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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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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영성/영성 자료

+ 축복

후앙리 2021. 6. 20. 05:29

축복’(blessing)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야기 해보겠네. 라틴어에서 축복한다는 말은 베네디세레’(benedicere)이네. 많은 교회에서 사용되는 축복 선포’(benedition)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좋게(bene) 말하는 것(dito) 혹은 누군가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의미지. 나는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네. 그리고 자네도 똑같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요즈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하지. “우리가 서로를 인정해 주어야 해.” 인정이 없이는 잘 살아가기가 어렵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정이지. 그것은 칭송이나 칭찬의 말 이상이고,누군가의 재능이나 선행을 지적해 주는 것 이상이네. 또 그를 조명 비추는 자리에 올려놓은 것 이상이지. 축복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네. 덧붙이자면, 축복은 그렇게 말한 실재의 모습을 창조해 내지. 이 세상에는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처럼, 서로를 칭찬해 주는 일도 많네. 축복이란 칭찬과 비난의 구분을, 미덕과 악덕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선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가 사랑 받는 자 되었음을 일깨워 주는것이네.

얼마 전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개인적으로 진정한 축복의 능력을 경험한 적이 있네. 집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하기 직전에, 우리 공동체의 장애인 중 하나인 자넷이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네. “헨리, 나에게 축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동적으로 나는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함으로써 응답했네. 그러나 그녀는 감사를 표현하는 대신 열정적으로 항의를 했네. “아니예요. 이건 효력이 없어요. 나는 진짜 축복을 원해요.” 그 때서야 그녀의 요청에 대한 내 응답이 의식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네.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미안해. 우리 모두가 모이는 기도 모임 시간에 진짜 축복을 해줄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내게서 어떤 특별한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예배 후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마루에 둥그렇게 앉아 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네. “자넷이 내게 특별한 축복을 요청했어요. 그녀는 지금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이렇게 말했을 때에도 나는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네. 그러나 그녀는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의혹에 잠긴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았네. 내가 자넷이 내게 특별한 축복을 요청했어요.”라고 말하자마자 그녀는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네. 그 때 나는 팔 뿐 아니라 손도 덮이는 넓은 소매가 달린, 하얗고 긴 예복을 입고 있었지. 자연스럽게 자넷은 팔을 뻗어 나를 안았고, 그녀의 머리가 내 가슴에 묻혔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내 예복의 주름 사이로 거의 감추어지도록 그녀를 소매로 덮었네. 그 상태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네. “자넷, 나는 네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 너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존재에 너의 아름다운 미소, 집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친절 그리고 네가 하는 모든 선한 일이,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있어. 나는 요즈음 네가 다소 침체되었다고 느낀다는 것과 마음속에 어떤 스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어. 하나님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아주 귀중한 사람이란 걸 말야.”

이렇게 말하자 자넷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고 환한 미소로서 자기가 진정으로 축복을 받았고 들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네.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자, 다른 장애인 여성인 제인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네. “저도 축복받기를 원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일어서서 얼굴을 내 가슴에 묻었네.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하기가 무섭게 많은 장애인들이 축복받기 원한다는 의사를 표현하면서 뒤를 이었네. 그러나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봉사자 중의 한 명인 24세의 학생이 손을 들고 저도 가능한가요?” 라고 말했을 때였지, 나는 물론이지. 이리 오게라고 대답했네. 그는 나왔고, 우리가 서로의 앞에 섰을 때 나는 팔로 그를 끌어안고 말했네. “,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은 아주 훌륭한 거야, 자네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네. 자네의 존재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되고 있네. 일이 고되고 삶이 부담될 때는 언제나 자네가 끊임없이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이렇게 말하자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날 저녁 나는 축복하는 것과 축복 받는 것을 것이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것이 진정으로 사랑받는 자의 표시임을 선포했지.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축복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대한 가장 심오한 단언이네. 선택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우리는 또한 날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들리는 축복을 계속 필요로 하네. 우리는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속했고 그 분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씀 말일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와 라헬, 이들 모두가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었네. 그들은 길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여정 가운데서도 축복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살았지. 예수님 역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축복의 음성을 들으셨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이 말이 바로 축복이지.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찬양과 비난, 사랑과 저주 가운데서 예수님을 지탱시켜준 것이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예수님도 자신이 선택받은 자라는 마음 깊숙한 곳의 믿음을 잃지 않고 계셨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변덕스러울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네. 어느 날은 위대하다고 느꼈다가 다음 날이면 비참하다고 느끼는 존재가 바로 우리지. 어느 날은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충만했다가 다음 순간 모든 것이 황량하고 흥미 없게 보이지. 어느 날은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아주 작은 요청도 너무나 벅차다고 느끼지. 이러한 변덕스러운 모습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라, 야곱과 레아와 라헬 그리고 나사렛 예수님이 들으셨고 우리 역시 들어야 하는 축복의 음성을 우리가 더 이상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네. 우리 존재의 표면에서 치는 작은 파도들 때문에 이리저리 휘청거린다면, 조작적인 세상의 희생자가 되어 버리기 쉽지만, 우리를 축복하는 깊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다면, 진정한 소속감과 안정된 행복감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헨리 나우엔)