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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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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아버지 본문
내가 태어나서 성장한 이 세계는 성적과 점수, 통계로 가득 차 있어서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 늘 다른 이들과 견주어 자신을 평가하려 합니다. 삶의 슬픔과 기쁨 가운데 상당 부분은 비교에서 비롯되며,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다수는 아무 쓸데가 없으며 한심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동시에 어머니이신 하나님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머리로는 그것이 사실임을 잘 압니다. 하지만 온몸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힘듭니다.
누군가가 아들이나 딸을 끔찍이 아까는 걸 보면 당장 상대적으로 덜 인정받거나 더 사랑받는 아이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그 많은 자녀들을 하나하나 똑같이 사랑하실 수 있는지 내 수준으로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찌됐든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 방을 붙이고 하나님나라를 들여다보면 주님을 천국의 점수판 관리인쯤으로 착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혹시라도 커트라인을 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안달복달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시는 집에서 세상을 보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도록 자녀들에게 제각기 독특한 성품과 자질을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큰 아들은 자신을 동생과 견주어보고 곧 질투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둘을 무척 사랑했으므로 맏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잔치를 늦춘다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자애로우셔서 결코 자녀들을 비교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마음 깊이 새겼더라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씨름해 왔던 문제들 가운데 상당수는 눈 녹듯 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태초부터 그분은 우리를 “손 그늘에 숨기시며... 손바닥에”(사 49:2,16) 새기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이 미치기 훨씬 전에 창조주의 손에 붙들려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시 139:5) 받았습니다. 인류의 운명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던 시기에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시 139:13) 만드셨습니다. 누구도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을 때, 하나님은 이미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먼저’ 베풀어주십니다. 아울러 우리가 사랑스러운 자녀로 성장하며 주님처럼 두루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철이 든 이후로는 줄곧 하나님을 찾고, 이해하며, 사랑하려는 씨름을 벌여왔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다른 이들을 섬기며, 성경을 읽는 등 영성 생활의 지침들을 따르면서 방탕의 구덩이로 빠지게 만드는 유혹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실족하고 실패하기를 거듭했지만 절망의 문턱에서 다시 일어나곤 했습니다.
문득 의구심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고, 이해하며, 사랑하려고 애쓰시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 걸까요? 그것을 알고는 있었던 걸까요?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찾으시도록 나를 드러낼 것인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아실 수 있도록 나를 보여드릴 것인가?”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은 혹시 내가 보이지 않는지 아득히 먼 곳을 뚫어지게 살피십니다. 하루빨리 찾아 집에 데려가시려는 뜻입니다.
“왜 죄인과 음식을 같이 먹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주신 세 가지 비유에서, 예수님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을 때까지 불을 밝히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는 여인입니다. 목이 빠지도록 밖을 내다보며 자녀들을 기다리다가 반갑게 달려 나가 영접하고, 힘껏 끌어안으며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고 간청하고, 부탁하고, 권면하는 아버지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길 원하는 만큼 주님도 나를 찾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이 내게 필요한 만큼 그분에게도 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집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채, 자식이 돌아와서 탈선행위를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며, 앞으로 잘 살겠다고 약속해주기를 기다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집밖으로 찾아다닙니다. 위엄 따위는 내팽개치고 달려 나갑니다. 사과나 개과천선을 약속하는 말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잔칫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손을 잡아끄십니다. (돌아온 탕자. 헨리 나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