 않았던 것을 그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날 밤 이후, 강연을 위해 나를 초청하는 기독교 대학에 갈 때마다 나는 교수들에게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부생들의 기독교 지식을 평가해 보라고 으레 요청한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 학교가 가톨릭이건 복음주의건 대답은 동일하다. 그들은 신학적 문맹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재직하는 학교에 오는 아이 중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명망 놓은 여러 가톨릭 고등학교 출신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고 그것이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가톨릭 신앙이란 자신들이 원하는 바 그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철저히 주입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광범위한 무지를 입증하는 사회 과학 문헌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실 중 어떤 것도 놀랄 만한 내용이 아니다. 결국, 도덕주의적 심리 요법적 이신론은 어딘가에 기인하고 있다.
MTD에 대항해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 하는 부모는 베네딕두스에게서 좋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규칙’에서는 수도승들이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베네딕도회의 성경 읽기 방법인 렉티오 디비나에 전념하도록 한다. 또한 성인은 수도승들에게 자신들의 성경 공부를 더 풍성하게 하려면 다른 종류의 독서와 연구에 전념하라고 명한다. 예컨대, ‘규칙’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각 수도승이 수도원 장서에서 한 권의 책을 지정받아 읽도록 지시한다. ‘규칙’에서는 수도승들이 성경뿐만 아니라 교부들의 저술과 성인들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도록 지시하는데, 이러한 책들이 굳건한 토대 위에 신앙의 집을 세우려는 이를 위한 덕을 세우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성경 공부는 이들을 하나님께 이끌 뿐만 아니라,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함께 묶어 세속주의의 맹공에 저항해 설수 있도록 돕는다. 다시 언급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유대인들의 교육에서 배울 수 있다. 필라델피아의 가톨릭 대주교인 찰스 채풋은 2012년 예시바 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정통파 유대 교육의 힘을 목도했다. 대학 기초 과목의 한 부분으로 토라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관찰한 후, 채풋은 “새 생명을 창조하는 성경의 능력”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썼다.
대 주교는 <퍼스트 씽즈> 매거진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대화다. 그 신적 대화는 학생들 간에 배움의 대화에 반영된다. 학생들은 이방인으로 시작하지만 성경 묵상과 그들의 발견한 내용을 서로 나누는 작업이 그들보다 더 큰 무언가, 즉 그들 사이의 우정과 그들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우정을 창출한다.”
정통파 유대인 학생들은 학문적 거리를 두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생명의 양식이자 그들을 공동체로 함께 묶는 힘줄로서의 성경을 공부한다. 교육이서 이 정도의 헌신을 성취하는 일이 기독교 학교와 대학에서는 비현실적 목표로 들리지만, 시도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랍비 고틀립이 옳다면 진정한 기독교적 문화의 생존에는 이것 혹은 이와 유사한 것이 필요하다. (베데딕트 옵션. 로드 드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