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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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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실리콘 벨리가 만든 신흥 종교 본문
‘바로 이때다!’ 하고 때맞춰 등장한 것이 유발 하라리가 <호메 데우스>에서 명명한 [데이터교]입니다. 데이터교는 실리콘 벨리에서 이제 막 태어난 신흥종교지요.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이미 수억 명의 신도들을 확보한 강력한 종교입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의 수가 이미 20억을 넘어섰고 날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자료를 감안하면, 데이터교는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이 크고 강력한 종교가 되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롯한 기존의 종교들이 대부분 정치와 손잡고 성장한 것과 달리, 데이터교는 경제와 야합하며 막강한 세력을 구축해 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에서 데이터자본주의로 바뀌고 있다는 빅토르 마이어 쇤버거 옥스퍼드대 인터넷 연구소 교수의 말이 그것을 증명하지요. 이 종교에서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신”이고 데이터가 ‘말씀’입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여러분도 잘 아는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2013년 건강한 두 유방을 모두 잘라 냈답니다. 유전자 조사 결과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 퍼센트라는 컴퓨터 알고리듬의 조언을 받아들인 사례로, 상당한 위험을 무릅쓴 수술이었다고 하지요. 그는 이미 열렬한 데이터교 신도가 된 것입니다. 호들갑이라고 생각되는가요? 아니요! 어쩌면 우리도 이미 데이터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말에 무슨 영화 볼까?’. ‘여름 휴가를 어디서 보낼까?’ 등을 네이버나 구글이 제공하는 인공지능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 싶겠지만, 알고 보면 누구든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라리는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우리를 우리의 친구보다 더 잘 예측하기 위해 우리가 클릭한 ‘좋아요’ 70개면 족하고, 우리의 배우자보다 더 잘 하는데는 ‘좋아요’ 300개밖에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무엇을 공부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누구에게 표를 찍을지를 고민할 때 우리는 이제 저 위에 있는 신이나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고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물을 것이라며 데이터와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 권위의 새로운 원천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우리는 어떻게 했나요? 자신의 진로나 결혼 상대를 결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문제는 기도 중에 하나님에게 묻거나,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물었지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랬습니다.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의 젊은이들은 이른바 기획투사, 즉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여 그것에 자신을 던지기 위해-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라리는 앞으로는 사람들이 아마존이나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차츰 새로운 우상으로 등극한 컴퓨터 알고리즘과 데이켜의 노예로 전락할 것으로 봅니다.
과장인 것 같지만,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지요!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보고 엎드려 기도하고 주무시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엎드려 기도하고 성경을 보곤 했습니다. 아마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십중팔구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요즈음 우리는 어떤가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먼저 스마트폰을 보고, 잠들기 직전에도 그러지 않습니까? 아마 목사님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문화적 흐름이 아니라.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말씀과 데이터 가운데 무엇을 더 믿는지를 한 번쯤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김용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