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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약함의 선교 본문

선교자료, 이슈, 연구/현대선교 이슈

약함의 선교

후앙리 2019. 3. 23. 00:17

 

 

2018년 한 선교단체의 선교대회에서 주제는 약함의 선교였다. 이제는 약함의 선교의 시대이기에 약함의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함의 선교, 즉 힘의 선교였지만 이제는 약하고 자신을 낮추는 선교, 현지인을 섬기는 선교의 시대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힘의 선교는 잘못된 선교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철저하게 과거의 잘못된 선교에 대한 반성 가운데 나온 주제였다. 이제 바른 선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약함의 선교라는 것이다. 필자도 이런 관점에서약함의 선교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낸 적이 있다. 강함의 선교를 추구해왔던 그런 선교의 흐름 가운데 이제는 약함의 선교의 흐름으로 변화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 약함의 선교는 무엇인가?

 

1.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겸손으로 섬김의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약함의 선교의 근본이다(2).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한없이 낮아지셨고 약해 지셨다.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겸손과 섬김으로 선교하는 것이 약함의 선교다.

 

2. 하나님은 약자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시는 약함의 선교를 실행하셨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죄인, 여인, 어린 아이, 비천한 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셨다. 약한 자의 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데서 나온다.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약한 자들은 힘이 없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선교 역사에서 볼 때, 힘과 강함으로 선교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돈과 재능으로 선교하기도 한다. 강한 자, 돈 있는 자, 힘 있는 자, 재능 있는 자들의 선교였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인 현지인들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이는 선교가 아닌 가진 것으로 지배하는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에 약한 자를 사용하시기를 다시 촉구하신다. 그래서 진정한 선교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이다. 진정한 선교사는 강함을 추구하고 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기 위해 절제하고 인내하는 선교사다. 약한 자를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이 시대의 선교가 요구된다.

 

3. 약함의 선교는 수치와 고통과 실패를 동반하는 선교다. 예수님은 사역하시기 위해 고통을 당하셨다.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으시고 수치를 당하셨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였다. 예수님의 사역이 진정한 약함의 선교로서 오늘날도 약함의 선교를 감당할 때 고통이 따른다. 배고픔과 좌절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아픔이 따른다.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해야만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 광야에서의 삶처럼 외로움과 고독과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선교의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누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배고픔을 감수하겠는가? 누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초월하여 홀로 눈물을 삼키는 외로움을 감수하겠는가? 누가 가족, 친척, 친구, 소유를 다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약함의 선교는 구호로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에 잘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필자가 제국주의적인 선교, 크리스텐돔(기독교 국가 체제, 혹은 기독교 왕국. 힘과 강함의 상징)의 선교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한마디로 힘과 강함의 선교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필자는 며칠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필자는약함의 선교의 책을 펴냈고 약함의 선교를 가르치고 있으며, 약함의 선교를 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약함의 선교가 필자의 선교철학인데 그런 필자에게 강함의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마음에 거슬렸다. 그래서 필자는이 목사님은 제국주의적인 선교와 크리스텐돔의 선교의 의미를 알고나 있나?” 하는 그런 마음도 가졌었다. 그리고 필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라오스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선교사님은 집사의 직분을 가졌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갑자기 선교사가 되었다(여기서 이 과정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신학교도 가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갑자기 목사 안수도 받았다. 선교훈련도 받지 않았다. 한 선교단체의 소속이 되었지만 그 선교단체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마이너(?) 선교단체이다. 선교사가 되었지만 비주류에 속한 선교사로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후원도 거의 없이 현지인들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 50이 넘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산다. 파송교회도 없다. 선교 경험도 별로 없다. 현지 선교사 협의회에 소속할 수도 없다. 선교사들이 주고받는 선교 정보도 얻을 수 없다. 자동차도 없다. 밥도 현지인들과 함께 먹는다. 그의 유일한 재산은 자전거다. 내일 먹고 살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 방문하는 것도 비행기 값이 없어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올 수 없다. 한마디로 주류 선교사가 아닌 비주류 선교사다. 주류 선교사들은 비주류 선교사들이 선교의 질을 하락시킨다고 비판한다. 비주류선교사를 얕잡아 보고 무시한다. 그런데, 그러나, 이 선교사에게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이런 모든 힘든 가운데 그는 하나님께 질문한다. “왜 내가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이런 질문 가운데 그는 하나님과 교통한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매일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것처럼 그에게는 의지할 곳도, 예정된 것도, 안정된 후원자도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매일매일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주신다. 그러기에 그의 매일의 삶은 은혜다. 은혜로 사는 것을 경험하고 나누며 산다.

필자는 이 선교사를 만나면서 전에 아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이영 선교사는 제국주의와 크리스텐돔의 선교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필자에게 말씀하셨던 목사님도 이 선교사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계신다. 이 목사님의 사역을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항상 어렵다. 안정된 것은 별로 없다. 그러기에 이 목사님은 필자를 바라보면서 힘의 선교, 안정된 선교를 하는 것처럼 느끼신 것이다. 이 목사님이 볼 때 필자는 25년 동안 선교사(목사) 사회의 주류에서 살아왔다. 정규 신학대학을 나오고 한국에서 소위 잘나가는(?) 선교단체 소속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7년 동안 든든한(?) 파송교회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하고 싶은 사역이라면 선교지이건 한국이건 간에 마음껏 할 수 있으니 그 목사님의 눈에는 필자가 힘과 강함의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필자가 약함의 선교를 외쳐도 그 목사님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은 것이었다. 필자의 삶이 안정되고 목사님께 없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언급한 목사님과 선교사님의 두 예를 보면서 필자는 약함의 선교의 구호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성찰을 해 보았다. 필자가 강함의 선교의 반열에 들어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필자는 그 동안 약함의 선교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 것을 회개했다. 강함의 선교를 하는 선교사님들을 비판한 것을 또한 회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약함의 선교는 내가 바로 약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약함의 선교는 구호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삶 자체, 그 현실은 생각보다 어렵고 고통스런 일이라는 것이다.

 

4. 약함의 선교의 정신은 십자가에서 나온다. 십자가는 약해지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이다. 겸손해 지는 것이며, 섬기는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되는 것이다. 첫째가 아니라 꼴찌가 되는 것이다. 죽기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조롱을 견디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아생전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십자가의 정신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승리를 가져온다. 예수님은 최후의 승리자였다. 세상의 실패가 바로 진정한 성공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맛보시고 모든 피조물이 발아래서 복종하는 영광을 얻게 되셨다. 이 세상을 죄와 악으로 지배하는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최후의 승리를 하신 것이다. 약함의 선교를 실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약함의 선교는 지금도 승리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성공의 자리가 아닌 실패의 자리에서 승리하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약함의 선교의 정신이다.

 

5. 약함의 선교의 대상의 우선은 약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힘없는 자, 상처 받은 자를 먼저 찾아가는 약함의 선교다. 이 세상에서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그 힘과 권력으로 산다. 그러나 약한 자들은 그 힘이 없다. 그러기에 약함의 선교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지금 주위에서 나보다 더 힘이 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는 것이 약함의 선교다. 힘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함으로 찾아간다. 약함의 선교는 결과를 빨리 찾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힘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함께 약한 자들과 동행하기 때문이다. 약함의 선교는 약한 자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함께 나누는 선교이기에 당장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약함의 선교야 말로 진정한 선교요. 사역의 열매다. 그 열매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완성된다.

6. 약함의 선교의 자세와 태도는 섬김과 겸손이다. 입으로의 섬김만이 아니라 몸으로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침으로 섬기셨을 뿐 아니라 몸소 발을 씻겨 주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섬김을 보여주셨던 것과 같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리고 지옥가지 내려가고 최고로 낮아질 만큼 겸손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이 아닌 아버지의 일에 관심이 있으셨고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겸손은 자신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그러나 가짜 겸손은 하나님보다 자신이 우선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이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아픔과 고통만을 내세우는 자기중심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짜 겸손이 아닌 진짜 겸손, 즉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은 너무나 자주 힘들다고 한다. 돈이 없다고 한다. 고생하는 자신을 알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약함의 선교는 자신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의 필요를 말한다. 선교지의 현지인들의 필요를 말한다.

약함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의 방법이다. 성경이 말하는 선교의 자세이며, 태도이다. 약함의 선교는 진정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돈과 힘으로 선교하는 제국주의적인 선교에서 돌아서야 한다. 꿩 잡는 게 뫼라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무언가 달성하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성공에 대한 열망을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 협력이 아닌 경쟁과 시기의 선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교는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복종시켜나가는 훈련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실행해야 한다. 사람을 바라보는데서 돌아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사람의 논리와 주장이 앞서는 것에서 돌아서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다운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와 천국의 의미가 현실에서 실행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현지인을 무시하는 태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돈 있고 후원해주는 파송 교회와 후원자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요구하는 선교가 아닌 그들을 바른 선교로 인도하고 가르치는 선교를 해야 한다. 현지인을 대할 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 대하듯 약한 자들을 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늘날 한국 선교사(모든 세계 선교사)들에게 약함의 선교를 하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가 약함의 선교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믿음의 순종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