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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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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제 1장 새로운 시대의 선교의 목표 본문
선교의 목표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선교의 목표는 무엇일까?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담임 목사나 성도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에 동참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보낸다고 말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방법론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선교의 실제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선교의 목표가 복음을 전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선교학자들의 이론 때문이다. 선교학자들의 이론과 선교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의 생각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교회에서 하는 목회와는 다른 것과 같다. 신학교에서는 성경에 대한 많은 설(?)들을 가르치지만 실제로 이것을 교회에서 설교 시간이나 목회에 사용되는 것은 극히 적다. 신학교에서는 성경에 대한 문서설을 가르치고 논쟁하지만 이 부분을 교회에서 다루는 목회자는 거의 없다. 이 부분을 다루는 교회는 성장하기 어렵다. 목회자들은 이런 설(?)을 가지고는 목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이런 간격이 선교 이론과 실제에서도 나타난다.
선교 학자들은 지금 선교의 정의에 대한 이슈로 논쟁을 하고 있다. 많은 선교 대회가 선교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 토론한다.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나는 에큐메니칼 입장이고, 또 하나는 복음주의 입장이다. 에큐메니칼 입장은 진보계열에 속한 그룹이고 복음주의 입장은 전통적인 입장이다.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선교의 목표는 세상의 변화에 있다. 교회보다 세상이 중심에 있다.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회 참여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다. 복음 전파와 사회의 변화를 별개로 생각한다. 복음 전파는 전도에 해당하는 것이고 선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기 위해서 세상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사회적 책임이란 정치적인 일에도 관여하고, 사회의 불합리한 일에도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찾아 하는 것이 모두 선교다. 이들에게 있어서 선교는 세상의 구조적인 것을 변혁하는데 초점이 있다.
반대로 복음주의 입장에서 선교는 복음 전파이다. 전도를 통해서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개념을 전도와 동일시하였다. 단, 전도는 동일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타문화 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와 선교의 차이였을 뿐 복음 전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약 200년 동안 선교는 복음 전파라는 생각으로 변함없이 실행되어 왔다. 그러나 1974년 복음주의 선교 대회인 로잔 대회를 통해 이 사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주로 존 스토트의 사상이 골격이 됨)에서 선교는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두 가지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복음 전파와 사회적 책임은 서로 동반자 관계로 공동의 목적을 위해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두 가지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동반자 관계에 있다. 물론 복음 전파가 사회 참여보다는 우선순위에서는 앞선다. 이 대회를 통한 변화의 핵심은 사회 참여 자체만으로도 선교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로 전문인 선교사의 선교 참여가 더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별히 존 스토트는 사회참여를 독립적으로 보았기에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이나 결과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 두 진영 간에 서로 합의를 찾아 가는 방법은 바로 총체적인 선교에 있다. 총체적인 선교란 선교를 한 가지 차원이 아닌 다양한 방법과 수단에 의해 총체적으로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전도가 중심에 있고 다른 사역들이 주변에서 서로 동반자 관계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사회 참여에 대해 이전보다 좀 더 관심을 갖는 의미에서 총체적인 선교를 지지한다. 반면에 진보 진영에서는 선교의 다양한 방법과 수단이 바로 선교 자체이기에 당연히 총체적인 선교를 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은 진보 진영의 총체적인 선교에 있어서도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조금씩 인정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필자는 이런 선교 학자들의 사상은 선교지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다고 본다. 현재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선교지의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 이론에 불과한 논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선교의 목표는 복음 전파라는 기존의 이론이 계속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1. 한국 교회의 입장
이미 언급했지만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사회 참여와 정의를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파송한다. 교회가 선교를 하는 목표는 전도를 통해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도”와 “구제”라는 단어를 구분해 보면, 한국 교회에서 전도와 구제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구제는 사회 참여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구제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그 결과로 구제 대상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구제(사회 참여)의 사명을 감당하는 마음으로 구제를 한다. 구제는 전도를 위한 방편 혹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구제와 전도가 분명히 다른 것처럼 선교도 사회 참여가 아닌 전도인 것이다. 물론 소수의 교회는 선교를 넓은 차원에서 생각하여 구제를 하는 것도 선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와 구제를 구분한다. 선교는 복음 전파이고 구제는 사회 참여이기에,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에 동참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사회 참여나 구제는 선교를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떤 교회가 구제만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겠는가?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 할 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교 현실적인 면에서 선교는 복음 전파여야 한다.
문제는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하고자 하는 한국 교회에 있다. 많은 교회들이 분명한 선교 철학 없이 선교지의 필요에 따라 지원하려고 한다. 선교지를 방문해 보니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서는 학교를 설립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적절한 학교도 없고 교육 받을 기회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일반 학교를 세운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학교를 통해 복음도 전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이야말로 최상의 선교라고 생각한다. 결국 무리한 투자를 해서 학교를 설립한다. 그러나 이것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잃을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기독교 학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지만 기독교 학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쉽게 답할 수 없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통로는 될 수 있다. 학교를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이 사역을 시작하는 후원 교회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후원하는 교회가 학교를 세우는 분명한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선교학자들이 선교의 목표를 세우면서 사회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논쟁을 하더라도 실제 교회의 요구는 선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복음 전파 없는 일반 학교만을 세우는 선교는 교회가 원하는 목표가 아니다. 분명히 복음 전파가 유일한 목표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방법론적인 면에서 사회참여의 사역이 복음 전파로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냥 학교는 학교로, 병원은 병원으로 남을 가능성이 선교 역사를 통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과 연관이 되어 교회를 설립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이 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원하는 교회와 선교사들이 이런 분명한 철학 없이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선교의 현실은 철학이 선교 사역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데 감정이나 선교지의 현실적인 필요가 선교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선교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성경의 핵심
성경에서 선교는 복음 전파가 핵심이다. 성경의 핵심은 영혼 구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었다. 죄인 된 인간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 예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증인이 되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를 통해서 이 세상이 구원을 받는 일이 계속 되어져야 한다. 이 핵심적이고도 분명한 내용이 성경의 중심 사상이다. 이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이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이 땅에 구속을 위해 오셨다. 사도들은 이 일을 위해 증인이 되었고, 특별히 바울은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주님은 복음 전파의 지상 대 명령을 유언으로 말씀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할 당시에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에 속국으로 있었고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해방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고 생각하였다. 제자들로서는 사회 정의와 사회 참여가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제자들은 승천하시려는 예수님을 붙잡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냐고 물었다(행1:6).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제자들이 알바가 아니고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1:8).
이처럼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이 있다. 선교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관심이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일보다 앞선다. 그래서 사회 참여나 인간화나 살롬을 주장하고 있다. 선교에 사회 참여도 포함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열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보면 사회참여가 예수님의 목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열 문둥병자를 고치셨다. 그들은 고침을 받고 예수님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중의 한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때 예수님은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자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17:17-19)고 하였다. 예수님의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열 사람을 고쳐 준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구원이 임했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에게는 문둥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있었다. 돌아온 한 명의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주님의 목표였던 것처럼 선교도 영혼 구원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다른 문둥병자 아홉은 고침을 받았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둥병의 고침을 받았어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별개의 문제이다.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시기는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목표는 아니었다. 주님의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었다. 오늘날 사회 참여를 하기는 해야 하지만 그것이 선교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 참여는 복음을 전하는 수단과 방법이 될 수 있다. 혹은 복음 전파의 결과로 사회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선교의 목표는 사회 참여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3. 선교 현장의 한계
선교 현지의 현실적인 상황으로 보아 사회 참여를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제를 통해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지역을 개발했어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그들을 구원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현지인들이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보통 한국에서 전도할 때 전도의 종류가 크게 두 가지이다. 그것은 말씀을 전함으로 전도하는 것과 삶으로 보여주는 전도이다. 말씀만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거부하기 쉽다. 그래서 요즈음은 생활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생활 전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활 전도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말씀을 통해 복음이 정확히 전파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생활 전도는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이요, 방법이다. 마찬가지로 선교지에서도 사회참여가 생활 전도처럼 복음 전파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물론 복음 전파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차원에서 사회참여는 가능한 일이지만 사회 참여가 선교의 목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에게 많은 빵을 나누어 주어 그들의 삶을 개선해 준다 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라고 말한다. 즉, 사회 참여를 통해 복음을 전해 본 선교사들은 그 방법이 결코 복음 전파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한다. 현지인들의 삶을 개선해준다 할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 개선은 소용없는 개선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지만 그 중의 아홉 명은 구원과는 별개의 고침을 받은 것이고 아홉 명에게 하는 행위가 선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지인들을 잘 살게 도와주고 그들의 삶을 개선해 줄지라도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면 소용없을 뿐 아니라 이것을 선교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몸에 병이 생겼다. 몸만 낫게 해 준다면 예수를 잘 믿겠다고 하였다. 그 사람을 도와 병원에 데려가고 치료해주어 낫게 했더니 건강한 사람이 되어 그 건강한 몸으로 더 큰 죄를 짓다가 폐인이 되더라는 이야기이다. 빵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은 이런 사례를 많이 본다. 빵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선교사들이 사회 참여의 입장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 직접적인 복음 전파보다는 사회 참여적인 방법을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복음의 문이 닫힌 지역에서는 방법론으로 사회 참여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선교의 목표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사회 참여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주는 것이다. 복음에 앞서 빵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혹은 학교나 의료나 스포츠를 통해 하는 선교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이 이런 방법론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회 참여가 선교 사역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서, 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하기도 하고 다른 사역보다 그 사역이 쉬워서 하는 경우도 있다. 눈에 보이는 사역이기에 그것을 통해 선교 후원금을 모금하는 통로로 삼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과시나 혹은 그 보이는 사역을 통해 명예를 얻고자 하는 이유도 있다. 현지 언어를 가지고 가르치거나 사람을 키우는 사역이 어렵기 때문에 이런 사역밖에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은 왜 이런 사역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분명히 필요한 사역이기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교학계의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구조적인 모순을 사회 참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해야 한다. 선교가 복음 전파라는 목표를 분명히 가졌다면 이런 사회 참여적인 사역이 복음 전파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평가해야 한다.
4. 복음 전파와 은사
선교의 목표가 복음 전파이든지 사회 참여이든지 간에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은사에 따라 자기 영역에서 사역을 해야 한다. 은사를 생각할 때에 한국 교회는 복음 전파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 교회 선교사의 대부분이 목회자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전문인 선교사가 늘어가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목회자 선교사가 더 많다. 목회자가 선교사가 된다는 의미는 목회라는 전공과 은사를 가지고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것을 말한다. 목회자의 은사는 직접적으로 복음 전파 사역에 집중하는 것이다. 목회자 선교사가 전도와 목회,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자연스럽다.
목회자가 선교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전공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라는 전공을 바꾸는 것은 효과적이 아니다. 목회가 전공이라면 선교지에서도 목회를 해야 한다. 자신의 은사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성경을 가르침을 통해 선교해야 한다. 자신의 은사가 신학교 교수 사역에 있다면 신학교 교수를 해야 한다. 대학생 선교에 은사가 있다면 대학생을 키워 제자훈련을 해야 한다. 문제는 사회 참여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목회자이다. 교육을 전공하지 않은 목회자가 일반 학교를 운영한다. 의료에 문외한인 선교사가 의료 사역을 한다. 운동선수 출신이 아닌 선교사가 스포츠 선교를 한다. 신학교에서 공부만 했던 선교사가 사업을 한다. 사회사업을 전공하지 않은 목회자가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운영한다. 건축을 전공하지 않는 선교사가 건축을 한다.
필자는 피아노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현지인들에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학원을 연다면 그것은 비효과적이다. 피아노를 새로 배워야 하거나 아니면 피아노 전공자를 구해야 한다. 피아노 전공자를 구해서 학원을 운영하더라도 선교사 자신이 어느 정도 피아노에 대해 알아야 한다.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모르면 피아노를 잘 가르칠 수가 없다. 학원 주인이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모르면 학원을 잘 운영할 수 없다. 큰 음식점을 하는 주인은 음식을 직접 요리하지는 않지만 음식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음식을 만드는 법을 요리사에게 가르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에 음식점은 잘 될 수 있다. 전에는 기업에서도 물건을 만드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달랐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이공계 출신이고 파는 사람은 경영계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공계 출신이 직접 경영자로 나서는 추세이다. 파는 물건을 잘 알아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공을 따라 사역을 해야 한다. 은사에 따라 사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은사에 따라 사역하지 않는 것은 은사대로 사역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현상이다. 선교사가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선교지에서도 은사와 전공에 따라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원리이고 사역의 결과적인 측면에서도 효과적이다. 선교지에서도 목사는 목회와 관련된 사역을 하고 전문인 선교사는 자신의 전공과 연관된 사역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과 효과적인 것이라면 그대로 하는 것이 기본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지혜와 은사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어 다르게 섬기고 봉사하도록 하셨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 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 12:17-18)” 목회자 선교사가 스스로 어떤 사역이던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목회자는 어떤 사역이던지 가능하며 목회자가 하는 것은 모두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수정해야 한다. 목회자와 목사 선교사가 영적 권위를 가졌기에 다른 분야에서도 권위와 기술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고쳐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사도들은 자신들이 간섭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일인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겠노라고 다짐하였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전 6:6)”. 선교사도 같은 원리로 사역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것은 선교사 자신뿐 아니라 선교지 사람들에게도 손해다.
현재 전문인 선교사가 많이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현상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목회자가 목회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인 선교사가 하는 일을 독차지 하고 있으니 전문인 선교사가 발 디딜 틈이 없다. 선교지 선택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선교지 중에서 닫힌 지역은 전문인 선교사가 더 많이 들어가서 전문인으로서 선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열린 지역, 즉 추수지역에는 목회자 선교사가 들어가서 교회와 목회에 관련된 사역을 해 나가는 것이 좋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추수지역에서 사업이 필요할 때는 전문인 선교사가 목회자 선교사와 협력하여 일을 할 수 있다. 닫힌 지역에서도 목회자 선교사가 전문인 선교사들의 사역 결과로 전도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할 때 어느 지역이던지 협력 사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협력 사역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사역적인 면에서 전공과 은사에 따라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숫자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목회자 선교사들이 전문인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빼앗아 하고 있기에 전문인 선교사들은 점점 길을 잃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협력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 사역을 할 때 자신의 은사에 맞는 사역을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원리이고 질서다. 이 질서가 깨지고 있는 것이 한국 선교의 현 주소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하는 선교는 오래 갈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목회자 선교사는 사회 참여적인 사역을 하고 전문인 선교사는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현실을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얽히고설킨 선교의 매듭을 풀 수 있다.
선교와 사회 참여
요즈음 한국 교회 선교의 흐름은 사회 참여적인 부분으로 흐르고 있는 현실이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사회 참여가 바로 선교인 것처럼 행하고 있다. 선교의 목표는 복음 전파일지라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 참여적인 일을 통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1. 선교사들의 역량 부족
선교사들이 자기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선교가 무엇이며,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선교를 하고 있다. 선교사로서 분명한 철학과 정체감이 부족하다. 한 선교사는 목사 선교사로서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목회를 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어느 날 구제를 주로 하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어느 NGO 단체에서 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 급식을 하고 구제를 하기 위해 이 단체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단체의 후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목회자 선교사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요, 교회를 세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원금을 더 받기 위해 다른 단체에서 행하는 선교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그 단체의 협력 선교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선교사가 창의적 접근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현지에 교회가 존재하고 복음의 추수지역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처럼 하는 것은 생각과 철학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이 선교지 곳곳에서 일어나기에 안타까운 것이다. 이 NGO에서 훈련 받고 있는 목회자 선교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사항이다. 선교사들이 자신의 선교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역하지 않고 철학에 따라 사역해야 한다.
2. 한국인들의 열등의식
한국 사람들에게 교만과 열등의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선교지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한 마음으로 무언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이면에 현지인들은 한국 사람인 자신보다 부족하고 못 살기 때문에 뭔가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교만한 의식이 선교사에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가난한 현지인들은 한국 선교사가 물질적으로 안 도와주어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꼭 도와주어야 한다는 교만한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의식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런 사회 참여적인 사업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선교사들은 결국 현지인을 물질로 지배하려고 한다. 한편으로 한국 선교사들은 자신의 열등의식을 물질로 덮으려는 생각이 있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선교사들이 다른 면에 자신감이 부족하다. 현지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그래서 가르치는 사역에 자신이 없기에 물질로 하는 사역을 통해 자신의 열등의식을 감추려 하는 경향이 있다.
3. 한국인들의 감정적인 영향
한국 사람들의 감성적인 요소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다른 민족 보다 감성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 감성적인 발달이 선교 사역에서 적용되어질 때는 부정적인 면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감성적인 면은 선교 사역에 있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전략적인 선교를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저 감정적인 부분에서 너무 불쌍하기에 물질로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화되다 보면 선교의 방향이나 목표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람들의 감성적으로 강한 면은 선교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사역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4. 결실 위주
눈에 보이는 결실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회참여적인 사역은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사역이다. 사역의 결과가 쉽게 나타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선교란 사람을 중요시하고 사람을 키우는 사역이다. 사람을 키우는 사역이 눈에 보이는 사역이 될 수 없다. 사람을 키우는 사역은 인내와 시간을 요한다. 한국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일본 사람들은 이민을 가서 10년 혹은 20년을 내다보고 사업을 구상하고 시작한다. 반면에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간 한국 사람들은 3년 안에 성과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3년 안에 돈을 벌어 성공을 해야만 하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하다가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선교사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 선교사들이 10년 걸려 하는 일을 3-4년에 하고자 한다. 그 열심과 의도는 좋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다. 짧은 기간 안에 사역의 열매를 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실패한다. 성공했다고 했던 사역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실패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눈에 보이는 열매를 성급하게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목회는 장기적인 시간이 요하는 사역인데 하물며 선교지에서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여 단기간 안에 무엇을 해 보겠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좀 더 사람 중심의 사역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선교의 목표인 복음 전파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업 중심의 사역 보다는 사람 중심의 사역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되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보다는 영적인 필요에 민감해져야 한다. 사회 참여보다는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사람을 중요시 여기면서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실행해야 한다.
선교와 제자훈련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정확히 성경적인 방법인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성경적인 방법론도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데 차이가 있지만 성경의 원리와 방법을 찾아 나가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에 대한 과정과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세계 복음화를 위한 방법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것이었다. 그 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 선교사들이 하는 것처럼 일반 학교 사역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여실 수 있었다. 혹은 병원을 세우셔서 치료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실 수도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로 도와주고 지역 개발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도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물론 주님은 병자를 고치셨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셨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많은 군중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 전파의 주된 주님의 방법은 아니었다.
주님의 주된 사역 방법은 제자를 선택하여 양육하는 방법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물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님도 사회 참여적인 일들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직접적인 사역 방법은 제자훈련이었다. 제자훈련은 주님의 사역의 핵심이었다. 주님은 제자를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맡기시는 것에 사역의 초점을 맞추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 선교에 있어서 제자 삼는 사역의 중요성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온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제자 삼는 사역이 세계 복음화의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제자 삼는 것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세계 복음화의 원리이다. 제자를 삼는 것 자체가 복음 전파의 원리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온 세상에 제자 삼는 것이 바로 세계 복음화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제자 삼는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제자 삼는 것은 철저한 훈련으로 되어져야 한다. 제자의 숫자는 상관없다. 숫자가 적으면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 선교도 선교의 중심에 제자 삼는 것을 원리로 삼아야 한다. 선교사들이 여러 가지 사역을 하지만 제자 삼는 사역을 선교의 핵심으로 삼아야 하고 제자 삼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선교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제자를 삼는 것은 주님의 선교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은 주님의 세계 복음화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제자 삼는 것은 세계 복음화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 왜 한국 선교사들은 제자 삼는 사역을 하지 않는가? 왜 선교사들은 주님의 방법과 원리를 선교 사역에 적용하지 않는가? 선교에 제자 삼는 것 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사역이 있는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제자 양육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가?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사람들이 선교를 생각할 때 떠오는 것은 “부족 혹은 오지 사역”, “미전도 지역”, “고생”, “돈”, “사업”,“가난”이라는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들은 선교의 본질이 아니다. “선교” 하면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자 훈련이 되어야 한다. 최근에 한국의 R교회에 대한 이야기다. R교회는 제자 훈련을 모태로 탄생한 교회이고 제자 훈련으로 성장하였다. 그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한국에서와 같이 제자 훈련이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정착되도록 사역을 하고 있었다. 선교는 제자훈련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얼마 전부터 선교 방법이 바뀌었다. 선교사들이 제자훈련을 하는 대신에 선교 센터를 세우고 큰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하는 사역으로 바꾸고 있다. 교회에서는 제자 훈련이 교회 본질이고 사역의 중심에 있는데, 선교지에는 제자 훈련을 뒤로 하고 사업성 선교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에서는 제자 훈련으로 한국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찾아가는 귀중한 역할을 하였는데 선교에 있어서는 반대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라도 한국 교회 선교는 제자훈련이 바로 주님의 선교 원리였고,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선교하면 제자 훈련이 떠오르고 제자 훈련이 중심이 되는 사역이 되도록 체질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선교사는 타 문화권에서 제자를 삼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선교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제자 훈련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선교사를 만나면 “어느 나라에서 제자 양육하십니까?”, “ 제자 양육의 토양은 잘 되어 있습니까?”, “그 나라에서 제자 양육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문화적인 요소는 무엇이 있습니까?”등등의 질문을 하는 풍토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그 때에 비로소 한국 교회 선교는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에 선교의 체질이 바꾸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에 선교의 목표를 회복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선교와 교회 개척
1. 교회 개척의 필요성과 중요성
선교에 있어 교회 개척은 많은 일들 중의 하나이다. 선교지에서의 교회 개척은 때로 다른 사역보다 매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인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사역한다고 하면 위대하다고 하면서 목회자가 교회 개척을 한다고 하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어떤 의사가 선교사로 오지에 가서 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 사역을 한다고 하면 그의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대학 교수가 선교지에서 교수 사역을 한다고 하면 그의 헌신을 귀하게 생각한다. 유명한 운동선수가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나가 운동으로 선교를 하면 대단한 결단이라고 한다. 이처럼 전문인들이 선교사로서 사역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들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다. 여기서 전문인 선교사의 사역과 목회자 선교사의 교회 개척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어떤 목사가 교회를 하나 개척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한 것인 냥 받아들인다. 그거 뭐 대단한 일이냐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요즈음에는 선교사가 교회 개척을 한다고 하면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전문인이 선교지에 가서 하는 그 사역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선교의 스타는 전문 직업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무명의 목회자 선교사가 교회를 하나 개척해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어느 유명한 스포츠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국가 대표 팀을 만들어 지도하는 사역을 하는 것 중 어느 사역이 더 위대한가? 우리는 누가 더 잘하고 위대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교회 개척하는 선교사의 사역이 스포츠 선교사의 사역보다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 개척에 대해 큰 매력을 갖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교회 개척은 선교의 중심에 있다. 모든 사역은 교회 개척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무리 많이 전도해도 교회를 세우지 않으면 그 전도는 별 소용없게 된다. 예를 든다면 한국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는데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자라지 못한다. 신앙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선교지에서 병원을 통해 육신의 병을 고치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교회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영혼은 다시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구제를 통해 가난한 아이들이 배를 채우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는데 교회가 없어 교회에 출석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신앙은 유지되기 어렵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신앙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교회를 통해 신앙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며 살도록 격려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들을 가르치고 양육한다.
선교지에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의미는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만들어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선교의 가장 기본이고 중심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아 교회를 통해 제자들이 활동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확장되고 성장될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세워진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기억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의미는 교회가 계속 세워지고 교회가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 일반 학교가 하나 더 세워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병원이 하나 세워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 세워질 때는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선교에 있어서 교회 개척은 선교 사역의 핵심이다. 교회 개척은 선교 사역의 일차 목표다. 선교의 목표가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회를 세움을 통해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 개척은 다른 사역보다도 열등한 사역이 아니다. 다른 사역보다도 부족한 사역이 아니다. 모든 사역의 기초요, 중심이다. 우리의 모든 사역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구제를 하고 병원을 세우고 선교 센터를 짓는 모든 것이 교회를 세워 확장하기 위한 방법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세우지 않는 선교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회 참여적인 일을 해야 하지만 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사를 좀 더 인정해야 한다. 교회 개척하는 선교사도 위대하다고 해야 한다. 교회 개척을 다른 사역보다 열등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 개척을 쉽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 개척이야 말로 선교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 개척의 중요성을 인정해하고 더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한다.
2. 교회 개척을 하는 유익
선교사가 교회 개척을 할 때 선교학자들의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선교 학자들은 선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 해 왔다. 선교의 목표가 전도냐, 사회 참여냐, 두 가지 다냐, 하는 논쟁을 해 오고 있다. 이 논쟁은 선교지에서 교회 개척을 할 때 분명하게 정리될 수 있다. 선교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 방법과 결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 교회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바로 사회 참여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선교사가 사회 참여적인 일에 관여할 것이 아니라 전도하고 제자를 삼고 교회를 개척을 한다. 그리고 그 교회의 현지인 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나라의 사회 참여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선교사가 인도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사회 참여적인 일까지 도맡아 하게 되면 현지인 교회와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현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야 할 일을 맡겨 주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현지 그리스도인 스스로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남겨 놓아야 한다. 그래야 현지인 교회가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고 그들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선교사는 선교지의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외국인으로서 정치 문제까지 관여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복음주의적인 선교 단체는 선교사가 현지의 정치적인 일에 참여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선교지의 정치적인 일들은 선교지 현지인들이 참여 할 수 있다.
사회 참여적인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다. 구제도 현지인 교회가 그들 수준에 맞는 구제를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구제를 하는 NGO 단체들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다만 구제를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 수준에 맞지 않는 지나친 구제는 현지인들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구제 단체에서 주는 구제금이 단체 입장에서는 별로 많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들 수준에서는 아주 많은 금액이다. 그 돈을 구제로 받게 되면 그 일에 관여되어 있는 현지인들이 우선 혜택을 받게 된다. 단순한 경제적인 혜택뿐 아니라 권력까지도 얻게 된다. 자질이 안 되는 현지인이 이 일을 중간에서 감당할 때는 구제금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구제금이 현지인들 끼리 불신을 조장하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물론 구제 단체에서는 철저한 교육과 감찰을 통해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사역을 통한 부작용들을 적잖게 볼 수 있다.
한 예로 어린이 교육을 위해 세계적인 NGO단체인 W단체에서 E국에 구제를 하고 있다. 이 구제 프로그램은 단순히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교회에 위임하여 교회가 어린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한다. 교회에서는 구제 단체에서 주는 돈으로 교사를 세워 월급을 주고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급식을 통해 영양상태를 개선한다. 이 구제 단체에서는 매 분기 마다 교회 책임자와 회계 담당자, 그리고 교사들을 교육한다. 재정 감사도 철저히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들이 이 일에 참여할 때 교회 목사나 중직자들의 가족들이 이 일에 관여하고 있다. 교사 자격이 안 되는 가족들도 교사로 세워 월급을 받아 간다. 물건들을 나누어 주는 것도 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권리를 행사한다. 이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큰 교회가 감당할 수 있다. 작은 교회는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이 프로그램에는 주위의 작은 교회들의 어린이들도 참여하면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고 강요를 받게 되었다. 작은 교회에 다니던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은 이 구제와 교육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작은 교회 담임 목사는 교회의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옆 교회의 어린이들이 동원됨으로 결국은 작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 NGO 단체에서는 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는 강제로 교회를 옮기게 만든 것이다. 이 교회는 이 프로그램으로 교회 주일 학교 학생이 늘었다고 보고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로 단 한 교회의 사례만은 아니다. 더욱 풍요로운 삶과 발전적인 교육을 위해 하는 구제 단체의 이 사역이 오히려 이런 모순된 일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제와 사회 참여는 신중히 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선교지 현지인들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는 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도행전 4장 24절에 보면, 초대교회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밭이나 집 같은 재산을 팔아 교회에 가져와 구제를 하니 가난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표현한다. 서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교인들 끼리 서로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선교지가 대부분 가난하지만 그들 가운데 잘 사는 사람도 있다. 그들 가운데 서로 나눈다면 가난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있다. 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사회에 보여 줄 수 있다.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현지인 교회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선교사들이 그 일을 하게 되면 현지인 교회가 사회 참여적인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 만약 선교사들의 손에서, 선교의 범위에서 사회 참여적인 일들이 진행된다면 현지 교회는 할 일이 없어진다. 그들의 힘은 너무 나약하기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힘과 물질을 당할 수가 없다. 결국은 이런 사회 참여적인 일들이 외부에서 들어오기에 현지 교회들은 자립하기가 어렵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교회가 잘 성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선교사들이 선한 뜻을 가지고 현지인들에게 하는 사회 참여적인 일들이 결국에는 복음 전파에 방해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던 사회 참여적인 일들이 현지 교회의 자립과 사명을 가로 막는 일을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선교사가 사회참여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현지인 교회가 스스로 자립하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교회 개척에 초점을 맞추어 선교를 할 때 선교의 목표가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논쟁을 잠재울 수 있다. 현지인 교회를 통해서 현지 복음화를 이룰 수 있다. 선교에 있어서 교회 개척은 많은 사역중의 하나가 아니다. 교회 개척을 중심으로 할 때 복음화는 이루어지고 어두운 세상은 밝게 변화될 수 있다.
3. 교회 개척의 방법
그러면 선교사의 입장에서 교회 개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교사는 선교 현지의 주인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 사역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고 현지인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결국은 현지인들에게 맞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현지 문화와 형편에 맞는 교회가 필요하다. 현지인 교회가 자립하고 독립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지인 교회가 재생산하는 교회가 되도록 선교사가 그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방법이 필요하다.
교회 개척을 하는데 있어서 세 종류의 선교사가 있다. 첫 번째 종류는 교회 개척을 많이 하기는 하는데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는 경우다. 이런 종류의 선교사는 교회 개척이라기보다는 교회 건축을 해주는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혹은 현지 교회 개척 감독자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 자신은 가르치거나 목회를 하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교회를 시작하여 운영하게 하고 선교사는 현지인 지도자를 관리 감독한다. 이런 선교사는 결국 많은 교회를 세우게 된다. 어떤 선교사는 50개, 100개의 교회를 개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것이 선교사가 해야 할 교회개척인가는 한번쯤 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정말 현지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해 나가는 가를 점검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교회 개척은 선교사가 목회를 직접 하지 않기에 그 부작용과 단점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
두 번째 종류의 선교사는 첫 번째 선교사와는 정 반대의 경우이다.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직접 목회를 하는 경우이다. 목회를 하되 현지인에게 이양을 해 주지 않고 계속해서 목회를 한다. 5년, 10년 혹은 그 이상 동안 한 교회를 목회한다. 물론 이 교회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해서 다른 많은 사역들을 펼친다. 이 경우는 선교사가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현지인 이양이라는 차원에서는 한번쯤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국은 현지인이 목회를 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약점을 가질 수 있다.
세 번째 종류의 선교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에 있는 경우이다.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일정한 시간 동안 목회를 하다가 현지인을 세워 현지인 지도자에게 교회를 물려준다. 그리고 또 다른 교회를 세워 그곳에서 일정 기간 목회를 하다가 다시 현지인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 경우 4년 만에 하나씩 교회를 개척하여 물려준다면 적절하다고 본다. 4년 동안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고 안식년 후에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한다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세 가지 방식이 있는데 어떤 방식이 가장 적절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선교지마다 특성이 다르고 각 선교사가 가진 은사도 다르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더 많이 전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기 원한다면 세 번째 방법이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첫 번째 방식은 많은 문제가 있어서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 세 번째 방식은 한 교회를 목회 하면서 모델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역을 할 수 있기에 권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결론
선교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증인이 되는 것이 선교다. 여기에 더 다른 것을 첨부하거나 보완할 필요는 없다. 사회 참여적인 일은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가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교회에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 훈련은 선교에 있어서 원리적인 방법이며, 핵심이다. 전도와 양육을 통합할 수 있는 사역이 바로 제자 훈련이다. 제자를 세움으로 세계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도록 하는 것이다. 선교의 중심에 있는 사역은 바로 교회 개척이다. 교회 개척을 통해서 모든 사역을 중심으로 모아야 한다. 모든 사역의 종착점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 없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은 다른 전략적인 사역을 포괄하고 하나로 집중시킬 수 있는 선교의 중심에 있는 사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