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 Today
- Total
선교교육 연구원(IMER)
+ 다시 찾은 아들의 자리 본문
잃어버린 게 무엇이든, 돈이든, 친구든, 명예든, 자존감이든, 내면의 기쁨과 평안이든(어느 하나든, 그 전부든) 상관없이 아버지의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자는 중얼거렸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 속으로 그 말을 곱씹으며 탕자는 발길을 되돌려 먼 지방을 떠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사건의 의미는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라는 표현에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감히 자식이란 말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잃어버릴 자격이 있었다는 건 미우나 고우나 아들임에는 틀림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탕자의 귀환은 비록 자격을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자리를 되찾는 바로 그 시점에 시작됩니다. 사실 작은 아들을 천하고 천한 신분으로 끌어내린 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실이었습니다. 아들로서는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 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리 안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의식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길을 선택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자식이라는 지위를 다시 실감하게 되면서 탕자는 ‘사랑하는 아이야’라고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나마 그 은혜로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여전히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느끼고 확신한 뒤부터는 잘한 것 하나 없어도 아들이라고 떳떳이 말할 힘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지위를 당당하게 내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변 세계에서 들려오는 더움의 소리들은 자기 말을 들으라고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합니다. 나는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임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한 칸씩 쉬지 않고 올라 의로워지지 않은 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들아’라고 부르시는 음성은 성공이나 갈채와 상관없이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지만, 어둠의 소리들은 그 메시지를 순식간에 망각하게 만듭니다. 나를 향해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에 빛을 주시는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지워버립니다. 나를 존재의 주변으로 밀어내고 사랑의 하나님이 그 중심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점을 의심하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먼 지방에서 떠나는 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면서 무얼 해야 할까요? 탕자의 행동은 대단히 명쾌해 보입니다. 작은 아들은 시나리오를 준비했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내고 발길을 돌리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의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
본문을 읽어나갈수록 나의 내면생활에도 이런 식의 대화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사실 나는 머릿속에서 줄곧 가상의 만남을 이어갑니다. 자신을 설명하고, 자랑하거나 사과하고, 비난하거나 변명하고, 칭찬을 자아내거나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예상되는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준비해가며 보이지 않는 상대들과 쉴새 없이 긴 대화를 나누는 꼴입니다.
이런 내면의 되새김질과 웅얼거림에 투자하는 정서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엄청난지 깜짝 노랄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먼 지방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나는 중입니다. 맞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을 이야기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진정한 정체성을 찾기는 했지만 아직도 주님이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거룩한 사랑을 조건적인 애정으로 생각하고 집을 미심쩍은 장소쯤으로 여깁니다. 고향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집에 도착했을 때 정말 환영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합니다. 나의 영적인 여정, 다시 말해서 집으로 가는 멀고도 고단한 나그네 길을 살펴보면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미래에 관한 걱정이 가득합니다.
무수한 실수를 저질렀으며 아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롬 5:20) 되었다는 사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아들보다 훨씬 아래쪽에다 자기 자리를 잡습니다.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용서를 쉽사리 믿지 못합니다. 용서란 한마디로 복수를 포기하고 얼마쯤 자비를 베풀려는 상대편의 의지를 가리킨다는 인생 경험을 더 신뢰합니다. (헨리 나우엔. 탕자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