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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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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영성

후앙리 2019. 3. 30. 23:18

어떤 일을 할 때 일이 잘 안 풀리면 본질 혹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한다. 어떤 일에 위기가 왔을 때도 본질을 점검해야 한다고 한다. 개인이나 단체가 성장이 안 되면 기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 교회와 선교가 위기라고 한다. 그래서 선교를 재활성화해야 한다고 한다. 선교를 재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본질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다. 그러면 선교의 재활성화를 위한 본질은 무엇인가? 선교의 본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선교의 바른 동기를 회복하는 것, 복음 자체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있다. 무엇보다 선교의 본질은 영성을 갖는 것이다. 바른 영성을 회복할 때 한국 교회의 선교는 재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러면 영성은 무엇인가? 사전에서의 영성은 신령스러운 성품이나 성질로 정의한다. 기독교 영성 전문가들은 성령 충만한 삶이나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종교적 생활, 즉 초월적, 초자연적 대상과의 교통을 의미한다. 파커(David Parker)는 영성을 “예수 믿는 사람의 태도, 믿음 및 실천과 더불어 믿는 사람의 지위와 상태를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휴스턴(James M. Houston)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진 상태”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의들은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한마디로 영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을 좁은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영성이 있다. 한국 교회 선교가 영성을 회복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영성을 넓은 의미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의 영성은 좁은 의미의 영성의 (1) 하나님과의 관계와 (2) 나와 이웃과의 관계, (3) 피조물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영성은 가장 기본적으로면서도 우선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한다. 영성은 믿음이 본질이다. 구원받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다. 영성은 어떤 교리 체계를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의 행위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내적 경건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알아가며, 그분이 원하시는 예배를 통해서 알아갈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영성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수도원과 수도사다. 원래 수도사는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뜻이다. 도를 닦기 위해 혼자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수도사이다. 그러기에 수도사는 독신이다.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5)는 “수도사란 최선을 다해 주교들과 여성들을 피해 도망쳐야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교는 제도화된 교회, 여성은 세상의 모든 유혹을 상징한다. 교회와 세상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외딴 곳, 즉 광야나 산이나 섬에 가서 금욕과 고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수도사이고 그들이 모인 곳이 수도원이다.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다. 기도와 청빈으로 살고 순결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수도원에서는 기도와 말씀, 그리고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수도원에서의 기도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마 6:6)는 말씀을 근거한 것이다. 수도원의 약점은 개인 영성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도원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방법이지만 이것만이 영성의 전부는 아니다. 한국 교회 선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기도원과 같은 곳에서, 혹은 조용히 쉬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영성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영성을 말할 때 오순절 영성을 다룰 필요가 있다. 오순절 영성은 성령의 은사에 강조점을 둔 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체험적 신앙’이 바로 오순절 영성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관념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몸으로 직감하는 감각적, 구체적 체험을 추구한다. 초대교회의 신비적이고 초자연적 사건들이 오늘날에도 성령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 체험의 유무가 영성의 수준을 가늠한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복음 전도와 교회 봉사와 기도와 예배에 더 열정적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에 일조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순절 영성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에는 약하다. 또한 물질적이고 현세적 축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약점이다. 현세적 물질적 축복에 집착하는 것은 무속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속이란 한국의 전통 신앙인 샤머니즘을 말한다. 샤머니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질병과 사고, 재난 등의 길흉화복이 초자연적인 영들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영들이 개입되어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모르기에 샤먼에게 그 원인을 물어보고 샤먼은 접신상태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그 원인을 알려주고 굿을 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목사들을 샤먼으로 연결하는 경향이 있어서 목회자가 은사를 받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며 목사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샤머니즘에서는 현세적인 복, 즉 권력, 재물, 건강을 이용해 영들을 조종하려 한다. 영들은 조종하는 행위가 주술이다. 이런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교회 안에서의 기도가 인간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행위, 즉 신을 조종하려고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샤머니즘에서는 신을 조종하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 때문에 기도의 방향보다는 기도의 양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새벽 기도, 일천번제 기도, 철야기도, 40일 금식기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렇게 금식하며 기도했기에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사상은 영과의 싸움도 능력을 대결한다는 의식으로 발전되어 (선교지에서) 땅 밟기 기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통성기도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큰 소리로 부르짖어 효력을 볼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시간이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은 샤머니즘적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샤머니즘에서의 비인격적인 신과의 교통이 아니다. 자기 의에 기초한 나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이 나를 통치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된 기도의 영성은 스스로 주인 노릇하려는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인적인 관계, 즉 감정, 이성, 지성을 포함한 관계이다. 오순절 신앙 안에는 반지성적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전인적인 관계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기도를 통해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굴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두 번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영성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먼저 다루어야 할 부분이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참 된 자기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참 된 자기 사랑은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다는 확실한 자기이해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하나님의 구속으로 인해 고귀한 인생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재임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고 하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향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자기를 바르게 사랑하는 자는 자신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자기 욕망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른 영성이다. 그러므로 바른 영성을 가진 자는 교회 공동체나 자신이 속해 있는 가정, 사회 공동체를 잘 섬긴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고 연약한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자가 바른 영성을 가진 자이다. 선교사들이 영성을 회복한다는 의미는 바로 현지인을 존중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적인 선교, 즉 돈과 힘과 가진 것으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섬김으로, 약함으로 현지인을 세우는 것이다. 주도권을 현지인에게 주고 종이 주인을 섬기는 마음으로 현지인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피조물과의 관계의 영성이다. 바른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사람)과의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과의 관계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란 자연과 동물을 포함한다. 자연과 동물은 신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하셨기에 잘 다스려야 할 존재다. 잘 다스린다는 것은 청기직로서 그것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다. 자연과 동물이 창조의 영광을 드러낼 구속의 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다스리는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바른 영성을 가진 자의 태도이다.

바른 영성이란 영혼의 일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차원과 온 세상에 대한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영성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전체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선교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재활성화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와 영광을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사명과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균형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바른 성경해석과 행동으로 균형잡힌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면서 이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각자. 선교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되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과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 바른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