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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따르는 길 본문

선교와 영성/영성 자료

-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따르는 길

후앙리 2021. 6. 2. 15:52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따른다. 그나마 따르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따른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다. 두려워하며 따르는 삶은 제자도의 형태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두려움이 많다. 두려움에 젖어있는 우리 모습이 어떤 때는 아찔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다음에 죽어서 그분 앞에 서면 어떻게 될까? 무어라고 말할까?”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간혹 우리가 하는 말이 있다. “일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일 안전한 길일거야,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되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따르기를 원하신다. 신약 곳곳에서 들려오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천사가 나타나 사가랴와 마리아에게도 그렇게 말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무덤에서도 천사들이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했다. 예수님도 친히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두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를 아주 멋지게 표현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어서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의 방벽을 뚫고 들어온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의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자 그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분이 다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도 다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한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물으신다. 베드로는 약간 불안해져서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아뢴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야,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신다.(21: 15-17).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우리가 지금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8)

이런 뜻이다. “네가 정말 사랑 안에 있으면 스스로 택하지 않은 곳이라도 능히 남에게 이끄려 갈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갈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심리학을 전복시킨다.

그분은 네가 젊어서는 팔을 벌리리니 남이 띠 띠우겠으나 늙어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네가 젊어서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늙어서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려 가리라

영적 삶은 점점 더 남에게 잘 이끌려 험지로 가는 삶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남이 데려가는 자리로 가는 삶이다. 예수님께 그곳은 십자가였다. 베드로에게도 십자가였다. 바울과 모든 제자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었다. 이는 피학 성향이나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학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다. 철두철미하게 사랑 안에 있다 보니 원하지 않는 곳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면 사랑 밖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의 눈길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대상에 머문다. 우리는 그저 한 걸음 또 한걸음 매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부모는 아픈 자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이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픈 자녀를 지키는 부모를 보고 큰 고통 속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녀의 곁에 남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사랑 안에 있으면 아무리 험한 곳으로 가도 고통이 사랑을 앞서지 못한다. 나는 고난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고난에 집중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이런 고생과 고통이 있을까? 누군들 이를 어떻게 다 감당할까? 끔찍하다. 나라면 결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고난을 살아내는 사람의 능력이 겉보기에는 불가능한 위업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이나 임종을 앞둔 환자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섬기게 된다면, 혹은 직장까지 버리고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두고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쉬워요. 당신이 말하는 모든 문제가 내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예수님을 따를 뿐이예요.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나 역시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발 한 발 주님의 사랑의 인도함을 받아 왔을 뿐입니다.”

병이 깊은 자녀를 둔 어머니라면 평생 자녀의 곁을 지켜야 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자유를 잃고도 자녀의 곁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본인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다 감담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그분을 따르니 두렵지 않아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순전히 그분을 사랑해서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헨리 나우웬: 예수의 길. 112-117) 202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